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그럴 때마다 기껏 진심에서 우러나는 동정심밖에 줄 게 없는 내게도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미묘한 희열을 느꼈다. ... 새로운 것을 인식할 때마다 흥분하고, 일단 어떤 감정으로 뒤흔들리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청춘의 특징이다. 이 연민이 나를 즐겁게 할 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내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연민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자 내 피에 어떤 독소가 침투해서 피를 더욱 뜨겁고 빨갛게, 빠르고 격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p.68

 걸출한 이야기꾼이자 사랑의 심리학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연민'에서 열정적 연민이 야기하는 재앙을 예의 그 남다른 투시력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호프밀러 장교가 빈에서 만난 작가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백하는 액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작가는 이 이야기가 실화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누군가 직접 뼛속까지 체험하지 않고는 이런 대사와 문장이 나올 수 없으리란 느낌이 들 정도로 작품 속 이야기는 뜨겁고 절절하다. 죽은 역사를 살아있는 소설로 부활시키는 츠바이크의 탁월한 재능을 재차 확인하는 기회였다.

 주둔지의 헝가리 귀족에게 초대받는 스물다섯의 청년 호프밀러. 그는 예의상 귀족의 외동딸 에디트에게 춤을 청했다가 갑작스런 그녀의 발작에 그녀가 하반신 마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자신의 실수로 상처받았을 그녀에게 꽃을 보내고 그녀는 화답의 의미로 그를 저택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불구가 된 이후 격리된 환경에서 자라온 에디트에게 호프밀러라는 존재는, 친절하게 대해주는 친구 이상의 의미였다. 처음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호프밀러는 위의 인용처럼, 봉사한다는 희열 하나로 그녀의 기분전환을 위해 헌신한다.

 그녀를 향해 우정이나 남매애 이상의 감정을 품어보지 않았던 호프밀러는 이윽고 그녀가 자신을 상대로 품고 있는 집착에 가까운 정열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그러나 열정적 연민은 열정적 사랑과는 달리 애초에 동등구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므로 좀더 건강하기에 좀더 강자의 위치에 놓인 그가 그녀를 내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연정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대비하기에 스물다섯의 그는 너무 어렸고, 감정에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숙지하기엔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였고, 보잘 것 없고 평범했던 자신이 미소나 지껄임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는 허영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처음에 한두 번 맞으면 통증을 진정시키고 마비시키며 기분을 좋게 만들죠. 그러나 육체나 영혼이나 우리의 기관은 불행하게도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원하듯 감정도 점점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입으로 '안됩니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리고나서 상대가 당신을 이제껏 한 번도 자기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증오하게 된다 해도 마음쓰지 말아야 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친애하는 소위님, 우리는 연민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해를 끼치게 됩니다. - p.222

 에디트의 주치의였던 콘도르가 호프밀러에게 경고하는 장면이다. 이에 갈팡질팡하며 초조해하던 호프밀러는 에디트의 아버지인 케케스팔바 노인의 간청과,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연민의 감정으로 그녀와 약혼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 그녀의 장애가 치료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고 정신을 차린 호프밀러는 그녀로부터 도망친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자살로써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지만 연대장의 제안에 따라 전보명령의 형식을 띠고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결국 그의 도주는 에디트의 상처를 심화시키고 절망한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그 후 호프밀러는 자신의 무책임한 연민과 우유부단함이 자신을 사랑했던 한 여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책감으로 전쟁 속으로 도주하여 영웅이 된다.

 그녀의 의심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녀가 바라는 본질적이고 유일한 것, 즉 그녀의 사랑에 대한 무언가를 내가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갔다. 그녀는 이야기 도중에 자주 (내가 아주 열심히 그녀의 믿음과 다정함을 구걸할 때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면 나는 얼른 눈썹으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마음의 밑바닥을 알아보기 위해 관측기구를 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p.346

 일체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완전무결한 애정을 갈구하는 여자와 애정을 열정적 연민으로 대체하고는 눈 감고 야웅하는 식으로 나날의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남자. 막대한 재산과 막연한 희망만이 두 사람을 위태롭게 받쳐주고 있을 뿐. 이들의 파국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디트는 조제처럼 밝고 쿨한 여인도 아닐 뿐더러, 호프밀러는 츠네오가 조제를 업어주듯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다. 소설 속 실화는 영화 속 동화보다 훨씬 더 가혹했으니. 그런 면에서 콘도르의 통찰력 넘치는 충고는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보편적 사실이리라.

