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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스쿨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미국 동부 해안선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자존심 센 사립학교 가운데 하나가 주인공 ‘나’가 다니던 곳. 그냥 그곳을 올드 스쿨이라고 해두자.
작가 토바이어스 울프는, 동막골 팝콘 스타 강혜정의 남편 타블로의 스탠퍼드대 은사다. 1945년 앨라배마 버밍햄에서 유대인 의사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성공회에 다니는 바람에 유대인이란 특별한 의식 없이 지냈다고 한다. 토바이어스 조너선 안셀 울프가 다섯 살 됐을 때 부모가 이혼해서, 토바이어스는 엄마와 함께 새아버지를 따라 미국 서북단 워싱턴주의 북 캐스케이드산맥 속의 작은 마을에서 살며 사춘기까지 보내게 된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토바이어스가 스탠퍼드대에 다니고 나서야 친부와 다섯 살 많은 형 조프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마치 ‘나’가 동부 해안의 고등학교에 다닌 것처럼 독자를 현혹한다. 책 좀 읽은 독자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겠지만, 울프는 책 중간에 ‘나’가 픽션을 쓰는 방식이 ‘자기 고백적’이라서 독자들이 여차하면 작가가 직접 경험했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고 언질을 주기까지 한다.
하여튼 ‘나’가 다녔던 학교는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속물적인 교육기관으로, 학교에서 칭송받는 인재들은 주로 레슬링이나 축구선수, 인정사정없는 토론의 명인, 총명한 학자, 성악가, 체스 챔피언, 치어리더, 배우, 음악가, 재치꾼 등이었고 이 가운데서 특히 글쟁이, 글 좀 쓰는 친구들이 대단한 성가를 누렸던 곳이다.
교사들의 구성도, 먼저 교장은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미국의 위대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사사했으며, 교장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주임 메이크피스 씨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던 의무대 운전병으로 헤밍웨이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다들 읽어보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나오는 제이크의 낚시친구 빌의 실제 모델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선생은 한 마디로 하지 않았지만 교사나 학생이나 다들 그렇게 믿던 것. 이들 외에도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남부의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당시 1학년 여학생과 결혼하는 바람에 대학을 그만두고 북쪽으로 올라와 이 학교에 정착한 현대문학 전공의 램지 선생(먼 훗날에 교장까지 승진하는 인물)도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부인과 함께 봉직하고 있다.
이 학교의 전통은 일 년에 세 명의 작가, 시인등의 문인을 초빙하는 행사. 이때, 학교는 최고학년인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나 소설을 응모하게 하고, 장원을 한 학생에게는 교장이 아끼고 아끼는 정원garden에 초빙 작가, 시인과 산보하면서 문학과 인생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부여한다. 물론 유명 작가를 초빙하는 일에 비교적 큰돈이 들기는 하지만 애교심 넘치는 졸업생들은 전통으로 굳어진 행사를 위하여 활수滑手한 기부를 멈추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등학교라고 해도 명문이다, 명문.
그리하여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대선이 끝나고 겨우 한 주 뒤, 1960년 11월에 방문했다.”
즉 이번 행사에 초대를 받은 시인이 로버트 프로스트이다. 이 학교에는 중세 음유시인이라는 뜻의 제호를 한 교지 ‘트루바두르’를 발행한다. ‘나’는 조지 켈로그와 편집자의 자리를 놓고 투표까지 벌였으나 딱 한 표 차이로 고배를 마시고 출판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 조지와 ‘나’, 돈 많은 명문가의 아들로 사실 이 정도의 학교는 졸업하건 말건 자신의 인생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제프 퍼셀, 그리고 ‘나’의 룸메이트 빌 화이트, 이렇게 네 명이 1960~61년 학기의 최대 라이벌이었고, 이 네 명 모두 위대한 시인 프로스트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아, 프로스트가 부어주는 향유로 어깨를 적시고 싶어 한다.
