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어느 남학생의 누나인 줄 알았다. 청순하고 수줍어 뵈는 아가씨가 교무실 문 앞에서 머뭇머뭇. 무얼 전해주려고 찾아왔나 싶어 물었더니 모친상을 당한 미술 선생님 대신 근무하게 된 미술학도였다. 너무 어려보여서 학생의 누나인 줄 알았다고 했더니 살포시 웃는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어찌어찌하여 내 옆자리로 오게 되었는데 짐도 몇 가지 없고 하얀 점퍼에 화장기 없는 맨얼굴. 문득 전공이 궁금했다. 역시 동양화란다. 어린 선생님이 있는 사흘 동안 청주에는 폭설이 내렸고 청초한 여인과 순백의 날씨는 아주 잘 어울렸다.

 

근무일이 오늘까지인 것도 모르고 옆자리의 또다른 미술 선생님이 웬일로 점심을 나가서 먹자고 하길래 이 폭설을 헤치고 무슨 김치찌개냐고 쌍지팡이 짚고 나섰는데 어쨌든 오동통한 두부와 쫄깃한 돼지고기가 씹히는 김치찌개는 무한정 맛있었고 아름다운 여인과 눈 속에서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걷는 기분도 썩 괜찮았다. 보송보송 털이 달린 구두도 요정의 신발 같고 어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 보이는 것이 아,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나, 싶었더랬다. 안나는 어찌하여 키티가 사랑하는 브론스키를! 마침 책을 읽고 있던 참이라 안나를 이해하기 싫었다. 어리고 고운 여인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그저 모든 것을 양보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므로.

 

스마트폰으로 작품을 보여주는데 한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정교한 판화 같고 어떤 그림은 추상적인 그래픽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한없이 응시하고 싶을만큼 깊고 은은했다. 가까운 백화점에 걸리기도 했다니 조만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선생님의 이름 석자를 꼭 새겼다. 이제 조금 말문이 트여 사적인 얘기도 오고가고 하는데 종례를 마치고 와보니 몇 개 되지도 않는 짐을 반짝 들고 작별인사를 한다. 선생님 같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했을 때 연락처라도 받아둘걸. 마치 대시할 타이밍을 놓친 뻘쭘한 상대처럼 부랴부랴 배웅을 해서 보내고 나니 어쩐지 좀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간식으로 사들고 온 과자도 하나도 못 먹고 갔네.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과 열망의 투영이라 할지라도 눈과 함께 왔다가 눈과 함께 사라진 어린 여인의 잔향이 생각보다 얼얼하다. 꼭 지금의 나와 같은 눈빛과 마음으로 어린 날의 나를 바라보던 어른들의 시선도 떠오른다. 예쁜 여인을 보면서 영달이의 앞날도 상상해 본다. 저처럼 조신하게, 야무지게, 단아하게... 물론 영달이는 나의 욕심이나 허영과는 무관하게 저의 잠재력대로 자라날 테지만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 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참 설렌다. 모처럼 예쁜 여인을 보니 예쁜 생각을 하게 되고 예쁜 상상을 불러 오고. 아! 정말 순백의 미스 도. 기분 좋은 사흘이었다. 앞날을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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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2-0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쯤에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아부 한 마디..

"미인은 미인을 알아보는 법이라더군요." 오호호호호호!

깐따삐야 2012-12-10 11:35   좋아요 0 | URL
뭐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