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이문구 지음 / 아로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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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이 책 못 읽겠다. 시방 도서관 열람실. 읽다가 웃음이 터지는데 이걸 뭐라 혀? 폭소? 홍소? 세상에 웃음 참기가 이렇게 힘든겨? 충청도 사람 책 읽다가 내 얼굴 그만 갱상도 하회탈 되네. 눈물까지 한 방울 맺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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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7-11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문구는 백날천날 관촌수필만 알다 이거 읽으니, 이게 찐이더라구요 ㅋㅋㅋ아예 시골을 아저씨떼째 통째로 들고 내 앞에 철푸덕 던져줌 ㅋㅋㅋㅋ우리동네 읽고 또 순위 갱신되나 함 볼라고요 ㅋㅋㅋㅋ

Falstaff 2024-07-12 05:39   좋아요 1 | URL
우리동네, 재미나지요. ㅎㅎㅎ 은근히 남녀상열지사도 좀 섞여 있고 뭐 그런데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사실 확실하지도 않습니다. ㅎㅎㅎㅎ
개 잡아먹은 데 가서 곡하고 재배할 늠. ㅋㅋㅋㅋㅋ
 
네이키드 런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1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전세재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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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펭귄 클래식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나온 윌리엄 S. 버로스의 출세작 <정키>와 <퀴어>를 읽은 이후로, 그때도 헌책이기는 하지만 한 방에 두 권을 사는 만행을 저질러 두 권을 다 읽게 되었는 바, 다시는 버로스를, 적어도 돈 주고 사서 읽지 않겠다고 단단히 작심을 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 : Naked Lunch : 개떡 같은 점심식사>를 읽은 건, 당연히 도서관 개가실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버로스는 잭 케루악과 함께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나는 잭 케루악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하면 보이는 족족 몽땅 읽어 치우는 반면, 도무지 이 윌리엄 S. 버로스는 못 읽어주겠다. 틀림없이 궁합이 맞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버로스의 마약(정키)과 동성애(퀴어)가 케루악보다 좀 더 지독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케루악의 대표작 <길 위에서> 속에 잭과 함께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멕시코시티까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알코올에 허우적대고, 차량절도와 마리화나와 프리섹스의 골짜기로 빠지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의 실제 모델이 윌리엄 버로스인 건 미국 비트소설 좀 읽은 분은 다 아시겠지만, 어쩜 이렇게 다를까 싶다. 아, 먼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내 취향에 잭이 더 맞는다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빌이 잭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잭과 빌이 대단히 친한 사이다. <네이키드 런치>라는 이 책의 제목을 잭 케루악이 지어주었을 정도니까.


  <네이키드 런치>는 1962년에 출간하자마자 곧바로 외설 시비에 휩쓸린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재판까지 받았는데, 이 책에서 서문, 머리말 비슷하게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무려 41페이지 분량으로 노먼 메일러, 그리고 역시 <길 위에서>의 미친놈 무리 가운데 한 명인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법정 증인 심문 내용 요약을 실었다. 최종 재판 결과, 1966년 7월에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은 <네이키드 런치>가 외설물이 아니라고 판정을 했다. 이 내용을 책 뒤편의 부록이 아니라 작품 앞에 실은 건 당연히 독자에게 <네이키드 런치>에 그런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 있으니 열라 사 읽어보라는 뜻이 있겠지. 그리고 진짜 읽어보면 1960년대 초반 시각으로 외설적이기는 하다. 외설인지 아닌지는 다음으로 하고, 적어도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간했으면 반공을 국시로 하는 3공화국에선 출판사 폐업하고, 작가는 곧바로 끌려가 줘 터진 다음에 한 5년 장하게 콩밥 깨나 먹었을 듯.


  여기서 내가 말한 외설의 뜻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과해도 너무 과한 마약. 진짜로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이 작품을 쓸 당시에 버로스 자신이 쓰는 내내 마약에 취해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데, 마약 상태에서 이런 문장이 나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쓰는 내내 시간 날 때마다, 시간이 없더라도 억지도 만들어서 짬짬이 온갖 종류의 마약을 지속적으로 빨아들였음이 거의 확실한 “것처럼” 작가 자신은 특정 사건이 흐르고 그걸 서술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 보면 그저 한 단편들만 주욱 나열되어 있는 옴니버스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지, 하여간 독특한 시각을 견지한다. 실제로 버로스는 마약을 다루는 작가가 작품의 소재로 쓸 만한 유일한 소재는, “글을 쓰는 순간에 자신의 감각에 존재하는 것” 뿐으로, 자신은 “이야기, 플롯, 연속성을 억지로 삽입하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p.348~349) 그러니 독자는 책을 읽는 내내 지금 작가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의 숲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

