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으로 동아리 친구 H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후배가 쓰고 있는 소설을 노트북에 담아와서 심심하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영화 원스에 대한 이야기에선 안타깝게도 공감대 불일치. 남자가 그 여자를 더 사랑한 것 같아요. 맘에 안 들어. 여자만 피아노를 받다니. 너 밀루유 떼베가 뭔지 모르지? ....... 당신을 사랑해요, 였다. 인마! 아직 연애경험이 없는 스물넷의 완고한 젊음이니 무조건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 happily ever after만을 기대하는 지도. 붕어빵을 팔아 등록금을 모으고 있다는 녀석은 어제는 오만이천원 어치를 팔았다며 이제 단골도 생기고 할만하긴 한데 다른 알바도 골고루 해보고 싶다며 열의를 보였다. 마른 버짐에 겨울볕에 그을린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수줍은 미소가 건강해 보였다.
평소 안경을 착용하던 우리의 신부는 한 마디로 뵈는 게 없는 채 대기실에 곱게 앉아 있었다. 급기야는 오랜만에 모인 동아리 선배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나는 일일히 누가누가 왔다고 전해야만 했다. 눈부신 신랑신부 앞에서 분위기 잡고 축시도 낭독했다. 지난번에 K에게 건넸던 축시를 재활용 하려다가 두 친구의 아우라가 많이 다른 까닭에 고민고민. 그분이 오시는 타이밍에 맞춰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다시 썼다. 써놓고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한데 나중에 쓴 시가 더 좋아서 K에게 살짝 미안했다는. H는 예의 그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시가 너무 이쁘다며 좋아했다. 흰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며 머리를 쥐어뜯던 시간이 보람차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짓궂은 선배들은 시는 잘 썼네. 시는! 시 낭송하고 머 그럴 땐 네가 아닌 것 같다? 이렇듯 진심 어린 농담들로 나를 갈궈댔다.
결혼식 일정이 끝나고 근처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이야길 나눴다. 우리 동아리엔 커플이 많다. 졸업 이전에 이미 사귀고 있던 커플도 있지만 대개는 졸업 이후에 간간히 연락하며 지내다가 가까워진 경우다. 철없는 말괄량이 같았던 나는 눈치가 젬병이라 모 선배랑 모 선배가 낌새가 심상찮다, 는 이야기가 들려와도 오늘의 술안주는 뭘까, 오랜만에 먹으면 스프 뿌린 날라면도 별미인데.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어쨌든 커플이 많은 덕분에 행사가 있을 경우 선배들을 한꺼번에 세트로 보게 되니 그건 좋은 것 같다. 눈 위로는 여자 선배. 눈 아래로는 남자 선배. 오묘하게 두 사람을 반반씩 닮은 아기를 보는 것도 참 신기했다. 이십대 초중반 즈음 처음 만났던 나와 그들이 이제는 서로 나이 먹어가는 것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엔 선배 커플과 함께 왔는데 알고보니 신혼살림을 바로 옆동네에 차렸더라는. 소심하고 깐깐한 Y선배는 역사 교사고 항상 여기저기 벌려놓은 일 때문에 머리 아파 하시는 J선배는 공무원이다. 두 선배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내게 잘해주었다. 처음 동아리에 발을 들여놓은 건 J선배의 부추김 때문이었고, 그 동아리에 발을 끊지 않았던 건 Y선배의 배려 덕분이었다. 졸업 이후 바쁘게 살아왔던 탓에 한참 잊고 지냈지만 내겐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학부 때 전공을 포기해가며 진로를 완전히 바꿨던 Y선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공부했다며 힘들었던 시간을 회상했다. 나와는 같은 직종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공통화제가 많았고 그간의 불합리한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며 흥분하기도 했다. J선배는 연초라서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다며 비효율적인 공직 시스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결국 MB정부를 비판하는 쪽으로 화제가 기울다가는, 나의 대학원 생활과 선배들의 애매한 신혼생활에 관한 소소한 수다로 맺음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 Y선배를 '남편'이라는 타이틀을 씌워 바라보니 대략 괜찮더라는. 그때 그 시절엔 왜 안 보였을까?
사실 지난날의 우리는 서로의 대책없음을 걱정해주기는 커녕 어느만치 부추겨주며 지냈던 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해 어떤 대책없는 신뢰 같은 게 있었던 듯 싶다. 아무리 침 튀기며 독설을 퍼부어도 속정은 깊은 사람이란 걸.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알콜을 들이부어도 남다른 밥그릇을 차고 나와 저러는 거라고. 담배로 해장을 하는 모습에 기함하면서도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는 믿음? 쿠쿠. 소식을 모르는 그리운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 안타깝지만 이렇듯 가끔 모이는 사람들이라도 건강하고 밝아 보여 참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 오늘처럼 또 환하게 웃을 수 있으려면 더욱 건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눈에 뵈는 게 없이 결혼식을 올린 H 덕분에 나는 보이는 게 아주 많았던 하루였다. 그녀를 포함한 모두에게 속닥속닥. Happily Ever Af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