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오빠를 쫓아다니던 아이였다. "돌멩아, 노올자아-" 문밖에서 오빠를 찾는 동네 오빠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내가 먼저 뛰쳐나가 문 앞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놀거리, 볼거리 변변찮은 시골의 산 69-1번지에서 오빠는 혈육 이상으로 친구이자 선배이자 나의 모든 상대였다. 다섯살이라는 적잖은 터울 탓에 오빠는 대부분 나를 귀찮아했지만 거의 생래적인 책임의식으로 나를 챙겨왔다. 나는 입만 살아있는 드센 아이였고 가족의 희망을 넘어 마을의 자랑, 지역사회의 촉망받는 인재였던 오빠는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수줍은 모범생이었다. 공부를 안해서, 틀린 문제를 또 틀려서 이따금씩 맞은 적은 있는데 오빠는 다정하다거나 친절하지는 않았다. 어릴적부터 무언가 절대적인 느낌과 의미로 다가오는 존재. 그냥 오빠였다.

 

  엊그제는 그런 오빠의 뒷모습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다. 진홍색 후드점퍼를 입은 오빠는 아직 단풍이 이른 푸른 숲길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나는 유모차를 끌며 눈으로는 계속 오빠를 쫓았다. 그러고보니 오빠와 나란히 걸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빠는 언제나 앞장 서서 걷거나 뒤에서 따라오곤 했다. 오빠 옆에서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고 싶은데 영달이를 챙겨야 해서 발길이 자꾸만 뒤쳐졌다. 오빠와 올케언니는 세심정으로 올라갔고 남은 가족들은 법주사 안으로 들어가 보리수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담소를 나눴다. 24시간 깨어 있어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도시 서울과, 오빠가 문재인 후보를 싫어하는 개인적인 이유, 언니와 집안일을 균등하게 분담한다는 놀라운 사실 등 엄마의 입을 통해 여러 소식들이 오갔다. 나는 어린 시절, 오빠가 소풍날 파란 점퍼를 입고 개구쟁이 웃음을 지으며 찍은 사진, 모처럼의 연휴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아 거뭇거뭇해진 턱선, 영달이를 바라보던 눈빛 등 갖가지 이미지를 떠올리며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녁에 오빠는 영달이를 바라보며 "애가 참 똑똑하구나. 똑똑하게 키워야지." 그런다. "똑똑하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시큰둥하게 응대하자 "그래도 머리가 좋아야 살기가 편해." 대꾸했다. 모르겠다. 오빠는 아이 잘 키우라고 한 말일텐데 나는 오빠가 늘 담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미심쩍었는가 보다. 영달이는 가끔 보는 외삼촌이 썩 마음에 드는지 입에 떡도 넣어주고 뽀뽀도 해주고 덥썩 안기기도 하고 평소에 안 하던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용돈을 사양하는 영달이에게 오빠는 쿨한 척 하지 말라고 퉁박을 주었고 영달이가 부끄러운 듯 마지못해 용돈을 받아들자 가족 모두 웃었다.

 

  다음날 친정에 가보니 오빠가 내 책장에 있는 책들 중에서 세 권을 가져갔단다. 한 권은 <욕망해도 괜찮아>인데 나머지 두 권은 모르겠다. 나는 오빠가 읽을만한 책을 눈에 띄는 곳에 더 많이 꽂아두지 않은 것이 문득 후회되었다.

 

  오빠와 나는 무언가를 이루고 그것을 함께 즐기거나 나눌 시간 없이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이제는 무언가를 이루려던 시절의 추억과, 사뭇 지친 기색으로 나이 들어가는 지금의 모습, 그 간극 속에서 서로를 향한 눅눅하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느낀다. 오빠는 마냥 징징거리던 짬보인 내가 본인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것 같은 오빠가 실상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세상 그 어느 곳에 갖다 놔도 자신의 둥지를 틀고 재미를 찾을 생명력 강한 오빠지만 내 먼 기억속에서부터 지금껏 오빠의 모습은 한결같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커다란 나무 같다.

