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수능감독을 갔던 고등학교에서 대학동기 J를 만났다. 통화는 가끔 했지만 꽤 오랜만이었다. 좀더 세련되어졌으나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총각 선생님 분위기가 폴폴 났다. J는 신규교사였을 때 남편과 같은 학교에 근무했고 둘이 죽지 않을 만큼 오지게 테니스를 치며 가까워졌다. 결국 J는 나와 남편의 다리가 되어주었고 그 믿기 힘들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동기라는 연결고리에 더한 의미를 보태어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고 있다.
J를 처음 만났던 곳은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다. 미술실에서 보던 석고상처럼 휘몰아치는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말수는 적은데 가끔 나오는 한마디가 분위기와 어우러지지 않는 폼이 나와 비슷했다. 2학년 선배가 밥먹을 사람 손을 들라고 했고 내가 소심하게 손을 들자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남자 동기가 나를 똑바로 가리키며 얘도 먹는다고 셈에 나를 넣어주었다. 김애란이 <비행운>에서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이라 했던가. 동의한다. 나는 빨간색 티셔츠를 입었던 남자 동기를 그 후 몇개월 동안 가슴에 품었다. 물론 그 티셔츠의 사나이가 J는 아니다.
J와 또다른 J. 우리는 그들을 준 브라더스라고 불렀다. 어울려 다니던 E와 나. 그리고 그 두명의 남자 아이들이 함께 놀았다.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은 삐질삐질 감출 수가 없어서 준 브라더스도 나의 고달픈 짝사랑을 눈치챘지만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그냥 열심히 놀았다. J가 헌혈을 해서 얻은 이용권을 가지고 함께 기차 타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대낮부터 잔디밭에 앉아 하염없이 병나발을 불기도 하고 칭찬보다는 구박과 응징을 주고받으며 무얼 해도 충만하고 그만큼 공허함이 덮쳐오던 신입생 시절을 겨우겨우 버텼다.
2학년이 되자 나는 동아리에 빠졌고 E는 그런 나를 격려하거나 염려했고 준 브라더스는 하나의 이미지처럼, 그저 익숙하게 지나치는 풍경처럼, 머물렀다 지워지곤 했다. 나는 이런저런 외유를 하느라 과에 동화되지 않았고 몇몇 동기들을 제외하곤 과 사람들과 표나게 거리를 두었다. 그들을 지루하거나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동아리 사람들은 비운의 천재들로 우상화하며 룰루랄라 또 한 시절을 버텼다. J와 경영대 잔디밭에서 독일영화 '밴디트'를 함께 보았던 것. 또 다른 J가 영어연극에서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던 것. E의 어설픈 연애담을 들어주던 사이 어둑어둑해지던 사범대 정경 등 우연히, 또는 편의대로 편집된 추억의 몇 컷이 이따금 떠오른다.
몇년이 흐른 후 J가 소개팅을 주선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오라 했고 나는 J의 옆좌석에 앉아 약속장소로 갔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홀홀했다. J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남자는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일 뿐. 쉽게 마음을 비웠다. 곧이어 동기들의 모임이 있었고 산뜻해진 준 브라더스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반갑게 재회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유예하고픈 청춘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가치를 당연히 몰랐고 J가 소개해준 그 남자의 적극성에 기대어 서둘러 평범해지는 길을 택했다. 어울려 놀았던 준 브라더스와 E는 여전히 싱글이고 그들 중 나만이 세 살배기 딸을 둔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내게 연락할 때 항상 조심하는 기색이 있고 나는 그들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낯선 도시의 낯선 자유 속에서 우울하게 휘청거리던 나를 지지해준 소중한 벗들인데 내가 그들로부터 참 멀리도 왔다.
시험장으로 남편과 영달이가 마중을 나왔고 우리를 발견한 J가 영달이를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귀엽다! 너도 빨리 장가 가서 하나 낳으라고 했더니 싱겁게 웃기만 한다. 우리의 결혼 소식에 깜짝 놀라며 꼭 잘 살아야 한다고 오빠처럼 당부하던 J는 제법 가족의 모양새를 갖춘 우리를 대견하고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몸도 퍼지고 마음도 퍼진 아줌마처럼 너스레를 떨며 헤어지는 길. 엄습하는 피로를 영달이의 체온으로 갈음하며 동기들을, 그들과의 추억을 잠깐 그리워했다. 남편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영달이는 내가 카시트를 타고 엄마를 찾으러 왔다며 으쓱해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 행복이 대체 무어냐고 자문하다가는 그런 질문 보다는 그저 삶 자체가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매콤하고 뜨끈한 컵라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마음, 같은 그리움이었는지 E가 전화를 했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기약없는 구두약속을 다짐했다.
오늘 이 도시에는 새벽부터 조금씩 날리기 시작한 눈발이 큼지막한 눈송이가 되어 첫눈이 왔다. 출근길, 영달이는 할머니 등에 업혀 눈송이들을 손바닥에 받으며 즐거워했다. 눈이 온다며 서로에게 전화를 하던 그때 그 시절. 첫사랑 보다는 어째 동기들이 보고싶다. 무늬만 엄마인 나는 엄마로서 모든 종류의 회동을 반납한 상태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야겠다. 미안했다고, 고마웠다고, 상투적인 회개를 한 다음 지나간 추억을 곱씹고 미래의 추억을 계획하며 옛날처럼 갈굼의 미학을 재현하고 싶다. 그리고 그날도 눈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