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60년에 오키나와 나키진에서 태어난 소설가, 단편 작가, 수필가, 활동가. 활동가? 오키나와는 그냥 우리가 일본의 영토라고 알고 있는 섬이지만, 원래는 ‘류큐국’이란 이름의 독립국이었는데 1879년에 메이지 정부가 강제로 오키나와 현에 편입시켜버린 지역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섬 사람들은 자기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을 징병해 전쟁에 투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도민들도 대거 제국군으로 징발해 13세에서 15세까지 여학생들은 ‘히메유리 간호병’으로 남학생들은 ‘철혈근황대원’이라 하고, 유일하게 세계대전 중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연합군 상륙전쟁에 투입했다. 군부는 간호병에게, 만일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다면 너희들은 미국 병사들에게 집단으로 능욕을 당한 후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니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을 하는 편이 오히려 편하게 죽는 방법이라 가르쳤다. 정말로 히메유리 간호병들이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히스테리에 빠져 한 자리에서 수십명씩 자살을 감행해 죽어가기도 했다. 철혈황근대원으로 징집된 소년병들은 정규 전투병력이 아닌 자폭소년단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작품 속에 묘사되었다. 아마 군수품 운반이나 식량 확보, 식수 보급 등 주로 전투외 작업에 투입하지 않았나 싶다. 이외에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근대사, 현대사를 거치면서 일본 본토인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계급으로 인식 받았으며 주로 하층민이 하는 일에 종사하는 등 불만이 깊다. 패전 후에는 오키나와 섬에 대규모 미군 기지가 설치되어 갈등이 더욱 깊어졌는데, 마지막 작품 <오키나와 북 리뷰>에도 나오듯이 류큐국의 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치를 주장하는 그룹과, 픽션인지 팩션인지 헛갈리기는 한데 ‘황태자를 오키나와의 사위로’ 만들자는 구호를 통해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그룹으로 의견이 갈렸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 이 정도만 미리 알고 시작하면 읽기가 훨씬 편할 듯하다.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뒤편에 실은 “부록”을 먼저 읽으면 더욱 좋겠다.


  단편 세 편이 실린 소설집. 차례로 <물방울>, <바람 소리> 그리고 <오키나와 북 리뷰>. 세 편 전부 색다른 플롯으로 썼다. 내가 읽기로는 표제작인 <물방울>이 단연 좋았다.

  주인공 도쿠쇼는 오키나와의 나와 지역 시골에서 출신의 청소년으로 2차 세계대전 시기를 통과했고, 미군이 오키나와를 침공할 당시에는 벌써 철혈황근대원으로 징집되어 전투원이 아니라 전령병 임무를 맡았다. 하긴 전령병이라고 해도 명령과 상황보고를 위해 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지역에 오키나와 사람으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막강한 화력의 미군 함포사격이 펑펑 터지는 골짜기를 뛰어다녀야 했으니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건 아니었다. 철혈황근대. 말이 좋다. 황제의 용맹한 근위대라는 뜻. 그럼 천황은 무슨 천황. 일본 왕이 당시 근위대를 옆에 두고 오키나와 전투를 진두지휘라도 했나? 카미카제처럼 그냥 이름만 멋있게 지어주고 폭탄 하나 들고 가서 적군과 함께 폭사하라는 뜻이다.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왕? 그저 얼굴마담으로만 있었다. 실제 모든 전쟁은 왕이 아니라 군부 엘리트의 오판으로 진행해서 무참하게 깨져버린 희대의 코미디로 끝났다.

  하여간 도쿠쇼의 부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사보다 이미 죽은 병사가 월등하게 많아졌고, 생존자 가운데서도 이젠 부상자가 혼자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더 많아졌다. 이 가운데 내지 즉 본토에서 온 마흔 정도 되는 노병도 있었으며, 비슷한 나이의 섬 아저씨도 있었고, 젊디젊은 도쿠쇼 또래의 동네 친구 이시미네도 있었다. 미군은 섬에 상륙하기 전에 진지를 만들고자 하는 곳과 부근의 적군을 싹쓸이하기 위하여 당연히 완벽한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 함포사격의 범위는 점점 넓어져, 일본군이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채 숨어 있는 골짜기까지 아예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상을 당해 심한 갈증으로 물을 달라는 병사들을 위하여 물을 가지러 냇가로 간 도쿠쇼와 이시미네 한테도 폭탄에 눈이 달린 게 아니어서 큼직한 폭탄이 떨어져, 도쿠쇼는 괜찮았는데 이시미네의 배에서는 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면 튀어나오던 것과 비슷한 뭉글뭉글한 느낌의 무엇이 쏟아졌다. 도큐쇼는 급하게 자기 각반을 벗어 임시로 이시미네의 배에 둘러주고 그를 데리고 피신처로 돌아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더욱 깊은 골짜기의 굴로 피신하라는 명령뿐.

