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김기태. 1985년에 우리나라에서 UFO가 가장 빈발하게 발견되는 강원도 W시에서 출생해 고려대 언론학부를 졸업했다. 37세 때인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무겁고 높은>이 당선하여 데뷔했다. 대학 졸업 후부터 데뷔할 때까지 설마 그냥 놀았겠어?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했거나, 사업을 했거나 그랬겠지.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 실린 단편소설 아홉 편의 발표시기를 보면, 데뷔작을 포함한 2022년 네 편, 2023년 네 편, 2024년 한 편. 그러니까 분기별로 한 편가량 꾸준히 발표를 한 셈이다. 그동안 습작했던 걸 다시 고쳐 발표했을 수도 있고, 직장 또는 직업 때려 치우고 본격적으로 전업작가 생활로 접어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작품들이 흥미롭다. 소설집의 제목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으로 뽑은 것처럼, 작가는 기본적으로 왼쪽 성향을 가졌다. 그러나 주변에서 지겹게 발견하는 투쟁적 유아독존의 왼쪽은 아니고, 흔히 오른쪽의 상징이랄 수 있는 자본이나 학력 같은 권력에서 소외된 마이너리티 사이의 삶을, 이렇게 말해도 좋을 지 모르겠지만, 따듯하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이 마이너리티들의 어울림을, 예전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어수선했던 고위 공무원이었고 지금은 한 정당의 총수가 말했듯이, 시냇가의 가재, 붕어, 개구리들이 자기들끼리 분수를 알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재, 붕어,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급 탈출/타파 노력은 사실 시냇물 속에서 벌어지겠지만, 진짜로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들은 기껏해야 다 들으려면 몇 시간이나 걸리는 전세계 각국의 언어로 녹음한 인터내셔널가를 유튜브를 통해 들을 뿐이다. 어디서 본 거 같지? 나만 그런가?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어 버린 김수영 같지 않아?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권진주와 김니콜라이. 권진주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교 다니는 내내 편의점, 생과일주스 가게, 무한리필 돼지갈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졸업을 했고, 그러면 뭐해, 두어 군데 사무실에 취직을 했지만 수당 없는 초과근무와 급여 지연, 갑질, 성희롱에 학을 떼고 이마트인 것이 틀림없을 대기업의 비정규직원으로 취직해 식품 쏜살배송 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니콜라이는 특성화고에 들어가 선반, 밀링 같은 쇠 가공 쪽으로 자격증을 몇 개 땄지만 자격증과 전혀 관계없는 식품공장을 시작으로 이러저러한 공장을 전전하다가, 경기도 남동쪽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그래도 중학교 동창, 그것도 반창이니 반가웠겠지? 이들은 곧 전화번호를 교환해서 진주가 먼저 삼겹살에 소주를 사고, 다음엔 한국 태생 고려인 3세 니콜라이가 감자탕에 소주를 사는 등 어울리다가, 비정규직의 직장생활이 길어질 수는 없는 법이라서 비슷한 시기에 경기도 남서쪽으로 옮겨 아예 한 집에 살기로 한다. 니콜라이가 귀화를 하려면 먼저 영주권을 따야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 평균 수입의 일정 수준에 해당하는 재외국인에게만 영주권이 주어지는 조항에 의거하여, 이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연수입이 3천8백은 되어야 한다. 꿈 깨야지 뭐. 근데 한국인과 결혼하면 곧바로 영주권을 얻고, 즉시 귀화를 위한 절차를 밟을 수 있다나? 어쩌셔? 진주하고 결혼신고만 하면 될 거 아냐? 근데 그게 쉽게 되겠어? 세상 사는 일 마음 같지 않아서 그저 유튜브 틀어놓고 인터내셔널가만 겁나 부르는 거지,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리는 것처럼.


  처음 읽는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아마 첫 소설집일 걸? 그러면 처음 읽는 것이 당연한데, 마음에 든다. 시선이 과격하지 않고, 꽤나 진보적 성향이지만 웅변하지 않는다. 별로 꾸미지 않는 문장으로 작품을 쓴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섬세하게, 실핏줄 같이 쓸 수 있다는 걸 아주 잠깐씩 팍, 보여주기도 한다. 서른일곱 살까지 습작을 했다면, 공력이야 말해 뭐하겠어. 엉겁결에 후다닥 등단하는 행운을 잡은 몇몇 로또들 보다 많이 윗길이다.

  근데 이미 꼰대의 대열에 들어간 내게 김기태의 작품 속에는 작가가 생각도 못한 허들이 놓였다는 건 몰랐겠지.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서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21세기도 아니고 1990년 이후에 나온 국내/해외 대중음악에 관해서는 완전 깡통이다. 반면에 김기태는 대학에서 언론학부를 졸업했다니 예전 방식으로 말하자면 신문방송학과 맞지? 성시경이 졸업했다는 과. 그래서 TV 프로그램과 K-팝, 걸그룹, 보이그룹 등등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걸 진짜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기태의 단편 몇 개가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는 건 아니지만 좀 갑갑했던 건 사실이다. 제일 앞에 실린 <세상 모든 바다>는 물론이고, “짝짓기 프로그램”이란 걸 묘사하는 두번째 실린 작품 <롤링 선더 러브>도 정말 그런 짝짓기 프로그램이 있었고, 출연한 사람들한테 그렇게 무도한 작업을 하라고 했다고?

