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쐬고 돌아왔습니다. 가장 춥다는 날짜에 맞추어. 아리도록 볼을 할퀴고 지나가는 겨울바람을 맞고 싶었습니다. 계절 한 가운데에 서 있다보면 나는 아주 작은 존재이면서, 나보다 훨씬 큰 무언가가, 나를 품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훈훈한 방안에서 키보드 위의 열기만을 느끼다가 밖으로 나가보니, 계절은 겨울을 피워내는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그 열기를 따라 더 멀리 떠나지 않은 것이 아쉬웠어요.

 돌아와서 영화 '행복'을 보았습니다. 겨울이 오면 자연스레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이 떠오릅니다. 까만 생머리의 심은하, 빨간 머플러의 이영애가 흰 눈을 배경으로, 백설공주의 선명한 이미지처럼 상상 속의 시야를 사로잡습니다. 영화 행복에는 얼음장 밑을 흐르는 깨끗한 냇물처럼, 투명한 살갗 밑으로 실핏줄이 다 비쳐 보일 정도로 청초한 임수정이 보였습니다. 아담하고 갸냘픈 그녀는 언뜻, 소녀의 실루엣을 하고 있지만 눈빛과 언어 만큼은 사랑을 알고, 아픔을 아는 숙녀의 그것이었습니다.

 한줌 안개처럼 맑고 차분한 은희씨(임수정 분)는 철없는 건달 영수씨(황정민 분)를 기적처럼 살려내더니만 그가 잠든 사이, 신작로를 내달립니다. 40% 밖엔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연약한 폐를 가진 그녀는, 애써 살려놓고 나니 이젠 네가 지겹다는 영수씨를 위해 달리고 또 달립니다. 숨이 차올라 죽기 위해서. 그로부터 떠나주기 위해서. 둥지에서 미끄러진 작은 새처럼 창백하게 파닥이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아주 오랜만에 조금 울었습니다. 개봉 날짜에 맞추어 영화관을 찾지 않았던 것이 참 다행스러웠어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보단 아예 커피를 엎지르는 편이 나으니까요.

 이타적인 은희씨와 이기적인 영수씨는 서로 다른 타인이면서, 하나 되는 연인이고, 야누스적인 우리 삶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항시 목전에 두고도 아파 보이지도, 두려워 보이지도 않는, 상냥하고 친절한 은희씨. 간이 뒤집어지고 나서야 세속놀음의 허무함을 알아버린 철딱서니 명수씨. 8년이란 긴 시간 동안 반쪽짜리 폐와 함께 해온 은희씨는 고통과 죽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데에 익숙합니다. 반면에 희희낙락하던 삶에 갑자기 쳐들어온 간경변이란 병 앞에서 건강했던 명수씨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은희씨는 영수씨가 좋아서 필요하고, 영수씨는 은희씨가 필요해서 좋아합니다. 먼저 상처받는 쪽은 전자고, 나중에 후회하는 쪽은 후자입니다. 상대를 위해 먼저 떠나주는 쪽은 전자고, 누추한 반성과 함께 나중에 돌아오는 쪽은 후자입니다. 은희씨와 영수씨도 이 구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식어가는 손으로 돌아온 그의 손을 잡아줍니다. 누구를 향해서도 쉽사리 어리석다, 바보 같다, 지나쳤다고 비난하지 못하는 건 우리 내면에 은희와 영수라는 두 얼굴이 공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신이 정말 좋다고 고백하는 은희씨에게 영수씨는 신기하다는 듯 말합니다. "그런 게 있긴 있구나. 정말..."