 예전의 나도 한때 주제 넘은 연민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감정이입에 능한 나는 우울한 가정사와 닭똥 같은 눈물 앞에서 즉시 무장해제 되어버렸고, 연민을 제대로 관리할 줄 몰랐기에 그것을 우정 또는 애정이려니 믿었다. 더 이상 감당하기 부담스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안됩니다'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몇 개월을 더 끌려다녔다. 자갈 하나에도 천둥 같은 파문이 이는 상대의 마음을 다칠까봐 하고 싶은 말은 되도록 참았고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었다. 상황을 알고 있던 지인 중의 하나는 차라리 나를 아프간으로 보내는 게 낫겠다고 꼬집기도 했지만 연민에 중독된 자, 어느새 '안됩니다'라는 말을 잊게 되더라는.

 영원한 망각 속에서 구원자로 남았으면 좋았을까. 하지만 상대가 제공하는 연민이라는 모르핀에 중독된 자 역시 '그것으로 족합니다'를 잊게 되더라는. 에너지를 탕진한 채 비에 젖은 낙엽마냥 돌아오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든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 결국 도망쳤다. 그 날, 카페에서 나오던 나를 붙잡어 세웠던 동자승처럼 보이던 두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가족에게 잘하라는 묘한 충고를 하더라는. 도망칠 계기만 찾고 있던 내게 그들의 충고는 곧장 내 방식으로 풀이 되어 '남에게 쓸데없는 신경 끄고 네 가족에게 더 잘하라'는 전언처럼 들렸다. 이후 한동안은 미안함과 자책감으로 내내 불편했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도주 욕구를 넘어서진 못했다. 

 호프밀러와 나의 연민은 끝내 책임질 줄 아는 창조적 연민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그 경지에 이른다면 그것은 위대한 사랑이겠지. 불명확한 감정을 거두어들이기엔 너무 늦었고, 불확실한 희망에 전부를 걸기엔 너무 이기적어서, 모든 것이 뚜렷해질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두려워서, 결국 인간적 나약함 때문에 천사의 의도를 품고도 악마로 기억되는 것이리라. 양심이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죄도 결코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434)는 호프밀러의 마지막 말처럼 섣불리 내민 손은 나중에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게 된다. 만약 손을 내밀었다면 목도 함께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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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정말 남얘기같지가 않은데요- 창조적 연민훈련을 받아야 하는건가, 섣불리 연민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건가.

깐따삐야 2008-01-09 23:15   좋아요 0 | URL
창조적 연민까지 끌어올릴 자신이 없다면 섣불리 연민에 빠지지 말자?
써놓고 보니 어쩐지 슬퍼서 술푸고 싶으네. -_-

깐따삐야 2008-01-09 23:27   좋아요 0 | URL
입에 물었던 수건으로 눈물 닦는대. 앗! 드러버라. =333

깐따삐야 2008-01-09 23:48   좋아요 0 | URL
찜질방이라면서 세수도 안 했대. -_-

이리스 2008-01-10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조적 연민이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말이죠. 쿨럭..

깐따삐야 2008-01-10 00:06   좋아요 0 | URL
상대가 살청님이기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요. 켁..

이리스 2008-01-10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그게 또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쿨럭.. ㅋ

깐따삐야 2008-01-10 00:55   좋아요 0 | URL
암만 노력해두 살청님을 대상으로 해선 좋게는 해석이 안 되네요. ㅋㅋ

웽스북스 2008-01-10 01:11   좋아요 0 | URL
이런 이교도와 크로스~ 하여 성도간의 이간질을 촉구하는 건 옳지 않아요
깐따님 회개하는 마음으로 덧글 10개 달고 오십시오

깐따삐야 2008-01-10 01:24   좋아요 0 | URL
나 이제 리뷰 안 써! 흑! (아무도 말리지도 않는군아...)