  왜 내가 <1박2일>이나 예전 MBC에서 비슷한 시간에 하던 오락 프로그램을 딱, 끊어버렸느냐 하면, 단지 해당 프로그램에 나온다는 거 하나 가지고, 방송이라는 권력이 출연진, 소위 방송인, 강호동, 이승기, 엠씨몽, 이수근, 유재석, 박명수, 하하, 기타 등등 한테 온갖 창피스러운 꼴을 당하게 해서 그랬다. 연예인이라는 거 하나 가지고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망가뜨려놓고 낄낄거릴 수 있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렇지. 에구, 다른 말이 너무 길어졌네.


  제일 앞에 실린 <세상 모든 바다>는 발단에서 K-팝 그룹 ALL THE SEAS OF THE WORLD, 세상 모든 바다, 약칭 “세모바” 또는 “SMB” 공연이 잠실운동장에서 있는데, 공연이 끝난 후 세모바가 공연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야외에서 게릴라 라이브를 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 그걸 보기 위해 14만 명이 몰린다. 이곳에서 한국에 유학 중인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 거류민 3세의 아들’ 하쿠가, 경북 해안 지역에 있는 해진군에서 콘서트 때문에 올라온 중학생 영록을 만나고, 곧 헤어진다. 자취집으로 돌아온 하쿠가 14만명이 운집한 잠실에서 몇 명이 죽는 사고가 난 것을 TV를 통해 알게 되고, 사망자 명단에 해진군의 중학생 영록도 포함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하쿠는 영록을 잊지 못해 낙후된 해진군을 방문한다. 거의 망가져가는 도시. 군청 앞에 작은 테이블을 차려놓고 한 아주머니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원래는 여러 명이 모여 시작을 했지만 날도 춥고, 유동인구도 없어서 점점 작은 규모로 이어가다가 그래도 시위를 멈출 수 없어 오늘은 한 명만 서 있게 된 모양이었다. 시위의 주장은, 경북도와 해진군의 원안대로 이 지역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주변에 산업도 없고, 제대로 된 어항도 없으며, 그저 작은 온천지대 하나뿐이라 해진군은 점점 낙후되고 있어서 원자력발전소를 유치하려 하지만 환경단체의 반대로 몇 년씩이나 중단 또는 연기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쿠는 자기라도 원전유치 청원에 서명하려다가, 일본인이기도 하고, 자기 정보 노출 문제도 있고, 원전을 굳이 찬성하는 입장도 아니어서, 마침 차가 왔다는 핑계로 그냥 서울로 돌아오고 만다.


  원전에 반대하는 입장은 이해하겠다. 세상의 모든 원자력은 나쁘다? 자주 나쁘지만 어떤 때는 덜 나쁘다. 아주 가끔은 그래도 써야 한다. 원전이 석탄발전에 의한 지구 온난화를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으며 경제적이다. 아직 태양광을 비롯한 자연 발전은 원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낮은 효율을 낼 뿐이다. 자연발전을 고집하기 위해서는 매우 비싼 전기요금을 감수해야 한다. 열배, 혹은 50배? 어쩌면 미친 트럼프의 비자 수수료처럼 한 방에 100배.

  원자력발전 반대, 지구 온난화 반대를 주장하시는 분. 올 8월 전기요금 얼마 내셨나 궁금하다. 내가 먼저 밝히겠다. 8월 사용량 264KWh, 요금 38,750원. 9월엔 182KWH, 28,500원. 다른 집보다 많이 썼는지, 적게 썼는지 모른다. 우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길래 그냥 써본 거다.

  찬 태양광, 반 원전과 관련해서 내가 제일 관심있는 것은 원전을 쓰지 않으면 당연히 전기 가격이 치솟을 텐데 도시 빈민이 에어컨을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가동 시간만큼’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7월 말에, 에어컨이 없으면 여름을 견디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싶어서 3일 동안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 지내보겠다고 했다가, 딱 하루 버티고 에어컨 다시 틀었다. 그러고나서 지금 세상은 에어컨 없으면 살기가 쉽지 않다고 결론 냈다. 앞으로는 전기 자동차, 전기 버스, 전기 화물트럭, 전기 화물선박, 전기 비행기까지 만들어 써야 하는 시절이 바로 코 앞에 닥쳤다. 동시에 지구가 더 더워지지 않기 위하여 대량으로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에너지를 이용한 전기 생산은 당장 멈추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여전히 태양광을 비롯한 자연 에너지 발전을 주장하는 분들 보기가 좀 민망하다. 당신들은 열배, 오십배 비싼 전기료를 감당할 수 있다고 쳐도, 없는 사람은 어쩌라고? 당신이 정말 좌파라면, 진보진영이라고 자부한다면 계급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원자력 결사반대 주의자였던 다와다 요코와 오에 겐자부로 같은 반 원자력 운동가들의 한달 전기 사용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왜 궁금할까?

