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스쿨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미국 동부 해안선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자존심 센 사립학교 가운데 하나가 주인공 ‘나’가 다니던 곳. 그냥 그곳을 올드 스쿨이라고 해두자.

  작가 토바이어스 울프는, 동막골 팝콘 스타 강혜정의 남편 타블로의 스탠퍼드대 은사다. 1945년 앨라배마 버밍햄에서 유대인 의사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성공회에 다니는 바람에 유대인이란 특별한 의식 없이 지냈다고 한다. 토바이어스 조너선 안셀 울프가 다섯 살 됐을 때 부모가 이혼해서, 토바이어스는 엄마와 함께 새아버지를 따라 미국 서북단 워싱턴주의 북 캐스케이드산맥 속의 작은 마을에서 살며 사춘기까지 보내게 된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토바이어스가 스탠퍼드대에 다니고 나서야 친부와 다섯 살 많은 형 조프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마치 ‘나’가 동부 해안의 고등학교에 다닌 것처럼 독자를 현혹한다. 책 좀 읽은 독자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겠지만, 울프는 책 중간에 ‘나’가 픽션을 쓰는 방식이 ‘자기 고백적’이라서 독자들이 여차하면 작가가 직접 경험했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고 언질을 주기까지 한다.

 

  하여튼 ‘나’가 다녔던 학교는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속물적인 교육기관으로, 학교에서 칭송받는 인재들은 주로 레슬링이나 축구선수, 인정사정없는 토론의 명인, 총명한 학자, 성악가, 체스 챔피언, 치어리더, 배우, 음악가, 재치꾼 등이었고 이 가운데서 특히 글쟁이, 글 좀 쓰는 친구들이 대단한 성가를 누렸던 곳이다.

  교사들의 구성도, 먼저 교장은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미국의 위대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사사했으며, 교장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주임 메이크피스 씨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던 의무대 운전병으로 헤밍웨이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다들 읽어보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나오는 제이크의 낚시친구 빌의 실제 모델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선생은 한 마디로 하지 않았지만 교사나 학생이나 다들 그렇게 믿던 것. 이들 외에도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남부의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당시 1학년 여학생과 결혼하는 바람에 대학을 그만두고 북쪽으로 올라와 이 학교에 정착한 현대문학 전공의 램지 선생(먼 훗날에 교장까지 승진하는 인물)도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부인과 함께 봉직하고 있다.

  이 학교의 전통은 일 년에 세 명의 작가, 시인등의 문인을 초빙하는 행사. 이때, 학교는 최고학년인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나 소설을 응모하게 하고, 장원을 한 학생에게는 교장이 아끼고 아끼는 정원garden에 초빙 작가, 시인과 산보하면서 문학과 인생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부여한다. 물론 유명 작가를 초빙하는 일에 비교적 큰돈이 들기는 하지만 애교심 넘치는 졸업생들은 전통으로 굳어진 행사를 위하여 활수滑手한 기부를 멈추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등학교라고 해도 명문이다, 명문.

  그리하여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대선이 끝나고 겨우 한 주 뒤, 1960년 11월에 방문했다.”


  즉 이번 행사에 초대를 받은 시인이 로버트 프로스트이다. 이 학교에는 중세 음유시인이라는 뜻의 제호를 한 교지 ‘트루바두르’를 발행한다. ‘나’는 조지 켈로그와 편집자의 자리를 놓고 투표까지 벌였으나 딱 한 표 차이로 고배를 마시고 출판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 조지와 ‘나’, 돈 많은 명문가의 아들로 사실 이 정도의 학교는 졸업하건 말건 자신의 인생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제프 퍼셀, 그리고 ‘나’의 룸메이트 빌 화이트, 이렇게 네 명이 1960~61년 학기의 최대 라이벌이었고, 이 네 명 모두 위대한 시인 프로스트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아, 프로스트가 부어주는 향유로 어깨를 적시고 싶어 한다.

  이렇게 최고학년이 되자 창작에 관심을 두고 있는 예비 작가들은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뿜어대며 특징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내 생각에도 문예 창작은 대학에 전공 학과를 둘 것이 아니라 예술 고등학교나 이 비슷한 특화 고등학교에서 보다 일찍 창작의 기초를 닦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여튼 로버트 프로스트는 몇 편의 시 가운데 트루바두르의 편집자 조지 켈로그를 우승자로 선정하고, 드디어 학교를 방문해 온갖 잘난 척을 다 하고 돌아간다.

  몇 달이 흘러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 방학이 오고, 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학교로 돌아온 ‘나’의 목적은 두 번째 초빙 작가인 에인 랜드를 위해 단편을 쓰기 위해서였다. 책에서 ‘나’는 그저 에인 랜드의 <파운틴 헤드>를 뒤적이다가 한 방에 작품 속으로 푹 빠져버리는 것으로 그렸는데, 정작 학교를 방문한 랜드는 <아틀란티스>를 자기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둘 다 번역되어 시중에 나와 있다. 나는 내년에 읽을 예정) 에인 랜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드물지 않던 러시아 유대인 출신의 미국인으로, 작품 속에 가히 니체가 말하는 초인들이 등장해 일체의 타협 없이 자기 주관대로 행동한다. 아무 정보도 보태지 않으면 남자 작가일 것 같지만 작은 키에 단단한 몸매를 지닌 여자다. 책에서는 이이의 성격과 언행을 좀 과장한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랜드를 본 적이 없어 실제로도 그런 성격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이 경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네 명의 문사들은 다 미역국을 마시고, 같은 이름을 써서 ‘큰 제프’라고 불리는 제프 퍼셀의 사촌이 장원을 한다.

  이제 마지막 경연. 초대받은 작가는 다른 이도 아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나는 헤밍웨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인 건 동의하지만 다분히 과대평가를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심정인데, 어쨌든 1960년대 초반에는 무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경배를 받고 있었다. 가슴에 부얼부얼한 털이 가득한 이 늙은 작가는 <올드 스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곳곳에서 등장한다. 물론 직접 작품에 나와서 한마디 하는 건 아니고, ‘나’가 제출한 작품을 장원으로 뽑아놓고, 램지 선생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모르긴 몰라도 술을 엄청 퍼마신 다음에, 전화선을 통해 일방적으로 지껄인 말을, 램지 선생이 다시 정리한 형식으로 얘기한 것만 나온다.