웽스북스 2008-01-10 01:35   좋아요 0 | URL
어, 안....돼.....요오오옹.......

치니 2008-01-1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억하는 한, 안톤 체홉의 단편에서는 소위 '창조적 연민'을 느껴본 거 같아요.

깐따삐야 2008-01-10 20:22   좋아요 0 | URL
체홉은 참 잘 쓴다, 고 생각하면서도 많이 읽어보진 못했어요. 책도 한 권도 안 갖고 있네요. 그러고보니.
치니님 말씀을 들으니 다시 체홉을 읽고 싶어집니다. 근데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거 있죠.^^

딸기뿡이 2008-01-2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방금 책을 다 읽고 제게도 별표 다섯 빵빵 주고 싶은 작품이라 어떤 분이 리뷰 쓰셨을까 보니 깐따삐야님이네요. 더군다나 그림까지 제가 좋아하는! 흔적 살짝 남깁니다.

깐따삐야 2008-01-26 23:5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이 책 참 잘 썼고 재미있죠? 종종 들러주세요.^^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유하 지음 / 열림원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엔 옛날에 사두었던 시집들을 한 권씩 꺼내서 읽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맞는 건지, 아니면 내 감수성의 감이 떨어진 건지, 서점에 가봐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시집이 없다. 세계의 문학은 올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문혜진의 시를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새롭다는 느낌이 들기는 커녕, 김정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김선우 식으로 풀어놓았다는 느낌만 들더라는.

 초임 발령을 받고 그 해 여름 즈음해서 쉰을 넘기신 선배 선생님 한 분이 내게 문혜진의 '질 나쁜 연애'라는 시집을 권해주신 적이 있었다. 불량한 남자와 오토바이를 타고 검은 구름을 몰며 떠나보자는 내용이었는데, 왜 이 시집을 권해주셨냐는 물음에 대해 아버지뻘 되시던 그 선생님은 알듯말듯한 미소와 함께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더랬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너무 FM적으로 보였던 내 삶에 나름의 자극을 주고 싶으셨는지도. 어쨌든 이제는 시든 소설이든, 날것과 본능이라는 근래의 트렌드를 따르기 보다는, 본래의 정공법으로 성실하게 써나간 작품을 만나고 싶다. 

 유하도 물론 정공법이나 성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시인이다. 황동규나 이수익 같은 격조 있는 시인들에 비하면 그냥 산문을 쓰지, 할 정도로 장황하고 수다스럽다. 그러나 유하는 스스로의 장점을 미덕으로 끌어올리는데 나름 성공했고 그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김수영 문학상에 걸맞는 새로움과 발랄함 그 자체였다. 나는 그의 청승과, 허풍과, 유머를 좋아한다.

 기형도가 일기 쓰는 멜랑콜리커였다면 유하는 편지 쓰는 멜랑콜리커랄까. 그것도 연애편지 전문. 새끼 치는 조건으로 무보수 대필 편지 가능이라는 푯말을 들고 있을 듯한. 도무지 건조하고 냉정한 데라곤 없어뵈는 유하는 시를 쓰고 영화를 찍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청승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듣기로는 보기 드문 거구라는데 그 안에는 순정만화에나 나올법한 웅크린 소년 하나가 엄마나 누나를 기다리며 울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시집은 99년 3월. 내가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충동구매한 책이다. 일단 표지와, 제목과, 시인이 마음에 들었고 아브라카다브라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오 그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나니(p.41)라는 구절을 보고 주문을 외워야겠단 생각에 망설임 없이 질러버렸다. 나중에 내가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을 때 이 사람은 자기 일기장에나 쓸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냈네, 뾰루퉁하다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이 시집을 다시 읽었을 땐 정말 잘 쓴 시구나, 라고 생각했다. 없는 것을 끌어와가며 공들여 제조한 듯한 기교가 아니라, 안에서 솟구치는 청승의 봇물이 그분이 오시는 타이밍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열정으로 터져나온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음울한 실연의 감옥인 몸둥아리로부터 벗어나 한 그루 아름드리 시로 피어나고픈 욕망. 

