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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의 정원 ㅣ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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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보스코의 3부작을 다 읽었다. 순서대로 <반바지 당나귀>, <이아생트> 그리고 <이아생트의 정원>. <이아생트> 독후감에서 이미 밝혔듯이 나는 앙리 보스코를 읽으면서 동시대의 프랑스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슐라르가 그렇듯이 보스코의 작품도 내밀한 몽상과 의식의 확장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독자가 쉽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보스코와 합이 맞지 않는 독자들은 곤욕을 치룰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아생트의 정원>은 전편 <이아생트>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만만하지 않다.
이 책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온전히 즐기려면 수고스럽지만 <반바지 당나귀>와 <이아생트>를 먼저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만일 내가 앞의 두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이아생트의 정원>이 지금처럼 흥미로울 수 있었을까, 이걸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9년 전에 읽은<반바지 당나귀>의 장면, 분위기, 심지어 나무들까지 고스란히 소환할 수 있었으니, 이런 것도 책읽기의 소소한 즐거움이 아닌가 말이지.
그러나 독후감 쓰기가 쉽지 않다. 앙리 보스코 작품, 그래봤자 이번이 세번째인데,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인물인 이아생트는 사실 작품 속에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이아생트를 둘러싼 다른 등장인물이 작품을 만들어간다. 그러면 이아생트가 하는 역할은 무엇이냐고? 별 대사도 없는 히아신스 아가씨, 이아생트, 결국 작품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이 소녀의 “인간계로부터 실종 상태에서의 귀환”에 집중한다. 당연히 “인간계로부터의 실종”은 <반바지 당나귀>에서 있었으며 귀환으로 3부작이 끝난다.
<반바지 당나귀>에서 실종된 이아생트는 어디로 갔을까? 저 산골마을 오스피탈레에서 더 높은 곳에 있던 마법사 시프리앵의 농장. 당나귀한테 반바지를 입혀 농장에서 생산한 것들을 내다 팔던 시프리앵은 자신의 후계자로 소년 콩스탕탱 글로리오를 점찍는다. 그러나 농장을 접고 길을 떠날 때는 콩스탕탱의 집에 들어와 살던 소녀 이아생트를 데리고 간다. 저 성 가브리엘 고원, 5백만 평에 육박하는 외딴 평원에 나지막이 솟은 언덕위의 집 라 주네스트로. 이곳에서 있던 일을 쓴 것이 두번째 작품 <이아생트>이다. 소녀 혼자 살던 집에 마법사 시프리앵이 돌아와 집시들과 축일의 밤을 보낸 이야기. 이것을 이름없는 화자 ‘나’의 시선으로 쓴 것.
<이아생트의 정원> 역시 화자 ‘나’의 시각으로 쓰지만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밝힌다. “메장 드 메그르뮈.” 이이는 작품의 초입에 분명히 밝힌다.
“(내가 잘 알았던 한 소녀 이아생트) 이야기는 이미 나온 바 있지만 이상한 방식이었다. 난 그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었으나, 정말이지 이치에 닿을 만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 (p. 14)
농장이 있으며 가축과 2백마리의 양도 가지고 있는 메장 씨가 말하는 이상한 방식의 이미 나온 이야기는 3부작 가운데 두번째 <이아생트>를 가리킨다(고 나는 이해했다). 화자 ‘나’는 이아생트가 성 가브리엘 고원의 외딴 집에 있을 때 라 주네스트가 까마득하게 보이는 작은 집 라 코망드리에 머물렀다. ‘나’가 광야의 밤에 불빛을 비추는 유일한 집인 라 주네스트에 이아생트가 살고 어느 날 축일의 밤을 보낸 이야기가 전부. 이외의 광활한 여백은 전부 몽상으로 채운 <이아생트>를 메장씨는 이상한 방식, 이치에 닿지 않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는, 말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적으로 믿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초장부터 본명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그렇다는 말일 뿐. 어차피 작가가 같은 사람인 걸? <이아생트의 정원>도 물론 화자 메장 씨의 다짐이 있었으니 앞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몽상적이고, 몽상적이라기보다 몽환, 환상의 묘사도 여전하다.
메장 씨는 양 2백마리를 마지막 목축 장인인 늙은 아르나비엘에게 맡겼다. 침묵과 관상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르나비엘은 일년 중 겨울을 제외한 여덟 달 동안 양떼와 개 두 마리만 데리고 8킬로미터 떨어진 에스칼 고개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한 해 11월에, 이제 양떼를 거느리고 내려와야 할 시점에 수십년 동안 없었던 큰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고개에는 집시 무리도 있어서, 아르나비엘은 그들을 피해 산줄기를 타고 간신히 보리솔(택호宅號: 가옥의 이름)에 도착, 마음씨 좋고 현명한 게리통 부부의 도움으로 양들을 낡은 막사로 피신시켜 단 한 마리의 손실도 없이 건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메장씨가 보리솔과 게리통 부부에 대해 들은 첫번째 소식이었고, 6년 전이었다.