 

  항상 만남의 반가움에 이은 작별의 순간, 그 이후의 여운에는 슬픔과 답답함이 뭉근하게 고이곤 한다. 나는 여전히 오빠 앞에 서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이 되어버리고 행여 나의 알은체와 상관없이 오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길을 갈 것이지만 오빠의 뒷모습이 오래오래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음 만남에는 오빠가 좋아하거나 좋아할만한 책을 집안 여기저기에 떨구어 놓아야겠다는 다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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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10-0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구나, 깐따삐야 님.
전 오빠 둘이 네 살, 다섯 살 터울이라 맨날 쫓아다녀도 퉁박만 받고 가끔 놀아주면 꼭 울려서 수도꼭지라는 별명을 듣고 살았어요. 이제는 다들 커서 자주 보지도 못하지만, 오빠 늙은 얼굴 보면 괜스레 마음이 짠 하고.
ㅎㅎ 그런데 왜 돌멩이라고 불렀대요?

깐따삐야 2012-10-04 12:43   좋아요 0 | URL
치니님도 오빠가 두분이나 있으시군요! 오빠도 나가서 또래들과 맘껏 놀고싶은데 어린 동생을 챙겨야하니 귀찮았을 것 같긴 해요. 저도 일년에 고작 몇 번 만나는 게 전부지만 피곤해 보이거나 그러면 한동안 계속 마음이 안좋아요.
오빠 이름이 돌멩이와 비슷해서 동네 오빠들이 돌멩이, 돌맹이 동생, 그렇게 부르곤 했어요.ㅋㅋ

다락방 2012-10-0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깐따삐야님. 글 좀 자주 써주세요. 이 글이 무척 좋아요.

나는 오빠가 읽을만한 책을 눈에 띄는 곳에 더 많이 꽂아두지 않은 것이 문득 후회되었다.

여기엔 빨간 볼펜을 들고 밑줄을 긋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 문장에 다 녹아들어있어서요.

깐따삐야 2012-10-04 12:4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처럼 하루하루가 시트콤처럼 재밌으면 좋을텐데 저는 주로 지친 몰골을 한 채 기계인간처럼 살고 있어서 쓸거리도 없고 쓸 시간도 별로 없답니다. 그 점이 아쉽고 안타깝지만 짬짬이 알라딘에 글 남기고 좋은 글, 좋은 책, 구경하며 쉬어가는 이 시간이 참 좋아요.

가족이란 참 오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관계여요.^^

감은빛 2012-10-0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면서 저는 여동생에게 어떤 오빠였을까 궁금해지네요.
아, 아마 알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결코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거든요.

이 글 참 좋네요.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2-10-05 13:19   좋아요 0 | URL
세상의 모든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란 그런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은빛님. 종종 뵈어요.
 
책읽기 좋은 날 -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전망 없는 밤을 위한 명랑독서기
이다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하루하루 비슷하게 살다 보면 다른 생각,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나를 비롯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드는 짠한 소회.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날마다 다른 옷을 입으면 뭐하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그 나물에 그 밥인데. 홍삼란이나 유정란이나 알고 보니 다 그게 그거였더라는 뉴스도 들려온다. 며칠 전 영달이는 베스킨라빈스의 슈팅스타를 먹다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더니 희한한 표현을 했다. 엄마! 아이스크림이 웃고 있어! 나는 유레카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는 지루한 글을 쓰는 작가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고 새로운 문장을 찾아 헤매는 스스로를 쥐어박았다. 이 책은 그 와중에 골라든 책. 씨네21의 이다혜 기자는 직업의 특성 상 나보다는 많은 사람들,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테고 영화를 잘 보기 위해, 잘 본 영화에 대해 잘 쓰기 위해, 나보다 더 다양한 책을 읽고 참신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 길에 듣는 이숙영의 방송에서 영화를 소개하는 전화목소리, 그 담백함과 수수함이 좋았고, 한편씩 골라주는 영화 또한 백퍼센트 재미있어서, 얼굴도 모르지만 믿음이 생겼다.