나무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서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새로 인해 무성한 이파리를 피워내고 사랑하는 자, 윤회를 믿게 되듯 시인은 날아오르는 새떼 속에서 내세를 본다. 

나무를 낳는 새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게 키스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떨어진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틔워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그렇듯
새가 낳은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떼가 날아갑니다
울창한 숲의 내세가 날아갑니다

농담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 미안해 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경고하건대 제발 오버하지 말아요. 하지만 이처럼 귀여운 고백에 웃지 않을 수 없는 여인들이여. 당신은 유하의 개미지옥에서 오래도록 빠져나올 수 없을지니.

학교에서 배운 것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그 많던 상상력은 누가 다 치웠을까. 상상력 절제 상실증으로 학교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유하. 그가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여고생의 뒤꽁무니를 쫓는 세운상가 키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뛰어난 시인과 감독을 보는 대신, 주류일절을 애호하는 비주류 수다맨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유하라는) 베짱이는 허기진 노래를 부를 것이다. 개미를 한입에 먹어치우고 싶다고. (p.47) 그가 허기를 느낄 만큼 살아있고, 욕망을 채우기 위한 뜨거운 노래를 멈추지 않는 한 그의 행로를 계속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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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물오른 깐따삐야님, 노느라 책도 못읽는 전 깐따삐야님 리뷰 읽는 게 더 즐거워요 흐흐흐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아, 여기 ㅠㅠ 나 이제 확 엎어버릴까봐

깐따삐야 2008-01-09 01:03   좋아요 0 | URL
아이구. 웬디양님이 즐겁다니 정말 좋으네요.
요즘 한가할 때 바짝 읽으려고 노력 중인데 언제 잠수탈지 모르는 게 또 내 특성이라는. 그간의 행로에 대해선 메피님이 잘 아시죠. 흐흐.

엎은 거 닦을 땐 살청님 수건 빌려다 씁시다.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1-09 01:04   좋아요 0 | URL
입속에 들어갔다온 수건인데 괜찮을까요?
하도 악~ 물어서 이빨자국 강하게!! ㅋㅋ

잠수하기만 해봐요 청주로 날라갈테니 ㅎㅎㅎ

깐따삐야 2008-01-09 01:12   좋아요 0 | URL
앗! 그렇다면 살청님을 시켜서 닦으라고 합시다. ㅋㅋ

웬디수사관 날라오고 살청님이 비글 풀고 메피님이 펠레의 저주 내리면 난 벼랑에 몰린 깐들쥐겠구만. -_-



웽스북스 2008-01-09 01:46   좋아요 0 | URL
그러기전에 먼저 혈육을 잃은 슬픔에 젖은 엘신 형님이 깐따삐야 별에 있는 도우너에게 교신을 보내 텔레파시로 깐따삐야님을 잡아오라고 할 거에요 ㅋㅋ

아 근데 깐들쥐, 어째 징그러워요 (깐 들쥐라니 ㅠㅠ 너무 편혜영 소설이다 ㅋㅋㅋㅋㅋㅋ)

깐따삐야 2008-01-09 01:53   좋아요 0 | URL
엘신형님은 나의 잠수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왠지. ㅋㅋ

사육장 덕분에 요즘 야생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지낸다는. 으흐흐.

깐따삐야 2008-01-09 18:02   좋아요 0 | URL
어쩌면 위에 보이는 웬디양님은 메피님일지도 모른다는. 항간에는 메피님의 분신설이 나돌고 있거든요. ㅋㅋ (커피는 맥심 커피믹스가 쵝오에요!)

채찍은 없지만 가죽허리띠가 있으니 이리 오시길.


