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드의 물고기 책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유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고른 건 당연히 플래너건의 2012년 맨-부커 수상작인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공감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하게는 알고 있지 않았던, 2차 세계대전 중 자바 섬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포로로 잡힌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의 비참한 경험, 열악한 음식, 구타, 극한의 노동, 말라리아, 뎅기열, 부종, 콜레라, 이질 등의 질병 같은 것들, 전쟁이란 명목으로 벌어진 인간집단에 의한 다른 인간집단에 대한 학대를 실감나게 그렸던 것이 마음에 와 닿아서 이번에 같은 작가가 2001년, 40세 전성기의 나이에 출간한 <굴드의 물고기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빅벨리해마, 켈피, 가시복, 별바라기, 쥐치, 장어 등 모두 열두 종의 어류를 표제로 한 부part로 구성한 독특한 책이다. 1부 ‘빅벨리해마’는 일인칭 화자, 이름을 ‘시드 헤밋’이라 유추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나’는 실업률이 높은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직업 없이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도 그냥 놀 수는 없어서 썩어가는 고가구를 사들여 거기에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모욕을 추가해 돈 많은 미국 관광객에게 테즈메이니아의 옛 이름인 벤디먼스랜드 고미술품 협회라는 유령단체의 보증서를 붙여 고가로 팔아먹기도 한다. ‘나’의 보호관찰관, 즉 공무원이라서 가명으로만 등장하는 ‘레니 콩가’도 이 지역에서 가구 위조는 매우 전망이 좋은 직업이라고 선언하고는 썩은 가구에 모욕을 가하는 일에 가세를 하는 것도 모자라, 베트남에서 콩나물시루 같은 폐정크선을 타고 무작정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온 난민 라이 푸 훙 씨를 영입해 과감하게 고가구 제조 공정을 추가해버린다.
  존경심을 품으라는 이유로 ‘훙 선생’이라고 불리우기를 바라는 훙선생은 베트남에서 증기 기중기 기사로 있었으나 진짜 야심은 시인이 되는 거였다. 문학은 훙선생의 종교 자체라서, 그는 빅토르 위고를 모시는 불교 종파인 까오다이교의 정식 신자였단다. 이 양반에 의하여 첫째 파트인 ‘빅밸리해마’가 탄생하고 이어 물고기 파트가 등장할 수 있으니 소개를 해야 할 밖에.
  태즈메이니아에 ‘살라망카’라는 항구가 있었나보다. 나는 책을 읽으며 고가구 위조를 하고, 살라망카, 하니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스페인의 살라망카만 생각하고, 거기가 내륙지방인데 어떻게 항구가 있을까, 싶어서 구글, 위키피디아 등을 아무리 검색해도 항구라는 내용이 없었다. 왜 이런 유난을 떨었는가 하면, 부두 근처 오래된 창고 건물에 있던 고물상에서 1940년대 흑목黑木 옷장과 낡은 함석 고기 찬장이 눈에 띄었고, 찬장 안엔 과월호 여성잡지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는데 그 속에 비단 끈 같은, 제본할 때 표지나 책등에서 몇 가닥 빠져나온 것이 눈에 띄어 봤더니 윌리엄 뷜로 굴드라는 유형자가 1828년에(조심하시라, 책의 27쪽에는 1928년이라고 나와 몇 페이지 더 넘어가면 마구 헷갈리게 되어 있으니), 지금은 태즈메이니아라고 불리는 밴디먼스랜드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는 유형지, (허구의) 세라 섬에서 외과의사가 과학연구목적으로 이곳에서 잡히는 모든 어류를 그림으로 묘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린 책이었다.
  이 책이 특별하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예전 종이가 귀했던 때 흔히들 그랬듯이 세밀한 글씨로 빽빽하게, 하여간 종이의 여백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를 동반한 이야기를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형식으로 보면 일기나 일지라 할 수 있으나 때론 속세의 진흙탕에 매몰된 실제 사건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 거대한 유형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라 흉학범들이 몰리던 벤디먼스랜드, 또 그곳에서도 보급이나 파견 등이 극히 불량했던 외딴 세라 섬, 얼마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가 하면, 그곳의 우거진 밀림을 일컫기를 원주민을 제외한 사람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아 드라큘라 백작이 살던 ‘트란실바니아 숲’이라고 할 정도였던 곳에서 벌어진 책. 1820년대에 ‘검은 전쟁’이라 하여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원주민 학살이 대대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굴드가 물고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을 전쟁이 바로 끝난 시기 정도로 설정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가 빌리 굴드가 그림과 함께 기록한 내용에 흠뻑 빠져, 급기야 함석 찬장을 사버렸고,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책을 이용해 이득을 챙길 생각을 버리고 책의 진실, 이 지역에 있었던 역사의 진위 여부를 파헤치기에 이른다는 거. 그리하여 태즈메이니아 섬의 기록물 보관소의 킴 피어스 씨에게 도움을 받아 같은 책, 그러나 글이 없고 그림만 있는 굴드의 물고기 책을 올포트 도서관에서 또 한 권 발견하기에 이르고, 수형자 사망 기록에서 몇 명의 윌리엄 굴드를 발굴해낸다. 이 가운데 왼쪽 가슴에 파란 날개가 달린 붉은 닻 그림이 “Love & Liberty”라는 명문epitaph으로 둘러싸인 문신을 한 인물이 1828년에 세라 섬 유형지에 도착한 상습 위조전문가이자 화가인 윌리엄 뷜로 굴드가 맞다.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학의 전공 교수한테 쫓아가 책을 보여주고 진위 여부를 가리기에 이르렀지만 교수는 책 자체는 당시에 그리고 쓴 것이 맞으나, 내용은 전부 허황된 허위라고 판정을 한다.