  게다가 진짜 온갖 마약들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굳이 부록을 달아 각종 마약의 중독성과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기도 해서, 징글징글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 두번째로는 성애 장면이다. 야하냐고? 그렇다. 왜? 혹 하셔?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성애 장면은 내 취향하고 거리가 먼 동성애, 그것도 남성간 동성애 장면이다. 이것도 이성간 성애와 비슷하다. 가끔 가다가 어떻게 한 번 나와야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지 이 책에서처럼 시도 때도 없이 주구장천, 그것도 자주 마약에 취해 여기다 옮기기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환상 속에서, 그냥 동성애도 아니고 딱 그 부분만 클로즈업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일찍이 <퀴어>와 <정키>를 통해 앞으로 거리를 두기로 했던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해 길게 독후감을 쓰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숱하게 등장하는 마약 중독자들의 망가진 모습만 한 두 장면 소개해볼까? 관두자. 괜히 밥 잘 먹고 그럴 필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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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7-1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길 위에서> 읽은 후 <퀴어>와 <정키>를 접하고 충격@_@;;;; 이 책은 앞부분 읽다가 덮어뒀었는데 Falstaff님 덕분에 생각났어요. 용기가 생기면 재도전해볼까합니다. @_@;;;

Falstaff 2024-07-11 15:24   좋아요 0 | URL
책꽂이에서 좀 더 묵혀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이거 쓸 때 늘 맛이 가 있는 상태여서 두 작품보다 더 난삽하더라고요.

잠자냥 2024-07-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층격적이긴한데 참 재미없는 버로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7-11 15:24   좋아요 0 | URL
이 작자는 로또입니다. 저한테는 참 안 맞아요. ㅋㅋㅋ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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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버라 킹솔버’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근데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전세계 여성 소설가에게 주는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여성소설상”을 유일하게 두 번 받은 것을 필두로 널리 이름을 알린 작가다. 출간한 작품마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으며, 대표적인 진보적 작가로 “사회변혁 문학 literature of social change”를 지원하기 위하여 “벨웨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게 말이 쉽지, 소설을 써서 인세를 받고, 유명 문학상과 상금을 받고, 재수가 좋아 영화로 만들어지면 거액의 대가를 받는 것을 생계로 하는, 즉 다른 이들에게 받기만 하는 일에 익숙해진 작가가 특정 목적을 위해 직접 재단을 만들어 다른 작가들을 지원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을 터이다. 이런 사람은 존경해도 괜찮다.

  위키피디아 내용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어서 소개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주에 있는 사립 드포DePauw대학에 장학생으로 클래식 피아노를 공부하다가,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이 1년에 여섯 번의 (연주)기회를 위하여 피 터지게 경쟁하고 나머지 시간엔 호텔 로비에서 <Blue Moon>을 뚱땅거려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공을 생물학으로 바꾸어 1977년에 이학사를 취득한다. 1980년엔 애리조나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생태학, 진화생물학 석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지금은 명함에 소설가, 시인, 수필가만 적혀 있으니, 도대체 어려운 공부는 왜 한 겨?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이하 “내 이름은…”>는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오늘에 되살린” 작품이다. 읽어보면 정말로 그렇다. 심지어 등장인물의 이름도 디킨스의 출연진과 매우 비슷하다. 데몬 코퍼헤드의 진짜 이름은 데이먼 필즈.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비슷하고,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양아버지 머렐 스톤도 디킨스가 만든 양부 에드워드 머드스톤과 거의 같다. 데몬이 태어날 때부터 데몬과 엄마를 친절하게 보살핀 이웃 페곳 가족도 디킨스의 페고티 가족하고 스펠만 좀 다르다. 이런 식이다. 다만 장소를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런던에서 애팔래치아 산맥과 근접한 버지니아주의 리 카운티, 지극히 작은 소도시로 옮겼을 뿐.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19세기와 달리 불행한 청소년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 사회보호사, 위탁가정에서의 비인간적인 처사, 그리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습관성, 마약성 약품의 무차별적 공급과 이에 결탁한 부패한 의사의 처방전 남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마약 같은, 디킨스 시절엔 꿈도 꾸지 못했을 이야기들. 얼마만큼인가 하면 <내 이름은…>이 마약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악, 나는 첫 문장부터 기겁을 했다.

  “일단 나는 알에서 태어났다.”

  이게 뭐야? 난태생? 박혁거세의 재림? 아니면 죠스 또는 살모사? 난 긴장했다. 킹솔버가 유명작가인 줄 몰랐고, 심지어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을 만큼 무식한 나는, 이거 괜히 애먼 소설 골라서 헛발질한 거 아닌가 싶었던 거다. 난 시력이 좋지 않아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 세상 편하거든.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요즘엔 침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쓰여 있는 거다.

  “일단 나는 알아서 태어났다.”

