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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기도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5
샬럿 우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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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 뉴사우스웨일주 쿠마에서 출생한 1965년생 작가. 호주 소재 대학에서 박사까지 공부했고 작년까지 위키피디아 노출 기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여기저기에서 숱하게 상을 받거나 최종후보까지 올랐는데 지금 독후감을 쓰는 <상실의 기도 Stone Yard Devotion>도 2024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가 그냥 내려왔다. 부커상이 떠그르르한 건 맞는 모양이다. 최종심에만 올라도 전세계적으로 번역 출판하는 걸 보니.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23번에 빛나는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도 2015년 최종심에 올랐다가 벌컥벌컥 미역국을 먹은 작품이었으니. 하여튼 작가 샬럿 우드는 지금 시드니에 살고 있고 호주예술위원회에서 문학분과 의장을 역임하는 등 호주 문학예술계에서는 실세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은 <상실의 기도> 한 권 밖에 없지만서도.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상실의 기도>는 일인칭 소설. 책을 덮을 때까지 화자 ‘나’의 이름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참 독하다. 한 번 정도는 나와도 좋을 거 같은데 말이지.
‘나’의 최근 직장은 멸종위기종 센터. ‘나’는 결국 법적으로 갈라서기로 확정한 전남편 알렉스와 무자식이 상팔자인 결혼생활을 누렸는지, 아이가 있긴 했는데 이미 다 커서 더 이상 아이들이 ‘나’의 인생 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이유가 없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수십년 동안 살다가 헤어졌다. 헤어진 김에 알렉스는 영국 런던으로 떠나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 그나마 원수처럼 헤어지지 않은 모양이라 히스로 국제공항에 내려서 ‘나’한테 잘 도착했으며 새 동료들이 마중 나왔다고 문자로 보낼 정도의, 사랑을 친분 또는 가까운 우정으로 대신해 이어가고 있다. ‘나’도 떠났다. 호주의 평원으로.
호주의 평원. 탁 떠오르는 에세 시리즈의 작품이 있다. 에세 시리즈 최초의 남성작가 작품, 제럴드 머네인이 쓴 <평원>. 민음사에서 낸 머네인의 소설집 《소중한 저주》와 피터 케리의 <집으로부터 멀리>. ‘나’가 그동안 잊었던 호주, 자기가 태를 묻은 고향 인근의 지명들. 차콜라, 오리알라, 브레드보, 번얀, 제랭글, 보번다라 그리고 캘턴 평원, 로키 평원, 드라이 평원. 끝도 없는 황량한 벌판과 띄엄띄엄 흩어진 목초지와 소, 양, 말, 그리고 가축에서 야생화한 생명체들. 예컨대 들개, 들고양이 등등. ‘나’는 이 지명들 속의 한 군데로 보이는 장소에 외따로 떨어진 수도원에 들어간다. 닷새 일정으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이미 신앙을 버렸음에도.
영국 이민 2세인 ‘나’가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지역의 외곽. 이곳을 떠나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겨울날 오후 세시에, 도착했다. 열 시간이 넘게 운전해 피곤하고 온몸이 쑤신다. 그때는 안 그랬던 것 같았지만 지금 보니 1970년대 요양지나 친환경공동체 같은 느낌이 든다. 35년만에 처음으로 부모 묘지를 찾는 ‘나’. 좋은 기억만 남기고 먼저 세상을 뜬 부모의 무덤가에는 어느 자선단체가 꽂아둔 플라스틱 조화가 이제 낡아 초라하게 보인다.
북어포와 청주를 올려놓고 재배한 다음 새삼스레 ‘나’를 둘러싼 공간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진 장례식장 장면을 잠시 떠올리다 애초의 목적지인 수도원으로 향한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세금 없이 신자들의 헌금을 수금해 호사를 누리는 바티칸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해 늘 허덕이는 호주 벌판의 가난한 비구니들의 수도원. 아참, 수녀를 비구니와 함부로 섞어 썼다가 가톨릭 환자들 눈에 띄면 두드려 맞아 돌아가실 수도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바꾸고 싶지는 않고. 하여간 어떤 수도원인지 짐작이 가시리라. 이제 돈이 들어올 곳이 없어서 옛 수도원 시절에 다른 용도로 쓰던 작은 나무 오두막들을 게스트하우스 비슷하게 개조해서 신자들에게 피정 숙소로 제공하고 약간의, 성의껏 돈을 받아 가계에 보탬을 하는.
‘나’가 이곳으로 피정 아닌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건 이유가 있어서이다. 방문객이 완전한 고독을 원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예배를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거절할 수도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원한다면 작은 싸구려 플라스틱 바구니와 폐쇄용기 두 개를 식당에 가져가 음식을 받아 오두막에서 혼자 먹을 수 있고 ‘나’는 정말 몇 번 그렇게 한다. 다만 다른 방문객에게도 완전한 고독을 허락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독을 방해할 수 있는 소음을 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말이 완전한 고독이지, 정말로 완전한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수녀들과 함께하는 저녁 기도에 참석한다. 겁나게 추운 작은 석조 예배실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봉헌성당’이라 부른다. 참석한 수녀는 여덟 명. 휠체어를 타고 온 수녀와 보행기에 의존하는 수녀 포함해 적어도 절반은 상당히 나이가 들었다. 다른 여성 방문객이 두 명 있고, 다음날엔 멋진 바리톤 음색을 가진 남성 방문객도 한 명 있다. 주로 수녀들에 의한 기도문 낭송이 들린다. 일종의 읊조림. 레치타티보 같기도 하고, 틀림없이 가톨릭 장례식 때 단체로 중얼대는 위령기도 즉 연도 같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저 중세 시절의 그레고리안 성가 비슷하겠지. 이게 ‘나’의 관심을 끈다. 딱히 뭐라 할 수 없지만 들을수록 끌리기도 하고, 그러다 끝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팔자라면 팔자다.
