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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ㅣ 창비시선 414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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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시영의 시를 읽는다. 1949년 구례 출신. 60년대말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신인공모에 시가 당선하여 등단한 시인인데 그딴 거 알 거 없고, 훗날 자유실천문인협회와 협회의 후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 단체들의 후신인 한국작가회의의 이사장을 역임한 진보진영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간 이시영의 시를 솔찮게 읽은 거 같은데 정작 생각나는 시는 없다. 열일곱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시선집, 그리고 잡글들, 이른바 산문집 또는 에세이집이라 부르는 책 몇 권을 상재했다. 일찍이 “리얼리즘 시의 대표선수”라는 칭호를 받은 바 있는 이시영은 그러나 이쪽 편과 정 반대쪽에 선 서정춘, 김종삼, 천상병 등을 “시업에 비해 의외의 소외를 받는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평하는 비교적 균형 잡힌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반면에 최영미의 괴물 논란 이전에 명색이 문인이라면 감히 이이 앞에서 크게 숨도 쉬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만년 노벨문학상 후보자 고은에 대하여, 놀라운 생산량에 비하여 시적 성취/발전은 주목할 만하지 못하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이다. 고은의 막강한 문학권력 앞에서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다는 거 하나만 갖고도 이시영의 배포는 알아주어야 했다. 문학판도 그렇다. 아니, 그랬다. 그렇게 개판이었다.
자유실천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거쳐 한국작가회의의 이사장까지 역임했으니 이이와 En 또는 괴물이라는 닉네임이 얻어 걸린 고은과 친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이시영이 촌스럽게 20세기 말에 호를 하나 가지고 있었으니 ‘산 이야기’ 산화山話라, 이 호를 지어준 이가 바로 고은이었다. 고은도 자신의 시를 비판한 까마득한 후배 이시영에게 호를 하사함으로써 자신의 아량을 뽐낼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꺼웠을꼬? 시집에서도 고은과의 하루를 기억하는 시가 들어 있다.
아욱죽
1970년대 내내 화곡동 고은 선생 댁 마루에서 골목을 감시하던 고 형사도 때론 섞여서 두레상 펼쳐놓고 먹던 아욱죽이 그립다. “숙자씨, 여기 한그릇 더요!” 외치면 저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 끄떡이며 은밀히 귀 기울여오던 마당귀의 미끈한 아욱대를! (전문. p.32)
이시영도 당연히 몰랐겠지. 이 시집 《하동》을 출간하고 며칠이 되지 않아 고은의 까마득한 후배 이시영의 새까만 후배 최영미가 <괴물>이란 시를 발표해서 고은, En을 시대의 저편으로 보내버릴 걸. 그런데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참여시, 운동시라고 했던 리얼리즘 계열의 시를 쓰면서 고은과 얼굴을 트고 지내지 않기도 쉽지 않았을 터이라. 딱하게 됐다. 고은이 내린 호 산화山話를 세상에 알릴 수도 없고 쓰기도 남사스러운 날이 올 줄 몰랐겠지. 시집의 초판이 2017년 9월. 이시영 68세였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남산 입구의 혼례식장에서 내려오던 길에 우리 만났지. “왜 시 안 써?”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그 가느다란 실눈을 뜨고 말보로를 한가치 꺼내 물더만, “성님, 시는 이십대에나 쓰는 거 아니요?” 그러곤 무슨 예감처럼 신호가 깜박이는 충무로를 건너 은빛 바이크들이 몰려 있는 상가 쪽으로 소파 같은 몸을 밀며 지나가더군. 맹인처럼 따각따각 지팡이를 두드리진 않았지만 사바세계의 구석구석을 걸어온 선지자처럼.” (<지우에게> 부분. p.92)
황지우는 이성복, 최승자와 함께 우리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52년생 트리오 가운데 한 명이다. 아, 이건 전적으로 무지막지한 아마추어 독자인 내 생각이니 이 명단에 끼지 못한 다른 52년생 시인이 있어도 넓디 넓은 양해 바란다. 어쨌든 이시영은 이 시에서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의 쪽글을 인용하면서 평소에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자주 얼굴을 스치기는 했어도 ‘정식으로’ 만난 적 없는 황지우와의 촌편을 시 한 수로 썼다. 아마 서로 추구하는 시 세계가 판이하고, 시를 쓰는 스타일도 거의 완벽하게 반대편에 자리하기 때문에 평소 가까이할 수 없었으리라. 황지우가 52년생이니 시인과 겨우 세 살 차이. 그럼에도 그의 말을 인용한 시를 썼으면 황지우의 말대로 시를 좀 줄이든지. 이 시집 《하동》에는 한 줄 또는 두 줄로 그저 생각나는 파편을 글로 써서, 이게 시다, 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시가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짧은 시 가운데 맨 앞에 놓여 있어서 하나 소개한다.