  늦여름과 가을 사이였는데, 열여덟 살이었던 엄마는 약에 잔뜩 취해 집으로 알고 살던 트레일러 안으로 쳐들어가 화장실 변기 옆, 자기 오줌과 약병들 사이에서 뒹굴고 있는 동안, 다행히 오줌을 누려고 엄마가 아랫도리를 벗고 있어서 데이먼은 말 그대로 자기가 알아서 비질비질 기어 나왔던 거였다. 근데 “알에서” 태어났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싶으면 또 그대로 괜찮았던 것이, 나오긴 나왔는데, 아주 드문 확률로 여전히 양막 안에서, 쉬운 말로, 물에 동동 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알에서” 나왔다고 한들 그게 뭐 크게 까탈이 되겠어? 이웃한 컨테이너에 살며, 리 카운티에 숱한 자식들과 친척을 거느린 마음씨 좋은 낸스 페곳 아줌마가, 산달이 다 된 어린 임산부가 혹시 또 술에 잔뜩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가 싶어 문을 열고 둘러보니 집안 꼴이 이 꼴이라 급하게 뒷처리를 해주어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써 새파랗게 변한 데이먼이 볼기짝을 맞아 첫 울음을 울게 해주었으니, 데이먼 입장에선 세상에 나올 때부터 페곳 아줌마라는 수퍼 히어로/히로인의 구조를 받을 개자식이었으리라.

  페곳 아줌마, 천사다. 아니면 적어도 반 천사. 이 착한 아줌마가 데이먼한테 뭐라 말했느냐 하면, 양막, 보에 싸여 물에 동동 뜬 채 태어났기 때문에 수영을 배우지 않아도 절대 물에 빠져 죽지 않을 거라고. 진짜 그렇게 된다. 저 뒤로 가면. 그리고 내가 알아낸 한 가지 더. 적어도 나중에 악마, 데몬이 되는 데이먼은 자기 초년 팔자가 곤두박질을 해도 수퍼 히로인heroine에서 스펠 e 하나 빠진 헤로인heroin, 히로뽕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것.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묻고 싶겠지. 그럼 데몬이 마약을 하느냐고? 그렇다. 엄마가 약쟁이라서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충분히 약과, 알코올과, 펠맬 담배의 맛에 익숙해 있어, 기적적으로 선천적 기형을 타고 나지 않았어도, 각종 약물과, 알코올과, 담배와 유사한 대마초에 관한 한 누구보다 접근성이 뛰어나지 않겠는가?

  왜? 걱정돼? 나는 아무리 짠한 장면이 나와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었거든. 왜 걱정해? 다 잘될 거야.


  나중엔 훨씬 전인 줄 알게 되지만, 엄마 말에 의하면 데몬이 세상에 나온 날, 난데없이 아빠의 어머니, 그러니까 친 할머니, 벳시 우들 여사가 나타나서, 죽은 아들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악덕의 소굴에서 꺼내 품위있게 키우게 해달라고 하는 걸, 엄마가 단칼에 거절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 이름도 찰스 디킨스에서 데이비드의 대고모, 죽은 아빠의 고모로 나오는 벳시 트로트우드와 무척 비슷하다. 이때는 엄마도 데몬하고 오손도손 잘 살 줄 알았지. 겨우 열여덟 살에 미혼모가 된 약쟁이에 알코올 의존증에 골초인 엄마가, 아무리 20세기 후반이라도 잘 살 수 있으면 소설이 아니어서, 머럴 스톤, 줄여서 ‘스토너’ 즉 약쟁이라고 불리는 스킨헤드의 사내를 데려오는데, 이 스토너가 데몬을 그리도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즐겁게 가스 라이팅을 할 줄 몰랐을 거다. 이 스토너 좀 보시라. 증오심이 담긴 눈을 하고, 밴달 새비지의 턱수염처럼 거대하고 검은 개도 한 마리 데려와, 참 나, 이름을 ‘사탄’이라고 했다. 커트 보니것의 단편집 《카메라를 보세요》에서도 마을의 악당이 사탄이라는 개를 키운다. 보니것의 악당하고 이 스토너하고 되게 비슷하다. 그래서 스토너는 즐거운 마음으로 데몬을 억압하고, 두르려 패며, 가스 라이팅을 한다. 어쨌거나 결혼을 했으면 임신도 하는 법, 엄마의 배는 점점 불려갔고, 뚝 끊었던 약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엔 독한 술을 잔뜩 마시면서 한 주먹의 진정제까지 꿀떡 삼키는 바람에 데몬이 911을 불러야 했지만, 새 아빠 스토너는 어디 캥기는 구석이 있는지, 911 부르는 일로 데몬을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패주었고, 그래도 하여간 앰뷸런스가 와서 병원으로 실려간 엄마는, 죽었다. 데몬이 그렇게 기다리던 동생과 함께.