 '그런 것'과 마주했을 때, 그것이 비록 개미지옥일지라도, 행복한 함정처럼 빠져드는 건 생과 사를 초월한 본능 같은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차피 고통이고 두려움일진대 삶과 죽음 가운데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대답은 무엇이 될까요. 사랑을 택하겠습니다. 그것이 인간 아닐까요. "뽀뽀를 하고 있는데도 왜 뽀뽀가 하고싶지..." 은희씨의 귀여운 대사 속에서 반짝, 하고 빛나는 행복을 봅니다. 비록 찰나의 희망일지라도, 길고 지루한 삶과, 삶 이후의 죽음 가운데서 꺼질듯 타오르는 그것은, 남아있는 40%의 목숨을 바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영수씨를 향한 은희씨의 마음처럼, 내 40%의 숨결로 상대에게 60%의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면, 그렇듯 나:너 = 4:6이란 비율로 사랑한다면, 어느새 5:5 따위가 중요해지지 않는 상생(相生)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을까요. 하지만 사랑이 어려운 것은, 내 안에 영수씨와 은희씨가 6:4의 비율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그게 사람이겠지요. 그냥 사람. 미안함을 알고 고마움을 알면서도, 결국 편안함을 따라가게 되어 있는 평범한 사람. 결국 그를 향한 비난 대신, 나 자신을 비롯한 인간 전반에게 동정을 보내게 됩니다. 오열하는 영수씨의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던 건 아마도 나 자신을 향한 포옹이겠지요.

'외출'했던 허진호가 '행복'하게 돌아와서 반갑습니다. 잠깐의 실망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이렇듯, 더욱 반가우니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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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게다예요 2008-01-1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진호의 <외출>에 실망하셨나봐요? 저도 얼마전에 <행복> 봤는데, 전 차라리 <외출>이 더 좋더라고요. <행복>은 허진호식 '느림의 미학'의 완결판 같았어요. 이제는 조금 바꿔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살짝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허진호스러움이 아직까진 싫진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깐따삐야 2008-01-16 12:13   좋아요 0 | URL
배용준과 손예진의 조합이 왠지 별로였어요. 처음부터 두 사람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영화 속에서도 영 어색했어요. 반면에 황정민과 임수정은 처음엔 그림이 안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니 탁월한 연기력 때문인지, 서로가 서로에게 잘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저는 허진호식 멜로가 좋고 앞으로도 줄곧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좋아할 의향도 있답니다.^^


순오기 2008-01-1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출~~~ㅠㅠ 행복~~~~~^^ 허진호감독도 깐따님도 멋진 외출과 행복으로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풀어내는 솜씨는 정말 맛이 다르네요~~~ 감동이야요! 꾸벅^^

깐따삐야 2008-01-17 00:04   좋아요 0 | URL
저도 순오기님을 환영합니다. 꾸벅.^^
이 영화 좋았어요. 임수정에게 기대를 많이 하게 됩니다.

라로 2008-01-1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박아녜요???깐따님은???ㅎㅎㅎ
농담이구요,,,,음 갑자기 차분해지셨다,,,,ㅎㅎ
님의 리뷰에 78%동의하면서 제가 봤던 행복이 생각나네요.
황정민이라는 배우를 다시 보게했어요.
참 신기했어요, 그래서.
깐따님 없으니까(물론 저도 자주 못왔지만)
지니없는 알라딘이야요,,,뭔말이래???ㅎㅎ

저 이제 영화보러가요.
저녁도 하기 싫어서 사먹구 들어오려구요.
이렇게 늦게 나가는 이유는 아이들이 오늘 해야할걸 다 하지 않아서
이제야 나가게 됐어요...저 좀 지독한 엄마 맞긴 한가봐요...ㅎㅎ
암튼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 가지고 올께요.
N군녀석 영화는 보고싶지 않지만 팝콘 먹고 싶어서 간데요,,,ㅎㅎ
이만 총총

깐따삐야 2008-01-17 00:07   좋아요 0 | URL
외박? 갑자기 차분? -_-
지니 없는 알라딘에서 급 뿌듯! ㅋㅋ

영화 보고 외식하는데 지독하다니요. 우리 엄만 할 거 다 해놔도 구박하시던데요. 나비님네 가족은 오늘 저녁, 행복한 시간 보내셨겠죠? 팝콘도 맛나게 먹구요.^^

치니 2008-01-1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외출>도 <행복>도 기대만큼 차오르진 못했었는데...
이 리뷰를 읽으니, 아 이렇게 보아주면 좋았을 것을, 이란 생각이 드네요. ^-^

깐따삐야 2008-01-17 14:08   좋아요 0 | URL
제 리뷰는 제가 읽어봐도 '꿈보다 해몽'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8-01-1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해지는 '해몽'이에요. 참 좋습니다.^^

