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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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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킹솔버’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근데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전세계 여성 소설가에게 주는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여성소설상”을 유일하게 두 번 받은 것을 필두로 널리 이름을 알린 작가다. 출간한 작품마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으며, 대표적인 진보적 작가로 “사회변혁 문학 literature of social change”를 지원하기 위하여 “벨웨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게 말이 쉽지, 소설을 써서 인세를 받고, 유명 문학상과 상금을 받고, 재수가 좋아 영화로 만들어지면 거액의 대가를 받는 것을 생계로 하는, 즉 다른 이들에게 받기만 하는 일에 익숙해진 작가가 특정 목적을 위해 직접 재단을 만들어 다른 작가들을 지원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을 터이다. 이런 사람은 존경해도 괜찮다.
위키피디아 내용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어서 소개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주에 있는 사립 드포DePauw대학에 장학생으로 클래식 피아노를 공부하다가,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이 1년에 여섯 번의 (연주)기회를 위하여 피 터지게 경쟁하고 나머지 시간엔 호텔 로비에서 <Blue Moon>을 뚱땅거려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공을 생물학으로 바꾸어 1977년에 이학사를 취득한다. 1980년엔 애리조나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생태학, 진화생물학 석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지금은 명함에 소설가, 시인, 수필가만 적혀 있으니, 도대체 어려운 공부는 왜 한 겨?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이하 “내 이름은…”>는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오늘에 되살린” 작품이다. 읽어보면 정말로 그렇다. 심지어 등장인물의 이름도 디킨스의 출연진과 매우 비슷하다. 데몬 코퍼헤드의 진짜 이름은 데이먼 필즈.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비슷하고,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양아버지 머렐 스톤도 디킨스가 만든 양부 에드워드 머드스톤과 거의 같다. 데몬이 태어날 때부터 데몬과 엄마를 친절하게 보살핀 이웃 페곳 가족도 디킨스의 페고티 가족하고 스펠만 좀 다르다. 이런 식이다. 다만 장소를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런던에서 애팔래치아 산맥과 근접한 버지니아주의 리 카운티, 지극히 작은 소도시로 옮겼을 뿐.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19세기와 달리 불행한 청소년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 사회보호사, 위탁가정에서의 비인간적인 처사, 그리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습관성, 마약성 약품의 무차별적 공급과 이에 결탁한 부패한 의사의 처방전 남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마약 같은, 디킨스 시절엔 꿈도 꾸지 못했을 이야기들. 얼마만큼인가 하면 <내 이름은…>이 마약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악, 나는 첫 문장부터 기겁을 했다.
“일단 나는 알에서 태어났다.”
이게 뭐야? 난태생? 박혁거세의 재림? 아니면 죠스 또는 살모사? 난 긴장했다. 킹솔버가 유명작가인 줄 몰랐고, 심지어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을 만큼 무식한 나는, 이거 괜히 애먼 소설 골라서 헛발질한 거 아닌가 싶었던 거다. 난 시력이 좋지 않아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 세상 편하거든.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요즘엔 침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쓰여 있는 거다.
“일단 나는 알아서 태어났다.”
늦여름과 가을 사이였는데, 열여덟 살이었던 엄마는 약에 잔뜩 취해 집으로 알고 살던 트레일러 안으로 쳐들어가 화장실 변기 옆, 자기 오줌과 약병들 사이에서 뒹굴고 있는 동안, 다행히 오줌을 누려고 엄마가 아랫도리를 벗고 있어서 데이먼은 말 그대로 자기가 알아서 비질비질 기어 나왔던 거였다. 근데 “알에서” 태어났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싶으면 또 그대로 괜찮았던 것이, 나오긴 나왔는데, 아주 드문 확률로 여전히 양막 안에서, 쉬운 말로, 물에 동동 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알에서” 나왔다고 한들 그게 뭐 크게 까탈이 되겠어? 이웃한 컨테이너에 살며, 리 카운티에 숱한 자식들과 친척을 거느린 마음씨 좋은 낸스 페곳 아줌마가, 산달이 다 된 어린 임산부가 혹시 또 술에 잔뜩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가 싶어 문을 열고 둘러보니 집안 꼴이 이 꼴이라 급하게 뒷처리를 해주어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써 새파랗게 변한 데이먼이 볼기짝을 맞아 첫 울음을 울게 해주었으니, 데이먼 입장에선 세상에 나올 때부터 페곳 아줌마라는 수퍼 히어로/히로인의 구조를 받을 개자식이었으리라.