  젊고 예쁜 여자와 결혼을 했더니, 사생아 하나만 떨구어 놓고 죽어버려 졸지에 법적 홀아비가 된 스토너. 스토너는 다행스럽게 데몬에 대한 양육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죽어가던 응급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중에 사회복지국에서 나온 여자가 시퍼렇게 멍든 데몬의 얼굴을 발견한 것. 사회복지국에서 주장하고, 스토너도 (결코) 반대하지 않아 데몬은 이때부터 위탁가정으로 들어간다. 처음에 간 곳이 크릭슨 씨가 사는 농가 아미티빌. 이곳에는 벌써 본명 스털링 포드, 별명 패스트포워드인 리 고등학교의 풋볼 간판스타와, 말이 많지만 선천적으로 착한 심성을 가졌으며 시간이 나는대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읽는 습관을 가진 토미 워델과, 조금 지능이 떨어지는 스왑-아웃이 살고 있었다. 패스트포워드는 잘 생긴 외모와 성글성글한 사교술로 크릭슨 씨의 친아들인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데몬을 비롯한 세 명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거의 노예 수준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배는 곯고 일만 시키는 크릭슨 씨 집을 나와서 두 번째로 간 위탁가정 매코브 씨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하면 더 했지. 그리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데몬은 가출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페곳 아줌마가 예전에 해준 말, 머더밸리에 있는, 있을 것 같은 할머니 벳시 우들 여사를 찾아. 갖은 고생을 해서 할머니를 만나고,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잘 지내다가,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다시 리 카운티로 돌아와, 리 고등학교 풋볼 팀 (우리나라 직급으로는 감독인) 윈필드 코치 집에 묵는다. 이게 다 할머니가 달마다 꼬박꼬박 수표를 보내주어서 그렇다. 데몬 코퍼헤드는 무럭무럭 자라고, 덩치도 좋은데다가, 풋볼 코치가 싹수를 알아보아 선수로 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단박에 스타로 떠오른다.

  이대로 주욱 잘 나가면 재미없지. 크게 부상을 입는다. 무릎이 돌아가버리는. 근데 미국의 의료환경이란. 엑스레이 찍는 데 한 주, MRI라도 찍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단다. 작은 리 카운티에서는 할 수 없어서 더 큰 도시에 가야 하는데 대기 기간이 그렇다고. 카운티에 스포츠 관련해 일을 해 본 유일한 의사가 와츠 선생이라고 있었다. 이이가 주로 처방하는 것이 옥시코돈인가 하이드로코돈인가 하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였던 것. 가뜩이나 친 약물성의 데몬 코퍼헤드는 와츠 선생의 처방에 따른 합법적 약물 투여로 인해 점점 더 중독으로 빠져 든다. 이전에도 크릭슨 농장의 패스트포워드 등과 어울리면서 충분한 경험이 있었고 작은 도시 리 카운티에서 하이틴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윈필드 코치의 딸 앵거스(디킨스 작품의 ‘아그네스’)만 빼고 모두 약물에 절여진 상태였던 거다.

  어떤 경로로 데몬이 약물 중독으로 접어들었는지 말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나름대로 짧게 쓴다고 했는데도 길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 미국 소설가가 십대를 주인공으로 쓴 작품이고, 더구나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리메이크잖은가.


  여담. 마음씨 좋은 페곳 아줌마의 딸이자 데몬의 오랜 친구 매곳maggot(구더기)의 엄마는 살인은 아니고 강력범죄 때문에 구칠랜드 여자교도소에서 오래 수감생활을 한다. 762쪽까지 달리면 메곳의 엄마가 출소할 때가 되고, 드디어 이름이 나오기는 한다. 한 페이지에 “머라이어”, “머리아어”, 그리고 “머리이어”라고. 흠, 놀라운 일이야. 이렇게 해서 <데몬 코퍼헤드>는 “알에서” 태어나는 걸로 시작해 같은 사람의 세 가지 이름으로 막바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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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09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이 책 나왔을 때 팔님이 생각나더군요.
디킨스 좋아하시잖아요. ㅎ
근데 이런 작가가 있긴하더군요.
전에 도 선생님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오늘에 되살린 작가의 작품이
있다고 하는데 누군지 기억이나지 않는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Falstaff 2024-07-10 06:57   좋아요 1 | URL
아니라니까요, 앞으로 디킨스 안 읽겠다고 몇 번이나 고사를 지냈는데요. ㅋㅋㅋ
 
이아생트의 정원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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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보스코의 3부작을 다 읽었다. 순서대로 <반바지 당나귀>, <이아생트> 그리고 <이아생트의 정원>. <이아생트> 독후감에서 이미 밝혔듯이 나는 앙리 보스코를 읽으면서 동시대의 프랑스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슐라르가 그렇듯이 보스코의 작품도 내밀한 몽상과 의식의 확장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독자가 쉽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보스코와 합이 맞지 않는 독자들은 곤욕을 치룰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아생트의 정원>은 전편 <이아생트>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만만하지 않다.

  이 책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온전히 즐기려면 수고스럽지만 <반바지 당나귀>와 <이아생트>를 먼저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만일 내가 앞의 두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이아생트의 정원>이 지금처럼 흥미로울 수 있었을까, 이걸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9년 전에 읽은<반바지 당나귀>의 장면, 분위기, 심지어 나무들까지 고스란히 소환할 수 있었으니, 이런 것도 책읽기의 소소한 즐거움이 아닌가 말이지.

  그러나 독후감 쓰기가 쉽지 않다. 앙리 보스코 작품, 그래봤자 이번이 세번째인데,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인물인 이아생트는 사실 작품 속에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이아생트를 둘러싼 다른 등장인물이 작품을 만들어간다. 그러면 이아생트가 하는 역할은 무엇이냐고? 별 대사도 없는 히아신스 아가씨, 이아생트, 결국 작품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이 소녀의 “인간계로부터 실종 상태에서의 귀환”에 집중한다. 당연히 “인간계로부터의 실종”은 <반바지 당나귀>에서 있었으며 귀환으로 3부작이 끝난다.

