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닿으면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도시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달에 예매를 했었다.
웅장한 스케일과 노래와 연기 실력이 수준급인 배우들 덕분에 2시간 40분이라는 긴 공연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외면서도 아쉬웠던 점.
제목은 명성황후인데 명성황후 보다도 내시나 궁녀 등, 주변의 낭인들의 연기와 활약이 더욱 돋보인다는 것.
명성황후는 당시로서는 깨나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황후였지만 극 중에서는 총명하긴 한데 타이틀에 걸맞는 매력과 카리스마는 엿보이지 않았더랬다.
내가 주목했던 인물은 민비를 사모했던 훈련대장, 홍계훈 장군.
청아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는 장군의 역할에 적합, 공연이 끝나고 환호와 박수를 많이 받았다.
(반면에 너무 허무하게 죽은 게 옥의 티였다. 칼솜씨는 시원찮은데 죽는 모습만 비장했달까. 드라마 '대조영'의 걸사비우나 흑수돌이 싸우는 장면을 좀 봐야 돼!)
며느리와 대척하는 흥선대원군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그가 고수했던 쇄국정책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고집스런 외양과 목소리로 감탄을 자아냈다.
대원군과 민비가 대립하는 장면을 좀더 긴장감 있게 부각시켰으면 하는 아쉬움.
대형 턴테이블을 이용한 무대로 역동감 있는 연출을 한 점은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의상들이 약간 허술하다 싶었고(인물의 특색을 살리지 못하고 획일화된 느낌),
일장기가 올라가며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박수 치는 관객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기야 좋았다지만 박수 칠 장면이 따로 있지. (관객 중엔 외국인도 있을텐데 대략 민망...)
하지만 홍계훈 장군을 주축으로 한 무예 훈련 장면은 매우 멋있었고 특히 굿 장면은 소름 돋을 정도로 전율이 일었다.
작년에 중국에서 보았던 송성쇼와 비교했을 때,
동작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일사분란함에 있어서는 송성쇼에 못 미치지지만 보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섬세한 멋이 있었다.
만만한 가격은 아닌데 돈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비운의 왕비라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위트와 유머를 잘 살려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으나,
제목을 명성황후로 했다면 명성황후를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단 생각이 든다.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할 여우 사냥, 황후 시해 장면도 너무 싱거웠다.
너무 단칼에, 한 마디 말도 없이 허무하게 죽어버려서(그것도 옆으로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발라당 엎어져서)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좀 어이가 없었다는.
명성황후는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그 누구보다도 집중적으로 주목을 끌었고 마지막에도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공연이 끝나고도 나의 불만은 가시지 않았더랬다.
명성황후 역을 맡았던 이태원이란 배우는 목소리도 아름답고 노래도 정말 잘하는데 연기에 대해선 솔직히 갸우뚱이다.
출중한 가창력으로 부족한 연기력을 메우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 받은 걸까.
그래도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쯤 볼만한 뮤지컬이다.
비록 명성에 못 미치는 명성황후였지만 충만한 오감의 유희로 밥을 덜 먹어도 하루 종일 배부른 느낌. 나쁘지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