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오빠를 쫓아다니던 아이였다. "돌멩아, 노올자아-" 문밖에서 오빠를 찾는 동네 오빠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내가 먼저 뛰쳐나가 문 앞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놀거리, 볼거리 변변찮은 시골의 산 69-1번지에서 오빠는 혈육 이상으로 친구이자 선배이자 나의 모든 상대였다. 다섯살이라는 적잖은 터울 탓에 오빠는 대부분 나를 귀찮아했지만 거의 생래적인 책임의식으로 나를 챙겨왔다. 나는 입만 살아있는 드센 아이였고 가족의 희망을 넘어 마을의 자랑, 지역사회의 촉망받는 인재였던 오빠는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수줍은 모범생이었다. 공부를 안해서, 틀린 문제를 또 틀려서 이따금씩 맞은 적은 있는데 오빠는 다정하다거나 친절하지는 않았다. 어릴적부터 무언가 절대적인 느낌과 의미로 다가오는 존재. 그냥 오빠였다.
엊그제는 그런 오빠의 뒷모습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다. 진홍색 후드점퍼를 입은 오빠는 아직 단풍이 이른 푸른 숲길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나는 유모차를 끌며 눈으로는 계속 오빠를 쫓았다. 그러고보니 오빠와 나란히 걸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빠는 언제나 앞장 서서 걷거나 뒤에서 따라오곤 했다. 오빠 옆에서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고 싶은데 영달이를 챙겨야 해서 발길이 자꾸만 뒤쳐졌다. 오빠와 올케언니는 세심정으로 올라갔고 남은 가족들은 법주사 안으로 들어가 보리수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담소를 나눴다. 24시간 깨어 있어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도시 서울과, 오빠가 문재인 후보를 싫어하는 개인적인 이유, 언니와 집안일을 균등하게 분담한다는 놀라운 사실 등 엄마의 입을 통해 여러 소식들이 오갔다. 나는 어린 시절, 오빠가 소풍날 파란 점퍼를 입고 개구쟁이 웃음을 지으며 찍은 사진, 모처럼의 연휴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아 거뭇거뭇해진 턱선, 영달이를 바라보던 눈빛 등 갖가지 이미지를 떠올리며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녁에 오빠는 영달이를 바라보며 "애가 참 똑똑하구나. 똑똑하게 키워야지." 그런다. "똑똑하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시큰둥하게 응대하자 "그래도 머리가 좋아야 살기가 편해." 대꾸했다. 모르겠다. 오빠는 아이 잘 키우라고 한 말일텐데 나는 오빠가 늘 담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미심쩍었는가 보다. 영달이는 가끔 보는 외삼촌이 썩 마음에 드는지 입에 떡도 넣어주고 뽀뽀도 해주고 덥썩 안기기도 하고 평소에 안 하던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용돈을 사양하는 영달이에게 오빠는 쿨한 척 하지 말라고 퉁박을 주었고 영달이가 부끄러운 듯 마지못해 용돈을 받아들자 가족 모두 웃었다.
다음날 친정에 가보니 오빠가 내 책장에 있는 책들 중에서 세 권을 가져갔단다. 한 권은 <욕망해도 괜찮아>인데 나머지 두 권은 모르겠다. 나는 오빠가 읽을만한 책을 눈에 띄는 곳에 더 많이 꽂아두지 않은 것이 문득 후회되었다.
오빠와 나는 무언가를 이루고 그것을 함께 즐기거나 나눌 시간 없이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이제는 무언가를 이루려던 시절의 추억과, 사뭇 지친 기색으로 나이 들어가는 지금의 모습, 그 간극 속에서 서로를 향한 눅눅하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느낀다. 오빠는 마냥 징징거리던 짬보인 내가 본인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것 같은 오빠가 실상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세상 그 어느 곳에 갖다 놔도 자신의 둥지를 틀고 재미를 찾을 생명력 강한 오빠지만 내 먼 기억속에서부터 지금껏 오빠의 모습은 한결같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커다란 나무 같다.
항상 만남의 반가움에 이은 작별의 순간, 그 이후의 여운에는 슬픔과 답답함이 뭉근하게 고이곤 한다. 나는 여전히 오빠 앞에 서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이 되어버리고 행여 나의 알은체와 상관없이 오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길을 갈 것이지만 오빠의 뒷모습이 오래오래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음 만남에는 오빠가 좋아하거나 좋아할만한 책을 집안 여기저기에 떨구어 놓아야겠다는 다짐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