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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과학자 애로우스미스 上 ㅣ 의사과학자 애로우스미스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유진홍 옮김 / 군자출판사(교재) / 2025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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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출간해 퓰리처 상을 받은 작품. 출간 백년을 맞아 가톨릭대학 감염내과 교수 유진홍의 번역으로 군자출판사에서 나왔다. 군자출판사는 의학서적 출판을 주로 하는 회사인데 의학, 약학, 치의학, 한의학, 보건학, 간호학 등등 가리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의사과학자 애로우스미스> 역시 의학 관련 서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일대를 졸업한 문과생이 쓴 완전한 소설책이다.
주인공 마틴 애로우스미스는 미국의 가상의 주State인 위네멕Winnemac주에서도 시골인 엘크 밀스에서 태어나 자랐다. 소설은 마틴의 소년 시절부터 순서대로 시계바늘 따라 착착 흘러간다. 쓸데없이 과거 회상에 몇 십페이지를 할애하는 잔 수는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읽다가 아리송한 기분이 들어 다시 앞 페이지로 넘겨 확인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착한 책이다.
엘크 밀스에는 단 한 명의 의사가 있었으니 닥터 비커슨. 지저분하고 통제가 안 되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어린 마틴에게 의학은 비즈니스 같은 돈벌이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어서 마틴에게 의사 공부를 하라고 독려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의사의 서가에 있어야 하는 세 종류의 책으로 그레이 씨가 쓴 해부학, 성경,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꼽았다. 비커슨 선생은 화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대학 학부를 거쳐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가라고 충고했다. 애초에 의과대학에 입학하지 말고 학부에서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을 충분히 공부한 후에 비로소 의학을 전공하라는 취지였다. 이건 후에 당대 최고의 의과학자이자 마틴의 평생 스승인 유대계 독일인 막스 고틀립 박사의 가르침과 합치한다.
마틴 애로우스미스는 ‘뉴욕의류바자’를 운영하는 J.J. 애로우스미스 씨의 아들로 14세인 1897년에 비공식 무급 조수 일을 해주던 닥터 비커슨의 가르침을 새겨 위네멕 대학에 입학해 육상선수 겸 농구팀 센터, 맹렬한 하키선수 경력으로 졸업했다. 가상의 웨네멕주는 미시간,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애나와 경계를 하고 있다니 중서부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주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드디어 의예과에 입학했을 때는 고향의 부모와 비커슨 선생 모두 생을 접었다. 부모는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쓸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남겼다. 즉, 의사가 되는 순간 마틴은 주머니가 텅 빈 상태가 되어 개업할 돈이 없으니 무조건 취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대에 진학해 마틴의 전 생애를 걸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칠 진정한 스승이자 세균학 교수인 막스 고틀립의 강의에 수강신청을 한다. 그러나 장렬한 퇴짜. 어두운 분위기에 냉담한 인상, 그리고 인간미 없는 인물로 이름이 난 고틀립 교수는 먼저 화학과 물리학을 더 배우고 1년 후에 자기 수업을 들으라고 지시한다. 고틀롭 교수는 면역학, 세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것은 맞지만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직업에 관심이 별로 없고, 의사라는 돈벌이에는 더욱 관심이 없다. 오직 세균과 면역에 관한 연구만 하고 싶어하는 말 그대로 과학자. 딱 연구와 실험에만 몰두한다. 그것도 아주 고집스럽게. 완전한 논문이 아니면 발표도 하지 않아 다른 교수들과 비교하면 약 1/5 수준의 논문만 의학지에 게재할 뿐이다.
마틴은 의과대학에서 여러 의대생을 사귀고 고급 친목 동아리 디감마 파이Digamma Pi라는 클럽에도 가입한다. 이 가운데 포츠버그 기독교 대학 졸업생 아이라 힝클리는 기독교 광신도로 서인도제도에 의료선교를 갔다가 페스트 구제에 나선 마틴과 상봉한다. 학교에 몇 안 되는 학부 졸업생이자 장차 의대를 수석졸업하고 훗날 부자들을 위한 과도한 처치와 과도한 시술을 특기로 떼돈을 벌고 출세도 할 애어스 듀어, 괜찮은 산부인과 개업의가 될 찌질한 뚱보 파프, 살집이 많고 가난한 익살꾼이자 의사 공부를 중도 작파하고 승용차딜러를 거쳐 사기꾼으로 입신양명할 절친 중의 절친이자 기숙사 룸메이트 클리프 클로슨 등이 있다. 뚱보 파프를 제외하고 훗날 다시 만나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과학자 입장에서 그냥 그런, 잊어도 별로 특별할 거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인연이라서.
고틀롭 교수의 실험 시간에 마틴 애로우스미스가 단연 두각을 보인다. 두 사람은 큰 키에 마른 체격, 그리 잘 생기지 못한 얼굴 같은 것이 서로 비슷하다. 이건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도 마찬가지다. 고틀롭 교수가 마틴, 그리고 싱클레어 루이스와 다른 점은 술이 과하지 않다는 거. 주인공과 작가는 둘 다 술고래이고, 특히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는 생의 중반 이후, 특히 193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급격하게 술이 늘어 메사추세츠 정신병원에 입원해 “술 없이 살 것인지, 술로 인해 죽을 것인지” 결정을 강요당하는 수준에 이른다. 마틴도 주종을 묻지 않고 모든 술을 벌컥벌컥 잘 마시지만 자청해서 몇 주 동안 술을 딱 안 마시고 실험에 몰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제력을 갖고 있으니 의존증 수준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마틴, 애칭 마트는 과학을 접근하는 법, 실험 현상을 과학적,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법, 이렇게 나온 결론을 수학적 수식으로 정리하는 법을 교수로부터 배우거나 따로 공부하게 된다. 물론 이런 단계에 이르기까지 두 사제는 납이 끓을 만큼 열을 내 싸우기도 하고, 액체질소만큼 냉랭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급기야 십수년 동안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지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가, 얼마나 위대한 과학자 스승인지, 과학자가 되기 위한 얼마나 위대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제자인지 충분히 알고 지냈으니, 그것 참.
