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회사에 들어와서 근무한 지도 어언 6년. 문득 과거를 더듬어 생각해보니 그동안 옷자락을 스치듯 잠시라도 인연을 맺고 지나간 직원들까지 합하면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숱한 직원들 중에서 소수인 여직원들 수만 해도 꽤 되고,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어린 동생들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나름의 철칙이 하나 있는데, 별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소수인 여직원들끼리만은 서로 싸우거나 헐뜯지 말고 가능한 한 서로 도울 수 있는 건 도우며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었다. 한때 같이 일하는 여직원들의 수가 꽤 될 때는 모두 도시락을 싸와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온갖 주제를 도마위에 올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소리로 웃어가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땐 그 재미가 정말 기막혔더랬다. 점심시간이 유일한 낙이 될만큼. 그때 분위기가 얼마나 단란하고 흥겨웠던지, 그 당시 남자직원들은 문을 빼꼼히 열고 '맛있어요?', '그렇게 재밌어요?', '웃음소리가 밖에서도 다 들리더라'고 하면서 부러워할 정도였다. 다른 회사에선 남자직원들과 워낙 잘 지내다보니 여직원들의 견제의 대상이 되어 여직원들과 친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한 동생은 독특한 매력과 초미니스커트를 과감하게 입어주는 톡톡튀는 패션감각, 곱상한 외모와 걸맞지 않는 걸죽한 입담으로, 정리해고로 떠나기 전까지 우리와 정말로 즐겁게 잘 지냈었다. 

난 내가 나이가 많고 입사선배라고 해서 차심부름을 시킨다거나 내가 막내였을 때 싫었던 일들, 내가 해야할 일을 그들에게 떠 넘기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그들의 일을 덜어주고 편하게 해주려고 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겪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때론 윗사람 눈치 보고 때론 아랫사람을 토닥거리기도 해야 하는 그런 중간자적 입장이 쉽지만은 않다.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서로 마음 상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어서 내딴엔 정말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회사를 떠나려고 마음을 먹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그런 내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다. 아마 예전보다 내가 짜증이 많이 늘긴 했을 거다. 알게 모르게 일에 쪼들리면서 받는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을 거고, 어쩌면 한달에 한번 있는 그날 전 증후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대체 왜 K, 그녀에게만은 다르게 대하고 그렇게 못 잡아 먹어 안달난 사람처럼 화를 내는 걸까.

나의 소심한 마음에 그녀가 안드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1. 그녀는 나보다도 남자직원들과 더 친하다. - 남자들만 있는 부서의 특성상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2. 처음인 일에 보다 빠르게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비록 좀 잘못해서 깨지더라도 자기 할일을 자신이 직접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어느새 보면 그녀 자리엔 다른 남자직원들이 앉아서 그 일을 대신하고 있다. - 수단좋은 것도 능력이긴 하다.

3. 자기 주장이 강하다 - 그동안 내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모르는 게 있으면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모른다고 몇번이고 묻는 것이 그냥 넘어가는 것보다 낫고, 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하라고 하면 한번쯤 생각해볼 만도 한데, 그녀는 일단 부정적이고 고집스런 자세를 취한다.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럴 땐 참 답답해진다. (나도 예전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피본 것도 많다. ㅋㅋ)

3. 어디를 가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절대로 미리 귀뜸하는 법이 없다. - 미리 귀뜸이라도 해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알아서 일을 처리하거나 최소한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할 게 아닌가.

그러다가 문득 결정적인 이유를 하나 깨달았다. 그동안 그녀와 나는 서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단 사실을. 전에 같이 일하던 동생은 나랑은 숨기는 것 없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했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음을. 그리하여 내가 커버해줄 수 있는 부분도 본의아니게 거부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을.

가끔 그녀에게서 예전 나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어쩌면 그래서 난 이렇게 답답함을 느끼고 그런 그녀를 받아들이는 게 더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해서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님을 그녀가 알아주면 좋겠다. 힘들 땐 힘들다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자신 힘 닿는 한도내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게 자신에게도 더 좋은 일이 될 수 있음을 언젠가는 그녀도 알게 될지 모르겠다....