 

  서점주인 아저씨 왈, 이 책이 신문에 났나요? 나 말고도 찾는 사람이 또 있었는지 책 표지에 전화번호가 적힌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입맛을 다시며 서점을 나왔고 그 다음날에야 이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책은? 재미있었고, 좋은 문장도 있었고, 알퐁스 도데의 어린왕자니 하는 엉터리 구절만 없으면 곁에 두고 보기 괜찮은 책이었다. 물론 헤밍웨이나 나쓰메 소세키 같은 거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금 더 나아가도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급선회해서 꾹, 맺어버리는 글을 읽을 때는 기자근성인가 싶기도 했지만 요즘 <테레즈 데케루>와 <밤의 종말>을 연달아 읽어내며 테레즈의 캄캄한 마성에 휘둘렸던 나로서는 이 두툼하지만 부담없이 상큼한 책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그렇게 시간이 간다. 꽃이 아닌 꽃받침으로. - p.23

 

즐기는 게 이기는 것이다. - p.44

 

그렇다. 맛있는 건 언제나 옳다. - p.72

 

인간은 사랑받을 타이밍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황보다 얻어맞을 타이밍을 알아챌 수 있는 쪽을 선호하게 된다. 적응이란 그런 것. - p.150

 

야구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 예술품 같아서 기쁨의 순간은 있어도 궁극의 만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 p.201

 

종교는 우리의 고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때로는 잔인한 눈속임일 수도 있는 것이다. - p.218

 

여자는 연애도 글로 배우려들고, 남자는 '기분' 대로만 하려고 든다. - p.271

 

감정을 통역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녀의 아찔한 고독. - p.301

 

세상에 익숙해진다는 건 자라고 하면 다시 잠을 잘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 p.357

 

  인용한 문장들 외에도 한번 쯤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 별다른 꾸밈없이 경쾌한 글 속에 맛있게 어우러져 있다. 고전 위주로 솎아놓은 무겁고 빤한 서평집이나, 최근에 읽고 좀 실망한 닉 혼비의 <런던스타일 책읽기>처럼 제멋대로의 스타일도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혼이든, 비혼이든, 여성이라면 한뼘 점도 더 공감할만한 재미있는 리뷰들이 곳곳에 들어 있다. 거의 4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인데도 가지고 다니며 읽었을 정도면 뭐.

 

  특히 부록으로 실린 다혜리의 책 정리법은 심하게 공감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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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처 동네 키즈 카페 아래층에 영풍문고가 생겨서 영달이를 데리고 종종 놀러 가는 편이다. 위층에서 열심히 놀다가 영달이가 피곤해 하면 아래층 서점으로 내려온다. 어린이책 코너에서 영달이와 아빠가 소리 나는 책을 눌러보고 이런저런 책들을 만져보고 구경하는 사이, 나는 슬며서 코너와 코너 사이를 빠져나와 소설, 인문, 등등의 코너에서 재빨리, 재빠르다는 것에 서글픔을 느끼며, 정말 천천히 책을 구경하고 싶다는 욕구에 도리질을 하며, 눈에 들어온 책들 중에서 가장 끌리는 책을 한 권 고른다. 그 즈음 되면 영달이는 엄마를 찾고 영달이가 마음에 들어하는 책, 또는 내가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른 다음, 두 권을 계산한다. 영달이 아빠가 본인 책을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에게 있어 책이란 마트에 진열된 각종 야쿠르트나 두루마리 휴지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마저 책을 좋아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내 책, 영달이 책도 이미 많은데!

 

  그리고 동네 서점. 우리집에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그리 넓지 않은 평수의 서점이 하나 있다. 내가 자주 다니던 지하서점은 작년에 문을 닫았다. 주인이 알라디너 아닌가 싶을 만큼 여기서 본 책을 거기서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고 공간도 여유가 있는 편이라 자주 찾았는데 어느 날 가보니 직원들이 책을 쌓아놓고 정리하고 있더라는. 간판은 그대로 있지만 문은 닫은 상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학습교재를 중심으로 매매하는 지금 이 서점을 자주 찾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매력도 있지만 마음 허전할 때, 또박또박 걸어서 오프라인 서점을 찾는 맛도 쏠쏠하기에 정가를 지불하고 책갈피를 끼워 서점을 나서는 행위를 그만둘 수가 없다. 어제 저녁에는 펭귄클래식 시리즈의 하나인 <테레즈 데케루>를 샀다. 남편은 무슨 책이냐는 듯 힐끔 쳐다봤고 나는 "어떤 여자가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에요."라고 너무 큰 소리로 말해버렸다. 영달이는 표지 그림을 보고 "엄마, 이 사람 누구야?"라고 묻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무섭게 생겼단다. 남편은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영달이는 룰루랄라 뽀로로 스티커북을 샀다.

