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는 올해 영달이라는 딸내미를 얻었고 조만간 이사를 간다. 결혼하고 나서 맞는 큰 변화들이다.    

  결혼한 지 채 2년이 안 된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살았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남편은 엊그제 저녁, 해물탕의 해물을 건져먹으며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당신이 이런 문자를 보냈었다, 고. 막 연애를 시작할 즈음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한 건을 읽고 나서 민망한 듯 손을 내두르자 또 다른 한 건을 보여준다. 얼굴이 훅훅 달아올랐다. 아니 왜 이런 걸 여태 보관하고 있어요? 내가 의아한 듯 불만스런 목소리로 묻자 그가 말했다. 가끔 꺼내보면 힘이 나니까. 요즘 나는 안 그래도 눈물이 많아졌다.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고였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해물탕에 더 바짝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감췄다.  

  나는 매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서도 세상은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읽다가 저 문장이 턱, 마음에 걸렸다. 나 역시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은 나를 제외시키고도 그 자체로 완벽해 보였고 그 안의 나는 고독하고 무력한 정물 같았다. 그렇듯 어리석고 외로웠던 시절, 남편과 나는 같은 건물에서 공부를 했고 그가 자취를 했던 동네에 내가 자취를 하러 들어왔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창 나이 먹어 연애하는 중에 알았다. 한번쯤 마주치지 않았을까. 어쩌면 여러 번 마주쳤을 테지만 그때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시절, 많은 술을 마셨다 했고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했었고 나도 한 일년쯤 방황했다. 그는 우리 학번은 마냥 애기로 여겨졌다 했고 나는 당신 학번은 느끼한 아저씨 부대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는 독서클럽 회장을 역임했다고 하여 내게 큰 웃음을 주었고 내가 동아리 선배를 뻥, 찼다고 하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 세계를 지나와 두 사람이 드디어 서로를 알아보았을 때, 우리는 각자의 어리숙함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 그와 나, 둘 중 한 사람이라도 현명했다면 우리는 아마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 이후, 온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 듯 했던 내 감정샘은 조금씩 말라가는 것 같다. 대화는 용건 중심, 일상은 계획 중심, 요즘은 영달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감기에 걸린 그가 코를 훌쩍이며 케케묵은 영구메시지를 찾아보고 있을 때 나는 육아대백과를 찾아 읽거나 기저귀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풍경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대학 초년생 시절, 친구 E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아기를 업고 시장가방을 든 채 길을 건너는, 지금 우리 또래의 여인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저렇게 될까봐 겁나. E는 아무 스스럼 없이 그렇게 말했다. 조금 실망했지만 솔직한 반응이기도 했다. 갓 스무살이었으니 말이다. 

  그처럼 고개 빳빳이 세우며 도도하게 뇌까리던 시절은 멀찌감치 흘러가 버리고 더 이상 삼인칭관찰자 시점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매일매일의 일상을 탈없이 꾸려가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좀더 어린 날의 나는 컨디션에 따라 주어진 하루를 그냥 방치한 적도 많았다. 후회도, 피해도, 내 몫이었고 그것은 차라리 향락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내 삶은 가만히 있지 않을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루하루가 날마다 똑같이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듯 똑고르게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것들과 싸워야 한다. 얽혀 있는 일, 사람 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불쾌를 견뎌야 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우울도 극복해야 한다. 그 와중에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한 대비도 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사람을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 뿐만 아니라 그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남편에게는 아쉽거나 갸우뚱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항상 결혼 전의 그 마인드라면, 아마 살기 힘든 건 남편 쪽일 것이다. 나도 손가락이나 놀려가며 문자나 예쁘게 보내면 되는 시절이 가끔 그립다.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면 속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런 행운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일텐데 우리가 그처럼 복받을만한 일을 한적이 있는가.  

  요즘 나는 영달이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기쁘다. 당연한 세계에 길들어가는 일이 처음으로 싫지 않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늘상 나를 괴롭혀대던 원인불명의 노이로제에서도 점점 해방되는 것 같다. 무능한 엄마에게 용기를 주는 아이, 아빠를 닮아 아빠를 잊지 않게 해주는 아이, 우리는 너에게 감사해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0-06-0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는.나.는.오.죽.하.겠.수.^^

깐따삐야 2010-06-07 23:10   좋아요 0 | URL
이제는 모든 관심을 월드컵으로! ㅋㅋ

레와 2010-06-01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10-06-07 23:10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