  핵 에너지를 반대하는 환경주의자의 주장도 다각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환경주의자라지만 싫어도 써야 하는 필요악도 있어서, 이걸 원자력 발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주장에 현혹되는 순진한 분도 있는 법이다. 과학을 배제하는 진보, 나는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원자력 발전에”는” 찬성하는 친환경주의자이다. 자연발전이 비약적으로 도약하여 원전보다 전기 생산 가격이 조금만 비싸지거나, 같아지거나, 저렴해질 때까지라는 조건이다. 아무 조건 없이 반원전을 외치는 분들, 귀댁의 8월 전기 사용량이 궁금하다. 내 집 사용량보다 당연히 훨씬 적을 것으로 믿는다. 강조하는데, 마침 8월, 9월 아파트 관리비 청구서가 앞에 있어서 하는 말이다.


  김기태가 또 책을 내면 그것도 틀림없이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은 내가 희망도서 신청을 하긴 했지만 바로 5분 전에 누군가 먼저 신청을 해서, 입고가 됐고, 이후 무수한 이용객들이 예약을 하는 바람에 5월에 나온 책을 이제야 읽었다. 바라건대 뚝심 잡고 제대로 장편 한 편 써 보면 어떨까? 기대가 크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도 4반세기가 지났는데, 이렇게 소설 쓰기, 있기, 없기? 앙가슴이 무너질 용의가 없으면 아예 책을 열지도 마시라. 여전히 손짓 하나로 심리 묘사가 가능하다는 말이지? 아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
Omer Z. 리반엘리 지음, 고영범 옮김 / 가쎄(GASSE)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처음 읽은 줄퓌 리바넬리 <세레나데>가 워낙 좋아서 그런가, 이후 이이의 작품을 읽은 다음엔 그만큼의 재미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불안>을 읽은 지금은, 혹시 <세레나데>를 읽을 당시 오늘 아침에 읽은 <불안>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리바넬리 특유의 감정 과잉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감지는커녕 과장에 홀랑 빠져 내가 흔히 이야기하고는 하던 빼어난 문장에 의한 마취 혹은 최면에 취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혹까지 생기고 말았다.

  아, 지금 <불안>이 재미가 없다거나,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충분히 재미있고, 알지 못했던 잔인한 인종청소를 당한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이기도 하다. 다만 이걸 묘사하는 리바넬리의 문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아오, 이 이야기는 애초부터 독후감 말미에 쓰려고 마음먹고 있던 건데 제일 먼저 말해버리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20년이 훌쩍 넘는 단골 횟집에서 쐬주 마시자는 약속이 있다. 암만해도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배도 좀 고프고. 배 고프면 제대로 잘 판단이 안 되잖아?


  화자 ‘나’의 이름이 이브라힘.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저널리즘에 종사한다. 쉬운 얘기로 신문기자다. 전엔 ‘기자’하면 어깨에 후까시 팍 들어간 줄 알아서, 기자가 되기 위한 시험 ‘기시’를 사시, 행시, 외시와 더불어 4대 고시라 칭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신세계백화점 옥상에서 돌 던지면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맞는다. 시인, 화가, 그리고 기자. 그래서 기자더러 기자라고 부르면 기분 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씩 웃으며 콧김을 뿜고.

  만일 살인 사건이 나면 튀르키예 신문엔 살해된 시신 사진을 그냥 싣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출간하자마자 데스크에서 기자들 집합시켜놓고 각종 험한 시체들 사진 가운데 실을 만한 사건을 추리는 중에 이브라힘의 눈에 오래 잊고 있던 저 먼 시절의 초등학교 동창의 죽은 모습이 들어왔다. 후세인. 수십년간 철권 통치를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아니라 튀르키예 동쪽 시리아 국경 근처의 오래된 타운 마르딘에서 의사로 일하던 친구. 그가 죽었다.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두 친형 살림과 압둘라가 운영하는 피자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이 다 끝난 한밤중에 청소와 정리를 하느라 남아 있다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백인우월주의자이며 반무슬림집단인 깡패들에게 칼로 수십곳을 찔려 치명상을 입고, 앰뷸런스로 응급실로 옮겼지만 처치 중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는 외신과 사진. 후세인의 마지막을 지키던 사람은 응급의료전공의 인도인 의사였다. 환자가 죽기 전에 무어라 의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마지막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을 한 것이 남아, 훗날 이브라힘 기자가 들을 수 있었으니, 이랬다.

  “한때는, 난 사람이었다.”

  튀르키예는 두터운 햄이 좌우로 누운 것처럼 생겼다. 왼쪽에는 스스로 유럽인이라고 여기거나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1천5백만 명이 밀집해 사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자유스럽고 분방하게 살고, 오른쪽으로 가면 갈수록 조지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국경을 맞대면서 아직도 20세기 이전의 지독한 이슬람 관습에 따라, 사막 비슷한 환경에서 그래도 꿋꿋하게 살고 있다. 이브라힘이 살던 마르딘으로 말하자면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향유했던 유서 깊은 곳이지만, 최근 불과 몇 십 년 만에 사랑과 자비와 친절의 종교인 무슬림이 급격하게 원리주의화 되면서 인근 국가에서 벌어진 이슬람대 이슬람, 과격 이슬람 ISIL에 의한 오랜 종교 에지디 신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사막과 산악을 넘어 밀려온 곳이다. 이브라힘은 이곳 마르딘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닌 후에, 더 좋은 교육을 위하여 부모가 이스탄불로 보내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것. 이브라힘의 부모는 세상을 떴고, 결혼은 파국을 맞아 전 재산 탈고 모자란 건 영끌해서 산 집을 전처에게 주고 이혼서류에 인감도장을 찍었으며, 신문사 스탭들간의 지옥 같은 경쟁 속에서 완전히 피폐해졌다, 라고 여기는, 이른바 위기 상황에 처한 상태.