  짧게 하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도쿠쇼는 이시미네를 지금 있는 동굴에 두고 자기만 다음 집결지로 향해야 했다. 근데 이게 나머지 평생의 큰 짐이 될 줄 그때는 몰랐지. 이때 자기한테 다음 피난지를 알려준 히메유리 여성 간호병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에 집단 자살에 동참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 소설하고 비슷하다. 도쿠쇼는 이후 술이 늘어갔고, 삼선이라는 오키나와 전통 악기를 사 만날 음주가무에 날 새는 줄 모르는 파락호 생활을 하다가 세 살 많은 우시라는 왈가닥 살림꾼을 만나 결혼하고, 하늘이 도왔는지 무자식 상팔자의 행운을 누리며 늙어왔다.

  그런데, 작품을 시작하자마자 이게 문제였다. 이제 시작이냐고? 그럼 여태까지는 뭐냐고? 에라, 그냥 간다. 작품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도쿠쇼의 다리가 탱탱 붓는다. 동과처럼 부었다고 하는데, 동과, 박 종류. 그냥 길게 둥그런 큰 박을 생각하시면 된다. 동과처럼 크고 탱탱하게 부은 다리는 색깔까지 동과처럼 초록 비슷하게 변하고, 엄지발가락 끝에서는 물이 똑, 똑 떨어지기 시작한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점점 악화되어 이젠 움직일 수도 없다. 의사들도 원인을 모른다. 발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채취해 가져가 조사를 해봤더니 그냥 물이란다.

  며칠 후, 자정이 되면, 새벽 다섯 시, 해가 뜨는 시간까지, 놀랍게도 수십년 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이 험한 모습을 한 채 방에 들어와 도쿠쇼의 발가락을 쪽쪽 빨아먹는다. 발가락을 먹는 게 아니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마시고 있는 것. 알고 보니 그게 치유의 액체였던 모양이다. 사촌동생이자 천하의 파락호인 세이유라고 있었는데, 이이가 우연히 발가락 물을 찍어 먹었다. 그랬더니 몸이 좋아지고 십여년 간 내내 6시 반을 유지하던 그것도 불쑥 11시 5분 정도는 되는 거다. 머리에 발라보니 5분도 되지 않아 솜털이 진한 흑발로 변한다. 이 정도면 왜 이미 깊은 상처를 입어 죽은 병사들이 밤마다 몰려드는 지 아시겠지? 세이유는 물을 모아 비싼 값에 팔아 수백만 엔을 모으고, 병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도쿠쇼의 방에 몰려와 인당 2분 정도 도쿠쇼의 발가락과 발바닥을 물고 빤다.

  이 과정에서 병상의 도쿠쇼는 앞에서 설명한 전투 장면을 연상하고, 그때 동굴에 두고 혼자 죽게 했던 이시메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할 기회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 그럼 어떻게 됐을까? 이제 병사들도 거의 정상적으로 치유된 모습으로 변했고, 드디어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날로 도쿠쇼 역시 벌떡 일어나 “차카게 살자!”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날마다 술타령과 음주가무에 전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고, 신비의 물을 사 마시고 젊음을 되찾았던 사람들은 한 순간에 원 위치, 떼로 몰려가 파락호 세이유를 두드려 패버린다.


  내가 옮기기를 번잡하게 옮겨서 그렇지, 단편일지라도 이렇게 우화적인 플롯으로 쓴 작품은 실로 오랜만에 읽는다. 심지어 마지막에 실은 <오키나와 북 리뷰>는 독자의 서평을 싣는 잡지의 리뷰를 선별해 옮긴 플롯인데, 진짜 책을 읽은 서평이 아니라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이다. 어디서 본 거 같지? 스타니스와프 렘의 《절대진공 & 상상된 위대함》에서 벌써 경험해본 플롯이다. 그러나 메도루마의 가상 서평은 오키나와의 극단적 두 주장의 충돌과 진행을 묘사하기 위하여 각 분량이 짧아서 더욱 쉽게 읽힌다. 뭐 그렇다고 큰 재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고. 오히려 두번째로 실린 <바람소리>가 더 내 취향이었다.

  굳이 시간을 내 읽어보실 만하다. 직접 돈 주고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라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5-11-24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게 엄마가 사둔게 있네요!!!!!!

Falstaff 2025-11-24 15:37   좋아요 1 | URL
이크, 그러면 얼른 읽어보셔요. 열반 쌛도 나쁘지 않게 읽으실 듯.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5-11-24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엄마가 이번에 지와 사랑을 다시 좋게 읽으셨다고 해서 제가 골드문트란 고전 뽀개기 전문가 할아버지가 계신데요 하고 소개해드렸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