오리알 두개
갈숲이 자라는 곳에 오리알 두개
오리는 어디갔나
갈숲이 대신 품어주는 곳에 따스한 오리알 두개 (전문. p.12)
시인이 갈대 숲을 지나다가 땅에 놓인 오리알을 보고 쓴 시다. 시라고 주장한다. 시인의 시선이 땅에 놓인 어쩌면 얼룩덜룩했을 오리알을 그대로 원고지, 아니지, 랩탑 화면 위에 문자로 써 놓고 시라고 주장하는 걸, 독자는 읽고 있다. 심지어 일행시도 있다.
산길
밤새워 고라니가 파놓은 흙 위에 흰 눈이 소복이 싸이셨다 (전문. p.21)
아마도 시 가운데 제일 쓰기 힘든 시가 일행시 아닐까 싶은데 이것 역시 헛심만 쓴 거 같아 안타깝다. 시집은 당연하게도 이렇게 짧은 시들로만 짜여있지 않다. 주로 시인이 65년 이상 살면서 겪은 옛 시간들의 기억과 만남을 마치 수필처럼 쓰고 있다. 왜 그런 것들을 시로 썼을까? 산문집이라는 형식으로 내면 안 될까?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무수한 만남과 이별 가운데 이런 이별도 시로 썼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생각함
임종이 임박했다는 새벽 전화를 받고 고려병원에 달려갔을 때의 일이다. 황달이 퍼져 샛노란 눈빛의 김남주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개 같은 세상에 태어나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 부탁한다. 남은 너희들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 마라!” 그의 숨이 끊어지고 난 뒤 병실 복도에 나와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빗방울 하나에도 절대 살해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전문. p.14)
* 김남주가 옮긴 브레히트의 시 <아침저녁으로 일기 위하여>의 마지막 행을 차용함
김남주. 불행한 우리나라 현대사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데 죽음의 침상에서 마지막으로 저렇게 일갈하고 죽었다고? 아오, 실망이네. 나는 김남주처럼 살지도 못했지만 김남주처럼 죽기는 싫다. 좋건 싫건 살다가 갔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꼭 저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것도 마지막 남기는 말로. 이 시집을 냈을 때 이시영의 나이가 나보다 위였을 텐데, 그 나이를 먹었으면서 이시영은 김남주의 마지막 말을 꼭 문자로, 활자로, 시 한 편으로 남기고 싶었을까? 세상이 개 같았을 지 모르지만, 정말로 개 같았지만,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미움이야말로 정말로 개 같은 것이란 걸 알았을 텐데. 김남주에 대해 억하심정이라도 있었나?
물론 시들이 다 이런 건 아니다. 제일 앞에 소개한 시의 제목이 <귀래사를 그리며>. 귀래사? 도연명이 쓴 <歸去來辭>? 아니, 그거 말고 그냥 절 이름이 “귀래사”다. 귀례歸來. 돌아옴. 전문을 옮긴다.