이렇게 최고학년이 되자 창작에 관심을 두고 있는 예비 작가들은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뿜어대며 특징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내 생각에도 문예 창작은 대학에 전공 학과를 둘 것이 아니라 예술 고등학교나 이 비슷한 특화 고등학교에서 보다 일찍 창작의 기초를 닦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여튼 로버트 프로스트는 몇 편의 시 가운데 트루바두르의 편집자 조지 켈로그를 우승자로 선정하고, 드디어 학교를 방문해 온갖 잘난 척을 다 하고 돌아간다.
몇 달이 흘러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 방학이 오고, 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학교로 돌아온 ‘나’의 목적은 두 번째 초빙 작가인 에인 랜드를 위해 단편을 쓰기 위해서였다. 책에서 ‘나’는 그저 에인 랜드의 <파운틴 헤드>를 뒤적이다가 한 방에 작품 속으로 푹 빠져버리는 것으로 그렸는데, 정작 학교를 방문한 랜드는 <아틀란티스>를 자기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둘 다 번역되어 시중에 나와 있다. 나는 내년에 읽을 예정) 에인 랜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드물지 않던 러시아 유대인 출신의 미국인으로, 작품 속에 가히 니체가 말하는 초인들이 등장해 일체의 타협 없이 자기 주관대로 행동한다. 아무 정보도 보태지 않으면 남자 작가일 것 같지만 작은 키에 단단한 몸매를 지닌 여자다. 책에서는 이이의 성격과 언행을 좀 과장한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랜드를 본 적이 없어 실제로도 그런 성격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이 경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네 명의 문사들은 다 미역국을 마시고, 같은 이름을 써서 ‘큰 제프’라고 불리는 제프 퍼셀의 사촌이 장원을 한다.
이제 마지막 경연. 초대받은 작가는 다른 이도 아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나는 헤밍웨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인 건 동의하지만 다분히 과대평가를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심정인데, 어쨌든 1960년대 초반에는 무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경배를 받고 있었다. 가슴에 부얼부얼한 털이 가득한 이 늙은 작가는 <올드 스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곳곳에서 등장한다. 물론 직접 작품에 나와서 한마디 하는 건 아니고, ‘나’가 제출한 작품을 장원으로 뽑아놓고, 램지 선생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모르긴 몰라도 술을 엄청 퍼마신 다음에, 전화선을 통해 일방적으로 지껄인 말을, 램지 선생이 다시 정리한 형식으로 얘기한 것만 나온다.
<올드 스쿨>의 주요 시간적 공간은 1960년 11월부터 1961년 7월까지. 작가 토비아스 울프가 1945년생. 그럼 작가의 나이로 치면 열다섯에서 열여섯 살 때까지다. 자신의 작문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최고학년이 될 수 없어서 헤밍웨이에게 원고를 보여줄 수는 없었을 때. 그런데 왜 시기를 이렇게 잡았을까? 헤밍웨이가 늘그막에 럼에 맛을 들여 거의 중독상태에 빠진 건 아시지? 그러다가 도가 지나쳐 알코올성 우울증 증세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1961년 7월 2일에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려 영광에 찬 한 생애를 스스로 저버리고 만다. 즉, 헤밍웨이가 했던 가상의 연설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면 모를까, 아니면 ‘나’로 하여금 헤밍웨이 초빙 경연에서 장원을 차지했더라도 결코 그를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터다. 그런데 만날 확률이 거의 최고조에 올랐을 때, 난데없이 자살로 뜻을 이루지 못해야 더 극적이고 여운을 남길 수 있었지 않을까?
그렇지? 그렇겠지? 그래서 ‘나’는 헤밍웨이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졸업을 하고 만다.
정말? 정말 그래서 졸업을 하고,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을 하고, 나중에 스탠퍼드대에서 석사를 하고 잘 나가는 소설가가 됐을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이미 책을 읽은 몇몇 분께서 저 구석에서 키득거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여.
문학을 지망하는 소년의 심각한 일탈이 가장 중요한 일화가 된다. 그건 작가 자신의 진짜 경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일탈인지,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