 

  <테레즈 데케루>는 물론 어떤 여자가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 그 이상이다. 훨씬 이상이다. 절반 정도 읽었는데 글맛이 느껴지는 번역은 아니지만 작품의 매력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왜? 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흥미로운 소재인데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심리묘사는 섬세하고 탁월하다. 관습적인 인물은 인물대로, 그 인물과 반목하는 인물들은 인물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나는 지금 장 아제베도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하는 상태. 테레즈에 비해 지성이나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안을 사로잡고 변화시킨 남자, 분명 테레즈와 관련이 있을 그 남자, 장 아제베도. 그 이름은 전헤린의 수필집에도 등장했던 중요한 이름 아니던가. 성마른 나는 <테레즈 데케루>를 다 읽지도 않았는데 속편이 궁금해 <밤의 종말>도 알라딘에 주문했다. 내 책만 주문하기에는 또 뭐해서 영달이가 좋아하는 토끼가 있는 책도 함께 주문. 남편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가계에 도움이 된다. 

 

  요즘 서점에도 자주 들르고 책도 많이 읽는다. 한동안 그러지 못했고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영달이가 좀 컸고 내 체력이 완전히 바닥날 정도는 아니게 되었고 동료들과의 대화가 하나도 재미있지 않고 친구들은 각자 본인의 고민과 본인의 삶에 충실해 있다. 안도감, 환멸, 그리움 같은 것이 잔잔히 엉켜 그 기분과 요즘의 날씨가 나를 독서로 이끌고 있다. 가을 동안, 밖으로 떠드는 대신 안으로 침잠하며 무르익었으면 좋겠고 영달이와의 감정 교류도 보다 깊고, 보다 섬세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서점으로 마실 갈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듯 남편에게도 상쾌한 햇볕과 바람 아래서 테니스를 칠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아내와 딸을 치다꺼리 하느라 그 남자도 수고가 많다. 신발장과 자동차 트렁크 안에 그의 테니스채가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 테레즈를 이해하는 동시에 체면 따위나 중시하는 그 남편에게 짜증을 내다 보니 영달이 아빠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독서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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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참 좋으네요, 깐따삐야님. 요즘 서점에도 자주 들르고 책도 읽으시고, 그래서인지 이렇듯 글도 써주셔서 좋아요. 깐따삐야님의 글을 읽는건 제게 오프라인 서점에 들르는 것 같아요. 바로 그런 기분을 줘요.

깐따삐야 2012-09-20 11:54   좋아요 0 | URL
가끔 세월을 헤아리면 신기한 생각이 들어요. 알라딘에서 책을 사고 글을 쓰기 시작한지 어언 8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새 나이를 먹고 다락방님과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고.^^ 진솔하고 아름다운 글을 꾸준히 써주시는 다락방님 같은 알라디너 분들이 없다면 알라딘에 접속하는 일이 더 뜸해질 것 같아요.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좋은 공간이에요!

비로그인 2012-09-2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늑한 강의실에 서너명이 드문드문 앉아 떼레즈 수업을 들었었는데...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복사본이 있어 깐따삐야님 덕에 다시 꺼내 읽어 보았어요. 단어 하나하나 종이사전을 뒤적여가며 수업듣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네요..ㅠㅠ
제가 사는 곳엔 나름 크다는 서점도 왠지 정이 안가서 서점구경했던 게 꽤 오래전 일이네요...통유리창 바로 앞에서 멋진 전망을 눈앞에 두고 책 읽을 수 있는 서점이 가까이 있다면 매일 출근도장을 찍을텐데 말이에요...

깐따삐야 2012-09-21 09:42   좋아요 0 | URL
아늑한 강의실에 서너명이 드문드문 앉아 듣는 문학수업... 저도 그립습니다. 너무 그리워서 펑펑 운 적도 있어요. 교수님이 꿈에 나타나 비를 맞고 있는 저에게 우산을 주셨습니다.^^
이 정도 시리즈는 있겠거니 하고 갔는데 없을 때, 내가 묻는 책을 주인아저씨나 아줌마가 이상한 발음으로 되물을 때, 조금씩 실망스럽긴 해요. 그래도 동네에 서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밤 늦게 환하게 불켜진 서점을 지나칠 때, 서점 안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느낌도, 요즘은 감사합니다. 소규모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게 참 아쉬워요.
 

