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 - 세계현대작가선 2
살만 루시디 지음, 오승아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절판이라니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가, 말았다. 왜냐하면 2021년 4월 현재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가 새롭게 작업해 일부 교정까지 마쳤다고, 100자 평에 비밀댓글을 달아주신 서재 동무님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누구냐고? 안 알려드림. 그럼 비밀댓글 다신 이유가 읎잖여, 그잖여? 아무렴, 이런 책은, 만일 품절시키면 안 되는 목록이 있다면 당연히 거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니까.
  저 서반아의 안달루시아 산골마을 베넨겔리. 내전 당시 팔랑헤당을 지지해, 이제 프랑코가 죽어 공화주의 편에 섰던 에라스모 마을은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이곳에 인도 출신의 화가 바스코 미란다가 큰돈을 벌어 제2의 알함브라 궁전 같은 저택을 짓고 살았다. 미란다가 화가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인도의 진정한 천재 화가 오로라 조호비에게 극도의 열등감을 갖고 살았다. 평생 독신으로 산 미란다도 이제 늙어 마약에 의지해 인생의 황혼을 버티고 있는 처지. 어느 날, 오로라 조호비의 외아들 모라에스 조호비, 애칭 무어가 찾아온다. 무어는 미란다의 저택에 감금되어 (왜냐고 묻지 마시라) 이 소설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원고 거의 대부분을 쓰고,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기적같이 탈출에 성공해 어느 묘석에 앉아 묘석에 새긴 글, RIP, 즉 Rest in Peace를 손으로 더듬어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어. 참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이는 우리 계산으로 애 들어선지 닷 달 만에, 서양식으로 얘기하면 임신 4개월 만에 세상 구경을 한다. 그것도 매우 크게 자란 상태로. 그러나 오른손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네 개가 한데 붙어 있고, 엄지도 겨우 흔적기관처럼 조금 돌출되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6피트 6인치까지 키가 크지만 성장속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딱 두 배다. 겨우 열 살에 195cm의 키와 완전한 2차 성징이 이미 다 발현되어 학교 근처도 가보지 못해 여성 가정교사를 통해 모든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물론 몸 교육을 포함해서. 그러나 나중에 장애가 있는 오른손이 말 그대로 망치 같은 펀치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밝혀지긴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사는 건 사실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밖에 없다.
  무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귀하게 태어난 한 잡종인간. 외갓집으로 말할 거 같으면 조상이, 인도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까지 올라간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와서 지내다가 죽고, 8년간이든가 묻혔다가 다시 백골로 포르투갈로 귀국할 때까지 설마 독신이었다고 믿지는 않겠지? 이때 남긴 가족의 후손이 무어의 외갓집으로 ‘다 가마’라는 이름을 쓴다. 책은 1876년생인 무어의 증조부 프란시스코 다 가마와 1877년생인 증조모 에피화니아 다 가마부터 소개를 한다. 증조부는 대대로 물려받은 향신료 무역을 비롯해 그들이 터를 잡고 사는 남인도의 중요한 무역항인 코친항과 인근 카브랄 섬의 대농장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현지 부자들이 그렇듯 영국인들의 위세엔 당하지 못했다.
  사실 무어의 외갓집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정말 재미있다. 재미만 따지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진짜 한 번 맞장을 붙여보고 싶을 정도. 마르케스도 입담에 관해선 세계 챔피언 급이지만 루슈디 역시 말발하면 절대 2등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작가라서 현란한 단어들이 밤하늘 별똥처럼 우수수 쏟아진다. 그건 정말 읽어봐야 맛을 아는데, 그걸 따로 떼서 소개하면 또 제 맛이 나지 않으니 참으로 아쉬울 수밖에. 뭐 어쩔 수 없다.
  그럼 친가 조호비 가문은? 놀라지 마시라.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무어 족을 이베리아에서 쫓아낼 당시의 마지막 무어 족 술탄 보압딜의 후예. 무어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망명한 왕의 풍모를 갖춘 대단한 외모를 한, 다 가마 개인 유한회사의 창고 사무원이었는데, 자기보다 21세가 어린 다 가마 가문의 후계자이자 무어의 친모인 열다섯 살 오로라의 눈에 들어, 그날로 산처럼 쌓아놓은 향신료 부대의 꼭대기에 올라 온몸에 향신료의 향기를 품으며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이다. 그렇다. 먼저 발견하고 반해서 두 손으로 턱을 들어올려 얼굴을 바라본 사람은 열다섯 살짜리 오로라 다 가마였다. 물론 보압딜의 정비queen는 아니고 유태인 애인이 생산한 후손이다. 보압딜의 이베리아 철수 후에 스페인 왕실이 내린 추방령에 의거, 인도로 출발할 당시 보압딜과 헤어지는 마당에 보석이 무수하게 박혀있는 왕관을 훔쳐냈고, 이때가 임신 중이어서, 아이의 이름을 ‘불운한 보압딜’이란 의미로 ‘엘 조호비’라고 했다. 조호비가 ‘운이 없는’이란 뜻이란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조하비는 애초엔 반 유태인이었다가, 인도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유태인과의 혼인을 통해 이젠 거의 유태인이라고 봐야 한다. 스페인 출발이 16세기 초, 무어의 부모가 혼인을 한 게 1939년, 4백년 이상 유태인하고만 혼인을 했으니까.