  반면에 후세인은 끝까지 마르딘에서 버텼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작은 키와 곱상한 피부에서 눈치챌 수 있다시피 힘도 없어서 친구들과 팔씨름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대신 모두 배워야 하는 꾸란에 관해서는 가장 뛰어났다. 공부 머리가 좋았다는 말이다. 집안에서도 부모 말씀에 복종하고, 하나 있는 누이동생한테 자상하며 온갖 집안일을 마다하지 않는 좋은 아들이었고, 때마침 (이브라힘이 이스탄불에서 공부하는 동안) 인근에 대학이 생겨 의과대학을 졸업해 지역 의사로 있었다.

  전형적인 선한 무슬림인 후세인은 이슬람국가를 천명하는 극단적 이슬람 ISIL이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에서 내전을 일으켜 숱한 사람들이 난민촌에서 텐트 생활을 하기 시작하자, 두 손을 걷어 부치고 캠프에 들어가 이들 가운데 환자와 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난민 가운데서도 ISIL에 의하여 가장 난폭한 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이슬람과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인 에지디 신자들이었다. ISIL 집단은 에지디 신자 가운데 15세 이상의 남자와 생리를 멈춘 나이든 여성이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참수, 목을 잘라 버렸고, 생리를 하는 모든 여성은 강간을 한 후 노예로 삼았으며, 아직 초경 전의 어린 여자 아이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동족 남자들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목이 댕거덩 잘려 모래땅 위로 떨어지고, 가까운 어디론가 지하실 비슷한 곳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집단으로 윤간을 당한 후, 담배 한 갑 가격으로 노예로 팔려간 어린 여자들은, 어쩌면 당연하게 정신을 놓아 버리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적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기도 했을 수밖에. 더 가끔, 아주 간혹, ISIL로 위장한 에지디 신자가 한정된 돈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에지디 여성을 사서 국경 근처까지 데려가 튀르키예까지 사막과 산을 넘어 도망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후세인이 마르딘의 캠프에서 만난 여자들은 거의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왔던 것이고, 난민 속에는 적의 아이를 출산한 멜렉나즈라는 여자도 끼어 있었다.

  매력적인 눈을 가진 미인이지만 후세인이 멜렉나즈의 외모에만 끌린 것은 아닐 듯하다. 이 여자 품에 안긴 갓난 여자 아이 네르기스는 눈동자를 하얀 막이 덮고 있어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으로 출생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멜렉나즈를 사랑하게 된 후세인.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되지만 후세인이 멜렉나즈를 동정한 것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선의가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확인한 멜렉나즈는 후세인의 청혼을 받아들여 함께 후세인의 집으로 가지만, 에지디의 율법으로도, 이슬람의 율법으로도 둘의 결합은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어느새 마르딘에도 과격 이슬람 ISIL의 분자가 생겨 어느 날 후세인에게 총을 난사해, 어깨와 왼쪽 팔에 총상을 입어 입원하게 된다. 이를 들은 미국의 두 형은 즉각 후세인을 설득하여 일단 미국으로 와서 재난을 피하고, 정식 서류를 갖춰 멜렉나즈와 아이도 데려가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9.11 이후 미국인들은 이슬람의 모든 종파를 과격 이슬람과 동일시하게 됐고, 무슬림 자체를 증오하는 집단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두 명의 큰 덩치 백인이 후세인을 칼로 난도질해 죽여버렸던 것.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 ISIL이 에지디 교인들에게 가한 학살과 학대 등이다. 이런 지독한 고통을 당한 에지디 여성의 아픔을, 줄퓌 리바넬리는, 이스탄불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저널리스트로 생활하는 소부르주아 또는 상위 중산층의 괴로움, 직장에서의 무한 경쟁, 이혼으로 인한 자산의 탕진, 거대도시에서의 각박한 삶 등에 지친 이브라힘의 고뇌와 퉁치려 한다. 이게 날 극도로 언짢게 했다. 비교를 해도 비슷하게 해야지, 참수와 강간과 노예 상태의 에지디 사람들과 소부르주아의 일상적 고통을 수평비교 하려 하다니, 에잇!

