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공기를 좋아하는 영달이 덕분에 거미의 생태나 나뭇잎의 다채로움에 대해 뒤늦게 눈을 떴으나 책장에 조용히 꽂혀 있거나 읽다 만 책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어제는 올록볼록 자갈을 깔아놓은 길을 총총히 걷고, 편의점 앞 기계에서 트럭도 한 대 뽑고, 감도 따고, 거미줄에 나뭇잎도 매달아 놓았다. 퇴근 후 두어 시간 정도 걸으며 뛰며 돌아다녔나 보다. 쿠션이 좋은 슬리퍼였지만 발바닥이 아팠고 환절기 감기 기운으로 조금 나른했다. 삶은 고기를 잔뜩 먹은 영달이는 캄캄해지도록 지칠 줄을 몰랐다. 

 

   잠들기 전 책장을 바라보는데 쉽게 한 권을 뽑아들 수가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담 보바리>,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초원의 집>, <레 미제라블> 등등. 원전보다 더 뛰어난 번역이라는 얘길 듣는다는 김화영 번역의 <마담 보바리>.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아주 복합적인 공주병 증상을 가진 마담 보바리가 결혼을 후회하는 대사가 나오고 어쩌면 그때부터가 이 소설의 시작인데 진도를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독서인데 역시 고전 파워인지 새로운 것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안나 카레니나>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비하면 단조롭고 치밀하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는 철학자 김영민의 또 다른 책이다. 내 미천한 깜냥 상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도 많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학자인 이 분은 시나 소설을 썼어도 아름다웠을 것 같다. <초원의 집>은 어릴 적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인데 원작을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자급자족하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로라네 가족을 보고 있으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때론 원하지 않는 것도 갖다 들이대는 엄마로서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밤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와 부지런하고 검소한 엄마. 가족이라면 무엇을 하든 함께 겪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요즘 영달이와 함께 여기저기 자연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이 책의 영향이 컸다. 아직 2권밖에 못 읽었지만 파급력이 가장 큰 작품.

 

  그리고 <레 미제라블>. 다락방님의 추천은 옳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옳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몇 페이지를 더 나아가야 진가를 드러내려나, 인내심을 요구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레 미제라블>은 당장에 독자를 휘어잡는다. 미리엘 주교의 인품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고 장발장의 분노와 고뇌는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야수로 만들어가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직 조금밖에 읽지 못했다. 미리엘 주교가 당신을 용서했는데 어떻게 당신이란 인간은 또 도둑질을 하지? 이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상하게 낮에는 이 책이 안 읽힌다.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독서 자체가 안 된다. 밤에 숨죽이고 읽어야 제맛이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명명할만한 몸상태 때문인지 영달이가 엄마에게 자꾸 운동을 시키려고 한다. 나도 그에 응하는 편인데 책욕이 생길 때마다 책은 사고, 조금씩 맛만 보다 쌓아두고, 날이 좋으면 무조건 밖으로, 밤이 깊으면 피곤이 몰려와 몇 페이지 읽다가 스르르... 엄마가 되어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당장 누가 나를 부추겨서 시골로 내려가자 하면 나 몰라라 오케이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책없이 자연이 좋지만 느긋하게 꼭꼭 씹어 읽을 시간이 없어 차곡차곡 쌓여가는 책들을 보고 있으면 좀 꿀꿀해진다. 하지만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 영달이의 세살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책은 영원회귀한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밖으로 나가 잠자리를 구경하고 꽃향기를 맡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듯 걸으며 뛰며 노는 동안 나는 발바닥에 티눈이 생겼고 영달이는 근육으로 제법 탄탄해진 종아리를 자랑한다. 가을이 왔다. 볕은 따듯하고 공기는 건조하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 영달이가 날씨 조오타~ 엄마 보고 싶었어~ 하고 외치는 한 마디에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날아가는 순간. 왜 읽는가. 그저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장전한 엄마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천천히 띄엄띄엄 읽더라도 생각거리를 주는 좋은 책을 읽고 그것을 농익은 지식과 지혜로 간직하는 사람, 엄마이고 싶다. 축적과 기록, 그 이상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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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초원의 집]을 다 읽긴했는데 4권부터였나, 정말 억지로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저도 어릴적 일요아침드라마로 재미있게 본 것 같은데요. 읽다가 확 질려서...ㅜㅜ


그나저나 오랜만의 깐따삐야님 글, 조곤조곤 좋으네요.

깐따삐야 2012-09-13 09:0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은 아무래도 도시여인이라 그러실 수도 있어요. 출신성분은 못 속인다고 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깡촌에서 보내서 그런지 머나먼 미국 개척시대 이야기가 콕콕 와닿습니다. 근데 이러다 4권부터 재미없어지면 어쩌죠?ㅠ

그나저나 다락방님 서재에 가면 읽고 싶은 책이 자꾸 많아져요.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지구요.^^

치니 2012-09-1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살배기가 날씨 조오타 ~ 하는 양을 그려보다가 저도 모르게 완전 엄마 미소. 책보다는 아이의 세살 시절이 더 중요하단 말씀에도 끄덕끄덕. 전 그시절 애 때문에 못하는 거 억울해하기만 하는 철부지였는데. ^^; 저도 오늘 페이퍼 조곤조곤 좋으네요.

깐따삐야 2012-09-13 09:11   좋아요 0 | URL
요즘 제비처럼 지저귀는 모습이 참 예뻐요. 영달이와 함께 동심에 젖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며 자연에 경탄하게 되고 신산한 밥벌이나 갖가지 고민들을 잊어버려요. 저도 문득문득 못하는 것을 떠올리며 갑갑해하기도 하는데 영달이 덕분에 새롭게 경험하고 발견하는 것들도 많아 신기하고 좋아요. 그동안 너무 급하게, 서두르며 살았구나, 그런 생각도 들구요.

영달이가 좀 더 자라면 언젠가 치니님이 머무르고 계신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보여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