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어느 남학생의 누나인 줄 알았다. 청순하고 수줍어 뵈는 아가씨가 교무실 문 앞에서 머뭇머뭇. 무얼 전해주려고 찾아왔나 싶어 물었더니 모친상을 당한 미술 선생님 대신 근무하게 된 미술학도였다. 너무 어려보여서 학생의 누나인 줄 알았다고 했더니 살포시 웃는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어찌어찌하여 내 옆자리로 오게 되었는데 짐도 몇 가지 없고 하얀 점퍼에 화장기 없는 맨얼굴. 문득 전공이 궁금했다. 역시 동양화란다. 어린 선생님이 있는 사흘 동안 청주에는 폭설이 내렸고 청초한 여인과 순백의 날씨는 아주 잘 어울렸다.

 

근무일이 오늘까지인 것도 모르고 옆자리의 또다른 미술 선생님이 웬일로 점심을 나가서 먹자고 하길래 이 폭설을 헤치고 무슨 김치찌개냐고 쌍지팡이 짚고 나섰는데 어쨌든 오동통한 두부와 쫄깃한 돼지고기가 씹히는 김치찌개는 무한정 맛있었고 아름다운 여인과 눈 속에서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걷는 기분도 썩 괜찮았다. 보송보송 털이 달린 구두도 요정의 신발 같고 어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 보이는 것이 아,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나, 싶었더랬다. 안나는 어찌하여 키티가 사랑하는 브론스키를! 마침 책을 읽고 있던 참이라 안나를 이해하기 싫었다. 어리고 고운 여인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그저 모든 것을 양보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므로.

 

스마트폰으로 작품을 보여주는데 한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정교한 판화 같고 어떤 그림은 추상적인 그래픽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한없이 응시하고 싶을만큼 깊고 은은했다. 가까운 백화점에 걸리기도 했다니 조만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선생님의 이름 석자를 꼭 새겼다. 이제 조금 말문이 트여 사적인 얘기도 오고가고 하는데 종례를 마치고 와보니 몇 개 되지도 않는 짐을 반짝 들고 작별인사를 한다. 선생님 같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했을 때 연락처라도 받아둘걸. 마치 대시할 타이밍을 놓친 뻘쭘한 상대처럼 부랴부랴 배웅을 해서 보내고 나니 어쩐지 좀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간식으로 사들고 온 과자도 하나도 못 먹고 갔네.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과 열망의 투영이라 할지라도 눈과 함께 왔다가 눈과 함께 사라진 어린 여인의 잔향이 생각보다 얼얼하다. 꼭 지금의 나와 같은 눈빛과 마음으로 어린 날의 나를 바라보던 어른들의 시선도 떠오른다. 예쁜 여인을 보면서 영달이의 앞날도 상상해 본다. 저처럼 조신하게, 야무지게, 단아하게... 물론 영달이는 나의 욕심이나 허영과는 무관하게 저의 잠재력대로 자라날 테지만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 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참 설렌다. 모처럼 예쁜 여인을 보니 예쁜 생각을 하게 되고 예쁜 상상을 불러 오고. 아! 정말 순백의 미스 도. 기분 좋은 사흘이었다. 앞날을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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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2-0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에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아부 한 마디..

"미인은 미인을 알아보는 법이라더군요." 오호호호호호!

깐따삐야 2012-12-10 11:35   좋아요 0 | URL
뭐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
 

갑자기 폭설이다.

근처 학교에서 불이야~ 가 아니라 눈이야~ 외치는 남자고등학생들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편한테 전화.

눈 엄청 와.

그러게.

나 어떻게 가지?

살살 와야지. 사알살.

못 가. 앞이 보이지도 않고 미끄러질 것 같고 이 날씨에 어떻게 운전을... 주절주절...

조금 늦을텐데.

안돼. 네시 삼십분까지 우리 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도록 해욧!

... 하고 끊었는데 아무리 운전 베테랑인 남편이라 해도 차마 바퀴를 떼지 못할 눈이다. 폭설이다.

집에 어떻게 가지?

 

요즘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중이다. 밤에 짬짬이 읽는 맛이 일품이다. 원래 작가정신에서 출간된 책을 갖고 있었는데 서점에서 이 책을 몇 장 넘겨보고 유려하고 깔끔한 문장이 새롭게 보여 또 구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얼마 전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을 읽으며 나는 이 정도는 아니네, 하면서 안도와 동시에 질투를 느꼈는데 그 질투심이 어째 불안불안 하더니만 진정한 중독자의 반열에 들어서려나 보다. 있는 책 또 사기. 이번이 몇번째인지.