페곳 아줌마, 천사다. 아니면 적어도 반 천사. 이 착한 아줌마가 데이먼한테 뭐라 말했느냐 하면, 양막, 보에 싸여 물에 동동 뜬 채 태어났기 때문에 수영을 배우지 않아도 절대 물에 빠져 죽지 않을 거라고. 진짜 그렇게 된다. 저 뒤로 가면. 그리고 내가 알아낸 한 가지 더. 적어도 나중에 악마, 데몬이 되는 데이먼은 자기 초년 팔자가 곤두박질을 해도 수퍼 히로인heroine에서 스펠 e 하나 빠진 헤로인heroin, 히로뽕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것.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묻고 싶겠지. 그럼 데몬이 마약을 하느냐고? 그렇다. 엄마가 약쟁이라서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충분히 약과, 알코올과, 펠맬 담배의 맛에 익숙해 있어, 기적적으로 선천적 기형을 타고 나지 않았어도, 각종 약물과, 알코올과, 담배와 유사한 대마초에 관한 한 누구보다 접근성이 뛰어나지 않겠는가?
왜? 걱정돼? 나는 아무리 짠한 장면이 나와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었거든. 왜 걱정해? 다 잘될 거야.
나중엔 훨씬 전인 줄 알게 되지만, 엄마 말에 의하면 데몬이 세상에 나온 날, 난데없이 아빠의 어머니, 그러니까 친 할머니, 벳시 우들 여사가 나타나서, 죽은 아들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악덕의 소굴에서 꺼내 품위있게 키우게 해달라고 하는 걸, 엄마가 단칼에 거절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 이름도 찰스 디킨스에서 데이비드의 대고모, 죽은 아빠의 고모로 나오는 벳시 트로트우드와 무척 비슷하다. 이때는 엄마도 데몬하고 오손도손 잘 살 줄 알았지. 겨우 열여덟 살에 미혼모가 된 약쟁이에 알코올 의존증에 골초인 엄마가, 아무리 20세기 후반이라도 잘 살 수 있으면 소설이 아니어서, 머럴 스톤, 줄여서 ‘스토너’ 즉 약쟁이라고 불리는 스킨헤드의 사내를 데려오는데, 이 스토너가 데몬을 그리도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즐겁게 가스 라이팅을 할 줄 몰랐을 거다. 이 스토너 좀 보시라. 증오심이 담긴 눈을 하고, 밴달 새비지의 턱수염처럼 거대하고 검은 개도 한 마리 데려와, 참 나, 이름을 ‘사탄’이라고 했다. 커트 보니것의 단편집 《카메라를 보세요》에서도 마을의 악당이 사탄이라는 개를 키운다. 보니것의 악당하고 이 스토너하고 되게 비슷하다. 그래서 스토너는 즐거운 마음으로 데몬을 억압하고, 두르려 패며, 가스 라이팅을 한다. 어쨌거나 결혼을 했으면 임신도 하는 법, 엄마의 배는 점점 불려갔고, 뚝 끊었던 약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엔 독한 술을 잔뜩 마시면서 한 주먹의 진정제까지 꿀떡 삼키는 바람에 데몬이 911을 불러야 했지만, 새 아빠 스토너는 어디 캥기는 구석이 있는지, 911 부르는 일로 데몬을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패주었고, 그래도 하여간 앰뷸런스가 와서 병원으로 실려간 엄마는, 죽었다. 데몬이 그렇게 기다리던 동생과 함께.