  그러나 문장의 힘은 무섭다. 아무 생각 없이 명문장을 자랑하는 리바넬리의 글을 좇다가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 어느 문장이 그런데 이리 난리냐고? 이렇게 묻지 마시라. 나도 인용하려고 메모를 하긴 했건만 약속시간 다 됐다. 당신 같으면 독후감이 중혀, 민어 백숙에 쐬주 각 2병이 중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바지
카를 슈테른하임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슈테른하임. 이름만 딱 봐도 유대인 집안이다. 유대인 은행가 카를 율리우스 슈테른하임 씨하고 눈이 맞은 루터교 신자 집안의 어머니 로사 마리가 카를을 낳고 2년 후에 혼인신고를 했다.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모양이다. 어머니 쪽이 루터교에, 가난한 노동자 계급이라서. 어쨌거나 아들 카를은 부잣집 자제 답게 뮌헨대학, 괴팅겐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각 철학, 심리학, 법학을 공부했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흔한 학사 학위도 못 따고 졸업도 하지 못했다. 22세 때인 1900년에 바이마르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시작해 첫번째 결혼을 했고, 6년 후에는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온 테아 뢰벤슈타인과 두번째 결혼을 해 인생이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했다. 한 방에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의 백배 이상을 확보한 슈테른하임은 ‘울프의 공식’에 의거해 자기 마음대로 작가들과 어울려가며 자신도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것 보라니까?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를 갖지 못하면, 쉽지는 않겠지만 그걸 제공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라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 인생은 한 방이여.

  흥미로운 건, 이들의 딸 도로테아가 적어도 1/4이 유대인, 뢰벤슈타인도 유대인 가문이라면 최대 3/4이 유대인일 터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전사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독일군에 체포되어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거기서 죽었는지 살아 남았는지는 위키피디아도 모르는 모양이다. 카를 슈테른하임은 1차 세계대전은 여유자금이 넘쳐 흐를 당시가 되어 스위스로 피신해 징집을 피했지만, 2차 세계대전은 그러하지 못해 벨기에에서 숨어 살다가 다행히 나치에 잡히지 않고 1942년에 죽어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슈테른하임의 장기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 시절을 일컫는 “빌헬미네 시대에 신흥 독일 중산층의 도덕적 감성을 풍자”하는 거였다고 위키피디아 첫 칸에 나온다. 오늘 독후감을 쓰는 <속바지>도 확실하게 그렇다. 이이는 1912년 이후에 비극을 전혀 쓰지 않았다는데, 책 뒤편 “지은이에 대하여”에 재미있는 내력이 있어서 소개한다.


  “1912년 슈테른하임의 <동 쥐앙(Don Juan)>이 베를린의 독일 극장에서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의 일이다. 필립왕 역을 맡은 배우가 신하에게 “이 바보 같은 건 누가 썼지?”하고 묻는 장면에서 누군가 객석에서 ‘슈테른하임요!’하자 극장 안은 온통 웃음바다로 변했고 ‘브라보!’를 외치는 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고 한다. 슈테른하임은 이 스캔들에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다시는 비극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작품에서는 낭만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극단적인 야유와 빈정거림으로 가득 차 있는 희극이었다. 희극은 시민 사회를 향한 슈테른하임의 조소를 효과적으로 퍼붓게 해 부르주아의 약점을 폭로하는 수단이 된다.” (p.189)


  위에 따온 글은 슈테른하임의 <속바지>를 이해하는데 꽤 큰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은유나 상징, 문학적 호소 같은 건 얄짤없이 그냥 고속도로로 직진해, 하고 싶은 말을 극단적으로 야유하고 빈정거린다는 거. 그걸 통해 현대 독일 중산층의 찌질함을 폭로하고 있다는 거다.

  작품의 남자 주인공이 테오발트 마스케. 여자 주인공은 루이제 마스케. 부부다. 이 ‘마스케’ 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여 소위 ‘마스케 삼부작’이라고도 하는가 본데, 굳이 외울 필요 없다. 시험에 안 나온다. 테오발트가 바로 현대 독일의 중산층이다. 연수 700탈러를 버는 중∙하급 공무원.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과 속바지가 무슨 관련이 있어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느냐고?

  속바지. 때는 1909년 이전의 베를린. 당시 유럽에는 팬티가 없었다. 삼각팬티는 1954년에 일본의 ‘사쿠라이’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손자를 위하여 디자인해 입혔던 것을 특허출원,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전 세계에서 다 헐렁한 형태의 ‘고쟁이’ 비슷한 걸 입었는데 이걸 총칭해 “속바지”라 부른다. 20세기 초반에는 합성 고무가 없어서 고무는 저 아프리카의 콩고 같은 오지 중의 오지에서 수입해와 상당히 비싼 재료라, 그걸 가공해 팬티 끈, 그러니까 속바지 끈으로 사용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 대신 천으로 끈을 만들어 죄어 묶어 썼겠지.

  속바지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는 집구석에서나 입었다. 서민 계급은 요즘 말로 노팬티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래 여름날 모시 바지를 입은 할배들은 축 늘어진 부랄이 흔들흔들 또는 달랑거리는 걸 맨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고,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들었다. 여자들은? 보일 것이 없잖아? 당연히 안 보이지. 흔하게 보이면 그땐 흉도 아닌 거니까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람.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사람이 좀 털털했던 모양이지? 하루는 황제께서 행차를 하시는데, 황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베를린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 중에 하필이면 마스케 부인, 루이제 한테 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지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뿔싸, 하늘도 무심하시지, 딱 이 시간을 맞추어 루이제의 속바지 끈이 스르르 풀려버렸고, 그래서 당연히 루이제의 속바지도 중력의 법칙에 의해 다리를 따라 또 스스륵 미끄러져 발목에 척, 걸쳐버린 걸, 글쎄, 빌헬름 2세가 봤는지 못 봤는지, 보긴 봤는데 황제 체면이 있어서 못 본 척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거다.