깐따삐야 2008-01-18 01:59   좋아요 0 | URL
혜경님의 참하신 리뷰도 좋아요. 저는 쓰다보면 글의 향방을 가늠키가 어려운데 혜경님은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 쓰시는 것 같아요.^^
 


기회가 닿으면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도시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달에 예매를 했었다.
웅장한 스케일과 노래와 연기 실력이 수준급인 배우들 덕분에 2시간 40분이라는 긴 공연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외면서도 아쉬웠던 점.
제목은 명성황후인데 명성황후 보다도 내시나 궁녀 등, 주변의 낭인들의 연기와 활약이 더욱 돋보인다는 것.
명성황후는 당시로서는 깨나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황후였지만 극 중에서는 총명하긴 한데 타이틀에 걸맞는 매력과 카리스마는 엿보이지 않았더랬다. 

내가 주목했던 인물은 민비를 사모했던 훈련대장, 홍계훈 장군.
청아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는 장군의 역할에 적합, 공연이 끝나고 환호와 박수를 많이 받았다.
(반면에 너무 허무하게 죽은 게 옥의 티였다. 칼솜씨는 시원찮은데 죽는 모습만 비장했달까. 드라마 '대조영'의 걸사비우나 흑수돌이 싸우는 장면을 좀 봐야 돼!)
며느리와 대척하는 흥선대원군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그가 고수했던 쇄국정책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고집스런 외양과 목소리로 감탄을 자아냈다.
대원군과 민비가 대립하는 장면을 좀더 긴장감 있게 부각시켰으면 하는 아쉬움.

대형 턴테이블을 이용한 무대로 역동감 있는 연출을 한 점은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의상들이 약간 허술하다 싶었고(인물의 특색을 살리지 못하고 획일화된 느낌),
일장기가 올라가며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박수 치는 관객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기야 좋았다지만 박수 칠 장면이 따로 있지. (관객 중엔 외국인도 있을텐데 대략 민망...)
하지만 홍계훈 장군을 주축으로 한 무예 훈련 장면은 매우 멋있었고 특히 굿 장면은 소름 돋을 정도로 전율이 일었다.
작년에 중국에서 보았던 송성쇼와 비교했을 때,
동작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일사분란함에 있어서는 송성쇼에 못 미치지지만 보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섬세한 멋이 있었다.  

만만한 가격은 아닌데 돈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비운의 왕비라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위트와 유머를 잘 살려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으나,
제목을 명성황후로 했다면 명성황후를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단 생각이 든다.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할 여우 사냥, 황후 시해 장면도 너무 싱거웠다.
너무 단칼에, 한 마디 말도 없이 허무하게 죽어버려서(그것도 옆으로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발라당 엎어져서)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좀 어이가 없었다는.
명성황후는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그 누구보다도 집중적으로 주목을 끌었고 마지막에도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공연이 끝나고도 나의 불만은 가시지 않았더랬다.
명성황후 역을 맡았던 이태원이란 배우는 목소리도 아름답고 노래도 정말 잘하는데 연기에 대해선 솔직히 갸우뚱이다.
출중한 가창력으로 부족한 연기력을 메우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 받은 걸까.
 
그래도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쯤 볼만한 뮤지컬이다.
비록 명성에 못 미치는 명성황후였지만 충만한 오감의 유희로 밥을 덜 먹어도 하루 종일 배부른 느낌. 나쁘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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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1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죽는 장면을 오버스럽게 비장하게 그리는 것도 좀 우습긴 하겠지만,
기대하던 장면이 맥없이 끝나버리면 좀 허무하긴 하죠 ^-^

예체능에 집중하는 주말을 보내셨나봐요
나 심심했어요! ^^

깐따삐야 2008-01-16 13:18   좋아요 0 | URL
발라당 엎어져서 죽는 건 보시기에 좀 그렇더라구요.^^;

나는 이따금 '딴짓'이라는 배터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웬디양님 생각도 했어요! ^^