 

하여간 대단한 책. 인간이란 19세기든 20세기든 21세기든 어찌 그리 똑같은지. 당신이 만약 폭설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면 어떤 책을 갖고 가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주저않고 안나 카레니나요! 하겠지만은 마침 그러고 나니 다른 책들이 모락모락 떠오르고. 기왕이면 도서관이나 영풍문고 같은 데 갇히면 좋겠다고 상상하고. 영달이가 보고싶고... 그나저나 집에 어떻게 가지?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니 너무 반가웠다. 마침 이 책을 주문해서 읽고 있었기에. 카뮈가 그르니에 선생님에게 예를 갖추며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이, 노심초사 동의를 구하기도 하고 실망을 안길까봐 소심해하는 인상이, 참말로 새롭다. 촘촘하고 완고한 그의 책을 읽을 때보다 어째 더 긴장하는 내 모습도 새롭고.

 

어느 광고 문구처럼 '같이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는 서한집이다.

나랑 같이 편지 친구하실 분? 또박또박 편지 쓰고 싶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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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2-0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쩌지. 저는 문학동네 안나 까레니나를 읽었는데, 깐따삐야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펭귄으로 안나를 다시 읽어볼까, 막 이런 생각이 드네요. 아 안돼 안돼, 난 중독자가 아니니까 그러면 안돼. 안돼 안돼 그러지마. 으윽.

카뮈 그르니에 서한집은 제가 다음번 지름에 반드시 포함시키겠다고 마음먹은 책인데 깐따삐야님은 읽고 계신단 말입니까! 아, 저도 빨리 읽고 싶어요.

여긴 이제 눈이 멎었어요. 집에 갈 거 생각하니 답답..하네요.

깐따삐야 2012-12-06 10:49   좋아요 0 | URL
저는 문학동네의 안나 까레니나를 읽고 싶네요. 분명 조금씩 다를텐데. 약물도 아닌데 책 중독은 괜찮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고.ㅠ

카뮈 그르니에 서한집, 좋은 책인데 읽는 내내 뭔가를 기다리는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눈의 결정처럼 책에서도 결정적인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거죠. 그보다는 열린 지성, 깨인 영혼들간의 조우, 그 아우라가 핵심이자 요지일텐데 말이죠. 어여 읽어보세요. 다락방님의 감상이 궁금해요.

눈이 멎었는데 학교가 난장판입니다. 나이든 선생님들은 출퇴근 걱정, 아이들은 마냥 소리지르고 좋아라 하네요.^^


다락방 2012-12-06 12:54   좋아요 0 | URL
저도 출퇴근 때문에 눈 오는게 싫으니, 이제 정말 늙었는가 봐요. 하아-
 

재미없는 책을 읽을 때보다 알라딘 서재의 옛날 글들을 읽어보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있다. 그땐 그랬지의 심정으로. 가끔은 시간이 없어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지난 글들을 꼼꼼히 읽어보기도 한다. 댓글까지 따라 읽다 보면 어느새 그 시점으로 돌아가 그날의 시선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그 중엔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버렸던 글과 글쓴이도 있고 제대로 친분도 쌓기 전에 흔적만 남기고 잠적한 글쓴이도 있다. 어떤 글쓴이는 내가 그 사람의 글에 반해 알라딘에 둥지를 튼 것을 기억하는지 잊었는지 더 이상 삶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당신의 관념을 읽고 싶기 보다는 당신의 생활을 읽고 싶어요. 그러니 써주세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온라인의 특성이자 한계일 뿐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나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나 눈코가 다른 곳에 쏠려 있을 때는 글 한 줄 남기기도 어렵지 않더냐고 반문하면서도,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마냥 그 이름이 그 삶이 그립다.

 

나 대신 술마시는 사람. 나 대신 연애하는 사람. 나 대신 여행하는 사람. 나 대신 싸우는 사람. 나 대신 욕을 하는 사람. 나 대신 책을 사는 사람. 나 대신 공부하는 사람. 나 대신 아파하는 사람. 나 대신......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 뿐인데 독자인 나는 대리체험을 넘어 대리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달하고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호르몬의 작용을 절절하게 느낀다. 그리고는 만난 적이 있든 만난 적이 없든 오래오래 그들의 안녕을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공용화장실 옆 후미지게 붙어있던 춥춥한 동아리방이 어린 날의 내게는 낙원이었듯 어떤 의미에서는 이곳 역시 그러하다.