양 주인은 당연히 게리통 부부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해야 마땅했지만 겨우내 악천후와 할 일이 겹쳐 길을 나서지 못하다가 다음해 성 안셀무스 축일인 4월 21일에야 두 시간 마차를 타고 아멜리에르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 나무 아래에 말과 마차를 묶어둔 채 언덕을 올라 보리솔에 도착했는데:
소박하지만 튼튼하고, 퓌를루브 봉우리 아래 여러 오름 중 첫번째 언덕 위의 아주 오래된 농가, 과수원에는 자두나무 네 그루, 앵두나무 열 그루가 있고, 농가 위쪽 바위에서 손가락 굵기의 갈대를 타고 은밀히 흐르는 샘이 개수대 격인 수반 위로 떨어진다.
이 장면을 읽는 순간, 번쩍, 저 <당나귀 반바지> 시절 마법사 시프리앵의 농장. 갈수록 샘의 수량이 줄어들어 결국에는 과수원마저 황폐화되고 마는 일까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마법사 시절엔 충분한 양이 흐르다가 여우와 뱀의 출현 이후 수량이 줄어들던 샘, 생명의 근원. 분명히 게리통 부부의 소유가 아닌 당나귀가 다리에 옷을 입은 채 창고에 서있기도 하고.
백 명이 안 되는 주민이 사십 채가 넘지 않는 땅딸막한 집에서 사는 아멜리에르 마을. 건물 반쯤이 땅속에 잠겨 있어 들어가려면 오히려 네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성당은 늙은 베르젤리앙 신부가 세상의 주목을 멀리한 채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정말 작은 사제관, 정원 벽에 기댄 네 개의 벌통. 정원 깊은 안쪽 문을 나서면 곧바로 움푹 팬 협곡이 드러나고 거기부터 이름없는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두 그루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야외용 벤치가 놓은 곳. 아멜리에르 마을 역시 <반바지 당나귀>의 오스피탈레 마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렇게 3부작의 마지막 무대는 첫 무대를 향하는 것일까?
보리솔의 가난하고 늙은 부부가 외로이 크리스마스를 지낼 것이 안타까워 찾아간 메장씨. 집에서 가져간 칠면조와 디저트와 사촌이 아프리카에서 보내준 오렌지 여섯 알과 함께 조촐한 크리스마스 밤을 즐기던 날이었다. 이날 앞에서 말한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가 게리통 씨네 헛간에 메어져 있었고,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밤 늦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 밖엔 보리솔 옆에 텐트를 쳤던 집시 여인이 아이 하나를 안고 서 있었으며, 애가 아프고, 불이 없어서 추워한다 해서 집안에 들였다.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인 여인이 잠시 후 몸을 일으키며 부드러운 음색으로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터이니 오늘 밤만 아이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마르고, 기이하게 미동조차 없는 여자아이.
차게 언 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머리, 빈 조개껍질 같은 가벼운 두개골은 텅 빈 듯해서 손가락을 대기조차 겁이 나는 아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죽 잤다. 메장씨와 게리통 부부가 밤새 돌보고, 동이 트자마자 야영지에 가보니, 집시들은 이미 떠났다. 추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뿌리 쪽은 적갈색을 띤 금발의, 열살은 넘지 않은 것 같은 소녀만 남긴 채. 헛간 당나귀 곁에는 자루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아이의 옷가지와 편지와 약간의 돈이 든. “아이를 맡깁니다. 펠리시엔이라고 부르십시오. 부모가 없는 아이입니다. 잘 키워주십시오. 적지만 비용을 대겠습니다. 돈은 때때로 보내겠습니다.”
이 아이가 이아생트다. 집시 혹은 마법사 시프리앵의 하수들은 이후 돈을 보내지 않았지만, 거의 백지 상태의, 아직은 펠리시엔인 아이는, 아무런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도 없었는데, 말을 하면 잠이 쏟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법사 시프리앵은 이 아이를 어디로 데려갔었을까? 저 멀고 먼 성 가브리엘 고원의 유일한 불빛, 라 주네스트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만일 내가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살았다면 지금 보다 분명하게 이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이 여전히 기독교 문명권이었을 때라면. 하여간 이아생트, 펠리시엔한테 성 가브리엘 고원 시절은 지워졌고, 인간계로부터 사라진 세월이었으며, 이제 <이아생트의 정원>에서 남은 유일한 것은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오는 일 뿐이다. 길은 막혀 있다. 벽을 여는 문에는 튼튼한 자물쇠가 걸려 있고, 당연히 자물쇠가 있으면 열쇠 또한 있는 법,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분은, 고단하더라도 <반바지 당나귀>, <이아생트>, 그리고 <이아생트의 정원> 모두를 읽으셔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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