순오기 2008-01-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성황후는 못 봤지만, 이문열의 '여우사냥'은 봤지요.ㅠㅠ
뮤지컬은 제겐 여전히 꿈의 무대입니다. 한 5년에 한번이나 보려나~~

깐따삐야 2008-01-17 00:09   좋아요 0 | URL
저는 이문열의 '여우사냥'을 못 봤네요.
저두 아주 큰맘 먹고 본 뮤지컬이었어요.^^;
 

  오산으로 동아리 친구 H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후배가 쓰고 있는 소설을 노트북에 담아와서 심심하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영화 원스에 대한 이야기에선 안타깝게도 공감대 불일치. 남자가 그 여자를 더 사랑한 것 같아요. 맘에 안 들어. 여자만 피아노를 받다니. 너 밀루유 떼베가 뭔지 모르지? ....... 당신을 사랑해요, 였다. 인마! 아직 연애경험이 없는 스물넷의 완고한 젊음이니 무조건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 happily ever after만을 기대하는 지도. 붕어빵을 팔아 등록금을 모으고 있다는 녀석은 어제는 오만이천원 어치를 팔았다며 이제 단골도 생기고 할만하긴 한데 다른 알바도 골고루 해보고 싶다며 열의를 보였다. 마른 버짐에 겨울볕에 그을린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수줍은 미소가 건강해 보였다.

 평소 안경을 착용하던 우리의 신부는 한 마디로 뵈는 게 없는 채 대기실에 곱게 앉아 있었다. 급기야는 오랜만에 모인 동아리 선배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나는 일일히 누가누가 왔다고 전해야만 했다. 눈부신 신랑신부 앞에서 분위기 잡고 축시도 낭독했다. 지난번에 K에게 건넸던 축시를 재활용 하려다가 두 친구의 아우라가 많이 다른 까닭에 고민고민. 그분이 오시는 타이밍에 맞춰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다시 썼다. 써놓고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한데 나중에 쓴 시가 더 좋아서 K에게 살짝 미안했다는. H는 예의 그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시가 너무 이쁘다며 좋아했다. 흰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며 머리를 쥐어뜯던 시간이 보람차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짓궂은 선배들은 시는 잘 썼네. 시는! 시 낭송하고 머 그럴 땐 네가 아닌 것 같다? 이렇듯 진심 어린 농담들로 나를 갈궈댔다.

 결혼식 일정이 끝나고 근처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이야길 나눴다. 우리 동아리엔 커플이 많다. 졸업 이전에 이미 사귀고 있던 커플도 있지만 대개는 졸업 이후에 간간히 연락하며 지내다가 가까워진 경우다. 철없는 말괄량이 같았던 나는 눈치가 젬병이라 모 선배랑 모 선배가 낌새가 심상찮다, 는 이야기가 들려와도 오늘의 술안주는 뭘까, 오랜만에 먹으면 스프 뿌린 날라면도 별미인데.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어쨌든 커플이 많은 덕분에 행사가 있을 경우 선배들을 한꺼번에 세트로 보게 되니 그건 좋은 것 같다. 눈 위로는 여자 선배. 눈 아래로는 남자 선배. 오묘하게 두 사람을 반반씩 닮은 아기를 보는 것도 참 신기했다. 이십대 초중반 즈음 처음 만났던 나와 그들이 이제는 서로 나이 먹어가는 것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엔 선배 커플과 함께 왔는데 알고보니 신혼살림을 바로 옆동네에 차렸더라는. 소심하고 깐깐한 Y선배는 역사 교사고 항상 여기저기 벌려놓은 일 때문에 머리 아파 하시는 J선배는 공무원이다. 두 선배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내게 잘해주었다. 처음 동아리에 발을 들여놓은 건 J선배의 부추김 때문이었고, 그 동아리에 발을 끊지 않았던 건 Y선배의 배려 덕분이었다. 졸업 이후 바쁘게 살아왔던 탓에 한참 잊고 지냈지만 내겐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학부 때 전공을 포기해가며 진로를 완전히 바꿨던 Y선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공부했다며 힘들었던 시간을 회상했다. 나와는 같은 직종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공통화제가 많았고 그간의 불합리한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며 흥분하기도 했다. J선배는 연초라서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다며 비효율적인 공직 시스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결국 MB정부를 비판하는 쪽으로 화제가 기울다가는, 나의 대학원 생활과 선배들의 애매한 신혼생활에 관한 소소한 수다로 맺음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 Y선배를 '남편'이라는 타이틀을 씌워 바라보니 대략 괜찮더라는. 그때 그 시절엔 왜 안 보였을까?