  <올드 스쿨>의 주요 시간적 공간은 1960년 11월부터 1961년 7월까지. 작가 토비아스 울프가 1945년생. 그럼 작가의 나이로 치면 열다섯에서 열여섯 살 때까지다. 자신의 작문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최고학년이 될 수 없어서 헤밍웨이에게 원고를 보여줄 수는 없었을 때. 그런데 왜 시기를 이렇게 잡았을까? 헤밍웨이가 늘그막에 럼에 맛을 들여 거의 중독상태에 빠진 건 아시지? 그러다가 도가 지나쳐 알코올성 우울증 증세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1961년 7월 2일에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려 영광에 찬 한 생애를 스스로 저버리고 만다. 즉, 헤밍웨이가 했던 가상의 연설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면 모를까, 아니면 ‘나’로 하여금 헤밍웨이 초빙 경연에서 장원을 차지했더라도 결코 그를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터다. 그런데 만날 확률이 거의 최고조에 올랐을 때, 난데없이 자살로 뜻을 이루지 못해야 더 극적이고 여운을 남길 수 있었지 않을까?

  그렇지? 그렇겠지? 그래서 ‘나’는 헤밍웨이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졸업을 하고 만다.

  정말? 정말 그래서 졸업을 하고,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을 하고, 나중에 스탠퍼드대에서 석사를 하고 잘 나가는 소설가가 됐을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이미 책을 읽은 몇몇 분께서 저 구석에서 키득거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여.


  문학을 지망하는 소년의 심각한 일탈이 가장 중요한 일화가 된다. 그건 작가 자신의 진짜 경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일탈인지,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4-20 0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키득키득 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20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뭔지 그게 뭔지 말씀을 해주셔야 하지요!! 🙄

Falstaff 2021-04-20 09:47   좋아요 4 | URL
아니됩니다.
미리 아시면 책 못 읽습니다. ㅋㅋㅋㅋㅋ
(아, 이 재미란! 이 맛에 책 읽고 독후감 쓴단 말입니닷!!!!) 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20 10:0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해서 저는 오늘 낚였습니다. 이 책 예전에 친구가 이야기해서 살까 했더니 사지 말고 그냥 도서관 가서 빌려 읽어 해서 아 응 하고 말았다가 깜박했어요. 도서관에 있나 가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4-20 10:11   좋아요 2 | URL
음하하하..... 한 건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4-20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낚시 냄새가 나는군요 ㅎㅎ

Falstaff 2021-04-20 11:4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낚시가 돼버렸다는 겁니다. ㅋㅋㅋㅋ
 
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8년 개띠 작가. 허난성 출생. 허난성은 서쪽과 남쪽으로 산이 많고 동쪽으로 평야가 펼쳐있다. 땅이 비옥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숱하게 벌어지기도 한 곳이다. <레닌의 키스>도 이 허난성 속 가상의 솽하이 현을 무대로 한다. 원래 제목은 ‘즐거움’이나 ‘기쁨’을 뜻하는 북부 허난성의 사투리 서우훠受㓉, 우리말 음가로 ‘수활’이다. 서우훠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즐거움이나 기쁨. 다른 하나는 작품 속에 일종의 유토피아, 그러나 상처만 남은 옛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바러우 산맥 깊이 위치한 장애인 공동체 서우훠 마을이다.

  <레닌의 키스>는 세 번째 읽은 옌렌커의 장편 소설. 처음이 <풍아송>이고 다음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다. 두 권의 책으로 옌렌커는 충분하다 싶었는데, 그만 서재 동무님의 낚시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소득이 있었으니, 예전에 무척 기대하고 읽었다가 실망해 마지않은 <풍아송>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 <풍아송>에서는 <시경>을 연구해 초절정의 논문을 쓴 양커 박사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산속에 들어가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또 다른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였다. <레닌의 키스> 속에서 바러우 깊은 산맥 속의 서우훠 마을이 바로 양커 박사가 이상화했던 율도국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던 것.


  <레닌...> 속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마오즈 할머니. 69세부터 71세까지가 시간적 공간이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와 둘이서 홍군을 따라 천리만리를 걸으며 혁명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다 하루는 엄마가 홍군에 잡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하고 만다. 이들 모녀가 가는 곳마다 적들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총살 4일 만에 진짜 반역자를 발견해 누명이 벗겨져 엄마는 혁명 열사로 추인되고 자신은 혁명의 후손이란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이어진 악전고투로 패전해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방랑하다가 바러우 산맥 속에서 기진해 쓰러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마음씨 좋은 석공이 업어와 석공의 노모와 함께 살았다. 이때가 마오즈 할머니가 19세, 석공이 35세. 이후 몇 년이 지나 노모가 혼인을 허락한 후에야 둘은 설레는 마음으로 방을 합치게 된다.

  서우훠 마을은 전형적인 장애인 촌으로 장애가 없는 남자들은 전부 짝을 찾아 외지로 나가고, 여자들도 외지로 시집을 가는 대신 새로 외지의 장애인들이 함께 살러 들어오는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듯 명나라 초기시대부터 몇백 년 동안 장애인 촌이 있었으며 특별하게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관리를 받지 않고 촌민들만의 공동체로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아온 별유천지비인간. 이곳에 혁명 열사의 후손인 개화 여성 마오즈 색시가 입촌하면서 유토피아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상사에 아무 관심도 없어 시대가 바뀌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장에 가는 길에 토지개혁과 집단농장, 계급혁명을 한 눈에 알아본 마오즈는 그길로 장애인 마을을 받아들이기 원치 않는 지방 향장을 설득해 솽화이 현, 바이수 향에 서우훠 마을을 귀속시킨다.

