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 1994 제1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민음사 / 1994년 6월
평점 :
절판


  임영태 작가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읽고 예전에 읽었던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세월이 흘렀지만 역시 재미있고 좋은 소설이다. 요즘 이만큼 쓰는 작가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검색해보니 작가의 책 대부분이 절판된 상태. 안 팔렸고, 안 팔린단 얘기다. 많이 아쉽다.   

  이 소설엔 세 친구가 등장한다. '우리'라고 명명되는 두 사람, 그리고 '두호'. 요즘 청년들은 아니고 음악다방, DJ의 마지막 세대쯤 될까. 공고를 나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전전하며 하릴없이 노닥거리는 우리는 서울 생활에 진력이 나거나 훌쩍 뜨고 싶을 때 춘천에 있는 두호에게 찾아간다. 두호는 노동현장에서 총무 일을 하면서 집안의 맏아들로, 빈손으로 찾아드는 우리의 물주로, 약한 내색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친구다. 소설은 우리의 이야기와 두호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와 두호의 이야기를, 그 또래 청년의 시점과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러고보니 공고생, 상고생들을 잊고 살았다. 언제는 기억하고 살았냐만은 요즘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청춘들도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치는 마당이니 실업계 고교를 나온 청춘들에게까지 눈을 돌리지 못했다. 음악다방이라니, 무슨 고릿적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여상을 나온 친구 하나는 이번에 출산을 하면서 십년을 다닌 회사에서 잘렸다. 출산율을 걱정하는 나라에서 오늘 이 순간에도 벌어지는 일이다. 십년간 청춘을 바쳤던 직장이 그녀에게 준 것은 상당 분량의 분유였다. 모유수유를 하는 그녀는 분유가 필요하면 자기에게 말하라 했다. 아직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남았다고.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3교대로 일했고 그 와중에 편찮으신 어머니와 마땅한 직업 없이 전전하는 남동생을 돌봤다. 중학교 때까지의 내 기억으로 그녀는 영어 성적이 좋았고, 글씨를 예쁘게 썼으며, 특히 피아노를 잘 쳤다. 그리고 서태지를 좋아했다. 꿈이 뭐냐고 물은 적은 없다. 하지만 언제고 결혼하고 임신하면 내쫓는 회사에서 십년간 뼈빠지게 일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아주 당연히 그만두는 걸로 알던데?" 그녀의 말에 문득 서글퍼졌다.   

  소설 속 우리와 두호도 무엇을 하기도 전에, 꿈도 꾸어보기 전에 벽에 부딪힌다. 책을 읽어도 처지에 맞지 않는 인문적 기질은(p.34) 상처로만 돌아오고 이십세기에 살면서도 잡지 속 아름다운 여성과의 연애는 언감생심일 뿐. 그러나 누구를 향하여 무엇에 대하여 분노하랴. 그 대상을 알 만큼 우리는 깨어 있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황폐한 유적이 되어 가라앉으며 오래도록 벌레라는 말만 신음처럼 주저리고 있었다. 벌레(p.217).     

  그때와 지금은 달라졌을까? 계급이 좀더 미시화, 세분화 되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영악해진 젊음들은 황폐한 유적이 되기를 거부한다. 할 일이 없다고 왜 황폐해야 하는가. 그들은 열심히 놀거리를 찾아다니며 무정형의 삶을 즐긴다. 우리는 벌레였어, 라고 절망할만큼 순진한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술이 떡진 우리와 두호보다 해사한 그들이 더 낯설고, 무섭다.    

  나는 이 보잘것 없는 젊음들의 찌질한 신파, 케케묵은 정서가 썩 마음에 든다. 특히 두호의 삶은 HD 이전 드라마게임을 보는 것처럼 축축하고 촌스럽다. 요즘 소설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케릭터들이다. 담배도 못 피우면서 길에서 만나면 담배 한갑 사주고 싶다. 선선한 저녁 무렵, 파라솔 밑에서 소주 한잔 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렇게 그들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나는 벌써 기성화된 것일까. 어느새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니.  

  임영태 작가의 건필을 빈다. 내가 갖고 있는 두 책 모두 잘 읽히고 오래 곱씹게 된다. 무엇보다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진솔함이 있다.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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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0-06-1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아홉번째집두번째대문을 다 읽지도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을 했지 뭡니까? 다시 한번 더 빌려 읽으려구요.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찾아보거나 그러지 않고 있어요. 내가 읽어야지!
저도 여상을 나왔어요. 졸업도 전에 취직을 했지요. 다행히 좋은곳(?)에 취직이 돼서 결혼을 해도 애를 낳아도 나가라는 말 한마디 안하는 직장이었지만 제가 여건이 안맞아 그만두게 되었네요.
아마 그래서 더 공무원을 선호하겠죠? 사기업과 달리 공무원은 결혼했다고, 출산한다고 그만두라는 소리 안하니까요. 얼른 기업 풍토가 바뀌어야 할텐데 말이에요..

깐따삐야 2010-06-18 10:54   좋아요 0 | URL
되게 좋게 읽은 소설이에요.^^
졸업하기도 전에 그런 좋은 직장을 구하셨다니 공부 열심히 하셨나 보다. 그 친구네 회사는 여직원이 결혼하고 임신하면 너무도 당연히 그만두는 분위기래요. 여전히 그런 곳이 많죠. 그러면서 출산율이 어쩌고 하는 거 보면.-_-
저는 교사이다보니 그만두란 소리는 안 듣지만 눈치도 보이고 아이도 안 낳은 남자 선생님들이 업무 효율 어쩌고 하는거 보면 완전 짜증나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한참 멀었어요.

비로그인 2010-06-1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걸 부러워하는 몹쓸 짓을 권하는 사회.
저도 이 작가를 좋아합니다. 밑바닥에서 담담한 목소리를 끌어낼 줄 아는 필력의 작가.

깐따삐야 2010-06-18 10:56   좋아요 0 | URL
우울해요.ㅠ
Jude님도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많이들 모르더라구요. 대부분 절판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고. 다음 소설을 기대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