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 동네 키즈 카페 아래층에 영풍문고가 생겨서 영달이를 데리고 종종 놀러 가는 편이다. 위층에서 열심히 놀다가 영달이가 피곤해 하면 아래층 서점으로 내려온다. 어린이책 코너에서 영달이와 아빠가 소리 나는 책을 눌러보고 이런저런 책들을 만져보고 구경하는 사이, 나는 슬며서 코너와 코너 사이를 빠져나와 소설, 인문, 등등의 코너에서 재빨리, 재빠르다는 것에 서글픔을 느끼며, 정말 천천히 책을 구경하고 싶다는 욕구에 도리질을 하며, 눈에 들어온 책들 중에서 가장 끌리는 책을 한 권 고른다. 그 즈음 되면 영달이는 엄마를 찾고 영달이가 마음에 들어하는 책, 또는 내가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른 다음, 두 권을 계산한다. 영달이 아빠가 본인 책을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에게 있어 책이란 마트에 진열된 각종 야쿠르트나 두루마리 휴지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마저 책을 좋아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내 책, 영달이 책도 이미 많은데!

 

  그리고 동네 서점. 우리집에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그리 넓지 않은 평수의 서점이 하나 있다. 내가 자주 다니던 지하서점은 작년에 문을 닫았다. 주인이 알라디너 아닌가 싶을 만큼 여기서 본 책을 거기서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고 공간도 여유가 있는 편이라 자주 찾았는데 어느 날 가보니 직원들이 책을 쌓아놓고 정리하고 있더라는. 간판은 그대로 있지만 문은 닫은 상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학습교재를 중심으로 매매하는 지금 이 서점을 자주 찾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매력도 있지만 마음 허전할 때, 또박또박 걸어서 오프라인 서점을 찾는 맛도 쏠쏠하기에 정가를 지불하고 책갈피를 끼워 서점을 나서는 행위를 그만둘 수가 없다. 어제 저녁에는 펭귄클래식 시리즈의 하나인 <테레즈 데케루>를 샀다. 남편은 무슨 책이냐는 듯 힐끔 쳐다봤고 나는 "어떤 여자가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에요."라고 너무 큰 소리로 말해버렸다. 영달이는 표지 그림을 보고 "엄마, 이 사람 누구야?"라고 묻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무섭게 생겼단다. 남편은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영달이는 룰루랄라 뽀로로 스티커북을 샀다.

 

  <테레즈 데케루>는 물론 어떤 여자가 남편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 그 이상이다. 훨씬 이상이다. 절반 정도 읽었는데 글맛이 느껴지는 번역은 아니지만 작품의 매력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왜? 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흥미로운 소재인데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심리묘사는 섬세하고 탁월하다. 관습적인 인물은 인물대로, 그 인물과 반목하는 인물들은 인물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나는 지금 장 아제베도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하는 상태. 테레즈에 비해 지성이나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안을 사로잡고 변화시킨 남자, 분명 테레즈와 관련이 있을 그 남자, 장 아제베도. 그 이름은 전헤린의 수필집에도 등장했던 중요한 이름 아니던가. 성마른 나는 <테레즈 데케루>를 다 읽지도 않았는데 속편이 궁금해 <밤의 종말>도 알라딘에 주문했다. 내 책만 주문하기에는 또 뭐해서 영달이가 좋아하는 토끼가 있는 책도 함께 주문. 남편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가계에 도움이 된다. 

 

  요즘 서점에도 자주 들르고 책도 많이 읽는다. 한동안 그러지 못했고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영달이가 좀 컸고 내 체력이 완전히 바닥날 정도는 아니게 되었고 동료들과의 대화가 하나도 재미있지 않고 친구들은 각자 본인의 고민과 본인의 삶에 충실해 있다. 안도감, 환멸, 그리움 같은 것이 잔잔히 엉켜 그 기분과 요즘의 날씨가 나를 독서로 이끌고 있다. 가을 동안, 밖으로 떠드는 대신 안으로 침잠하며 무르익었으면 좋겠고 영달이와의 감정 교류도 보다 깊고, 보다 섬세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서점으로 마실 갈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듯 남편에게도 상쾌한 햇볕과 바람 아래서 테니스를 칠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아내와 딸을 치다꺼리 하느라 그 남자도 수고가 많다. 신발장과 자동차 트렁크 안에 그의 테니스채가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 테레즈를 이해하는 동시에 체면 따위나 중시하는 그 남편에게 짜증을 내다 보니 영달이 아빠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독서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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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참 좋으네요, 깐따삐야님. 요즘 서점에도 자주 들르고 책도 읽으시고, 그래서인지 이렇듯 글도 써주셔서 좋아요. 깐따삐야님의 글을 읽는건 제게 오프라인 서점에 들르는 것 같아요. 바로 그런 기분을 줘요.

깐따삐야 2012-09-20 11:54   좋아요 0 | URL
가끔 세월을 헤아리면 신기한 생각이 들어요. 알라딘에서 책을 사고 글을 쓰기 시작한지 어언 8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새 나이를 먹고 다락방님과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고.^^ 진솔하고 아름다운 글을 꾸준히 써주시는 다락방님 같은 알라디너 분들이 없다면 알라딘에 접속하는 일이 더 뜸해질 것 같아요.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좋은 공간이에요!

비로그인 2012-09-2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늑한 강의실에 서너명이 드문드문 앉아 떼레즈 수업을 들었었는데...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복사본이 있어 깐따삐야님 덕에 다시 꺼내 읽어 보았어요. 단어 하나하나 종이사전을 뒤적여가며 수업듣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네요..ㅠㅠ
제가 사는 곳엔 나름 크다는 서점도 왠지 정이 안가서 서점구경했던 게 꽤 오래전 일이네요...통유리창 바로 앞에서 멋진 전망을 눈앞에 두고 책 읽을 수 있는 서점이 가까이 있다면 매일 출근도장을 찍을텐데 말이에요...

깐따삐야 2012-09-21 09:42   좋아요 0 | URL
아늑한 강의실에 서너명이 드문드문 앉아 듣는 문학수업... 저도 그립습니다. 너무 그리워서 펑펑 운 적도 있어요. 교수님이 꿈에 나타나 비를 맞고 있는 저에게 우산을 주셨습니다.^^
이 정도 시리즈는 있겠거니 하고 갔는데 없을 때, 내가 묻는 책을 주인아저씨나 아줌마가 이상한 발음으로 되물을 때, 조금씩 실망스럽긴 해요. 그래도 동네에 서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밤 늦게 환하게 불켜진 서점을 지나칠 때, 서점 안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느낌도, 요즘은 감사합니다. 소규모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게 참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