 사실 지난날의 우리는 서로의 대책없음을 걱정해주기는 커녕 어느만치 부추겨주며 지냈던 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해 어떤 대책없는 신뢰 같은 게 있었던 듯 싶다. 아무리 침 튀기며 독설을 퍼부어도 속정은 깊은 사람이란 걸.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알콜을 들이부어도 남다른 밥그릇을 차고 나와 저러는 거라고. 담배로 해장을 하는 모습에 기함하면서도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는 믿음? 쿠쿠. 소식을 모르는 그리운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 안타깝지만 이렇듯 가끔 모이는 사람들이라도 건강하고 밝아 보여 참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 오늘처럼 또 환하게 웃을 수 있으려면 더욱 건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눈에 뵈는 게 없이 결혼식을 올린 H 덕분에 나는 보이는 게 아주 많았던 하루였다. 그녀를 포함한 모두에게 속닥속닥. Happily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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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1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는 렌즈를 착용하지 않고 그냥 뵈는 것 없는 상태로 결혼한 거에요? 신기하네요 ㅎㅎ
대책없음을 걱정해주기는 커녕 부추기는 사이, 하니 친구 c양과 나의 관계
서로 대책없이 철없이 깨는 짓 한번 할 때마다 역시 그래서 난 니가 좋아 막 이래요
그러고보면 그녀와 내 사이에도 대책없는 신뢰 같은 게 있나봐요 ^^
그나저나 오산이면 경기도네!!!

깐따삐야 2008-01-13 10:48   좋아요 0 | URL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좋은가 봐요.^^
생각해보니 저랑 친구들은 '네가 좋아' 이런 말을 잘 안 하네요.
오산은 수원 갈 때 잠깐 들르기만 하다가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 도시 분위기가 영 심란하더라구요.

Mephistopheles 2008-01-1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랑 친구 중에 건질만한 사람은 없던가요?
축시까지 낭독하셨다면 결혼식 때 주목 받으셨을텐데 말입니다.

깐따삐야 2008-01-13 10:51   좋아요 0 | URL
저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안 보이던데요.
저희 동아리 사람들만 주목한 것 같아요. ㅋㅋ

순오기 2008-01-1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깐따님, 축시 전문이구낭! 깐따님 결혼에는 누가 축시 써주나요?
아무리 콩깍지가 씌었어도 뵈는 것 없이 결혼식을 하다니~~~헉!!
나도 안경 빼면 뵈는 거 없는 사람이라 그날만 렌즈 끼고 했는데~ 신혼 여행 갔다온 나를 본 조카가 경악했다는 슬픈 전설이... ^^

깐따삐야 2008-01-16 11:54   좋아요 0 | URL
저도 결혼 축시는 이번에 처음 써봤습니다.
제가 결혼할 땐 유리상자나 성시경이 축가를 불러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최근에 들어본 전설 중에 가장 슬프네요.^^;


이게다예요 2008-01-1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그 H라는 친구는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이 결혼한 거예요? 저도 소문난 안경잽이라... 결혼을 결심하고 처음으로 렌즈를 장만해서 결혼식 땐 사람들에게 제 눈이 얼마나 이쁜지 다 보여줬는데 말이죠. ㅋㅋ
근데 시를 직접 지어서 읽어주셨나요? 멋지네요. 한번 올려줘보세요. 궁금해요~

깐따삐야 2008-01-16 11:57   좋아요 0 | URL
눈이 아주 나쁜 건 아니고 대충은 보이니까 그냥 렌즈를 끼지 않은 모양이에요.
퇴고하던 시가 페이퍼 어딘가에 있을텐데 완성된 시는 친구한테 선물한 것이어서 공개 페이퍼로 올리기가 좀 그렇네요.^^

