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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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에 대해 말을 더 보태면 입이 아플 정도로 잘 알려진 콜롬비아 작가. 그가 썼다면 이름값 딱 하나만 믿고 사서 읽어도 후회하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후회한 적도 있긴 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이건 제목부터 참 불량했다. ‘내 추억’인지 ‘창녀들의 추억’인지도 모르겠고, ‘슬픈 창녀’인지 ‘슬픈 추억’인지도 헷갈렸는데, 책을 다 읽어도, 하긴 책을 읽은 게 15년도 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나, 하여튼 그랬다.
  그거 말고는 특별히 까탈을 잡을 수 없었다. 오늘 읽은 <사랑과 다른 악마들> 역시 같은 소감. 전형적인 마르케스. 물론 이렇게 말을 해도 된다면. 하긴 세상에 못할 말이 어디 있나.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출신으로 무자비한 노예 매매업자, 냉혹한 군단장으로 이름을 높인 두에냐스 후작 1세의 유일한 후계자 이그나시오를 (후작 1세가 보기에)정신박약 증세가 있고, 글자도 해독하지 못하는 어리버리로 설정해놓고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정신병원의 환자 둘세 올리비아와 눈이 맞아 둘세의 특기인 종이비행기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할 작가가 세상 천지에 마르케스 말고 또 있느냐 말이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후작 1세는 덜 떨어진 아들 이그나시오를 본국 명문가의 아름다운 여성 올라야 데 멘도사와 혼인을 하긴 하는데, 올라냐는 처녀성을 간직한 채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다시 혼자가 된 이그나시오는 천박한 메스티소 여자 베르나르다 카브레라와 결혼하게 만든다. 당시엔 유혹적이었던 베르나르다를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그나시오를 그녀가 거의 겁탈하다시피 해놓고, 어느 날 베르나르다의 아버지가 총을 가져와 이그나시오에게 건네주면서, “도련님 제게 이 총으로 죽을 즐거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면 내가 도련님을 죽일 거 같아서 말입죠.” 한 마디 하는 바람에 얼른 혼례미사를 올리는 것도. 마르케스의 입담이 워낙 세계챔피언 수준이라 베르나르다를 어떻게 소개하느냐 하면,
  “베르나르다 카브레라는 그날 새벽 드라마틱한 설사약을 먹었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탐욕스럽고 수다스러우며, 능히 대대 병력을 만족시킬 만큼 굶주린 하복부를 지녔다. 집시 눈동자처럼 초롱초롱하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해지고, 총기도 사라지고, 피똥을 싸고 위산까지 게워냈다. 게다가 마스티프 종 사냥개들까지 기절초풍할 정도로 우렁차고 고약한 방귀를 뀌어 댔다.”
  하여튼 이렇게 카살두에로 후작 2세이자 다리엔의 영주 이그나시오 데 알라로 이 두에냐스와 베르나르다 카브레라 사이에 칠삭둥이 외동딸이 태어나 열두 살이 된 해 사달이 벌어진다.