 

가면우울증

- 강기원


나는 즐겁다
(즐거워야 한다)

나는 너그럽다
(내 심장은 퀼트처럼 조각나 있다)

나는 웃는다
(울음은 멈춰지지 않으므로)

나는 늘 기도한다
(십계명의 '하지 말라'가 '하라'로 읽힌다)

나는 노래한다
(내 귀를 막고)

나는 아픈 적이 없다
(병명을 모른다)

얼굴 위에 얼굴을 덧씌운다
(버릇이 되면 숨 막히지 않는다)

나는 나다
(나는 내가 아니다)


- '세계의 문학' 제32권 4호(2007 겨울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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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아래 덧글을 덧씌운다
(버릇이 되면 잠도 오지 않는다)

살청님 스페셜 버전
입 안에 수건을 덧씌운다
(버릇이 되면 웃음소리가 새나가지 않는다)

깐따삐야 2008-01-08 02:13   좋아요 0 | URL
이 방이 좀 한가하죠?
패로디 이벤트 해야겠다. 웬디양님이 따논 당상일세. 넘 웃겨.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1-08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이제 자러 갈거에요

깐따삐야 2008-01-08 02:17   좋아요 0 | URL
옹! 좋은 생각이에요. 언능 자요. 언능! 명동교자칼국수 기대기대.^^

웽스북스 2008-01-08 02:19   좋아요 0 | URL
나는 잠든 적이 없다
(입술을 깨문다 ㅠㅠ)

나는 하품한 적이 없다
(눈물이 흐른다 ㅠㅠ)

깐따삐야 2008-01-08 02:22   좋아요 0 | URL
웬디양은 잔다
(자야 한다)

깐따삐야는 졸린 적이 없다
(낮밤을 모른다)

Mephistopheles 2008-01-08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보시요들 설교시간 다가오는데 교인들이 안보이오..

깐따삐야 2008-01-08 12:19   좋아요 0 | URL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프레이야 2008-01-0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계명의 하지말라가 하라로 읽힌다.
이거이 확 땡겨요 ㅎㅎ

다락방 2008-01-08 10:14   좋아요 0 | URL
십계명의 하지말라가 하라로 읽힌다.
이게 땡기는 두번째 人 이로군요, 저는. 훗 :)

깐따삐야 2008-01-08 12:21   좋아요 0 | URL
저두요! ㅎㅎ

Mephistopheles 2008-01-0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오면우울증은 뭔가요?? (시비돌이님 성대묘사가 아닌 댓글묘사)

깐따삐야 2008-01-08 22:17   좋아요 0 | URL
그건 저한테 묻지 마시구요.
우울증 전문가이신 로쟈님께 자문을 구하시길! ㅋㅋ

웽스북스 2008-01-09 00:54   좋아요 0 | URL
아 나 그거 하려다가 참았는데 ㅋㅋ

비로그인 2008-01-0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좋네. ^^
그런데 요즘 이게 유행인가...글은 감동~ 댓글은 코메디...=_= ㅋㅋ

깐따삐야 2008-01-08 22:19   좋아요 0 | URL
형님이 좋으시다니 저두 기뻐요.^^
살청님도 저러다 마시겠죠 머. ㅋㅋ
 
대화 - 90대 80대 70대 60대 4인의 메시지
피천득 외 지음 / 샘터사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2003년 4월에 가졌던 대담을 채록, 월간 샘터 400호 기념으로 나왔던 책이다. 1부는 피천득 선생님과 샘터사 고문인 김재순, 2부는 법정 스님과 소설가 최인호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피천득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 상냥하고도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아 좋았다. 이 분은 다시 뵈어도 참 귀여우시다. 예전에 '인연'을 들고 '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하신 적이 있는데 검버섯이 피어나는 얼굴 안에 아이 같은 천진함이 깃들어 있어 참 귀여운 할아버지네, 라고 생각했었다. 금아라는 예쁜 아호처럼 그야말로 맑고, 곱고, 깨끗하게 늙어가셨던 분. 동시에 아래 인용한 구절처럼 겸손한 예지까지 겸비하셨던 분.