  <반바지 당나귀>에서 실종된 이아생트는 어디로 갔을까? 저 산골마을 오스피탈레에서 더 높은 곳에 있던 마법사 시프리앵의 농장. 당나귀한테 반바지를 입혀 농장에서 생산한 것들을 내다 팔던 시프리앵은 자신의 후계자로 소년 콩스탕탱 글로리오를 점찍는다. 그러나 농장을 접고 길을 떠날 때는 콩스탕탱의 집에 들어와 살던 소녀 이아생트를 데리고 간다. 저 성 가브리엘 고원, 5백만 평에 육박하는 외딴 평원에 나지막이 솟은 언덕위의 집 라 주네스트로. 이곳에서 있던 일을 쓴 것이 두번째 작품 <이아생트>이다. 소녀 혼자 살던 집에 마법사 시프리앵이 돌아와 집시들과 축일의 밤을 보낸 이야기. 이것을 이름없는 화자 ‘나’의 시선으로 쓴 것.


  <이아생트의 정원> 역시 화자 ‘나’의 시각으로 쓰지만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밝힌다. “메장 드 메그르뮈.” 이이는 작품의 초입에 분명히 밝힌다.


  “(내가 잘 알았던 한 소녀 이아생트) 이야기는 이미 나온 바 있지만 이상한 방식이었다. 난 그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었으나, 정말이지 이치에 닿을 만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 (p. 14)


  농장이 있으며 가축과 2백마리의 양도 가지고 있는 메장 씨가 말하는 이상한 방식의 이미 나온 이야기는 3부작 가운데 두번째 <이아생트>를 가리킨다(고 나는 이해했다). 화자 ‘나’는 이아생트가 성 가브리엘 고원의 외딴 집에 있을 때 라 주네스트가 까마득하게 보이는 작은 집 라 코망드리에 머물렀다. ‘나’가 광야의 밤에 불빛을 비추는 유일한 집인 라 주네스트에 이아생트가 살고 어느 날 축일의 밤을 보낸 이야기가 전부. 이외의 광활한 여백은 전부 몽상으로 채운 <이아생트>를 메장씨는 이상한 방식, 이치에 닿지 않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는, 말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적으로 믿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초장부터 본명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그렇다는 말일 뿐. 어차피 작가가 같은 사람인 걸? <이아생트의 정원>도 물론 화자 메장 씨의 다짐이 있었으니 앞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몽상적이고, 몽상적이라기보다 몽환, 환상의 묘사도 여전하다.

  메장 씨는 양 2백마리를 마지막 목축 장인인 늙은 아르나비엘에게 맡겼다. 침묵과 관상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르나비엘은 일년 중 겨울을 제외한 여덟 달 동안 양떼와 개 두 마리만 데리고 8킬로미터 떨어진 에스칼 고개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한 해 11월에, 이제 양떼를 거느리고 내려와야 할 시점에 수십년 동안 없었던 큰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고개에는 집시 무리도 있어서, 아르나비엘은 그들을 피해 산줄기를 타고 간신히 보리솔(택호宅號: 가옥의 이름)에 도착, 마음씨 좋고 현명한 게리통 부부의 도움으로 양들을 낡은 막사로 피신시켜 단 한 마리의 손실도 없이 건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메장씨가 보리솔과 게리통 부부에 대해 들은 첫번째 소식이었고, 6년 전이었다.

  양 주인은 당연히 게리통 부부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해야 마땅했지만 겨우내 악천후와 할 일이 겹쳐 길을 나서지 못하다가 다음해 성 안셀무스 축일인 4월 21일에야 두 시간 마차를 타고 아멜리에르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 나무 아래에 말과 마차를 묶어둔 채 언덕을 올라 보리솔에 도착했는데:

  소박하지만 튼튼하고, 퓌를루브 봉우리 아래 여러 오름 중 첫번째 언덕 위의 아주 오래된 농가, 과수원에는 자두나무 네 그루, 앵두나무 열 그루가 있고, 농가 위쪽 바위에서 손가락 굵기의 갈대를 타고 은밀히 흐르는 샘이 개수대 격인 수반 위로 떨어진다.

  이 장면을 읽는 순간, 번쩍, 저 <당나귀 반바지> 시절 마법사 시프리앵의 농장. 갈수록 샘의 수량이 줄어들어 결국에는 과수원마저 황폐화되고 마는 일까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마법사 시절엔 충분한 양이 흐르다가 여우와 뱀의 출현 이후 수량이 줄어들던 샘, 생명의 근원. 분명히 게리통 부부의 소유가 아닌 당나귀가 다리에 옷을 입은 채 창고에 서있기도 하고.