 

삶이 없는 글은 빛이 없고 글이 없는 삶은 그림자가 없다.

그간 알라딘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고로, 지금처럼 살고 읽고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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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없는 글은 빛이 없고 글이 없는 삶은 그림자가 없다.
삐야님, 명문장! 담아갑니다. 어디? 가슴에.^^
빛과 그림자를 늘 말하는 울옆지기 말이 생각나네요.
빛이자 그림자, 빛도 그림자도 필요한 것.
참 좋은 계절,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깐따삐야 2012-11-21 16:39   좋아요 0 | URL
빛도 그림자도 필요한 것. 그렇죠? 프레이야님도 내내 행복하세요.^^

다락방 2012-11-1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의 글들은 차곡차곡 마음에 쌓아두고 싶어져요. 저 역시 나지막한 삶의 이야기들을 깐따삐야님의 글을 통해 대리만족하며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저는 결코 쓸 수 없을테니 말이죠.

깐따삐야 2012-11-21 16:41   좋아요 0 | URL
아마 저도 다락방님처럼 아름답게 솔직해지긴 어려울 거에요. 솔직한 건 쉽지만 추해지지 않기란 참 어려워서. 다락방님의 삶과 글을 경외심을 갖고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요.

Mephistopheles 2012-11-19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없는 글은 빛이 없고 글이 없는 삶은 그림자가 없다.
하지만 깐따삐야님 서재 대문 문구엔 모든 이론은 회색!

너무 심오합니다...^^

깐따삐야 2012-11-21 16:43   좋아요 0 | URL
살아 있는 나무는 푸르다, 가 핵심이랍니다.^^
저는 심오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고 메피님의 요즘 건강은 괜찮으신지 어쩐지 여쭤보고 싶네요.

레와 2012-11-1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12-11-21 16:43   좋아요 0 | URL
레와님, 동기모임은 잘 다녀오셨죠? ^^

2012-11-1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명문장 마음에 담아갑니다../서재든 블로그든 오래 하는 게 전 무조건 좋더라구요. 제가 못 그래왔지만 (다른 블로그에서) 여튼 그게 무조건 진리라고 생각은 합니다.^^

깐따삐야 2012-11-21 16:47   좋아요 0 | URL
섬님, 반갑습니다.
전에 네이버에도 블로그가 있었고 싸이월드도 잠깐 했었는데 여기가 가장 편하더라구요. 많은 책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안정감과 든든함이 있어요. 번쩍번쩍하는 것도 덜하구요. 이상하게 변덕을 안 부리게 되요.^^

2012-11-25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6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며칠 전 수능감독을 갔던 고등학교에서 대학동기 J를 만났다. 통화는 가끔 했지만 꽤 오랜만이었다. 좀더 세련되어졌으나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총각 선생님 분위기가 폴폴 났다. J는 신규교사였을 때 남편과 같은 학교에 근무했고 둘이 죽지 않을 만큼 오지게 테니스를 치며 가까워졌다. 결국 J는 나와 남편의 다리가 되어주었고 그 믿기 힘들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동기라는 연결고리에 더한 의미를 보태어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고 있다.

 

J를 처음 만났던 곳은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다. 미술실에서 보던 석고상처럼 휘몰아치는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말수는 적은데 가끔 나오는 한마디가 분위기와 어우러지지 않는 폼이 나와 비슷했다. 2학년 선배가 밥먹을 사람 손을 들라고 했고 내가 소심하게 손을 들자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남자 동기가 나를 똑바로 가리키며 얘도 먹는다고 셈에 나를 넣어주었다. 김애란이 <비행운>에서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이라 했던가. 동의한다. 나는 빨간색 티셔츠를 입었던 남자 동기를 그 후 몇개월 동안 가슴에 품었다. 물론 그 티셔츠의 사나이가 J는 아니다.