  마오즈는 카를 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천국을 바랐겠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 공산화된 중국은 모옌과 위화의 작품 속에서 몇 번 나오듯이 나라 전역에서 쇠붙이를 싹 거두어들인다. 거기까진 어떻게 넘어갔는데 불행하게도 1950년, 중국 전역에 걸쳐 기근이 닥친다.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 와중인데도, 하루는 현장이 와서 보니 서우훠 마을엔 새로 생긴 무덤이 없어 이들에게 양식 일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안 줄 수 없어서 요구 양식을 내어 주고, 다음엔 더 많은 양을 달라고 떼를 쓰고, 나중엔 사지가 멀쩡한 장정들이 쳐들어와 폭력으로 마을의 모든 양식과 가축을 약탈해버린다. 이 와중에 주인공 마오즈 할머니의 자상한 남편 맷돌쟁이 석공도 굶어 죽는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풍요한 마을을 괜히 행정단위에 입사시켜 거덜을 내게 한 마오즈를 원망할 수밖에. 이때 마오즈 할머니는 행정단위에서 퇴사하는 것을 마을 주민들에게 맹세하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거는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마오즈 할머니의 강력한 맞수는 현장 류잉췌. 1960년생으로 자칭 진정한 혁명가. 일찍이 부모형제가 누군지도 모른 채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를 솽화이현 사회주의교육원(社校)의 유일한 전문직원이었던 류선생이 거두어 기른 양자다. 1966년에 시작한 문화혁명 당시 인텔리 계급으로 당연히 인민의 적이었지만 이이 아니면 마르크스, 레닌을 가르칠 교사가 없어 끔찍한 모욕은 당하지 않았던 류선생은 그러나 아내가 딸 하나를 남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떠나버리고, 교육원에서 가차 없이 강등당하자 결국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딸의 평생을 부탁하며 눈을 감는다. 이들은 후에 자연스럽게 부부가 된다.

  류잉췌가 향의 하급 간부였을 당시 춘삼월, 서우훠 마을에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아가씨가 있었으니 쥐메이. 동네에선 드물게 보이는 장애가 없는 처녀였는지라 춘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밀밭 속으로 자빠뜨렸던 건데, 이 아가씨가 누군가 하니 바로 마오즈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딸. 그래놓고 아홉 달이 지나자, 류잉췌는 꿈도 꾸지 못한 사이에 쥐메이는, 놀라지 마시라, 무려 딸만 네 쌍둥이를 순산했던 거였다. 그러니 마오즈 할머니가 류잉췌의 장모가 되는 족보.

  류잉췌는 자기도 모르는 새 얻는 네 딸이 열일곱 살이 되는 동안, 향장이 되었다가, 현의 부현장으로 승차를 하고, 때마침 소비에트 땅 이곳저곳에서 레닌의 동상이 무너지는 와중에 소련 정부는 레닌 시신의 영구보존 비용을 감당하기 너무 헐떡여 곤란을 겪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는, 솽화이 현의 중흥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레닌의 시신을 사들여와 레닌 기념 공원을 조성하면 현의 모든 인민들은 노동할 필요 없이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당서기에게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이를 들은 서기는 류잉췌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책 줄이나 읽은 걸 확인한 다음 슬쩍 현장으로 승급을 시킨다. 드디어 류잉췌가 현장이 되어 겨드랑이 사이에 숨겨두었던 날개를 웅장하게 펴 보일 순간이 도래한 것.

  단, 조건이 레닌의 유해를 사 오는 돈이 얼마가 됐든 현에서 비용의 절반은 부담해야 한다나. 그리하여 눈알을 번득이며 뭘 해서 비용을 마련하느냐, 방안을 찾고 있는데, 이때 생각지도 못한 화수분이요, 흔들기만 하면 가지에서 돈이 떨어진다는 전설 속의 나무인 요전수를 만나게 되니, 예부터 밀 수확이 끝나면 장애인 마을인 서우훠 마을에서 며칠을 두고 벌였던 축제에서 장애인들이 자기들의 장기를 자랑했던 것을 비장애인 도시인에게 공연하게 한다는 거. 이름하여 서우훠 묘기 공연단.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렇다.


  외다리 원숭이 청년 : 외다리로 빨리, 높이 달리기

  귀머거리 마씨 : 귀에다 대고 폭죽 터뜨리기

  외눈박이 : 외눈으로 한 번에 바늘 열 개 꿰기

  앉은뱅이 아줌마 : 나뭇잎에 수놓기

  맹인 퉁화(류현장의 맏딸) : 예민한 귀로 깃털 떨어지는 소리 알아 맞추기

  소아마비 소년 : 병(glass bottle)으로 신발 신기

  63세 맹인 아저씨 : 자신의 눈동자에 촛농 떨어뜨리기

  육손이 : 여섯 번째 손가락을 불에 달구기

  앞마을 외팔이 아주머니 : 무나 배추를 한 팔로 얇게 빨리 썰기


  이것들은 글로 써 놓으면 별로인 것 같아도, 옌렌커의 입담으로 과장을 더하고, 특히 이런 묘기가 장애인에 의하여 행해지기 때문에 비장애인은 놀라움의 인플레이션을 가져와 무려 반년 동안 중국 각지를 돌며 솽화이 현은 어마어마한 거금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동네 주민을 공연에 동원할 수 있게 해준 마오즈 할머니가 맨입으로 허락을 했겠나. 할머니는 조건으로 새해가 되는 날 서우훠 마을을 솽화이 현이란 행정단위에서 퇴사시키는 것을 문서로 확인해달라는 거였다.

  이리하여 류현장은 레닌의 유해를 사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떠나보내고, 마오즈 할머니는 평생소원이었던 퇴사를 이루고, 서우휘 마을은 전국 최고의 유토피아로 탈바꿈 할 수 있을까.


  우리말 제목을 <레닌의 키스>로 한 건, 류현장의 계획대로 레닌의 유해를 솽화이 현 바러우 산맥의 훈포산 꼭대기에 지은 기념관에 모시기만 한다면, 즉 레닌의 키스를 받기만 하면, 현과 서우훠 마을을 지상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집단 최면 상태를 의미했으리라. 그러나 사실 독자는 처음부터 서우훠 마을 주민들이 이미 대대로 몇백 년간 원시 공산주의를 이루어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 이후 국공내전이 끝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정식으로 건국한 다음, 정부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정치나 행정 절차들이 서우훠 주민들에게 가져다준 것은 오직 하나, 멸시와 수탈을 포함한 끝없는 고통, 단 하나였음을 옌렌커는 숱한 에피소드와 유머를 섞어(레닌의 유해를 돈 주고 사 온다는 발상보다 더 큰 유머를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타래 실처럼 풀어놓았다.

