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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황시내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저자 황시내는 황순원의 손녀이자 황동규의 딸이다. 처음에는 그 화려한 배경과 클레의 황금물고기가 그려진 예쁜 커버에 이끌렸다. 작곡을 전공한 후 미술사를 공부했다는 독특한 이력에도 호기심이 갔다. 유전과 환경의 세례를 골고루 받은 이 행운의 여인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과거 독일로 떠났던 전혜린에게서 잿빛 우울을 보았다면, 황시내에게서는 황금빛 그리움을 보는 듯 했다. 클레의 <황금 물고기>는, 가끔 화집이나 포스터로 마주칠 때마다 의뭉스레 한쪽 눈을 꿈쩍이며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남몰래, 내게만. 그리고 그 인사를 받을 때마다 그를 가까이서 만져보고 싶다는 갈망이 나의 내부에서, 마치 막 부풀기 시작한 오븐 속의 효모처럼 마구 꿈틀거린다. 다다르고자 했으나 한 번도 이룰 수 없었던 나의 열망, 나의 황금 물고기.(p.56) 저자는 청춘의 많은 시간을 이국 땅에서 홀로 외롭게 보냈다. 학문과 예술에의 열망으로 가득차서. 그녀는 공부하고 여행하며 마주쳤던 갖가지 추억들을 이 묵직한 한권의 에세이집 속에서 조곤조곤 되짚는다. 깐깐한 자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갈하고도 상냥한 목소리로.
Freundin이라는 단어에는 특수한 울림이 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세상 어느 단어보다도 다정한 느낌을 주는 낱말. 그러나 때로는 이 부드러운 단어가 얼마나 날카롭게 사람의 가슴을 찌를 수 있는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실은 얼마나 우리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p.79) 섣부른 친절로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는 한발짝 늦게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그녀. 그렇듯 아름다운 것들이 감추고 있는 가시에 찔리고, 독에 취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청춘이 지닌 찬란한 슬픔을 깨닫는 것이겠지.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2차로 평양 빈대떡을 부쳐주는 주점으로 향했다는 그. 어린 시절 친척들이 모일 때면 우리는 늘 주교동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평양냉면과 불고기를 먹곤 했다.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한 그 가게에는 언제나 평안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중노인들이 식탁마다 둘러 앉아 평안도 식으로 조리한 갈비를 뜯고 평안도 식으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서울은 그들에게 어떻게 해봐도 낯선 도시였을까.(p.95) 여기서 '그'는 저자의 할아버지인 황순원을 가리킨다. 어쩌면 먼 곳에의 향수도 태생적이란 느낌이 든다. 피와 살에 섞여 면면히 내려져오는 유전적 그리움. 그 실향민 의식은 재능과 열망이 있는 사람을 예술가로 키운다. 생활인의 가면 뒤에서 저마다 향수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예술을 즐기는 가운데 고향을 본다.
뭐랄까.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것 하나 없지만, 그리고 아직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한 일 하나 한 것 없지만 왠지 이제는 드디어 온전히 세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은 느낌. 삶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이라는 클럽의 준회원이었다가 어느덧 정회원 자격을 부여받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어. 그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지? 아마도 여태까지 쌓아온 경험들과 추억들이 아니었을까. 예전엔 그리도 심각하고 목숨 걸 만큼 절박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데서 오는 느긋함. 웬만한 일은 이제 큰 집착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로움......(p.205) 삼십대에 들어선 저자의 고백에 아직은, 이라고 갸웃하면서도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요즘 나의 고민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고. 언제쯤이면 나도 집착 없이, 느긋하게 세상의 정회원이 될 수 있을까. 기다림의 순간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러나 그 끝이 공갈빵처럼 텅 빈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p.219) 내 기다림의 끝도 구멍 뚫린 공갈빵 또는 도너츠 같아서 숭숭 통하는 바람에 결국 이런 것이었어? 라며 쓸쓸해질까.
한 번 버려진 길들은 영원히 No longer an option으로 남는다. 만일 선택한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던 길을 되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예전에 선택할 수도 있었을 처음 그대로의 길을 만나지는 못한다. 우리가 다른 길을 걷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비가 내리고 낙엽이 쌓이고 길가에는 잡초들이 자라고 하는 것이다.(p.223) 왠지 이 문장 다음에는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라는 즐거운 편지의 싯구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가지 않은 길은 기억 속에서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지금 선택한 길을 성실히 걷는 수 밖에. 쉽사리 성실을 허락치 않는 끈적끈적한 그리움으로 이따금 삶의 궤도를 다시 돌아보곤 하는 내게 꼭 필요한 충고이다.
뛰어난 에세이스트 한 사람을 발견한 느낌. 더불어 이 책 속에는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들과 다양한 음악에 대한 소개가 함께 담겨져 있다. 루이제 린저와 4월이라는 교집합 앞에선 사뭇 반가워지기도 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드리우듯 그녀의 감수성엔 한계가 없어 보인다. 열린 지성과 다정한 성품. 게다가 이렇게 참하기까지 하다.
황시내 / (네이버 인물정보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