 

J와 또다른 J. 우리는 그들을 준 브라더스라고 불렀다. 어울려 다니던 E와 나. 그리고 그 두명의 남자 아이들이 함께 놀았다.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은 삐질삐질 감출 수가 없어서 준 브라더스도 나의 고달픈 짝사랑을 눈치챘지만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그냥 열심히 놀았다. J가 헌혈을 해서 얻은 이용권을 가지고 함께 기차 타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대낮부터 잔디밭에 앉아 하염없이 병나발을 불기도 하고 칭찬보다는 구박과 응징을 주고받으며 무얼 해도 충만하고 그만큼 공허함이 덮쳐오던 신입생 시절을 겨우겨우 버텼다.

 

2학년이 되자 나는 동아리에 빠졌고 E는 그런 나를 격려하거나 염려했고 준 브라더스는 하나의 이미지처럼, 그저 익숙하게 지나치는 풍경처럼, 머물렀다 지워지곤 했다. 나는 이런저런 외유를 하느라 과에 동화되지 않았고 몇몇 동기들을 제외하곤 과 사람들과 표나게 거리를 두었다. 그들을 지루하거나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동아리 사람들은 비운의 천재들로 우상화하며 룰루랄라 또 한 시절을 버텼다. J와 경영대 잔디밭에서 독일영화 '밴디트'를 함께 보았던 것. 또 다른 J가 영어연극에서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던 것. E의 어설픈 연애담을 들어주던 사이 어둑어둑해지던 사범대 정경 등 우연히, 또는 편의대로 편집된 추억의 몇 컷이 이따금 떠오른다.

 

몇년이 흐른 후 J가 소개팅을 주선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오라 했고 나는 J의 옆좌석에 앉아 약속장소로 갔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홀홀했다. J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남자는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일 뿐. 쉽게 마음을 비웠다. 곧이어 동기들의 모임이 있었고 산뜻해진 준 브라더스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반갑게 재회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유예하고픈 청춘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가치를 당연히 몰랐고 J가 소개해준 그 남자의 적극성에 기대어 서둘러 평범해지는 길을 택했다. 어울려 놀았던 준 브라더스와 E는 여전히 싱글이고 그들 중 나만이 세 살배기 딸을 둔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내게 연락할 때 항상 조심하는 기색이 있고 나는 그들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낯선 도시의 낯선 자유 속에서 우울하게 휘청거리던 나를 지지해준 소중한 벗들인데 내가 그들로부터 참 멀리도 왔다.    

 

시험장으로 남편과 영달이가 마중을 나왔고 우리를 발견한 J가 영달이를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귀엽다! 너도 빨리 장가 가서 하나 낳으라고 했더니 싱겁게 웃기만 한다. 우리의 결혼 소식에 깜짝 놀라며 꼭 잘 살아야 한다고 오빠처럼 당부하던 J는 제법 가족의 모양새를 갖춘 우리를 대견하고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몸도 퍼지고 마음도 퍼진 아줌마처럼 너스레를 떨며 헤어지는 길. 엄습하는 피로를 영달이의 체온으로 갈음하며 동기들을, 그들과의 추억을 잠깐 그리워했다. 남편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영달이는 내가 카시트를 타고 엄마를 찾으러 왔다며 으쓱해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 행복이 대체 무어냐고 자문하다가는 그런 질문 보다는 그저 삶 자체가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매콤하고 뜨끈한 컵라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마음, 같은 그리움이었는지 E가 전화를 했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기약없는 구두약속을 다짐했다.

 

오늘 이 도시에는 새벽부터 조금씩 날리기 시작한 눈발이 큼지막한 눈송이가 되어 첫눈이 왔다. 출근길, 영달이는 할머니 등에 업혀 눈송이들을 손바닥에 받으며 즐거워했다. 눈이 온다며 서로에게 전화를 하던 그때 그 시절. 첫사랑 보다는 어째 동기들이 보고싶다. 무늬만 엄마인 나는 엄마로서 모든 종류의 회동을 반납한 상태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야겠다. 미안했다고, 고마웠다고, 상투적인 회개를 한 다음 지나간 추억을 곱씹고 미래의 추억을 계획하며 옛날처럼 갈굼의 미학을 재현하고 싶다. 그리고 그날도 눈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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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1-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그날도 눈이 왔으면 좋겠다...
이 문장만으로만 따진다면 깐따삐야님은 아직 청춘이에요.
전 눈만 오면 그날 아침부터 짜증 지대로 뻗어버리니까요.