  봤겠어? 못 봤겠어? 나는 못 봤다는 데 만원 건다.

  근데 남편 테오발트는 그게 아니다. 서방이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여 자만심이 상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의처증이 도져 그런 것도 아니다. 만일 황제가 자기 마누라의 속바지가 흘러내린 꼴을 보았다면, 저런 칠칠치 못한 여편네를 둔 남자가 공직을 맡았다는 걸 용서하지 않아, 아마도 근일 내에 해고당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테오발트는 자기 마누라 루이제가 무지 예쁘게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사는 진짜 찌질이. 그리하여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야단치고, 두드려 패기 시작한다. 연수 700탈러 타령을 하면서.


  이제 동네방네 이웃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게 됐단 말이야. 마스케 부인 속바지가 벗겨졌다고! 그것도 국왕폐하 면전에서 말이야. 나 같은 말단 공무원이. 나도 죄가 있지. 이런 여편네를 둔 죄 말이야. 이런 칠칠치 못한 쌍것. (그대로 머리를 휘어잡아 테이블에 대고 내리친다.)

  700탈러를! 그걸로 우린 방 몇 칸을 지탱할 수 있고 잘 먹고 옷 사 입고 겨울에는 난방을 할 수 있단 말이다. 희극 구경 갈 수 있게 표를 살 수 있고, 의사나 약사에게 가지 않아도 되게 건강이 우릴 보살펴주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즉, 황제가 루이제의 속바지를 봤다면 자기가 해고당해 700탈러를 벌지 못할 거여서 열을 받은 거다. 진짜 웃긴 건, 이 부부가 결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겨우 일년 밖에 안 되긴 했지만, 아직 아이도 없고, 루이제의 배도 비어 있다는 거다. 왜냐하면, 700탈러 수입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너무 힘이 드니 벌이가 조금 나아질 때까지 임신을 하지 말자고 남편 테오발트가 일방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근데 1909년 이전에 어떻게 피임을 해? 완전한 방법이 있지. 아무렴. 이보다 더 완전할 수 없는 피임법. 그냥 손만 잡고 자는 거. 하기는 뭐.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런 찌질이니까 아내 루이제가 남다른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루이제의 속바지가 치마 아래로 흐른 장면을 여러 사람이 보기는 봤다. 여기서 끝나면 연극이 안 되잖아? 그래서 시작할 때부터 마스케 집의 남는 방 두 개를 임대한다고 창문에 써 붙여 놓았던 것. 여태까지 한 사람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더니, 속바지가 흘러내린 바로 당일, 두 명의 남자가 방을 빌겠다고 들이닥쳤다. 한 명은 부르주아인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자기는 학자 겸 작가라고, 자기 일터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고 싶어 여기까지 와서 방을 빌리려 한다는 스카론 선생. 다른 한 명은 옆에 있는 이발소도 아니고 서너 블록 떨어진 이발소의 수석 이발사인 만델슈탐. 둘 다 속내는 루이제를 어떻게 한 번 자빠뜨려볼까 싶어 덤벼든 거다.

  웃기게도 남편 테오발트는 이들로부터 받을 임대료, 특히 예상보다 높은 월세를 제시한 스카론 씨 때문에 다른 건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두 남자는 결혼은 했지만 (결혼 전엔 모르겠고) 결혼한 다음에는 한 번도 즐기지 못해서 생각보다 쉬운 먹잇감이기도한 루이제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공하느냐고? 그건 안 알려드리고, 남자들의 대시를 상담해주던 옆집 아가씨 게르트루드 도이터 양이 루이제와 어울리다가 독자 또는 관객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남자, 테오발트 씨를 자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재미있다. 루이제는 암만해도 이발사 만델슈탐보다는 작가 스카론에게 더 관심이 가겠지? 스카론은 며칠 만에 계약과 관계없이 1년치 월세를 몽땅 지불하고 집에서 나가버리고, 다른 남자가 스카론 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가격으로 그 방에 다시 들어오니, 테오발트 마스케 선생은 돌 한 번 던져 새 세 마리를 잡았겠네? 그리하여 이제 제법 돈을 만진 테오발트. 루이제에게 은근히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제 우리도 아이 한 번 만들어 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11-13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4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난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디스 워튼은, 흠, 유명세에 비해 나하고 그리 좋은 궁합이 아니다. 아무래도 세대차이, 젠더 차이, 그리고 계급차이 때문에 그런 거 같다. 워튼 스타일의 문장도 내 취향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인 내가 좀 차이가 있어도 문장만 합이 맞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텐데, 워튼과 나 사이엔 그게 제일 치명적이다. 말로만 재잘거리지 말고 예를 들어보자.