교수와 결별하기 전에 마틴은 위네멕의 주도 제니스에 있는 대형병원인 제니스병원에 수막알균 균주를 가지러 갔다가 병원 복도를 청소하고 있는 수습간호사를 만나 다투고, 호감을 갖고, 데이트 신청을 하더니 결국 사랑하는 마음까지 품었는데, 아뿔싸, 이때 마틴은 약혼녀가 있었다. 장차 의사가 될 신분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의사 아내가 되기만 하면 의사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펑펑 써대는 희망으로 가슴을 부풀린 아가씨 매들린 폭스. 곡절을 겪은 끝에 수습간호사였던 리오라 토저 양과 결혼을 하고, 인턴 시절을 보낸 후에 리오라의 친정이 있는 시골 윗실베니아에서 개업의로 몇 년을 보낸다. 시골 사람들의 고집스러움과 완강한 보수적 사고방식과 경쟁 의사들의 잘난 척에 데어 다시 제니스로 컴백해 노틸러스 시의 공중보건 담당의가 되고, 윗실베니아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인 노틸러스에서도 실패한 마틴은 이제 대학시절 최우등생 애어스 듀어가 파트너로 있는 병원을 거쳐 드디어 뉴욕에 위치한 세계적인 의학 연구소 맥거크 연구소에 입소하는데, 맥거크 연구소의 재단 이사장이 제일 흠모하는 과학자 막스 고틀립 박사가 마틴을 추천했던 거였다.
이 연구소에서도 고틀립 박사는 엄격한 과학자로 일체의 양보도 없이 연구에 매진한 결과 숱한 적들을 만들어냈다. 잘난 사람의 꼴을 못 보는 거, 이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다. 연구소에서 다시 마틴을 만난 교수는 이번에도 역시 마틴에게 수학과 물리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라고 핀잔을 주면서 자기 조수이자 마틴의 망나니 절친 클리프 클로슨에 필적하는 냉소적 외골수이며 진정한 연구자인 테리 윅켓을 소개한다. 성격을 마틴과 달라도 과학과 실험에 몰두하는 진정에 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죽이 맞는 윅켓. 그는 조연답게 주인공인 마틴에게 수학과 물리학 등을 가르쳐주고, 몇 년이 흐른 후 마틴은 주인공답게 수학과 물리학에 있어 윅켓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그의 중요한 연구 결과를 로갈리즘과 시그마 등을 사용한 일목요연한 식으로 풀어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 센셰이션은 그의 이름을 뉴욕과 런던과 파리에 휘날리게 할 뻔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프랑스 과학자가 먼저 논문을 발표하는 바람에 휘리릭 날아갔고, 대신 때마침 서인도제도 세인트휴버트 섬에서 창궐한 페스트를 구제하러 나이 들었지만 열성적 공중보건 활동가 구스타프 손델리우스와 마틴 부부가 현지에 도착한다. 부부가? 그렇다. 이건 암만 생각해도 작가 의도상 그런 거 같다. 합법적으로 마틴의 첫번째 아내 리오라를 호적에서 파내고 재혼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리오라가 거기서 죽어 마틴이 홀아비가 되느냐고? 그렇다. 죽는다. 죽어서 관에 들지도 못하고 적도 하늘아래 묻힌다. 열성적인 공중보건 활동가 손델리우스도 영웅적인 죽음을 맞고, 대학 동기동창 아이라 힝클리도 죽어 한줌 재가 된다. 다 죽고 페스트를 진압하고 돌아온 마틴 혼자 영웅이 된다.
이 동안 아빠 같았던 스승 막스 고틀립 박사는 급성 치매에 걸려 어둔 골방에 앉아 눈만 껌벅껌벅거리고, 연구소에서는 친절한 악당인 리플튼 홀리버드가 고틀립 박사에 이어 소장 자리에 앉아 마틴이 싫어하고 기피하는 지시만 죽어라 내린다. 그리고 마틴은 세인트휴버트 섬에서 잠깐 만나 함께 해변을 걸었던 기억이 있는 백만장자이자 젊고 예쁜 과부 조이스 레니언과 결혼해 아들 존을 낳는다.
이게 끝이냐고? 아니, 아니. 아직 남았다. 이제 백만장자 아내와 아들, 그리고 거대 연구소에서 기계적이고 광 파는 작업만 수행하게 된 높은 연봉의 연구자 마틴 애로우스미스가 책의 제목대로 의사과학자, 이걸 넘어 위대한 의과학자가 되려면 뭔가 남은 게 있다. 여기까지 열라 썼지만 하여튼 좀 밍밍하다. 이 밍밍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나는 결론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기 싫다. 좀 올드 스타일이지만 재미있는 책이니 도서관을 이용하시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늘 그렇듯이 결론은 “안 알려줌.”
싱클레어 루이스가 쓴 작품답게 곳곳에 유머 코드를 담고 있다. 그걸 전부 알아채기는 같은 언어 사용자가 아니라 당연히 불가능하고, 작품 속에 눈에 띄는 등장인물이 두 명 있다는 건 그냥 뱀다리로 적어본다. 한 명은 베빗 씨. 이이가 살던 곳이 가상의 위네맥 주라서 루이스가 특별출연을 시켰고, 역자 유진홍도 알았겠지만 그냥 말없이 넘어간 도즈워스 씨도 만찬의 한 장면에 등장한다. 이런 걸 알아차리는 것도 책을 읽는 소소한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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