2008-01-13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의 문학 2007년 겨울호. 올해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문혜진 외 이문재, 강기원 시인의 시들도 함께 실렸다. 시나 소설 보다도 특집으로 실린 '우리 시대의 서사'와 평론가 이광호가 요즘 젊은 소설들에 두루 엿보이는 초연함에 대해 '너무나 무심한 당신'이라는 타이틀로 쓴 기획 평론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서점에 들렀다가 문학동네가 가을호 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고 그냥 나오려다가 그래도 오랜만에 계간지를  읽고 싶어서 구입한 책이다. 계간지는 파편적인 구성 때문에 밀도 있는 독서가 되진 못하지만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게 미덕이다.

 

  스누피를 읽더니 이젠 에코다. 잘 쓰고 싶은 '진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더라는. 확실히 읽고 났을 때 도움이 되는 책이긴 한데 번역이 심하게 엉터리다. 거듭 읽어도 의미가 모호하고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냥 에코에게 전화하고 싶어지더라는.

 방법보다는 자세에 대해 조언하는 책. 그래서 읽고나면 마음가짐은 달라지는데 눈앞에 놓인 백지는 여전히 새하얗다. 아까 내리던 비는 이제 눈으로 바뀌었고 머릿속도 하얗다. 이를 어쩌면 좋을꼬.

 

  작년에 '마음'과 함께 읽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책. 막무가내 청년이 시골학교의 수학교사로 발령받으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보여준다. 오쿠다 히데오 식의 적나라하고 시끌벅적한 유머보다 소세키의 유머가 훨씬 더 내 취향에 맞는 것 같다. 능청스러운 무대뽀. 하지만 알고보면 착하고 정의로운 우리 도련님. 초임 발령을 받고 엉망진창으로 첫해를 보냈던 과거 내 모습과 오버랩되어 더 재밌는 소설. 칙칙한 날씨에 꺼내 읽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나쓰메 소세키는 타고난 작가인 것 같다. '마음'을 쓴 그와 '도련님'을 쓴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신기하다. 두 작품이 너무 다르지만 둘 다 훌륭하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책을 꺼내 보듯 짬날 때마다 보고 있다. 잠언집이라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들고 마음 속으로 시 낭송하듯 읽으면 된다. 차를 곁에 두고 읽으면 승방에 온 것처럼 고즈넉해질 때도 있다.

 요즘 살펴보니 내 책장엔 러셀의 '행복론'도 있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보이고 쇼펜하우어의 '인생론'도 꽂혀 있더라는. 아마도 무진장 잘 살아보고 싶었나 보다. 이젠 더 이상 그런 책들은 안 사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진장 잘 살고 있지는 않다.

 

  베스트 아카데미 수상작 컬렉션. '로마의 휴일'을 다시 보고픈 마음에 구입한 DVD 컬렉션이다. 그 외에도 '무기여 잘 있거라', '아가씨와 건달들' 등 좋은 고전영화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소장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점. 나는 선하고 풍만해 뵈는 여배우보다는 깜찍하거나 청초한 여배우를 애호하더라는. 일례로, 잉그리드 버그만<비비안 리. 

 10편 중에 6편 봤다. 그 가운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보다가 껐다. 잉그리드 버그만 때문일까. 지루했다. 다음엔 재밌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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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1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진장 잘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깐따삐야 2008-01-11 12:50   좋아요 0 | URL
깜딱이야! 있으면 어디 댓글 달아보라구 합시다.^^

깐따삐야 2008-01-11 13:22   좋아요 0 | URL
모가지가 없어 슬픈 살청이여.
언제나 산만한 편 댓글이 많구나.
- 깐천명

깐따삐야 2008-01-11 13:29   좋아요 0 | URL
싸구려만 입으시니까 그렇죠. 신축성이 좋은 걸 입으셔야지.
삐쳐야 할 사람은 저라구요. 잉크님한테 살청제나 투약하구 말이죠.
같은 야양청스교끼리 상부상조하지는 못할 망정. 미워요!