깐따삐야 2012-11-15 09:45   좋아요 0 | URL
저도 눈발이 날리면 운전석에 앉는 순간 더럭 겁부터 나는데 그래도 친구들 만날 땐 눈이 와도 좋겠어요.^^

blanca 2012-11-1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은 여유가 안 된다고 마흔 넘고 아이들이 크면 그 때는 더 잘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약했어요. 맞아요. 그 때는 왜 청춘이 눈부시다는 걸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저도 평범해지는 것을 택했네요^^

깐따삐야 2012-11-16 09:49   좋아요 0 | URL
아이들 다 키워놓고 여유롭게 모임에 나가거나 여행을 다니는 분들 보면 부러워요. 언제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까마득하기도 하구요. 이십대에는 청춘을 예찬한 글들을 보면 이해가 잘 안되었는데 지나고 나서야 절절히 느껴요.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막상 평범해지니 뭔가 아쉽고. 시시때때로 마음이 왔다 갔다 해요.^^

레와 2012-11-1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글을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내일 동기들 모임에 갈려구요..^^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왜 결혼안하냐도 한마디씩 거들겠지만, 이겨낼 수 있어요. ㅋㅋㅋㅋ 아자!

깐따삐야 2012-11-16 09:50   좋아요 0 | URL
오늘이지요?
꼭 가세요. 말은 그래도 싱글이 부러울 때도 많을 걸요. 아자!
 

 

 

개봉 당시에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감성 충만한 중3 여학생들과 이 영화를 함께 보았다.

삼사십대만 공감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과꽃 같은 여중생들과 무리지어 웃고, 울었다.

 

소리를 만드는 여자와 공간을 만드는 남자.

머물고 싶은 여자와 떠나야 하는 남자...

'잘' 사랑하는 법은 몰라도 우리 모두 '다르게' 사랑했고 그 사랑은 각자 특별했다.

 

그리고 이 시가 떠올랐다.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잿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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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1-0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꽃 같은 여중생들과 무리지어 웃고, 울었다.

깐따삐야님은 짧은 글을 써도 꽃같이 쓰네요. 이 글은 코스모스 같아요.

깐따삐야 2012-11-07 10:10   좋아요 0 | URL
그 나이 땐 얼굴에 난 여드름, 두꺼워지는 종아리를 걱정하지만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면 곱디고운 과꽃 한다발과 마주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흉흉한 세상이어도 아이들은 대부분 여리고 예쁘고 착합니다.^^

프레이야 2012-11-0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ᆢ이런 시가 있군요. 절묘하게 느낌이 전해옵니다. 저도 이 영화 울집 십대 여학생이랑 봤어요. 수지 때문에 중딩한테도 꽤 관심가는 영화ᆢ 근데 아주 재밌고 뭔가 느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보더라구요.^^

깐따삐야 2012-11-07 10:14   좋아요 0 | URL
나희덕 시인은 쉬운 언어로 독자의 가슴에 날카로운 무늬를 새겨넣곤 합니다. 훌륭한 시인이어요. 영화 속에서 배수지와 이제훈이 얼마나 예쁘던지요!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로 가장 몰입해서 보았던 멜로였어요.

Mephistopheles 2012-11-06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 안봤습니다만.. 그래도 엄태웅씨가 연기했던 직업군을 비교적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집에 며칠 못들어가고 부시시 꽤재재한 모습.)

깐따삐야 2012-11-07 10:16   좋아요 0 | URL
한가인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엄태웅은 상당히 현실적으로 수수털털했어요. 메피님도 한때 집에 잘 못 들어가고 잠 없기로 유명하셨는데. 그쵸?

blanca 2012-11-0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여중생들과 <건축학 개론>을 보셨군요. 아이들도 공감할 수 있다니 놀랍네요. 저야 그 비슷한 언저리 학번으로 완전 공감, 몰입해서 봤답니다. 저는 왜이리 이제훈에게 이입이 되던지요. 여자인데 자꾸 수지가 아닌 이제훈의 그 치기, 어리석음, 상처에 공감이 되더라고요. 너무 이른 감정들이었나봐요. 스무 살에는요.

깐따삐야 2012-11-07 10:22   좋아요 0 | URL
누군가를 좋아하고 표현할 길은 막막하고 그 막막함 속에서 혼자 설레이거나 절망하고. 그런 과정을 사춘기 아이들도 겪고 있다보니 꼭 그 시절, 그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하더라구요. 저 역시 blanca님처럼 이제훈에게 이입을 해서 봤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안쓰럽고 그리웠어요. 스물 초엽의 제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