  재미있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풍아송>의 일독도 고려해봄 직하리라. 나도 <레닌의 키스 : 受活>을 먼저 읽었더라면 <풍아송風雅頌>이 더 재미있었을 거라고 조금 아쉬워해 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4-19 09: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레닌의 유해를 사오겠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기발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서우훠 마을 장애인들과 엮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도 그렇고요.
저는 폴스타프 님 권유대로 조만간 <풍아송>을 읽어보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1-04-19 09:38   좋아요 4 | URL
예, 정말 재미난 아이디어였습니다.
풍아송은 이 책보다 좀 더 거칠어요. 이이가 군대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가끔가다 너무 수컷스러워서, 제가 읽기에도 이거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감안하세요. ㅎㅎㅎ 좀 걱정되기도 합니다. 제목은 진짜 예쁜데 말입죠. 풍, 아, 송!

레삭매냐 2021-04-19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닌의 키스>에 앞서 <풍아송>
을 먼저 만났는데, 옌렌커 선생이 계속
해서 이런 체제 비판적인 작품을 발표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더 놀랍습니다.

레닌의 유해로 한 몫 잡아 보겠다는 발
상이 정말 기발했습니다. 곰은 프롤레타
리아 인민들이 부리고, 그에 따른 명예와
이익은 당간부들이 챙기는 현실 비판이
라고나 할까요.

Falstaff 2021-04-19 09:49   좋아요 4 | URL
그래서 이이 작품을 출간하기 쉽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소위 혁명, 이라는 인위적 행위의 부당성에 방점을 둔 것처럼 읽었습니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던 폭력, 문화혁명을 직접 체험한 세대라서 더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

청아 2021-04-19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개띠작가의 책들 저도 읽어보렵니다! 덕분에 순서도 정해졌네요.ㅋㅋ

Falstaff 2021-04-19 10:01   좋아요 3 | URL
<레닌의 키스>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이라는 단서조항을 꼭 달아야 하겠습니다.
ㅋㅋㅋㅋ 추천하기에 좀 위험한 작가 같아서 말입죠.
 
손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7
위룽쥔 지음, 홍영림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작가 위룽진喩榮軍. 대학에서 공부한 건 예상외로 스포츠 의학. 무사히 졸업까지 했다. 졸업 후에 의학의 길 대신 상하이 트라마센터에서 서포팅 업무를 하다가 틈틈이 극작을 썼던 모양이다. 1971년생. 2000년부터 60여 편에 달하는 연극, 오페라, 발레극, 전통극, 신체극을 썼다니 놀라운 일이다. 중국은 각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징적인 연극과 음악극의 혼합형태(곤극, 곡극 등)가 발전해서 이이가 썼다고 하는 ‘신체극’이, 우리나라의 경우에 신체시新體詩라 불리는 것처럼 기존의 연극양식에 서구의 극 형식을 적용한 것인지, 아니면 몸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임mime을 신체극身體劇이라 했는지 문외한으로는 도무지 구별할 수 없다. 하긴 중요한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역자 홍영림은 이 작품 <손님>을 부조리극이라 규정한다. 등장인물은 단 세 명.
  작품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이 있다. 1976년의 중국을 경천동지하게 만든 사건. 7월 28일, 당시 베이징에서 불과 2백 킬로미터 떨어진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해 상당히 축소해 발표하지 않았나 싶은 중국정부의 공식집계로 242,769명이 사망한 일. 중국 정부는 과거 10여 년간 지식인 계층을 잡도리하느라고 당연히 학업에 관심이 없어 의사의 수가 엉망으로 부족한 지경에 이르러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하며, 문화혁명 기간에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현지의 상황을 알기 위해 털털거리는 고물 자동차가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먼짓길을 며칠을 달려 베이징에 도착해야 했단다.
  지진 43일 후인 9월 9일에 한 번 더 난리가 나는데, 이번엔 중국의 가장 빛나는 붉은 별, 마오가 세상을 뜬다. 절대 권력자의 죽음은 그의 아내가 벌여놓은 문화혁명의 조종을 울려 같은 해 10월엔 사인방으로 불린 마오의 처 장칭을 위시해 야오원위안, 왕훙원, 장춘자오를 체포해버린다. 우리나라에선 1976년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에서 양정모 선수가 건국이후 최초로 금메달을 따, 남한 정부도 세계에서 금메달감인줄 알았던 시기였지만, 중국은 그야말로 현대사가 격동했던 시기였다.


  여전히 문화혁명의 서슬이 퍼렇던 7월에 35세가 채 안 된 꽃다운 청춘 마스투馬時途는 상하이의 회사에 다니다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지금은 방직공장 노동자인 약 28세의 아내 모상완莫桑晩을 두고 탕산으로 출장을 간다. 일단 갔다고 생각하자.
  탕산에서 일을 마치고 거액의 물품대금이 든 가방을 메고 다시 상하이로 오는 새벽기차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버스가 죽어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길 양편에서 집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탕산 대지진 당시 무려 530만 채의 건물이 무너졌다고 한다. 붉은 혁명열사의 집안 출신, 그러니까 이른바 진골 화랑 출신인 마스투는 즉시 버스에서 내려 묻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이 와중에 물품 대금으로 받은 현금은 어느 벽돌더미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지진이 진정되고 구호상황이 끝난 후 마스투는 상하이로 돌아왔다. 하여튼 돌아왔다고 가정하자. 아직 마오가 죽기 전이라 혁명열사 가문의 진골 화랑이 불가촉 향·소·부곡 출신인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여성과 결혼한 것도 마뜩하지 않은데, 이제 탕산에 출장을 가 지진이 났다는 핑계로 거액의 현금을 횡령이나 착복, 아니면 적어도 망실한 죄를 물어 회사는 마스투를 고소해버렸고, 법원은 죄가 마땅하다는 선고를 내려 긴 형기를 만기 출소하게 됐다. 이제 마스투와 모상완한테는 상하이의 마천루 사이 중심가에 낡은 단층집 하나만 마치 알박기라도 하듯 남아 있을 뿐. 이제 그것마저 조속히 팔지 않으면 강제철거를 당할 처지에 몰렸다.