치니 2008-01-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쏘쎄키 작품 중 젤 좋았던 건 <그 후>. 안 읽어보셨으면 추천입니다 ~ ^-^

깐따삐야 2008-01-11 12:56   좋아요 0 | URL
아, 서점에서 봤어요. S양이 그 책 보고 그러더라구요. 언니! 언니가 좋아하는 소새끼야 소새끼! -_-
보관함에 넣어두었답니다.^^

마노아 2008-01-11 15:01   좋아요 0 | URL
소 새끼.. 어쩜 좋아요..ㅜ.ㅜㅋㅋㅋ

깐따삐야 2008-01-11 23:1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S양도 제 덕분에 유식해지는 거죠. ㅋㅋ

다락방 2008-01-1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놔.)
제가 하루만 참았으면 여기에 땡스투 할수 있었던거잖아요. 그쵸? OTL

깐따삐야 2008-01-11 13:23   좋아요 0 | URL
(아 놔.)
괘안습니다. 괘안치 않으면 머? ㅋㅋ

미미달 2008-01-1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와 도넛과 커피 ! 굿 !!!

깐따삐야 2008-01-11 23:18   좋아요 0 | URL
갈피접기라는 카테고리를 우리 미미달님이 잘 이해를 못했구나. ㅋㅋ
그래도 영화와 도넛과 커피는 굿!!!

2008-01-12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 물고기
황시내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저자 황시내는 황순원의 손녀이자 황동규의 딸이다. 처음에는 그 화려한 배경과 클레의 황금물고기가 그려진 예쁜 커버에 이끌렸다. 작곡을 전공한 후 미술사를 공부했다는 독특한 이력에도 호기심이 갔다. 유전과 환경의 세례를 골고루 받은 이 행운의 여인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과거 독일로 떠났던 전혜린에게서 잿빛 우울을 보았다면, 황시내에게서는 황금빛 그리움을 보는 듯 했다. 클레의 <황금 물고기>는, 가끔 화집이나 포스터로 마주칠 때마다 의뭉스레 한쪽 눈을 꿈쩍이며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남몰래, 내게만. 그리고 그 인사를 받을 때마다 그를 가까이서 만져보고 싶다는 갈망이 나의 내부에서, 마치 막 부풀기 시작한 오븐 속의 효모처럼 마구 꿈틀거린다. 다다르고자 했으나 한 번도 이룰 수 없었던 나의 열망, 나의 황금 물고기.(p.56) 저자는 청춘의 많은 시간을 이국 땅에서 홀로 외롭게 보냈다. 학문과 예술에의 열망으로 가득차서. 그녀는 공부하고 여행하며 마주쳤던 갖가지 추억들을 이 묵직한 한권의 에세이집 속에서 조곤조곤 되짚는다. 깐깐한 자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갈하고도 상냥한 목소리로.

 Freundin이라는 단어에는 특수한 울림이 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세상 어느 단어보다도 다정한 느낌을 주는 낱말. 그러나 때로는 이 부드러운 단어가 얼마나 날카롭게 사람의 가슴을 찌를 수 있는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실은 얼마나 우리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p.79) 섣부른 친절로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는 한발짝 늦게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그녀. 그렇듯 아름다운 것들이 감추고 있는 가시에 찔리고, 독에 취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청춘이 지닌 찬란한 슬픔을 깨닫는 것이겠지.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2차로 평양 빈대떡을 부쳐주는 주점으로 향했다는 그. 어린 시절 친척들이 모일 때면 우리는 늘 주교동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평양냉면과 불고기를 먹곤 했다.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한 그 가게에는 언제나 평안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중노인들이 식탁마다 둘러 앉아 평안도 식으로 조리한 갈비를 뜯고 평안도 식으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서울은 그들에게 어떻게 해봐도 낯선 도시였을까.(p.95) 여기서 '그'는 저자의 할아버지인 황순원을 가리킨다. 어쩌면 먼 곳에의 향수도 태생적이란 느낌이 든다. 피와 살에 섞여 면면히 내려져오는 유전적 그리움. 그 실향민 의식은 재능과 열망이 있는 사람을 예술가로 키운다. 생활인의 가면 뒤에서 저마다 향수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예술을 즐기는 가운데 고향을 본다.