방문객을 위한 기도서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눈에 뜨인 작은 팜플렛에 기도문이 적혀 있다. ‘나’는 꽤 큰 호기심으로 기도문을 읽는다. 이 악마와, 저 하느님의 적들을 비난하고 멸하자는 내용이다. 내용을 알고나서 들으니 읊조림의 섬세한 리듬이 더 이상 매혹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수녀들의 읊조림일 뿐이다. 섬세한 리듬 이상이 아니며 온전히 육신과 무의식에 관한 것 이상이 아닌. 저녁기도가 끝나고 ‘나’는 제일 나중에 성당에서 나온다. 어둠. 충격적일 정도로 평화스럽다. 저녁은 오두막 찬장에 넣어둔 땅콩 두 종지와 와인 석 잔으로 때운다. 이렇게 첫날이 지나간다.
다음날은 선잠 끝에 다섯시 반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휴대폰 신호가 거의 잡히지 않는 저 먼 평원지대의 수도원. 알렉스 한테 짧고 확실한 이메일이 도착했지만 답장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일곱시 반에 아침기도가 있다. 무엇을 할까? 잠? 결정하기? 알렉스와 내일에 관해서? 울기? 숨기? 독자인 나는 여기까지 와서야 아직 알렉스와의 정식 이혼이 완전히 결정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런 형광들 같으니라고. 울기도 싫고 숨기도 싫어 ‘나’는 아침기도에 참석하기로 한다.
이어서 아홉 시에 성체성사. 이 사람들, 즉 수녀들은 도대체 언제 일을 끝내는 걸까? 두 시간마다 하는 일을 멈추고 성당으로 달려와 기도하고, 찬송하고, 기도문 중얼거리고, 하루에 한 번 “내가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의 잔”과 “몸”을 먹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야 하니 언제 일을 마치는 걸까? 그러다가 깨닫는다. 일을 중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그들의 일이라는 것을. 일의 행함 그 자체. 그러자 기이한 평온에 빠진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고요함이 오히려 급진적, 불법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간 ‘나’의 삶이 어째서였을까?
중간기도. 두 시간마다 한 번이라 했으니 한 열한 시 정도일까? 여전히 같은 곡조의 성가를 노래하고, 비슷한 음색, 비슷한 중얼거림. ‘나’는 피로를 느낀다. 엄습한다. 깨어있기 힘들다. 중세 느낌의 소리가 이곳 높고 건조한 모나로 평원, 세상 어느 곳과도 동떨어진 장소를 채운다. 여기 있는 일이 마치 어린 시절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너무 길고, 허공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일이 너무 많다. 내게 요구하는 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도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스러워진다.
이렇게 드디어 5일차. ‘나’는 가방을 꾸리고, 차에 싣고, 떠나, 다시 열 몇 시간을 운전해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제 숙소를 방문객 오두막에서 수녀들이 사는 울타리 두른 길고 낮은 다른 건물로 옮기고 수녀들과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다. 이미 책은 2부로 들어섰다.
이렇게 무신앙의 나이든 ‘나’는 수도원에서 보살로 살기로 마음먹어, 자리를 잡고 세상을 털어버리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새로운 사건들을 만나고 새롭게 자각하는 기회를 얻는다.
호주 북쪽은 날이 갈수록 더워지고 건조해져서 그곳에 살던 쥐들이 엄청난 기세로 남쪽 호주로 밀려 내려온다. 차를 몰고 가다가 마치 갈색의 바다처럼 아스팔트를 길게 메우고 있는 작은 털뭉치들. 이것들이 수도원 수녀들의 모든 장소를 메운다. 수녀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쥐를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코 없앨 수 없는 정도로 몰려온다.
다른 하나는 이 수도원 출신의 제니 수녀가 태국에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위한 사업에 전력하다 그곳을 찾은 신부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신부는 곧바로 자살해버리고 제니는 행불자 처리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강력한 태풍이 불어 나무가 쓰러지자 나무 뿌리에 걸린 백골로 발견된다. DNA 검사 결과 제니 수녀인 것을 알게 되어 COVID-19의 어려운 환경에서 호주의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백골의 제니. 유해를 인도하고 수도원에 도착한 평복 수녀 헬렌 패리. 패리 수녀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나’와 친구들에게 심하게 따돌림을 받고, 얻어 맞은 후에 학교를 그만둔 과거가 있다. 백골의 제니 수녀와 수도원의 보나벤처 수녀. 그리고 헬렌 패리와 ‘나’ 사이의 과거 해소를 위한 용서 문제. 용서라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용서한 다음엔 용서받은 행위 이전 시절처럼 스스럼없을 수 있을까? 정말? 나는 안 되던데. 읽어보시라. 특히 당신이 가톨릭 신자라면 후회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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