  바깥 공기를 좋아하는 영달이 덕분에 거미의 생태나 나뭇잎의 다채로움에 대해 뒤늦게 눈을 떴으나 책장에 조용히 꽂혀 있거나 읽다 만 책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어제는 올록볼록 자갈을 깔아놓은 길을 총총히 걷고, 편의점 앞 기계에서 트럭도 한 대 뽑고, 감도 따고, 거미줄에 나뭇잎도 매달아 놓았다. 퇴근 후 두어 시간 정도 걸으며 뛰며 돌아다녔나 보다. 쿠션이 좋은 슬리퍼였지만 발바닥이 아팠고 환절기 감기 기운으로 조금 나른했다. 삶은 고기를 잔뜩 먹은 영달이는 캄캄해지도록 지칠 줄을 몰랐다. 

 

   잠들기 전 책장을 바라보는데 쉽게 한 권을 뽑아들 수가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담 보바리>,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초원의 집>, <레 미제라블> 등등. 원전보다 더 뛰어난 번역이라는 얘길 듣는다는 김화영 번역의 <마담 보바리>.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아주 복합적인 공주병 증상을 가진 마담 보바리가 결혼을 후회하는 대사가 나오고 어쩌면 그때부터가 이 소설의 시작인데 진도를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독서인데 역시 고전 파워인지 새로운 것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안나 카레니나>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비하면 단조롭고 치밀하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는 철학자 김영민의 또 다른 책이다. 내 미천한 깜냥 상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도 많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학자인 이 분은 시나 소설을 썼어도 아름다웠을 것 같다. <초원의 집>은 어릴 적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인데 원작을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자급자족하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로라네 가족을 보고 있으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때론 원하지 않는 것도 갖다 들이대는 엄마로서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밤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와 부지런하고 검소한 엄마. 가족이라면 무엇을 하든 함께 겪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요즘 영달이와 함께 여기저기 자연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이 책의 영향이 컸다. 아직 2권밖에 못 읽었지만 파급력이 가장 큰 작품.

 

  그리고 <레 미제라블>. 다락방님의 추천은 옳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옳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몇 페이지를 더 나아가야 진가를 드러내려나, 인내심을 요구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레 미제라블>은 당장에 독자를 휘어잡는다. 미리엘 주교의 인품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고 장발장의 분노와 고뇌는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야수로 만들어가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직 조금밖에 읽지 못했다. 미리엘 주교가 당신을 용서했는데 어떻게 당신이란 인간은 또 도둑질을 하지? 이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상하게 낮에는 이 책이 안 읽힌다.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독서 자체가 안 된다. 밤에 숨죽이고 읽어야 제맛이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명명할만한 몸상태 때문인지 영달이가 엄마에게 자꾸 운동을 시키려고 한다. 나도 그에 응하는 편인데 책욕이 생길 때마다 책은 사고, 조금씩 맛만 보다 쌓아두고, 날이 좋으면 무조건 밖으로, 밤이 깊으면 피곤이 몰려와 몇 페이지 읽다가 스르르... 엄마가 되어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당장 누가 나를 부추겨서 시골로 내려가자 하면 나 몰라라 오케이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책없이 자연이 좋지만 느긋하게 꼭꼭 씹어 읽을 시간이 없어 차곡차곡 쌓여가는 책들을 보고 있으면 좀 꿀꿀해진다. 하지만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 영달이의 세살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책은 영원회귀한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밖으로 나가 잠자리를 구경하고 꽃향기를 맡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듯 걸으며 뛰며 노는 동안 나는 발바닥에 티눈이 생겼고 영달이는 근육으로 제법 탄탄해진 종아리를 자랑한다. 가을이 왔다. 볕은 따듯하고 공기는 건조하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 영달이가 날씨 조오타~ 엄마 보고 싶었어~ 하고 외치는 한 마디에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날아가는 순간. 왜 읽는가. 그저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장전한 엄마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천천히 띄엄띄엄 읽더라도 생각거리를 주는 좋은 책을 읽고 그것을 농익은 지식과 지혜로 간직하는 사람, 엄마이고 싶다. 축적과 기록, 그 이상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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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초원의 집]을 다 읽긴했는데 4권부터였나, 정말 억지로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저도 어릴적 일요아침드라마로 재미있게 본 것 같은데요. 읽다가 확 질려서...ㅜㅜ


그나저나 오랜만의 깐따삐야님 글, 조곤조곤 좋으네요.