금아: 그런데 소설에 보면 사랑방 손님이 떠나간 후 계란 장수가 왔을 때 어머니가 "이제 계란 먹을 사람이 없어요"라며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전 그게 아주 못마땅해요. 사랑하는 딸에게 계란을 사 먹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 p.37

금아: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은 대개 글을 좋아하고 문장이 좋은 그런 친구들인데 일반적으로 가난했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좋은 글이란 가난 속에서 나오거든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남보다 더 물질적인 향락을 누리며 산 사람들은 고생하면서 산 사람들의 내면을 잘 알 수가 없어요. - p.62

 나이 먹을수록 친구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친구의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누군가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나로부터 자꾸만 미끄러져 간다. 시정의 대화에 둔감한 나는 연세가 있으신 어른들이나 한참 어린 아이들과는 비교적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인데 별로 터울이 안 지는 또래들 사이에선 보기좋게 연기만 하고 있을 뿐.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 물론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나를 향해 솔직하고 재미있다는 평가까지 내려준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너만큼은 계속 솔직해라, 앞으로도 웃겨주길, 이라는 암묵적 명령처럼 들리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머리가 조금씩 아파오고, 입술이 마르고, 그 자리에 대해 회의감이 들 무렵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신들과 이야길 나누느니 샘터에서 나온 '대화'를 읽겠어요, 라고 말하진 못하더라도 이젠 점점 체력도 달리고 소갈머리는 옹졸해지는데 굳이 소모스러운 수다에 끼일 필요는 없지 싶다.

 가장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 중의 하나가 그이가 없는 자리에서의 뒷담화인데 요래조래 얽혀 사는 사람인 이상, 전혀 안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도가 지나치면 눈살이 찌푸려지기 마련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그 부분이었다. 돌아가는 이익에 따라 서로를 헐뜯던 어제의 웬수가 오늘의 다정한 친구로 지내는 것에 대해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나로서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황희 정승이나 스위스마냥 중립노선을 지키곤 했다. 그조차도 버거워지면 너무 피곤해서 말수가 줄어든 것으로 무마하기도 하고.

 불의만 보면 인내심이 솟구치는 비겁한 회색분자여!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나의 고집은 나 자신을 사수하기 위한 것일 뿐. 타인과 쓸데없이 넝쿨지기 위한 것이 아닌 바. 비 오기 전, 조용조용 줄지어 피신하는 개미처럼, 약하고 무능한 나의 생존본능이었다. 책과의 대화로 에너지를 장전하여 세상에 나가면 어르신들은 이런 내가 순진하고 딱해서, 아이들은 그야말로 수준이 맞아서, 어쩌면 나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위안까지 받으면서, 스스로의 조숙함에 으쓱해지기도 했겠지.

 넓어진 세상, 대화의 통로와 방법이 훨씬 더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 혹은 서로 다른 코드를 가졌더라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문학계의 훈남, 최인호와 불교계의 완소남이신 법정 스님의 대화는 그런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고도 부럽게 보였다.

최인호: 노래 가사도 예전과는 무척 많이 달라졌어요. '네가 날 버려? 나도 널 잊어버릴 거야' 같은 내용들이더라고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같은데 뭔가 왜곡된 느낌이에요.
법정: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그러니까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도로 무른다고 그렇게 수고들을 하지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이기적인 흥정이지요. 사랑은 따뜻한 나눔이고 보살핌이고 관심이지요. 더 못 줘서 안타깝고 그런 것이 사랑인데 말이지요. - p.80

최인호: 주인공이 못 되는 것이지요.
법정: 그렇지요. 완전히 소도구로, 부속품으로 전락해 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교육은 사람을 활짝 펴게 만들지 못하고 잔뜩 주눅이 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해외에 나가 보면 학생들 표정이 아주 발랄한데 우리 아이들은 굳어 있어요. 그래서 기회만 되면 술을 마시고 때려 부수고 하는 것이지요. - p.99

최인호: 문학상의 심사위원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강의하는 사람도 아닌, 글 쓰는 사람으로 사는 일. 저는 창작이 제 남은 삶을 채우기 바랍니다.
법정: 참 소중한 꿈입니다. 내게도 꿈이 있지요.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남은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군요. 그리고 추하지 않게 그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 p.118