 뭐랄까.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것 하나 없지만, 그리고 아직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한 일 하나 한 것 없지만 왠지 이제는 드디어 온전히 세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은 느낌. 삶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이라는 클럽의 준회원이었다가 어느덧 정회원 자격을 부여받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어. 그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지? 아마도 여태까지 쌓아온 경험들과 추억들이 아니었을까. 예전엔 그리도 심각하고 목숨 걸 만큼 절박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데서 오는 느긋함. 웬만한 일은 이제 큰 집착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로움......(p.205) 삼십대에 들어선 저자의 고백에 아직은, 이라고 갸웃하면서도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요즘 나의 고민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고. 언제쯤이면 나도 집착 없이, 느긋하게 세상의 정회원이 될 수 있을까. 기다림의 순간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러나 그 끝이 공갈빵처럼 텅 빈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p.219) 내 기다림의 끝도 구멍 뚫린 공갈빵 또는 도너츠 같아서 숭숭 통하는 바람에 결국 이런 것이었어? 라며 쓸쓸해질까.

 한 번 버려진 길들은 영원히 No longer an option으로 남는다. 만일 선택한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던 길을 되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예전에 선택할 수도 있었을 처음 그대로의 길을 만나지는 못한다. 우리가 다른 길을 걷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비가 내리고 낙엽이 쌓이고 길가에는 잡초들이 자라고 하는 것이다.(p.223) 왠지 이 문장 다음에는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라는 즐거운 편지의 싯구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가지 않은 길은 기억 속에서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지금 선택한 길을 성실히 걷는 수 밖에. 쉽사리 성실을 허락치 않는 끈적끈적한 그리움으로 이따금 삶의 궤도를 다시 돌아보곤 하는 내게 꼭 필요한 충고이다.  

 뛰어난 에세이스트 한 사람을 발견한 느낌. 더불어 이 책 속에는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들과 다양한 음악에 대한 소개가 함께 담겨져 있다. 루이제 린저와 4월이라는 교집합 앞에선 사뭇 반가워지기도 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드리우듯 그녀의 감수성엔 한계가 없어 보인다. 열린 지성과 다정한 성품. 게다가 이렇게 참하기까지 하다. 

 황시내 / (네이버 인물정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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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1-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의 순간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러나 그 끝이 공갈빵처럼 텅 빈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p.219)

저는 지금 알아가고 있는것 같아요.
제 기다림의 끝이 공갈빵처럼 텅 빈 것은 아닌줄로만 알았는데, 그럴수도 있다는걸 깨달아가고 있어서 아픈 요즘이지요.

깐따삐야님의 리뷰를 읽었더니, 내용과는 상관없이, 저 문장 하나때문에,
쓸쓸해지고 말았어요.
후~

깐따삐야 2008-01-11 10:28   좋아요 0 | URL
뭔지는 잘 모르지만 저까지 마음이 아파오네요. 끝이 쓸쓸하더라도 기다리면서 설레었던 기분은 추억으로 고이고이. 그쵸? :)


순오기 2008-01-1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전과 환경의 세례... 부럽당!
전혜린......청춘들이 바치는 그녀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었다. 나도......

깐따삐야 2008-01-11 10:38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읽다보니 질투심이 일더라구요. 나도 재주 많았는데. 막 속상해 하기도 하면서. ㅋㅋ 그래도 현재 이룬 것들의 많은 부분은 그녀가 외롭게 노력한 시간들 덕분이겠죠.
전혜린은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고유명사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짧게 살았기에 더 신화화된 경향도 있는 것 같구요. 어쨌든 당시로서는 매우 비범한 여성이었나 봐요.

웽스북스 2008-01-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전혜린을 너무 늦게 읽은 거야, 라고 툴툴거렸어요. 이십대 후반에게는 더이상 전혜린이 멋있어보이지 않았더라며.

깐따삐야 2008-01-11 12:53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여름에 머플러 하고 다니는 것도 예전엔 그렇게 멋져 보이더니 말이죠. 전혜린은 그 마음 그대로 성장이 멈춘 채 죽었는데 우리는 계속 변화하니깐. 궁합이 잘 안 맞아요. 이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