  앞에서 이 드라마를 부조리극이라 한다고 했다. 위에 적어놓은 내용은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 그런데 극의 본론 격인 2막에 들어서면 내용이 완전하게 바뀐다. 보자.
  마스투가 탕산으로 출장 가서 대지진을 만나는 것까지는 같다. 이 와중에 마스투 역시 무너지는 벽돌에 깔려 오른쪽 다리 하나가 바스러진다. 말이 바스러지는 거지, 40년이 지나도 후유증으로 다리를 약간 저는 정도면 그냥 부러진 거였을 확률이 훨씬 높다. 뼈가 바스러지면 아주 복잡한 외과수술이 필요한데 당시 절대 부족한 의사진이 그런 것까지 즉각 해주었을 턱이 없다. 이 와중에 물품대금 역시 사라졌다. 다리가 부러지고 까무러친 마당에 누군가 훔쳐갔을 수도 있고, 마스투와 마찬가지로 폐허에 묻혔을 수도 있다. 하여튼 7개월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마스투는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고 예쁜 용모에 머리도 총명한 젊은 아내 모상완을 위해 엉망이 된 도시에서 다시 호적을 정리하는 틈을 타 이름도 마신런馬新人, 다시 태어난 자로 개명해 그대로 탕산에 주저앉는다.
  모상완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은 것으로 알고 혁명열사 가문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면서 기회를 얻자 다시 공부를 해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다. 이때 마스투는 탕산에서 신문을 통해 모상완의 내력을 스크랩해두고 관찰하면서 대학 학비를 보내주기도 한다. 물론 머리가 제대로 박힌 모상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신세를 질 수 없어 우편환을 다시 돌려보내지만. 모상완은 승승장구, 이후 박사가 되고, 많은 저술을 내기도 하면서 네 살 많은 테너 가수 샤만텐夏滿天과 결혼해 여태 함께, 마스투가 살던 상하이 시내 한복판 마천루 사이의 단층집에서 살고 있다.
  마스투가 탕산으로 향한지 40년이 흘러 이제 마신런이 되어 다시 모상완을 방문했을 때, 모상완은 남편 샤만텐과 아침밥상을 매개로 소소한 일상적인 다툼을 벌이고 있던 터. 이 작자는 왜 난데없이 모상완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폐암에 걸려서 말이지. 이때 마스투는 일흔다섯, 모상완은 예순여덟, 심장병이 있는 샤만텐은 일흔둘.
  왜 왔는지 가르쳐드릴까? 싫다.


  그런데 말이지, 만일 마스투가 아예 탕산에 가지 않아서 지진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여태 상하이 중심가 마천루 사이의 단층집에서 모상완과 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세 가지를 놓고 보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극에서 자주 나오듯이 어차피 삶에 ‘만약’은 없는 거니까. 인생은 그저 한 번 살아가면 그걸로 끝.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래? 다시 저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난 싫다. 이대로 살다가 죽으련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4-18 09: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왜 왔는지 가르쳐 드릴까? 싫다에서 강한 뽐뿌의 예감이 듭니다. ㅎㅎ
저도 옛 시절로 돌아가고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으련다에 좋아요 보냅니다. ^^

Falstaff 2021-04-18 10:01   좋아요 3 | URL
이 작품은 작년에 우리나라 노 배우들이 낭독 공연을 했답니다. 연륜있는 배우들이라서 그런지 매우 환상적이었다는 소식을 들었습지요.
코로나가 끝나면 낭독 공연이 아니라 정식 공연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데, 어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대가 되는 공연입니다만 연극은 막이 올라봐야 아니까요.
 