  게이트 옴과 데니스 페이턴은 두 달 전에 약혼한 사이다. 케이트는 이 약혼 때문에 한때 행복감에 흠뻑 빠져 있던 적도 있단다. 케이트가 직접 얘기한 건 아니고 이디스 워튼이 전지적 작가라서 그렇게 썼다. 근데 두 달이 흐르는 동안 뭔가가 바뀌긴 했겠지? 어떤 상태냐 하면:


  “(약혼) 이전에는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개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반면 지금은 그 날개들이 그녀 위에 멈춰 있는 것 같았고, 그녀는 자신이 그 날개들의 은신처라고 믿을 수 있었다.” (p.10)


  틀림없이 케이트 아가씨의 심정 변화를 표현한 문장일 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가볍게 날아다니는 날개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건 ‘공기’ 대신 ‘공간’을 넣으면 대강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 가지만, “날개들이 그녀 위에 멈춰 있는 것”은 또 뭐야? 어떤 상태를 이렇게 말했을까? 그리고 케이트 아가씨가 이 날개들의 은신처라고? 어디 숨겨 놓았나 보지? 드레스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나? 당시 귀한 댁 아가씨가 채신없이 주머니 달린 작업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초장부터, 이게 두번째 페이지인데, 나 한테 초를 치는 문장이 나와 버리니, 같은 말을 굳이 한 번 더하자면, 초장부터 김이 팍 새 버렸다. 같은 아가씨라도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술술 읽혔잖아? … 설마,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누군지 모르시는 건 아니지? 알퐁스 도데.

  이런 문장이 한 번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펑펑 터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읽기를 멈춘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이게 어떤 심리를 표현한 것일까? 나? 만날 독후감 올린다고 책도 쉽게 읽는 인간은 아니다. 이해 가지 않는 문장이 나오면 갑작스레 공황 비슷한 심정이 되어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또다시 읽고, 한 일곱 번 읽은 다음에,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땐 그냥 넘어간다. 물론 속으로 욕은 한 바가지 하지. 점잖은 분들 앞에서 어떤 욕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서도. 이렇게 나 한테 만날 욕을 쳐 자시는데 어찌 나하고 합이 맞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 틀림없이 세대 차이, 성별 차이, 그리고 계급 차이와 성격 차이까지 온갖 차이가 날 작가-독자 사이다. 이디스 워튼, 일찍이 미국의 국가대표 소설가 네 명 안에 자기 이름을 올린 작가이지만, 그래서 눈에 이이의 책이 띄어도 선뜻 집어 들게 되지 않는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 <피난처>는 새삼스레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도서관에서 ‘첫빠따’로 읽었다는 거 아니냐.


  당연히 신부댁 옴 집안과 신랑댁 페이턴 집안은 미국 뉴욕 또는 뉴욕 인근의 부르주아 집안이다. 뉴욕이라 해도 지금의 뉴욕을 생각하지 마시라. 옴씨 댁 앞은 넓은 초원이 펼쳐 있고 큰 키의 나무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 19세기의 도시 인근. 옴씨 댁에 데니스 페이턴씨가 온다.

  데니스 페이턴. 이 책은 김욱동 번역인데, 2025년 초판이라서 그런지 어째 잘 읽히지 않는다. 1부에서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데니스의 어머니를 이렇게 묘사한다.

  먼저 12페이지.

  “데니스의 어머니, 즉 페이턴 씨의 두 번째 아내보다 더 감상에 치우쳐 너그러운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16페이지.

  케이트가 묻기를 “어머니는 어떠셔요?”

  데니스가 대답한다. “내 친어머니는 아니잖아.”

  앞에서 데니스의 형제 아서가 죽는 바람에 아서의 재산 모두를 데니스가 상속받는다. 그래서 데니스의 어머니가 두번째 아내라니까 아서가 형, 데니스가 동생. 이리 결론을 내리고 읽었던 것이 탈. 어, 지금 엄마가 데니스의 엄마가 아니라고? 계속 읽어보면 그렇다. 두번째 아내가 데니스를 낳고 죽었는지 이혼해 버렸고, 2보다 큰 정수 n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데니스의 이복 동생이 아서. 아서는 좀 방랑기가 있고, 방랑기가 있는 사람이 바람기도 있는 법이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 아가씨를 만나 야매인지 진짜인지 결혼을 해 아이도 하나 만들었다. 다만 가문의 족보에는 올리지 않았을 뿐. 근데 아서가 깊은 병이 들어 아내가 정성껏 치료를 했건만 결국 숟가락 놨다. 페이턴 가문은 아서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 아서의 재산을 가문 밖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했다. 아서의 아내는 소송을 했지만, 다 이 통속이 저 통속인 19세기 미국 부르주아 사회에서 어떻게 일개 가난한 여성이 부르주아 집안과 겨루어 소송을 이겨? 당연히 패소했고, 아내는 남편의 돈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사생아로 키우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해, 엣다 드런 세상, 안 살고 만다, 아이를 안고 연못에 빠져 죽었다. 이날 아침 데니스가 보안관한테 시신 확인을 해주고 케이트를 찾아온 길이었다. 당시 동부에 살던 제멋대로 도련님들 가운데 아서 같은 경우가 제법 있었단다. 이런 도련님을 꼬드겨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신고를 완료한 다음에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보상을 받고 이혼해주는 전문직 여성이랄까? 그런 직업여성도 꽤 있었다고. 그런데 아서와 혼인해 아이까지 낳은 이 여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데니스가 이 모자를 불쌍히 여겨 소송에 이겼어도 금일봉을 전달하고자 했건만 절대 받지 않았다니까.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던 커플.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는 법이다. 데니스가 한참 떠들다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색을 하더니 자기는 동생 아서가 정식 결혼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니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 케이트도 얼굴색을 바꾸어 버렸다.