귀래사라는 절이 어디 있더라? 하여간 이 지상 어딘가에 있긴 있겠지. 이제 그만 그곳에 닿고 싶다. 가서 나무를 해도 좋겠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고 싸리비로 절 마당이나 쓸라고 하면 그 또한 좋겠지. 늙으신 보살이 차려준 공양을 정성껏 비운 뒤 뒷산 남새밭에 가서 하루 종일 잡풀들과 일하리라. 가끔 일어서서 허리를 곧추세워 독수리눈으로 하늘을 보리라. 청청히 텅 빈 하늘, 그리고 목화 송이처럼 흐르는 구름들. 저녁을 마치면 골방에 틀어박혀 잡서를 읽으리라. 그리고 세상과 등을 지고 나와 대면하리라.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그 또한 잠깐의 인연. 훨훨 털고 텅 빈 벽에 바짝 붙어 단잠을 자다 소변을 눈 뒤 절 뒤꼍 해우소 근처에서 오래 서성이리라. 텅 텅 울리는 새벽 종소리가 아픈 무릎에 스밀 때까지 (전문. p.10)
왕년의 참여시, 운동시를 쓴 시인. 1970~80년대 리얼리즘 진영의 대표주자이며 소위 이야기시를 반대하여 마치 하이쿠 같은 한줄, 두줄 시를 생산한 시인의 이야기시. 이런 하드웨어적 접근이 아니라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시집을 관통하는 구례지역의 현대사, 여순사건과 파르티잔, 민주화 운동 당시의 과거 동지들과의 후일담과 어울리지 않는 시라는 점. 말이 “귀래”일 뿐, 귀래, 시를 읽으며 돌아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면서, 아오, 이게 왕년에 내가 알던 이시영이라는 말이지? 여전히 좌파 진보진영의 일원이라는 말을 하고, 듣고 싶지만 사는 건 부르주아로 살고 싶은 소위 강남좌파 아녀?
나이 들어 작으나마 절에나 들어가 마당 쓸고, 풀 뽑으며, 날 새면 아주머니가 해주는 밥이나 먹고 책도 좀 읽고 하는 일상을 살겠다고? 음하하하…. 좋겠다. 그렇게 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 나이 들어 이 빠지고 무릎 쑤시고, 삭신이 결딴나도 최저임금 받으며 아파트 경비라도 서야 하는 노년이 아닌 것을 축하해야 할 밖에. 이시영씨, 그런 노인들한테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네요.
가끔 허리를 곧추세우고 독수리눈으로 하늘을 보겠다? 대놓고 이야기해서 세상을 향해 기회가 있으면 “마지막 봉사”라는 핑계로 세상일에 참견을 하겠다는 말 아냐? 독수리의 눈? 우습다. 한 번 귀래, 돌아왔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무슨 미련이 있어서 세상을 독수리의 눈으로 또다시 바라봐야 직성이 풀리실까? 제발 그러지 마시라. 그 눈깔 확 뽑아버리고 사시라. 세상은 젊은이들한테 맡겨 놓고 그냥 하동 근처에 나지막한 집 한 채 짓고, 아니면 있는 집 리노베이션 해서 잘 자시고 잘 살다가 곱게 세상 뜨면 될 일이다. 일 하지 않고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것에 고마워하면서 말이지.
내가 뭐 잘난 거 있다고, 이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한때 좌파면 좌파답게, 왕년에 진보였고 지금도 진보라 주장하고 싶으면, 적어도 이렇게 살겠다고 세상에 내놓고 떠들지만 말라는 거다. 그렇게 못 사는 노년이 노년인구의 9할이 넘는 세상인데.
역시 황지우가 갑이다. 시는 이십대에나 쓰는 거라는 진리를 이미 체득한 현명한 시인 말이지.
쓰다 보니 함부로, 그리고 험하게 말을 쏟기도 했다. 시인과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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