  백 명이 안 되는 주민이 사십 채가 넘지 않는 땅딸막한 집에서 사는 아멜리에르 마을. 건물 반쯤이 땅속에 잠겨 있어 들어가려면 오히려 네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성당은 늙은 베르젤리앙 신부가 세상의 주목을 멀리한 채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정말 작은 사제관, 정원 벽에 기댄 네 개의 벌통. 정원 깊은 안쪽 문을 나서면 곧바로 움푹 팬 협곡이 드러나고 거기부터 이름없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두 그루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야외용 벤치가 놓은 곳. 아멜리에르 마을 역시 <반바지 당나귀>의 오스피탈레 마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렇게 3부작의 마지막 무대는 첫 무대를 향하는 것일까?


  보리솔의 가난하고 늙은 부부가 외로이 크리스마스를 지낼 것이 안타까워 찾아간 메장씨. 집에서 가져간 칠면조와 디저트와 사촌이 아프리카에서 보내준 오렌지 여섯 알과 함께 조촐한 크리스마스 밤을 즐기던 날이었다. 이날 앞에서 말한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가 게리통 씨네 헛간에 메어져 있었고,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밤 늦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 밖엔 보리솔 옆에 텐트를 쳤던 집시 여인이 아이 하나를 안고 서 있었으며, 애가 아프고, 불이 없어서 추워한다 해서 집안에 들였다.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인 여인이 잠시 후 몸을 일으키며 부드러운 음색으로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터이니 오늘 밤만 아이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마르고, 기이하게 미동조차 없는 여자아이.

  차게 언 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머리, 빈 조개껍질 같은 가벼운 두개골은 텅 빈 듯해서 손가락을 대기조차 겁이 나는 아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죽 잤다. 메장씨와 게리통 부부가 밤새 돌보고, 동이 트자마자 야영지에 가보니, 집시들은 이미 떠났다. 추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뿌리 쪽은 적갈색을 띤 금발의, 열살은 넘지 않은 것 같은 소녀만 남긴 채. 헛간 당나귀 곁에는 자루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아이의 옷가지와 편지와 약간의 돈이 든. “아이를 맡깁니다. 펠리시엔이라고 부르십시오. 부모가 없는 아이입니다.  잘 키워주십시오. 적지만 비용을 대겠습니다. 돈은 때때로 보내겠습니다.”

  이 아이가 이아생트다. 집시 혹은 마법사 시프리앵의 하수들은 이후 돈을 보내지 않았지만, 거의 백지 상태의, 아직은 펠리시엔인 아이는, 아무런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도 없었는데, 말을 하면 잠이 쏟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법사 시프리앵은 이 아이를 어디로 데려갔었을까? 저 멀고 먼 성 가브리엘 고원의 유일한 불빛, 라 주네스트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만일 내가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살았다면 지금 보다 분명하게 이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이 여전히 기독교 문명권이었을 때라면. 하여간 이아생트, 펠리시엔한테 성 가브리엘 고원 시절은 지워졌고, 인간계로부터 사라진 세월이었으며, 이제 <이아생트의 정원>에서 남은 유일한 것은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오는 일 뿐이다. 길은 막혀 있다. 벽을 여는 문에는 튼튼한 자물쇠가 걸려 있고, 당연히 자물쇠가 있으면 열쇠 또한 있는 법,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분은, 고단하더라도 <반바지 당나귀>, <이아생트>, 그리고 <이아생트의 정원> 모두를 읽으셔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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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08 0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넷은 너무 박하다. 그렇다고 다섯은 조금 버겁고

hnine 2024-07-08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세권의 소설을 삼부작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있군요. 삼부작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까지 잘 설명해주셔서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반바지 당나귀> 읽은 것은 한권의 소설을 읽었다기보다 1/3 만 읽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두권 더 읽어야 비로소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반바지 당나귀 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성경의 내용을 너무나 자주 상기시킨다는 점에 슬쩍 반향심이 들기 시작해서 편견을 같고 읽기 시작한게 하나의 장벽이었어요.

Falstaff 2024-07-08 07:01   좋아요 0 | URL
이 삼부작은 특히 저자와 독자가 맞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다행입니다만 책 좀 읽으시는 분도 실망하는 경우 몇 번 봤습니다.
저도 <반바지 당나귀>만 달랑 읽었을 때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종교인 것 같기도 하고, 민간신앙인 것 같기도 하고, 둘이 합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환상 소설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9년 전이라 정확한 기억 아니지만, <반바지 당나귀>는 확실히 헷갈리면서 읽었습니다. 결국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글자만 읽었다 해도 아니라고 할 자신이 없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7-11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별점 반점을 왜 안 만들어가지규 이렇게 고뇌의 앙을 늘리는가… ㅋㅋㅋㅋ

Falstaff 2024-07-12 05:38   좋아요 1 | URL
맞아요, 맞아. 근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반점이 생기잖아요, 그럼 별5는 거의 없을 거 같기도 하기도 합니다.
 
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7
정지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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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독후감은 2024년 6월 2일에 썼다. 6월 말에 터진 정지돈과 그의 전 연인 간 스캔들과 관계없다. 스캔들 때문에 독후감을 수정할 이유도 없고, 다시 쓰지도 않았다.)