  그럼 내 약혼자가 거짓 증언을 해서, 여인과 아이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았다는 말이지? 명예롭지 못한 일을 뻔뻔하게 저지른 남자와 결혼해 살면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이런 결혼 자체가 명예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케이트는 데니스에게, 지금 청첩장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 부치지 않았으니, 우리의 결혼을 조금 늦추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어떤 의미인 줄 아는 데니스. 반대할만한 타당한 핑계가 없다.

  오후 시간. 옴씨 댁 응접실에 다른 방문객이 도착한다. 데니스의 어머니 페이턴 부인. 아서를 낳은 엄마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데니스의 친엄마는 확실하게 아닌 어머니. 페이턴 부인은 자신이 여태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혜로 케이트를 설득한다.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결혼해 버리라고. 인생사 뭐 별거 있는 줄 알아요? 그냥 좋으면 좋게, 편하게 살다 가는 게 장땡이랍니다, 아가씨. 왜 그래요, 옴씨 댁 모양 빠지게?

  에이, 설마 이렇게 말했으려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케이트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만 죽 늘어놓고 돌아선 페이턴 여사.

  케이트는 이 일을 오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엣다 모르겠다, 그냥 결혼하고 만다.


  이어서 1부의 두 배 정도 되는 분량의 2부. 케이트는 결혼을 했고, 잘 생기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은 아들 딕을 낳았으며, 딕이 여섯 살 때, 에그머니, 과부가 되어버렸다. 이후엔 연애도 하지 않고 오직 아들 딕 하나를 후원하며 살아온 나이든 과부.

  딕이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아 이게 골치다. 즉, 뛰어난 한 방이 없는 사람. 예고 다닐 때는 음악을 전공했고, 하버드에 입학해서 미술. 그러더니 파리의 보자르로 유학 가서는 또 건축으로 전공을 바꾸고 각 단계별로 적어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딕 말고 케이트 페이턴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름을 낸 일은, 사교계의 별이라서가 아니라, 사교계엔 발걸음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딕, 딕, 파리 보자르까지 쫓아가서 한 집에 산 건 아니고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살며 딕의 불편함을 보살펴 주었다는 거. 미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흉 떨릴 일이다. 다 큰 애새끼를 여전히 치마폭에 감싼다고.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현명한 케이트가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았으니까.

  다시 뉴욕 근방 집으로 돌아온 케이트와 딕. 딕은 뉴욕에서 건축 사무실을 냈고, 클레먼스 버니 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케이트가 보기에는 딕의 실력에 비해 자잘한 일만 의뢰받는 것 같은 기분. 솔직히 두각을 나타냈지만 세계의 총아들이 다 모인 뉴욕에서는 그저 오종종한 수준이란 것을, 부모는 여간해서 눈치채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딕이 자기의 이름을 크게 낼 수 있는 큰 공모전이 열리고, 딕도 이를 자신한테 주어진 최고의 기회라고 인식한다. 여기에서 당선만 하면, 물론 자신도 있었지만, 이름도 나고, 돈도 벌고, 버니 양과 결혼할 수도 있을 터, 이제 날밤을 새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 딕의 친구 ‘대로우’만 아니라면.

  아이쿠. 더 이상은 스토리를 얘기하기 힘들다. 다만 오랜 과거에 딕의 아버지 데니스가 겪은 곡절을 딕이 대를 이어서 겪어야 한다는 힌트만 줄 뿐. 그러면, 전에 시어머니 페이턴 여사가 했던 말을, 케이트 페이턴 여사가 아들 딕의 연인인 클래먼스 버니 양한테 똑같이 할 수 있을까? 이것도 궁금한 일이 되겠지?

  이쯤에서 끝내자. 뉴욕 건축가들의 만화경은 에인 랜드가 쓴 <파운틴 헤드>가 훨씬, 훨씬 더 재미있다는 말만 보탠다. 조금만 더 힌트를 주자면, 이 소설도 점점 <파운틴 헤드>와 비슷한 쪽으로 달려간다는 거.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망고 2025-11-12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개가 행복감을 말하는거 아닐까요 약혼 전에는 행복감인 날개가 그냥 여기저기 가볍게 날아다니는 정도라면 지금은 행복감이 딱 그녀 위에 머물러서 결론적으로 안정적으로 행복하다....이런뜻 아닐까요? 어렵고 딱 와닿진 않는 문장이긴 한거 같아요🤣

Falstaff 2025-11-12 16:47   좋아요 1 | URL
그게 다 독자 마음 먹기에 달린.... ㅎㅎ... 거 아닌가 싶어요. 딱 그 자리에 다른 추상명사를 가져다두어도 어색하지 않는 거. 아휴, 저는 천생 이과 쪽이 모양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