최인호: 우문입니다만, 스님도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으신가요?
법정: 그럼요. 사람은 때로 외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모르면 삶이 무디어져요. 하지만 외로움에 갇혀 있으면 침체되지요. 외로움은 옆구리로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런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집니다. - p.140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예술가들은 소통 부재를 화두로 삼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올려가며 소통을 시도한다. 시대의 징후를 느끼는 독자와 관객들은 문득 쓸쓸해지면서도 굳게 입을 다문다. 상대의 닫힌 입을 보았거나, 세치 혀에 찔렸던 아픔을 상기하면서.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는 어르신들의 대화를 읽으며 지식의 내공이나 연륜에서 묻어나는 지혜가 부러웠다기 보다는, 서로 깍듯하게 삼가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나가는 대화법이 참 그립고도 소중했다. 세치 혀에서 꽃이 피는가, 독침이 돋는가는 자신에게 달린 몫. 스스로에게 엄격하되, 타인에겐 겸양의 자세를 잃지 않는 자세를 연마하고 또 연마하여 각자의 혀에서 화사한 꽃이 피어나고 그것들이 만발하여 향긋한 이야기꽃을 피워보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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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8-01-0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주옥같은 책을 만난 것 같아요!

리뷰만 읽었을 뿐인데 날이 선 제 마음이 조금은 무뎌지는 느낌이네요..

아.. 좋다!! ^^*

깐따삐야 2008-01-08 12:24   좋아요 0 | URL
레와님, 반가워요.^^
이 책 옆에 두고 가볍게 읽기에 좋아요. 그러면서도 내용은 가볍지 않구요.
저는 피천득 선생님의 상냥한 어조를 다시 볼 수 있어 좋았답니다.

2008-01-23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3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1-24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군요! 축하해용, 깐따삐야님^^

순오기 2008-01-24 15:21   좋아요 0 | URL
저도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축하해요 깐따님! ^^
멋진 책에 멋진 글이군요.

깐따삐야 2008-01-24 16:44   좋아요 0 | URL
어떤 친절한 분이 알려주셔서 저도 어제 알았어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당.^^

네꼬 2008-01-2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축하해요. 저 어제 봤는데 인제야 답을.. 우리 이제 호떡 먹는 거예요? (5만원어치?)

깐따삐야 2008-01-25 11:28   좋아요 0 | URL
앗!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당.^^ 제가 사는 청주에 '쫄쫄이호떡'이 아주 유명하거든요. 찹쌀로 빚어서 바삭바삭 튀겨내는 호떡인데 한 개에 오백원이니깐 오만원 어치면 네꼬님이랑 저랑 부족함 없이 먹겠네요. ㅋㅋ

개츠비 2008-01-2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주 리뷰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 5만원, 생각보다 거금이더군요..ㅋㅋ 마음의 양식, 눈의 양식, 마니 구입하세요!!

깐따삐야 2008-01-25 21: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들이 보관함에 그득했는데 이제 좀 비워야지요. ㅋㅋ 요즘 님도 열심히 읽으시는 것 같아요!
 
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편혜영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희뿌연 안개와 질척한 습지 안에서 울부짖고 허둥대는 짐승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무사안일한 일상의 이면에 잠복해 있다가는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불시습격을 감행하는 짐승들, 짐승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거나 그들의 냄새를 맡는 순간 숨겨두었던 본능을 드러내는 인간의 허울을 뒤집어쓴 짐승들. 안락과 유희를 찾아 떠난 주인공들은 우연히 맞닥뜨린 짐승의 시간 속에서 한껏 으르렁거려보지만 결국엔 속수무책이다. 작가는 교외로 소풍을 떠난 연인들과 삶의 안정을 꿈꾸는 가장들 코앞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의 살점을 던져준다. 너희가 기대한 바는 아니겠지만 피해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식으로. 그것은 그로테스크함을 극단까지 추구함으로써 파생되는 엽기나 잔혹함이라기 보다는 염려와 기우 없는 평면적 일상에 울려대는 경종처럼 들린다.