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 - 세계현대작가선 2
살만 루시디 지음, 오승아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절판이라니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가, 말았다. 왜냐하면 2021년 4월 현재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가 새롭게 작업해 일부 교정까지 마쳤다고, 100자 평에 비밀댓글을 달아주신 서재 동무님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누구냐고? 안 알려드림. 그럼 비밀댓글 다신 이유가 읎잖여, 그잖여? 아무렴, 이런 책은, 만일 품절시키면 안 되는 목록이 있다면 당연히 거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니까.
  저 서반아의 안달루시아 산골마을 베넨겔리. 내전 당시 팔랑헤당을 지지해, 이제 프랑코가 죽어 공화주의 편에 섰던 에라스모 마을은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이곳에 인도 출신의 화가 바스코 미란다가 큰돈을 벌어 제2의 알함브라 궁전 같은 저택을 짓고 살았다. 미란다가 화가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인도의 진정한 천재 화가 오로라 조호비에게 극도의 열등감을 갖고 살았다. 평생 독신으로 산 미란다도 이제 늙어 마약에 의지해 인생의 황혼을 버티고 있는 처지. 어느 날, 오로라 조호비의 외아들 모라에스 조호비, 애칭 무어가 찾아온다. 무어는 미란다의 저택에 감금되어 (왜냐고 묻지 마시라) 이 소설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원고 거의 대부분을 쓰고,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기적같이 탈출에 성공해 어느 묘석에 앉아 묘석에 새긴 글, RIP, 즉 Rest in Peace를 손으로 더듬어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어. 참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이는 우리 계산으로 애 들어선지 닷 달 만에, 서양식으로 얘기하면 임신 4개월 만에 세상 구경을 한다. 그것도 매우 크게 자란 상태로. 그러나 오른손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네 개가 한데 붙어 있고, 엄지도 겨우 흔적기관처럼 조금 돌출되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6피트 6인치까지 키가 크지만 성장속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딱 두 배다. 겨우 열 살에 195cm의 키와 완전한 2차 성징이 이미 다 발현되어 학교 근처도 가보지 못해 여성 가정교사를 통해 모든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물론 몸 교육을 포함해서. 그러나 나중에 장애가 있는 오른손이 말 그대로 망치 같은 펀치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밝혀지긴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사는 건 사실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밖에 없다.
  무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귀하게 태어난 한 잡종인간. 외갓집으로 말할 거 같으면 조상이, 인도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까지 올라간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와서 지내다가 죽고, 8년간이든가 묻혔다가 다시 백골로 포르투갈로 귀국할 때까지 설마 독신이었다고 믿지는 않겠지? 이때 남긴 가족의 후손이 무어의 외갓집으로 ‘다 가마’라는 이름을 쓴다. 책은 1876년생인 무어의 증조부 프란시스코 다 가마와 1877년생인 증조모 에피화니아 다 가마부터 소개를 한다. 증조부는 대대로 물려받은 향신료 무역을 비롯해 그들이 터를 잡고 사는 남인도의 중요한 무역항인 코친항과 인근 카브랄 섬의 대농장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현지 부자들이 그렇듯 영국인들의 위세엔 당하지 못했다.
  사실 무어의 외갓집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정말 재미있다. 재미만 따지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진짜 한 번 맞장을 붙여보고 싶을 정도. 마르케스도 입담에 관해선 세계 챔피언 급이지만 루슈디 역시 말발하면 절대 2등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작가라서 현란한 단어들이 밤하늘 별똥처럼 우수수 쏟아진다. 그건 정말 읽어봐야 맛을 아는데, 그걸 따로 떼서 소개하면 또 제 맛이 나지 않으니 참으로 아쉬울 수밖에. 뭐 어쩔 수 없다.
  그럼 친가 조호비 가문은? 놀라지 마시라.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무어 족을 이베리아에서 쫓아낼 당시의 마지막 무어 족 술탄 보압딜의 후예. 무어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망명한 왕의 풍모를 갖춘 대단한 외모를 한, 다 가마 개인 유한회사의 창고 사무원이었는데, 자기보다 21세가 어린 다 가마 가문의 후계자이자 무어의 친모인 열다섯 살 오로라의 눈에 들어, 그날로 산처럼 쌓아놓은 향신료 부대의 꼭대기에 올라 온몸에 향신료의 향기를 품으며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이다. 그렇다. 먼저 발견하고 반해서 두 손으로 턱을 들어올려 얼굴을 바라본 사람은 열다섯 살짜리 오로라 다 가마였다. 물론 보압딜의 정비queen는 아니고 유태인 애인이 생산한 후손이다. 보압딜의 이베리아 철수 후에 스페인 왕실이 내린 추방령에 의거, 인도로 출발할 당시 보압딜과 헤어지는 마당에 보석이 무수하게 박혀있는 왕관을 훔쳐냈고, 이때가 임신 중이어서, 아이의 이름을 ‘불운한 보압딜’이란 의미로 ‘엘 조호비’라고 했다. 조호비가 ‘운이 없는’이란 뜻이란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조하비는 애초엔 반 유태인이었다가, 인도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유태인과의 혼인을 통해 이젠 거의 유태인이라고 봐야 한다. 스페인 출발이 16세기 초, 무어의 부모가 혼인을 한 게 1939년, 4백년 이상 유태인하고만 혼인을 했으니까.
  근데 루슈디의 장난을 한 번 보자. 아브라함이 오로라와 결혼하는 1939년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다. 이때 천애고아가 된 어린 오로라 대신 향신료 무역을 총괄하게 된 아브라함이 세 번 향신료를 가득 싣고 영국으로 배를 출항시켰는데 동아프리카에서 독일 군함에 의하여 세 번 다 침몰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회사가 거덜이 났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어머니 플로리 조호비에게 쫓아가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엄마 전에 봤던 보석들 좀 줘요, 해서, 첫아들을 할머니에게 보내는 조건으로, 낮은 이율로 빌려와 다시 대상단을 꾸려 유럽에 보내 대박을 친다. 여기서 무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억은 다 만들어진다고. 술탄 보압딜의 왕관이 아니라 인도에서 밀수꾼들이 훔쳐온 보석, 그러니까 장물을 보관하고 있다가 밀수꾼들이 몽땅 잡혀 죽으니까 그걸 여태 팔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거였을 거라고. 여지없이, 여태까진 아주 근엄하고 위세 있게 자랑하듯 얘기한 것을 안면 싹 바꾸고 이렇게 말해버린다.
  무어의 큰할아버지 아이리쉬 다 가마는 엄마 에피화니아 다 가마의 친정 쪽 조카인 카르멘 로보와 결혼을 하는데, 첫날 밤 늦게 신방에 들어오더니, 정성껏 옷을 벗고, 꼼꼼히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벗겨 그걸 자기가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가 보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청년, 항해사 프린스 헨리와 함께 먼 바다로 노를 저어간다. 아이리쉬가 집안의 향신료 사업 운영을 포함한 모든 걸 상속받으려면 자손, 특히 아들이 필요한데, 아무리 카르멘이라도 자빠져 하늘을 봐야 별을 따거늘 도대체 자빠뜨리지를 않으니 이를 어쩔꼬. 그래 집안의 가업계승은 증조부에 이어 둘째 아들인 무어의 할아버지 까몽쉬 다 가마, 이어서 유태인 아버지 아브라함 조호비로 이어지고, 거기서 끝난다. 왜? 아브라함 조호비의 나이 아흔 살일 때 무어는 37세. 그러나 세월을 2배속으로 먹는 무어는 몸과 마음이 벌써 74세.
  여기에 절묘하게 섞이는 것이 각 시대별로 겹치는 인도의 기구한 현대사. 할아버지 형제 까몽쉬와 아이리쉬 다 가마는 사회주의 운동과 댄디즘에 경도되어 평소엔 허물없는 친구 같았던 인도 경찰서의 영국인 경찰서장에게 체포되어 콩밥을 먹고, 아브라함 조호비는 극도로 부패한 시대와 정부의 허점을 틈타 폭력세력과 힘을 합쳐 온갖 나쁜 일을 다 해 거부의 자리를 유지한다. 크게는 1차, 2차 세계대전과 내전, 종교분쟁과 인도 분할, 소비에트 소멸, 테러 등까지 다 섞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고귀하게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인종적 잡종인간이 몰락해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 재미있다. 온갖 난장판이 다 벌어지는 속에서 별의 별 형태의 사랑이 등장하고, 또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랑의 성공이 아니라, 드런 사랑 이야기, 애초 배신하기로 결심을 하고 시작하는 사랑, 각종 형태,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거짓말 속의 사랑, 배신을 넘어 등에 칼 꽂으면서 앞에선 모든 헌신을 하는 사랑, 그러나 당하는 쪽에선 내 목숨 말고는 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진실한, 하지만 결국 무너지는 사랑 같은 거 몽땅 다 나온다. 실패한 사랑도 사랑이냐고? 하 참. 당신은 실패한 사랑 안 해보셨나? 안 해 봤다면 여태 헛산 거고, 해봤다면 그것도 진실한 사랑, 어쩌면 더 진실한 사랑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말씀이야. 안 그랴?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4-15 1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새로 나오는 책으로 꼭 읽어보겠습니당~