젊고 예쁜 여자와 결혼을 했더니, 사생아 하나만 떨구어 놓고 죽어버려 졸지에 법적 홀아비가 된 스토너. 스토너는 다행스럽게 데몬에 대한 양육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죽어가던 응급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중에 사회복지국에서 나온 여자가 시퍼렇게 멍든 데몬의 얼굴을 발견한 것. 사회복지국에서 주장하고, 스토너도 (결코) 반대하지 않아 데몬은 이때부터 위탁가정으로 들어간다. 처음에 간 곳이 크릭슨 씨가 사는 농가 아미티빌. 이곳에는 벌써 본명 스털링 포드, 별명 패스트포워드인 리 고등학교의 풋볼 간판스타와, 말이 많지만 선천적으로 착한 심성을 가졌으며 시간이 나는대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읽는 습관을 가진 토미 워델과, 조금 지능이 떨어지는 스왑-아웃이 살고 있었다. 패스트포워드는 잘 생긴 외모와 성글성글한 사교술로 크릭슨 씨의 친아들인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데몬을 비롯한 세 명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거의 노예 수준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배는 곯고 일만 시키는 크릭슨 씨 집을 나와서 두 번째로 간 위탁가정 매코브 씨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하면 더 했지. 그리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데몬은 가출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페곳 아줌마가 예전에 해준 말, 머더밸리에 있는, 있을 것 같은 할머니 벳시 우들 여사를 찾아. 갖은 고생을 해서 할머니를 만나고,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잘 지내다가,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다시 리 카운티로 돌아와, 리 고등학교 풋볼 팀 (우리나라 직급으로는 감독인) 윈필드 코치 집에 묵는다. 이게 다 할머니가 달마다 꼬박꼬박 수표를 보내주어서 그렇다. 데몬 코퍼헤드는 무럭무럭 자라고, 덩치도 좋은데다가, 풋볼 코치가 싹수를 알아보아 선수로 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단박에 스타로 떠오른다.
이대로 주욱 잘 나가면 재미없지. 크게 부상을 입는다. 무릎이 돌아가버리는. 근데 미국의 의료환경이란. 엑스레이 찍는 데 한 주, MRI라도 찍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단다. 작은 리 카운티에서는 할 수 없어서 더 큰 도시에 가야 하는데 대기 기간이 그렇다고. 카운티에 스포츠 관련해 일을 해 본 유일한 의사가 와츠 선생이라고 있었다. 이이가 주로 처방하는 것이 옥시코돈인가 하이드로코돈인가 하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였던 것. 가뜩이나 친 약물성의 데몬 코퍼헤드는 와츠 선생의 처방에 따른 합법적 약물 투여로 인해 점점 더 중독으로 빠져 든다. 이전에도 크릭슨 농장의 패스트포워드 등과 어울리면서 충분한 경험이 있었고 작은 도시 리 카운티에서 하이틴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윈필드 코치의 딸 앵거스(디킨스 작품의 ‘아그네스’)만 빼고 모두 약물에 절여진 상태였던 거다.
어떤 경로로 데몬이 약물 중독으로 접어들었는지 말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나름대로 짧게 쓴다고 했는데도 길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 미국 소설가가 십대를 주인공으로 쓴 작품이고, 더구나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리메이크잖은가.
여담. 마음씨 좋은 페곳 아줌마의 딸이자 데몬의 오랜 친구 매곳maggot(구더기)의 엄마는 살인은 아니고 강력범죄 때문에 구칠랜드 여자교도소에서 오래 수감생활을 한다. 762쪽까지 달리면 메곳의 엄마가 출소할 때가 되고, 드디어 이름이 나오기는 한다. 한 페이지에 “머라이어”, “머리아어”, 그리고 “머리이어”라고. 흠, 놀라운 일이야. 이렇게 해서 <데몬 코퍼헤드>는 “알에서” 태어나는 걸로 시작해 같은 사람의 세 가지 이름으로 막바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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