아...그리고 반성한다. 내가 생각해도 가끔 '이렇게 하라', 내가 너보다 경험이 좀 많으니 이럴 땐 이렇게 내 말을 들어라,라는 식의 태도를 취할 때가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찬물을 맞은 듯한 기분이 된다. 그럴 땐 가능하면 목소리톤과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그런 일이 잦아지는 경향을 보이니 그게 문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독 그녀에게만은 이상하게도 좀더 자주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녀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나이 먹어도 곱게 늙어야 하는데 어찌된 게 심술통만 느는 내게 문제가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이런 무책임한...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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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일랜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년 전부터였을 게다. 네이버에서 아일랜드라고 치면 제일 먼저 혹은 제일 눈에 띄는 사이트가 에린(우리이름:허신영)의 사이트였다. 처음엔 아일랜드에 대한 정보나 좀 얻을까 싶어 들어갔는데, 에린의 칼럼이나 아이들 이야기, 아일랜드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유학 혹은 어학연수 들어간 학생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서 금새 그녀에게 호감이 갔고 좋아하게 되었다. 1년 남짓한 시간동안 간간이 그녀의 사이트에 들어가 이런저런 글들을 읽으면서 에린에 대한 믿음과 호감은 점점 더 커져서, 아일랜드에 갈 일이 생기면 그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에린이 아일랜드의 옛이름이란 사실도 그녀를 통해서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생 Y가 영문이름을 고민할 때 에린이란 이름을 권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제 친한 동생 L로부터 정말 믿기지 않는 슬픈 소식을 전해들었다. 처음에 L이 그녀 이야기-우리나라 사람으로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한-를 꺼냈을 때 불현듯 내 뇌리를 스치는 단 한 사람, 에린이었고 나의 불길한 예감은 어이없이 들어맞아버렸다.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아일랜드로 귀국한 다음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만...  믿을 수 없었다. 설마, 그럴리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가수 김현우처럼 만우절 거짓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 동생에게 몇번을 물었다.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녀가 죽었다고.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 주말내내 울었다고. 정말 거짓말 같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L이 그녀를 알았다는 사실도, 에린의 죽음을 L을 통해서 듣게 될 줄도 정말 몰랐다.

오늘 아침 출근하자마자 에린의 사이트에 접속을 시도했다. 그녀의 죽음을 전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처럼 하얀 백짓장같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이지만, 오직 온라인상에서만 알게된 그녀이지만, 허망해서, 너무도 허망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머리 끝까지 슬픔이 차오르는 것 같다.

삼가 그녀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이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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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5-04-1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나.... 전 이름도 못 들어본 분이지만, 좋은 곳으로 가시길 빕니다.

무탄트 2005-04-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고맙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요. 저도 그분이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라이카님도 건강하세요. ^^
 

드디어 출국일이 잡혔다고 했더니, 친구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매섭다.

동생L : (말이 별로 없다) 부러워요. (그러면서도 왠지 시무룩한 것 같다)

친구B : 진짜로 가니? 난 니가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어. (약간 비꼬는 듯하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너희 어머님이 아시면 좋아하시겠다(난리치시겠다의 반어법). 정말 동생 혼자 두고 갈거냐. 도둑놈은 어쩌고(이때 도둑놈은 진짜 도둑놈이 아니라 내 동생의 남친을 뜻한단다) 가서 청첩장이나 보내라. 우리도 곗돈 깨서 외국 구경 좀 하게.