Falstaff 2021-04-15 10:39   좋아요 4 | URL
옙. 진짜 재미난 책입니닷!!

새파랑 2021-04-15 11: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절판이라는데 포기했다가 새로나온다니 장바구니로 ㅋ 폴스타프님이 재미나다고 하시니^^

Falstaff 2021-04-15 11:04   좋아요 3 | URL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21-04-15 11: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역자가 루슈디의 말장난의 리듬을 다 살렸다는 평입니다.
여러분.... 새로 나올 책, 기대해주세요.
개.봉.박.두!!!!!

coolcat329 2021-06-30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새로 나오는군요! 기대할게요~^^
 
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에 대해 말을 더 보태면 입이 아플 정도로 잘 알려진 콜롬비아 작가. 그가 썼다면 이름값 딱 하나만 믿고 사서 읽어도 후회하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후회한 적도 있긴 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이건 제목부터 참 불량했다. ‘내 추억’인지 ‘창녀들의 추억’인지도 모르겠고, ‘슬픈 창녀’인지 ‘슬픈 추억’인지도 헷갈렸는데, 책을 다 읽어도, 하긴 책을 읽은 게 15년도 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나, 하여튼 그랬다.
  그거 말고는 특별히 까탈을 잡을 수 없었다. 오늘 읽은 <사랑과 다른 악마들> 역시 같은 소감. 전형적인 마르케스. 물론 이렇게 말을 해도 된다면. 하긴 세상에 못할 말이 어디 있나.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출신으로 무자비한 노예 매매업자, 냉혹한 군단장으로 이름을 높인 두에냐스 후작 1세의 유일한 후계자 이그나시오를 (후작 1세가 보기에)정신박약 증세가 있고, 글자도 해독하지 못하는 어리버리로 설정해놓고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정신병원의 환자 둘세 올리비아와 눈이 맞아 둘세의 특기인 종이비행기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할 작가가 세상 천지에 마르케스 말고 또 있느냐 말이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후작 1세는 덜 떨어진 아들 이그나시오를 본국 명문가의 아름다운 여성 올라야 데 멘도사와 혼인을 하긴 하는데, 올라냐는 처녀성을 간직한 채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다시 혼자가 된 이그나시오는 천박한 메스티소 여자 베르나르다 카브레라와 결혼하게 만든다. 당시엔 유혹적이었던 베르나르다를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그나시오를 그녀가 거의 겁탈하다시피 해놓고, 어느 날 베르나르다의 아버지가 총을 가져와 이그나시오에게 건네주면서, “도련님 제게 이 총으로 죽을 즐거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면 내가 도련님을 죽일 거 같아서 말입죠.” 한 마디 하는 바람에 얼른 혼례미사를 올리는 것도. 마르케스의 입담이 워낙 세계챔피언 수준이라 베르나르다를 어떻게 소개하느냐 하면,
  “베르나르다 카브레라는 그날 새벽 드라마틱한 설사약을 먹었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탐욕스럽고 수다스러우며, 능히 대대 병력을 만족시킬 만큼 굶주린 하복부를 지녔다. 집시 눈동자처럼 초롱초롱하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해지고, 총기도 사라지고, 피똥을 싸고 위산까지 게워냈다. 게다가 마스티프 종 사냥개들까지 기절초풍할 정도로 우렁차고 고약한 방귀를 뀌어 댔다.”
  하여튼 이렇게 카살두에로 후작 2세이자 다리엔의 영주 이그나시오 데 알라로 이 두에냐스와 베르나르다 카브레라 사이에 칠삭둥이 외동딸이 태어나 열두 살이 된 해 사달이 벌어진다.