 사육장에서 탈출한 개에게 물어뜯긴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향해 차를 모는 아버지. 그러나 그가 운전하는 방향은 개들이 짖어대는 사육장 쪽이라는 아이러니. 고속도로의 거대차량들은 시시때때로 이들의 행로를 위협하고 개 짖는 소리와 기계음이 뒤섞인 소음 속에서 주인공들은 공포와 혼돈의 맨 구석까지 몰리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을 무심하고 간결한 단문들로 서술하는 작가의 솜씨가 그런 면에서 더욱 섬뜩하게 옹골차다.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 내 귓전에다 대고 정신 차리시라, 고 하는 경고문을 듣는 것 같았다. 방바닥을 뜯으면 집채만한 잡쥐들이 우글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맨홀 뚜껑을 여는 순간 폐수에 젖은 너구리나 족제비가 얼굴을 할키며 달려들거야. 이렇듯 점점 괴기스런 상상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그것들이 짐승의 탈을 빌려쓴 인간이거나 재주만 몇 번 넘으면 인간으로 화하는 요물이라면 그 공포는 배가 되리라. 정글에, 땅굴에, 동물원에, 사육장에 숨어있고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과욕과 허영 때문에 멧돼지의 습격을 받았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집과 차와 여가를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인 생활인들이여. 아파트 마지막 납임금을 내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길, 도로 한복판에서 돼지떼의 습격을 받는다면, 그 와중에 덩치 큰 트레일러의 묘기 운전에 위협받게 된다면, 당신은 집과 차와 더불어 무엇을 더 가지고 싶은가.

 짐승과 관련된 공포 스토리 한 두 가지 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어릴적에 집에서 소를 기른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외양간에 소를 보러 갔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다. 성장한 개마냥 커다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삼각형으로 오므라드는 눈빛을 번뜩이며 나를 쏘아보고 있더라는. 대개 호랑무늬의 크지 않은 도둑고양이와 맞닥뜨린 적은 있어도 그런 기묘한 고양이는 난생 처음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돌로 굳어선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고양이 역시 꿈쩍도 안 하고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더라는. 결국 눈싸움에서 지고 만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후다닥 도망쳐 얼른 마루 위로 뛰어 올라왔었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내내 고양이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한번은 집에서 키우던 발바리가 새끼를 낳아서 강아지를 보러 갔는데 세상에나. 발바리 짝퉁처럼 생긴 시커머죽죽한 너구리 한 마리가 우리 강아지들을 떡하니 품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소리를 질러가며 헐레벌떡 집안으로 뛰어들어갔고 아빠가 너구리를 멀리멀리 쫓아낼 때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뭔가를 밟았는데 물컹해서 보니 뱀이었다던가, 쥐가 갉아놓은 빨래비누 등을 발견하는 건 시골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저 두 가지 경험은 아주 어릴적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뇌리 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인간의 시간 속에 길들어버린 가축들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 안이하고 평온한 일상에 길들어버린 인간들도 마찬가지.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은 그 길들인 균형 속에 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끼어들어 균열을 일으키고 소음을 내는 짐승의 시간이다. 수십배의 덩치에 달하는 소도 두렵지 않은 고양이, 다른 동물이 낳은 새끼들은 떡하니 품고 있는 너구리. 이들은 어제와 다르지 않던 오늘에 무참히 끼어든 침입자들이다. 여기에서 하필 왜? 라는 질문은 무색하고 부질없다. 밤길 운전 중, 족제비 배를 깔아버린 채 그대로 내달리는 승용차를 향해 하필 왜? 라고 질문하는 족제비가 없는 것을 보라. 저기 불빛들이 꼭 달빛 같지 않니? 여자는 남자의 상투적인 비유들을 못 견뎌하지만 상투 튼 점잖은 일상을 헤쳐놓는 비상투성은 공포의 낭떠러지로 여자를 몰아간다. 토사물 한 봉지와 함께 다시 인간의 시간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작가는 팔짱을 낀 채 무심히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아까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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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8-01-08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으셨네요. 저도 아오이 가든은 아직 못 읽었는데,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은 살짝 아쉬워 하지만, 대놓고 섬뜩하고 무서운 것 보다는 이 책이 주는 공포도 충분히 살떨리던데요?

깐따삐야 2008-01-08 12:37   좋아요 0 | URL
그쵸. 심상한 어투로 늘어놓는 기묘한 이야기들이 더 섬칫한 법이잖아요.
편혜영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