  근데 루슈디의 장난을 한 번 보자. 아브라함이 오로라와 결혼하는 1939년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다. 이때 천애고아가 된 어린 오로라 대신 향신료 무역을 총괄하게 된 아브라함이 세 번 향신료를 가득 싣고 영국으로 배를 출항시켰는데 동아프리카에서 독일 군함에 의하여 세 번 다 침몰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회사가 거덜이 났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어머니 플로리 조호비에게 쫓아가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엄마 전에 봤던 보석들 좀 줘요, 해서, 첫아들을 할머니에게 보내는 조건으로, 낮은 이율로 빌려와 다시 대상단을 꾸려 유럽에 보내 대박을 친다. 여기서 무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억은 다 만들어진다고. 술탄 보압딜의 왕관이 아니라 인도에서 밀수꾼들이 훔쳐온 보석, 그러니까 장물을 보관하고 있다가 밀수꾼들이 몽땅 잡혀 죽으니까 그걸 여태 팔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거였을 거라고. 여지없이, 여태까진 아주 근엄하고 위세 있게 자랑하듯 얘기한 것을 안면 싹 바꾸고 이렇게 말해버린다.
  무어의 큰할아버지 아이리쉬 다 가마는 엄마 에피화니아 다 가마의 친정 쪽 조카인 카르멘 로보와 결혼을 하는데, 첫날 밤 늦게 신방에 들어오더니, 정성껏 옷을 벗고, 꼼꼼히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벗겨 그걸 자기가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가 보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청년, 항해사 프린스 헨리와 함께 먼 바다로 노를 저어간다. 아이리쉬가 집안의 향신료 사업 운영을 포함한 모든 걸 상속받으려면 자손, 특히 아들이 필요한데, 아무리 카르멘이라도 자빠져 하늘을 봐야 별을 따거늘 도대체 자빠뜨리지를 않으니 이를 어쩔꼬. 그래 집안의 가업계승은 증조부에 이어 둘째 아들인 무어의 할아버지 까몽쉬 다 가마, 이어서 유태인 아버지 아브라함 조호비로 이어지고, 거기서 끝난다. 왜? 아브라함 조호비의 나이 아흔 살일 때 무어는 37세. 그러나 세월을 2배속으로 먹는 무어는 몸과 마음이 벌써 74세.
  여기에 절묘하게 섞이는 것이 각 시대별로 겹치는 인도의 기구한 현대사. 할아버지 형제 까몽쉬와 아이리쉬 다 가마는 사회주의 운동과 댄디즘에 경도되어 평소엔 허물없는 친구 같았던 인도 경찰서의 영국인 경찰서장에게 체포되어 콩밥을 먹고, 아브라함 조호비는 극도로 부패한 시대와 정부의 허점을 틈타 폭력세력과 힘을 합쳐 온갖 나쁜 일을 다 해 거부의 자리를 유지한다. 크게는 1차, 2차 세계대전과 내전, 종교분쟁과 인도 분할, 소비에트 소멸, 테러 등까지 다 섞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고귀하게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인종적 잡종인간이 몰락해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 재미있다. 온갖 난장판이 다 벌어지는 속에서 별의 별 형태의 사랑이 등장하고, 또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랑의 성공이 아니라, 드런 사랑 이야기, 애초 배신하기로 결심을 하고 시작하는 사랑, 각종 형태,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거짓말 속의 사랑, 배신을 넘어 등에 칼 꽂으면서 앞에선 모든 헌신을 하는 사랑, 그러나 당하는 쪽에선 내 목숨 말고는 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진실한, 하지만 결국 무너지는 사랑 같은 거 몽땅 다 나온다. 실패한 사랑도 사랑이냐고? 하 참. 당신은 실패한 사랑 안 해보셨나? 안 해 봤다면 여태 헛산 거고, 해봤다면 그것도 진실한 사랑, 어쩌면 더 진실한 사랑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말씀이야. 안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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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15 1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새로 나오는 책으로 꼭 읽어보겠습니당~

Falstaff 2021-04-15 10:39   좋아요 4 | URL
옙. 진짜 재미난 책입니닷!!

새파랑 2021-04-15 11: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절판이라는데 포기했다가 새로나온다니 장바구니로 ㅋ 폴스타프님이 재미나다고 하시니^^

Falstaff 2021-04-15 11:04   좋아요 3 | URL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21-04-15 11: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역자가 루슈디의 말장난의 리듬을 다 살렸다는 평입니다.
여러분.... 새로 나올 책, 기대해주세요.
개.봉.박.두!!!!!

coolcat329 2021-06-30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새로 나오는군요!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