  처음 읽은 정지돈이 <모든 것은 영원했다>. 참 흥미롭게 읽었다. 심지어 독후감에 (로베르토 볼라뇨보다) “더 미학적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후에 도서관 신간 코너에 정지돈의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도 눈에 띄자마자 읽었다. 대략 난감. 이어서 신간이 나왔다는 걸 아는 즉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받아 읽은 책이 <브레이브 뉴 휴먼>. 완전 난감. 이젠 정지돈이 책을 내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본 후에 고를까 말까 생각 좀 해봐야겠다.


  체외인이라고 있다. 체외인體外人. 몸 밖에서 나온 사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체외수정인? 204x년. 대한민국은 계속되는 출산율 감소로 인한 인구 저하로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을 인정하는 체외인법을 세계최초로 통과시키고, 정부차원에서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간다. 신체건강한 성인 남녀로부터 정자와 난자를 기증받아 대리모가 아닌 공장식 인공자궁 센터에서 배양해, 이들을 인력이 부족한 산업에 투입하는 용도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생식세포, 즉 난자와 정자를 기증하는 것은 국가의 법으로 규정한 국민의 의무가 되었으며, 시행 초기부터 다양한 비판과 우려가 있었지만 아무도 인구감소의 보완이라는 측면과 이들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부인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간이 지난 후에 체외인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았고, 이 방식에 의한 생명 창조는 인류를 생식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획기적 전환점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뉴턴의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하여, 체외인이 등장한 이후부터 인간들은 자연분만을 거의 신성시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경향은 상류층일수록 높아져 가정, 가족 개념을 중시하는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체외인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속마음이 그렇다는 것이고 겉으로는 인자한 무시 같은 것으로 표현되었다. 인간의 가정/가족 중시 개념은, 체외인이 생식세포를 추적해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을 엄격하게 금지하게 만들었다. 멀쩡한 가정/가족을 이루어 사는 인간에게 느닷없이 젊은 시절에 난자/정자를 기증해 자기도 모르는 자식이 딸입네, 아들입네 하면서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기겁을 하겠느냐는 말이지. 말은 맞다. 체외인은 태어날 때부터, 아니 최초 생명으로 수정될 때부터 부모도, 가족도, 뿌리도, 역사도 없는 인간으로 규정되었으니까. 애초부터 의무나 책임감, 그리고 정체성이 없는 일회용품과 다를 바 없게 태어난 건데, 이들도 마흔여섯 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전혀 다를 바 없는데도 그랬다. 이건 지난 세기, 지지난 세기라면 혹시 모를까, 개나 고양이한테도 엄마, 아빠라고 불리고 싶은 21세기 현대인이 접수하기는 조금, 일본말로 하면, 조또 무리 아닌가?

  갈수록 난감한 것은, 체외인법 2장 4조에 의거하여, 모든 체외인의 거주와 이전은 정부가 정한 규정을 따르게 만들었고, 이들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하여 오른쪽 손목에 식별 가능한 생체 바코드를 새겼다. 체외인의 어떠한 바코드 조작도 금지한 건 당연하다. 이를 어기면 체외인의 존재를 말소한다고. ‘사형’이 아니라 ‘존재 말소’다.


  인간과 똑 같은 DNA를 가지고 있으면 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수정 후에 어떤 환경에서 배양, 즉 꾸준하게 세포분열을 하고 세상에 나왔는 지를 막론해서. 비록 어린 시절에 긴 복도를 따라 수많은 방이 있는 거대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에 2백명이 넘는 가족과 함께 산 어린시절을 가졌으며, 자라면서 체외인이 해야 마땅한 직업을 비롯한 삶(인간에게는 체외인이 살면서 해야 할 직업이 가장 중요했으리라)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세뇌 비슷하게 교육을 받은 결과, 다수의 체외인이 맡은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하는 데 만족하는 반면, 다른 다수는 일반인과 동일한 욕구를 느껴 인간으로 승격하기 위해 노력하는 무리도 있다. 이렇게 조건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해 인간과 같은 레벨로 상승하려는 족속을 일인,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체외인을 이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책은 당연히 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체외인은 대개 외국어 식 이름으로 불린다. 주인공 아미. 이름이 없는 어린 시절에는 유전자 시퀀스를 암호화한 고유식별번호 CLR-70-797851로 불리기도 했다. 아미의 친구가 유일하게 우리한테 친숙하게 권정현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아미의 2백명에 달하는 가족 가운데 한 명이다. 체외인은 인간과의 섹스가 금지되어 있으며, 기껏 인간이 출산과 육아에서 해방시킨 만큼, 어떠한 경우라도 임신은 허가받지 못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면 존재 삭제를 각오해야 한다. 권정현지는 이것을 뻔히 알면서도 임신을 하고, 출산을 위해 마약중독자가 운영하는 야매 산파 컨테이너를 찾아 충청남도 결성으로 떠난다. 아미는 대단히 공부 잘하는 여성 체외인으로, 체외인 출신 인간 리젠쿠이가 회장으로 있는, 체외인 2차 버전인 합성인 생성 연구소에 다닌다.