깐따삐야 2012-09-13 09:0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은 아무래도 도시여인이라 그러실 수도 있어요. 출신성분은 못 속인다고 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깡촌에서 보내서 그런지 머나먼 미국 개척시대 이야기가 콕콕 와닿습니다. 근데 이러다 4권부터 재미없어지면 어쩌죠?ㅠ

그나저나 다락방님 서재에 가면 읽고 싶은 책이 자꾸 많아져요.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지구요.^^

치니 2012-09-1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살배기가 날씨 조오타 ~ 하는 양을 그려보다가 저도 모르게 완전 엄마 미소. 책보다는 아이의 세살 시절이 더 중요하단 말씀에도 끄덕끄덕. 전 그시절 애 때문에 못하는 거 억울해하기만 하는 철부지였는데. ^^; 저도 오늘 페이퍼 조곤조곤 좋으네요.

깐따삐야 2012-09-13 09:11   좋아요 0 | URL
요즘 제비처럼 지저귀는 모습이 참 예뻐요. 영달이와 함께 동심에 젖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며 자연에 경탄하게 되고 신산한 밥벌이나 갖가지 고민들을 잊어버려요. 저도 문득문득 못하는 것을 떠올리며 갑갑해하기도 하는데 영달이 덕분에 새롭게 경험하고 발견하는 것들도 많아 신기하고 좋아요. 그동안 너무 급하게, 서두르며 살았구나, 그런 생각도 들구요.

영달이가 좀 더 자라면 언젠가 치니님이 머무르고 계신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보여주고 싶어요.^^
 

1. 철학자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이 재미있어 그의 다른 책도 하나, 둘 찾아 읽고 있다. 마음은 차치하고 말과 살로 소통하라는 전언이 그럴듯 하다. 보다 젊은 날, 불확실함에 상처 입지 말고 확실함에 기대어 사심없이 행복해 할걸... 강의를 사뭇 부끄러운 구애의 양상으로 표현한 것도 흥미롭다. 그렇다. 나도 매일매일 부끄럽다. 천하의 벤야민이 마치 고양이 같은 라시스의 털실공처럼 언급되는 대목에선 책장을 덮고 싶었다. 저자의 치열한 관념의 아포리즘을 따라잡기에 나는 머리가 나쁘거나 상념이 많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한다.    

 

2. 학급 아이 하나가 숨 쉬는 것 빼고는 거짓말이다. 위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가만가만 묵인하며 사는 어머니,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았을 누나들, 그리고 본인 입으로 순순히 고백하길, 언젠가부터 거짓말이 습관이 되어버린 이 아이.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기에  잘못이 있는 아이에게 취하는 수순을 밟으면서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켜켜이 쌓여 있을 무언가가 있을 것이기에 바라보는 나의 눈과 마음이 까마득하다.

 

3. 지난 한 주 동안 타이어를 찢어먹고 다른 학교로 전근가는 선생님의 그랜저를 긁어먹고, 퇴근 무렵에 두 건을 해먹었다. 사람이 안 다쳤으니 다행이라는 위로 이후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중이다. 왜 그랬나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영달이가 보고 싶어서, 공식적인 답은 나오지만 운전에 익숙해진 방만함이 가장 큰 이유다. 핸들을 잡은 채로 화장을 고치거나 차간 폭을 생각하지 않고 내달리는 것은 몇 개월 전만 해도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짓이다. 보험회사 측은 수리비용을 대주며 친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처음이니 봐주지만 다음부터는 안 봐줍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뉘앙스의 말, 내가 아이들한테 종종 하던 말. 네네. 아무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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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9-0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김영민의 공부론을 읽었고, 봄날은 간다, 를 읽었어요. 동무와 연인은 아직 못읽었고요. 암튼 저에겐 둘다 무척 좋았는데, 깐따삐야님도 김영민을 읽고 계셨군요 :) 방가 방가

깐따삐야 2012-09-06 13:2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웬디양님 서재에서 <공부론>을 보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좀 쪼이는(?) 책을 읽고 싶어 찾았는데 어떤 부분에선 하릴없이 뇌운동만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문장이 이해가 잘 안 되어서;) 얻는 것들이 많아 선택에 후회는 없네요. 나중에 똑같은 책 읽고 문장릴레이 같은 것 해보면 재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