  책의 서문 격으로 쓴 걸 보면, 마르케스가 신문사 기자를 하던 1949년에 산타클라라 수녀원이 팔려 그 자리에 오성급 호텔을 건설하는 바람에 갑자기 하게 된 납골묘를 비우는 작업을 취재하다가 강렬한 구릿빛의 생생한 머리카락이 22미터 11센티에 달하는 소녀의 두개골을 발견했고, 비석엔 시에르바 마리아 데 토도스 로스 앙헬레스라고만 쓰여 있어 성family name을 알 수 없었는데, 이걸 보고는 할머니가 얘기해준 전설, 머리카락을 웨딩드레스처럼 땅바닥에 끌고 다니던 열두 살 먹은 후작의 딸이 개에 물려 광견병에 걸려 죽었다는 얘기가 떠올라 소설을 쓰게 됐다고 깔아둔다. 물론 구라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두피가 평생 9미터 42센티의 머리카락을 길러낼 수 있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모발의 끄트머리까지 영양분을 공급하기가 어려워 9미터도 사실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구라를 치려면 적당히 한 11미터 정도로 해야 그래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이지. 22미터라니, 애초부터 지금부터 구라를 풀기로 작정했던 것.
  이 다음에 할 이야기는 시에르바 마리아 아가씨가 전설상 사인course of death인 광견병.
  우리나라에서는 광견병과 같은 말로 물을 무서워하는 병, 즉 공수병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검색해보면, 광견병의 증세로, 발병 후기에 불면증, 불안, 혼돈, 흥분, 부분적인 마비, 환청, 흥분, 타액·땀·눈물 등의 과다분비, 연하곤란, 물을 두려워하는 증세를 보이고, 이 정도로 진행하면 평균 4일 이내에 섬망, 경련, 혼미, 혼수에 이르며 호흡근 마비 또는 합병증으로 죽는다고 한다. 나 어렸을 적에도 동네에 가끔 벌건 눈에 침을 흘리며 유난히 사납게 구는 미친개가 횡행하고는 했는데, 그때도 광견병 또는 공수병은 대단히 무서운 병으로, 걸리면 미쳐서 죽는 줄 알았다. 근데 희한한 게 미친개는 있었지만 개한테 물려 진짜로 광견병에 걸린 사람은 못 봤다는 거.
  서양의 경우에 유일하게 본 건,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서 주인공 재니 크로포드의 세 번째 남편 티 케이크가 바로 이 광견병에 걸려 죽는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 무대는 18세기 말 콜럼비아의 무역 항구도시 카르타헤나.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의 라틴 아메리카라면, 스페인 본국보다 오히려 더 교조화된 가톨릭이 유럽 이민자들과 반half 백인들을 지배하고 있어서, 여전히 종교재판과 고문, 심지어 화형까지 집행되곤 하던 시절이다. 중요한 조연 가운데 한 명인 토리비오 데 카세레스 이 비르투데스 주교는 장교 출신의 성직자로 엑소시즘을 사제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로 보는 인간이다. 동시에 광견병 후기에 나타나는 불면, 혼돈, 흥분, 섬망증 등을 사탄이 환자의 몸에 들어와 저지르는 사악한 행위로 간주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증명했고, 스스로 라이프니츠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교의 땅은 미신이 지배하고 있던 것.
  라틴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은을 스페인으로 보내던 주요 항구 카르타헤나의 시장에 하녀 하나를 데리고 구경나온 시에르바 마리아의 왼쪽 복사뼈 부근을 표도 나지 않게 개가 물었다고 해서 대수롭게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 길을 가다 주인 없는 개나 고양이에게 물리는 일이 수다했던 터. 그러나 이날, 문제의 회색빛 개에 물린 다른 세 명의 흑인 노예는 며칠 후 발작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깨물어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에 묶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물린 곳엔 벌써 딱지가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광견병의 잠복기가 때론 5년에 이를 때도 있어서, 카르타헤나의 숨겨진 박식한 명의 아브레눈시아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부모, 후작 2세와 베르나르다로 말할 거 같으면 애초에 개와 원숭이 사이였지만 엄마 베르나르다가 애인 후다스 이스카리오테, 성경에 나오는 발음대로 하자면 가롯 유다와 질펀한 혼외정사가 끝나는 때를 기점으로 서로 남은 감정이라고는 이제 증오밖에 없다. 원래 서방이 싫으면 애새끼도 싫은 법이라, 시에르바 마리아가 어렸을 적부터 베르나르다가 직접 딸을 돌본 적이 거의 없이 주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의 손에 의해 자랐다. 이 결과 시에르바 마리아는 스페인 출신의 백인들이 보기엔 악마나 구사할 수 있는 이교도의 언어를 서너 개 씩이나 능숙하게 말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토템을 상징하는 목걸이 같은 것이었으니 이거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미친개에게 물렸다는 소문은 어느새 주교의 귀에 들어가고, 후작을 호출한 주교는 시에르바 마리아를 산타클라라 수녀원으로 보내 광견병을 치료하기 위한 엑소시즘을 시행할 것을 ‘명령’한다. 주교, 영어로 bishop. 이거 대단한 지위다. 신부는 father. 신부, 즉 아버지가 꼼짝도 못하고 계율에 의하여 순응해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이 주교 아닌가 말이지. 그래 가뜩이나 쫄보 성향이 농후한 이그나시오 어쩌구저쩌구 카살두에로 후작 2세는 자신이 사랑하는지도 몰랐던 딸 시에르바 마리아를 직접 이끌고 산타클라라 수녀원, 미신적 가톨릭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원장 수녀를 비롯한 불쌍한 영혼들이 득시글거리는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후작 2세는 몰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 다시는 자신의 딸을 못 보게 될지.


  재미있는 책. 그러나 아쉽게 지금은 품절이고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른다. 그래 나머지 이야기도 더 해주고 싶기도 하고, 나도 오랜만에 시간이 철철 남아 더 자유롭게 써내려가고도 싶지만 이 정도에서 참기로 했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것이라서. 기다리시라. 그랬다가 시중에 다시 깔리는 순간, 머뭇거리지 마시고 구해 읽으시라. 짧아서 한 나절이면 다 읽고 독후감도 쓴다. 별점 네 개? 마르케스라면 그래도 이것보다는 더 현란하고 더 재미있어야 할 거 같은 욕심이 들어서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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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13 1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광견병 걸린 사람 미드에선 봤어요. 실제론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드에선 일단 개처럼 바뀌더라구요.😳 저는 <백년의 고독>부터 읽어봐야 겠네요.
이 책도 제목이 좀 중의적으로 보이는데용?

Falstaff 2021-04-13 19:33   좋아요 3 | URL
광견병의 말기에 잠깐 그런 증세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섬망. 근데 또 ‘섬망‘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잖아요. 그게 미드에서 나오는 과장 장면 같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ㅋㅋㅋ
당연히 백년고독 부터 읽으셔야지요.

mini74 2021-04-13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야기속에 또 이야기가 그것도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무슨 배추속처럼 담겨 있어서 ㅎㅎ이 책 끝이 너무 궁금해요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엔 없네요 ㅠㅠ

Falstaff 2021-04-14 08:44   좋아요 1 | URL
옙! 그 책 대빵 재밌습니다. 노인네들 연애하는 것도 그렇지만 역시 마르케스의 농담 하나가 절 까무러치게 했습지요.
라틴 아메리카를 호령하는 막강한 산적떼가 등장하는데 걔네들 두목 이름이 글쎄, 아이고 어머니, 폴란드에서 출생해 젊은 시절 배타고 세상을 누비기도 했던 스타 작가 조지프 콘래드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