친구 C : 뭐? 어디 간다고? 필리핀? (필리핀은 무슨... ㅡㅡ;;) 언제 올건대? (6개월 후에) 가시나. 팔공산에서 한참 기분내고 있었는데 니땜에 기분 다 잡쳤다. 두번이나 배신을 당하다니(첫번째 배신은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이 미국어학연수 갔다가 두달만에 결혼하고 눌러앉은 사건을 말한다) 몰라. 나 삐졌다. 이제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 지금 니 전화 받을 기분 아니다. (뚝)

웅... 뭐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더 강경한 반응에 우울해진다. 아마도 부모님 반응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게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간다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만도 하다. 나도 내가 지금 미친 짓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해질 정도니까. 갔다와서의 일을 생각한다면 내가 무슨 바보같은 짓을 저지른 건가 싶다. 하지만, 몇 번을 내 마음 속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다. 지금 이대로 살겠냐고 묻는다면 아니,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몇일을 살다 죽더라도, 비록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라도, 지금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 그 열망만이 날 가득채우고 있으므로. 지금 이대로 살아간다면 나태의 독이 언제 나를 집어 삼킬지 모른다. 죽음보다 더 고약한 무기력이 날 제물삼을지 모른다.

자네는 바보야. 이 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새로운 모험에 한번도 도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라고 했던가. 남들이 보기엔 정말 미친 짓같고 바보같은 짓이라도, 지금 이순간 내게 그 일은 더없이 소중한 산소와도 같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내 친구들도 이해해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동안 난 그 어떤 것도 결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만큼의 절박함과 또 그만큼 매여있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길을 떠날 것이다. 친구의 말대로 모든 것은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둘 것이다. 그리고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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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탄트 2005-04-15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 친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어 날 놀라게 했다. '곗돈은 다 내고 가는 거냐?' 아, 꼼꼼하기 그지없는 우리 계주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을 거다. 뭐, 떼먹을 의도나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에라, 여행경비에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괘씸하니 네가 내 것까지 다 내라. 여행가서 돈 떨어지면 네게 좀 부탁하려고 했더니만(말만 그럴 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에 대비한 포석일 뿐이다)'이라고 했더니 그땐 또 말을 하라나. 공은 공, 사는 사란다. ㅋㅋㅋ

Laika 2005-04-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한 (?) 계주이시네요...ㅎㅎ
 

얼마 전에 내 지인들에게 말했다.

여행 가서 두고두고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는 책을 한 권씩 권해달라고. 채택되는 사람에게 원하는 책 한 권을 선사하겠다고.

그때 에린이 그랬던가. 굳이 우리 사람이 쓴 책일 필요는 없지 않아요? 번역본도 괜찮을텐데...

그렇다. 우리 나라 사람이 쓴 책이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번역본 중에서 작가와 번역가의 탁월함에 의해 빛나는 책이면 족하리라.

츠바이크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책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가지고 갈까 생각도 했었다. 가능하면 가볍게 떠나고 싶어서 오직 딱 두권의 책만 가지고 가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집어들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겠다. 그의 책을 읽을 엄두도 차마 못 내면서...  (아직 다 읽진 못했지만, 츠바이크의 <천재와 광기>를 읽으면서 니체를, 괴테를, 발자크를, 톨스토이를 만나고 싶어질 것 같다.)

그리하여 지금 든 생각은... 그 모든 책들을 몽땅 짊어지고 가서 한 나라마다 하나씩 흘려놓고 오리라...

그 책들이 누군가의 손을 통해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그들의 삶에 잠시라도 빛이 되고 한참을 돌아 내게로 돌아오는 꿈. 아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누군가 그 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손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음... 나라별로 대표적인 작가의 책을 한권씩 가지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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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보니 연이어 츠바이크의 책을 붙잡게 되었다. 사실은 아직 마리 앙투와네트를 끝내지 못했다. 그동안 노느라 바빴던 내 게으름의 소치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넘을 만큼 마음을 강하게 다잡지 못한 탓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천재와 광기>의 도스토예프스키편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나의 나약함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인정한다. 난 지금까지 도저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을 엄두를 못 냈었다. 그의 어둡고 위대한 영혼을 일면할 만큼 내 영혼이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그를 이야기하는, 차라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듯한 츠바이크의 외침, 그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으면서, 나는 어떤 예감에 떨고 있다. 다가올 여행기간 동안 그가, 도스토프예스키가 내 인생의 폭풍처럼 휘몰아쳐 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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