  책의 서문 격으로 쓴 걸 보면, 마르케스가 신문사 기자를 하던 1949년에 산타클라라 수녀원이 팔려 그 자리에 오성급 호텔을 건설하는 바람에 갑자기 하게 된 납골묘를 비우는 작업을 취재하다가 강렬한 구릿빛의 생생한 머리카락이 22미터 11센티에 달하는 소녀의 두개골을 발견했고, 비석엔 시에르바 마리아 데 토도스 로스 앙헬레스라고만 쓰여 있어 성family name을 알 수 없었는데, 이걸 보고는 할머니가 얘기해준 전설, 머리카락을 웨딩드레스처럼 땅바닥에 끌고 다니던 열두 살 먹은 후작의 딸이 개에 물려 광견병에 걸려 죽었다는 얘기가 떠올라 소설을 쓰게 됐다고 깔아둔다. 물론 구라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두피가 평생 9미터 42센티의 머리카락을 길러낼 수 있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모발의 끄트머리까지 영양분을 공급하기가 어려워 9미터도 사실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구라를 치려면 적당히 한 11미터 정도로 해야 그래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이지. 22미터라니, 애초부터 지금부터 구라를 풀기로 작정했던 것.
  이 다음에 할 이야기는 시에르바 마리아 아가씨가 전설상 사인course of death인 광견병.
  우리나라에서는 광견병과 같은 말로 물을 무서워하는 병, 즉 공수병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검색해보면, 광견병의 증세로, 발병 후기에 불면증, 불안, 혼돈, 흥분, 부분적인 마비, 환청, 흥분, 타액·땀·눈물 등의 과다분비, 연하곤란, 물을 두려워하는 증세를 보이고, 이 정도로 진행하면 평균 4일 이내에 섬망, 경련, 혼미, 혼수에 이르며 호흡근 마비 또는 합병증으로 죽는다고 한다. 나 어렸을 적에도 동네에 가끔 벌건 눈에 침을 흘리며 유난히 사납게 구는 미친개가 횡행하고는 했는데, 그때도 광견병 또는 공수병은 대단히 무서운 병으로, 걸리면 미쳐서 죽는 줄 알았다. 근데 희한한 게 미친개는 있었지만 개한테 물려 진짜로 광견병에 걸린 사람은 못 봤다는 거.
  서양의 경우에 유일하게 본 건,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서 주인공 재니 크로포드의 세 번째 남편 티 케이크가 바로 이 광견병에 걸려 죽는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 무대는 18세기 말 콜럼비아의 무역 항구도시 카르타헤나.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의 라틴 아메리카라면, 스페인 본국보다 오히려 더 교조화된 가톨릭이 유럽 이민자들과 반half 백인들을 지배하고 있어서, 여전히 종교재판과 고문, 심지어 화형까지 집행되곤 하던 시절이다. 중요한 조연 가운데 한 명인 토리비오 데 카세레스 이 비르투데스 주교는 장교 출신의 성직자로 엑소시즘을 사제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로 보는 인간이다. 동시에 광견병 후기에 나타나는 불면, 혼돈, 흥분, 섬망증 등을 사탄이 환자의 몸에 들어와 저지르는 사악한 행위로 간주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증명했고, 스스로 라이프니츠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교의 땅은 미신이 지배하고 있던 것.
  라틴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은을 스페인으로 보내던 주요 항구 카르타헤나의 시장에 하녀 하나를 데리고 구경나온 시에르바 마리아의 왼쪽 복사뼈 부근을 표도 나지 않게 개가 물었다고 해서 대수롭게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 길을 가다 주인 없는 개나 고양이에게 물리는 일이 수다했던 터. 그러나 이날, 문제의 회색빛 개에 물린 다른 세 명의 흑인 노예는 며칠 후 발작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깨물어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에 묶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물린 곳엔 벌써 딱지가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광견병의 잠복기가 때론 5년에 이를 때도 있어서, 카르타헤나의 숨겨진 박식한 명의 아브레눈시아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부모, 후작 2세와 베르나르다로 말할 거 같으면 애초에 개와 원숭이 사이였지만 엄마 베르나르다가 애인 후다스 이스카리오테, 성경에 나오는 발음대로 하자면 가롯 유다와 질펀한 혼외정사가 끝나는 때를 기점으로 서로 남은 감정이라고는 이제 증오밖에 없다. 원래 서방이 싫으면 애새끼도 싫은 법이라, 시에르바 마리아가 어렸을 적부터 베르나르다가 직접 딸을 돌본 적이 거의 없이 주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의 손에 의해 자랐다. 이 결과 시에르바 마리아는 스페인 출신의 백인들이 보기엔 악마나 구사할 수 있는 이교도의 언어를 서너 개 씩이나 능숙하게 말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토템을 상징하는 목걸이 같은 것이었으니 이거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미친개에게 물렸다는 소문은 어느새 주교의 귀에 들어가고, 후작을 호출한 주교는 시에르바 마리아를 산타클라라 수녀원으로 보내 광견병을 치료하기 위한 엑소시즘을 시행할 것을 ‘명령’한다. 주교, 영어로 bishop. 이거 대단한 지위다. 신부는 father. 신부, 즉 아버지가 꼼짝도 못하고 계율에 의하여 순응해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이 주교 아닌가 말이지. 그래 가뜩이나 쫄보 성향이 농후한 이그나시오 어쩌구저쩌구 카살두에로 후작 2세는 자신이 사랑하는지도 몰랐던 딸 시에르바 마리아를 직접 이끌고 산타클라라 수녀원, 미신적 가톨릭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원장 수녀를 비롯한 불쌍한 영혼들이 득시글거리는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후작 2세는 몰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 다시는 자신의 딸을 못 보게 될지.


  재미있는 책. 그러나 아쉽게 지금은 품절이고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른다. 그래 나머지 이야기도 더 해주고 싶기도 하고, 나도 오랜만에 시간이 철철 남아 더 자유롭게 써내려가고도 싶지만 이 정도에서 참기로 했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것이라서. 기다리시라. 그랬다가 시중에 다시 깔리는 순간, 머뭇거리지 마시고 구해 읽으시라. 짧아서 한 나절이면 다 읽고 독후감도 쓴다. 별점 네 개? 마르케스라면 그래도 이것보다는 더 현란하고 더 재미있어야 할 거 같은 욕심이 들어서 말씀이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4-13 1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광견병 걸린 사람 미드에선 봤어요. 실제론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드에선 일단 개처럼 바뀌더라구요.😳 저는 <백년의 고독>부터 읽어봐야 겠네요.
이 책도 제목이 좀 중의적으로 보이는데용?

Falstaff 2021-04-13 19:33   좋아요 3 | URL
광견병의 말기에 잠깐 그런 증세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섬망. 근데 또 ‘섬망‘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잖아요. 그게 미드에서 나오는 과장 장면 같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ㅋㅋㅋ
당연히 백년고독 부터 읽으셔야지요.

mini74 2021-04-13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야기속에 또 이야기가 그것도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무슨 배추속처럼 담겨 있어서 ㅎㅎ이 책 끝이 너무 궁금해요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엔 없네요 ㅠㅠ

Falstaff 2021-04-14 08:44   좋아요 1 | URL
옙! 그 책 대빵 재밌습니다. 노인네들 연애하는 것도 그렇지만 역시 마르케스의 농담 하나가 절 까무러치게 했습지요.
라틴 아메리카를 호령하는 막강한 산적떼가 등장하는데 걔네들 두목 이름이 글쎄, 아이고 어머니, 폴란드에서 출생해 젊은 시절 배타고 세상을 누비기도 했던 스타 작가 조지프 콘래드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