  스토리를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사실 축을 이루는 스토리가 그동안 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봐서 익숙하다. 그나마 조금 진화해 체내에 칩을 삽입하지 않고 바코드를 찍지만 그것도 이미 많이 써먹었다. 인간 출산 공장을 굳이 어디서 봤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그럴 필요 없지? 정지돈은 작가 후기에서 <멋진 신세계>와 스필버그의 영화 <AI>를 거론하며, 특히 <멋진 신세계>는 자기 작품의 좋은 참조점이 되긴 했지만 방향성은 반대라고 주장한다. 근데 작품 속에서 인간 아날로그맨은 아미와 또다른 일인 체외인인 애드가 호텔의 방으로 올라갈 때 로비에서 예브게니 자먀찐의 환상적인 SF 작품 <우리들>을 읽고 있기도 하다. 이것 말고도 나는 피터 애크로이드의 디스토피아 미래소설 <플라톤의 반란>과 마르코 브람빌라 감독의 B급 영화 <데몰리션맨> 같은 것도 떠올랐다.

  우리가 처한 출산율 감소와 인구 절벽은 알겠는데, 굳이 체외인으로 이 문제를 짚어야 하는지 그건 모르겠다. 나는 읽는 내내 체외인들과 지금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 외국인을 치환해보았다. 개발도상국에서 입국해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어 돌아가거나 이 땅에 정착하는 사람들. 토종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리 토종도 아닌 우리나라 사람한테 차별과 조롱과 심지어 가끔 멸시도 당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일을 체외인이 떠맡는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의 정지돈은 어디 있을까? 나는 그 정지돈을 좋아하는 것이지 <브레이브 뉴 휴먼>의 작가 정지돈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이미 숱하게 읽어본 듯한 이 책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좀 따져가면서 정지돈을 읽어야겠다. 이건 아까 한 말이다. 그래도 한 번 더 한다. 또 그의 이름이 보이면 흔들릴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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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05 0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예정 삽질:
월요일.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의 정원>
화요일. 바버라 킹솔버,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목요일. 윌리엄 S.버로우, <네이키드 런치>
금요일.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끈>

네비올로 2024-07-06 23:09   좋아요 0 | URL
지난주에 데몬 코퍼헤드를 완독한 일인으로서 담주 Falstaff님의 후기가 넘 궁금하네요.^^

Falstaff 2024-07-07 15:48   좋아요 1 | URL
데몬 코퍼헤드는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리메이크 작이잖아요. 디킨스를 미리 읽었더니 긴장감이 확 줄더라고요. 어차피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읽기에 괜찮았습니다. ^^

stella.K 2024-07-05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정지돈이 왜요? 전 여친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살짝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도 정지돈 앞으로 안 읽단 말씀은 안 하시네요. ㅎ 전 정지돈은 영...

stella.K 2024-07-05 18:25   좋아요 1 | URL
아, 무슨 내용인지 방금 알았네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몇년 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모르겠네요.

Falstaff 2024-07-06 06:17   좋아요 2 | URL
엑스 여친 이름까지 그냥 써버린 건 오버 맞다 싶네요.
근데 소설가하고 연애하면서, 자기도 작가더라고요, 어떤 형태라도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궁금해지더군요. 물론 이 책 말고, 전권회수에 들어간 작품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고, 상대가 이렇게 빡칠 정도로 까발렸다면 작은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하여간 집구석에 작가 한 명이 생기면 그 집 족보는 다 개 털리는 겁니다. ㅋㅋㅋ

stella.K 2024-07-06 09:31   좋아요 0 | URL
ㅎㅎ 자전소설 안 쓰는 소설가가 어딨습니까? 단지 지돈 형 지혜가 없었던 거죠. 아니면 허락받고 쓰던가. 회수된 책 급관심 생기던데 기회가 없어졌네요. 앞서 비슷한 사례의 작가가 쓴 책은 직전에 구입해서 읽어봤는데 뭐 별것도 아니더만 당사자끼리나 얼굴 붉히는거지 전 좀 그랬습니다. 이젠 오래된일이라 작가 이름도 기억도 안 나네요.ㅋ

hnine 2024-07-05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지돈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요, 기발하다는 생각과 함께, AI가 써낸 소설 같다는 생각이 함께 들어요. 깊이와 의미를 묻게 되요.
이 책도, 별 세개를 주셨음에도 벌써 어디 메모해놓고 빌려서라도 읽어볼 생각 하고 있네요.

Falstaff 2024-07-06 06:20   좋아요 0 | URL
저는 정지돈 세 권 읽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세 권이 전부 다른 주제, 다른 양식, 아예 다른 장르의 작품이다, 실험적인 작가다, 싶어서 좀 더 읽어볼 작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독특합니다.

자목련 2024-07-05 17: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지돈 별로인데,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급 궁금해집니다.

Falstaff 2024-07-06 06:22   좋아요 0 | URL
저는 ‘첫빠따‘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걸려서 말입죠. ㅎㅎㅎ <모든 것...>은 얼핏 볼라뇨가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