  늘 책을 끼고 살던 ‘나’가 어느 날 호텔 바에 앉아 책을 모두 읽고 화장실에 갔다 와보니 탁자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던 것. 당연히 <물고기 책>도 사라져버렸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나’는 근본적인 무엇을 잃은 듯했고, 그 대신 기이한 전염병 같은, 지독한 짝사랑 비슷한 느낌에 감염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올포트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빌려와 그것을 보며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쓰기로 작정한다. 이 일을 ‘나’는 “굴드의 물고기 전부를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배를 만드는 것”이라 단정하면서, 소설은 본문을 시작한다.
  플래너건은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수용소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가혹한 처우를 현미경 적으로 관찰했다. 이번엔 태즈메이니아의 부속 섬인 유형지 세라 섬을 무대로 포로와 비슷한 범죄자 죄수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노역장을, 2차 세계대전 120년 전,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관찰하고 있다. 첫 장면이 바다 감옥. 영화에 가끔 나오는 건데, 만조 수위보다 낮은 곳에 감옥을 지어 문제 유형수들에게 징벌을 하는 의미에서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을 집어넣으면, 만조 때마다 호흡을 위해 머리 위 대들보에 매달려 머리, 때로는 코만 내밀고 견뎌야 하는 모습이다.
  처음에 책을 열 때부터 앞부분을 읽으면서 리처드 플래너건의 놀라운 필력에 혀를 차게 된다. 짧지 않은 문장으로 마땅하게 화려하기도 하고 반어적이기도 한 글을 읽는 재미에 푹 젖을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1부 격인 빅벨리해마를 제외하면 책의 무대가 딱 한 군데, 좁디좁은 세라 섬에 국한되어 있어서 중간 이후 한 시점이 지나면 지루해질 수도 있다.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역시 자바 섬 수용소와 강제노역장에 국한하지만 포로들의 각기 특색 있는 과거 시절과 행위와 노동과 치료 및 수술 등 장면이 다양한데 비하여 이 책은, 놀라운 필력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나처럼 질려버릴 위험이 있다. 작가도 이런 현상을 이해한 듯, 가끔 표현의 수위를 높이기도 하나, 내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어림도 없는 의견이지만, 만일 분량을 250쪽 정도로 팍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존 바스의 요절복통 유쾌한 작품 <연초 도매상>을 떠올렸다. 기발한 상상력과 적절하게 코믹한 문장에 정상인이라면 상상을 하지 못할 엽기적 장면까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굴드의 물고기 책>은 <연초 도매상>에 대지 못한다. <연초 도매상>은 아메리카 대륙에 오기까지 온갖 우여곡절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다음에 겪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독자를 끊임없이 감탄하게 만들지만, 아쉽게도 이 책 <굴드의 물고기 책>은 처음부터 고양되었던 호기심과 경탄과 재미와 긴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이것이 전형적인 아마추어의 감상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상찬한 바 있음도 기억할 만하다.
  한 줄로 내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재미있지만 아쉬운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해
율리 체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찍이 율리 체는 6년 전인 2012년에 카나리아 제도의 북섬을 무대로 흥미로운 작품 <잠수 한계시간>을 출간한 적이 있다. <새해>는 체의 2018년 출간 작품으로 또다시, 카나리아 제도 동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령 화산섬인 란사로테 섬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테레자 와 헤닝 가족을 그리고 있다.
  81쪽 까지 이어지는 첫 번째 챕터는 주인공 헤닝이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여 사이클링 복장이 아닌, 조깅화와 면 소재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빌린 산악자전거를 타고 해발 5백 미터에 위치한 ‘페메스’라는 산악마을까지를 목표로 라이딩하는 과정을 담는다. 나는 자전거 라이딩에 흥미가 없어 잘 모르지만, 제대로 된 신발과 복장을 하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심한 맞바람이 몰아쳐 가뜩이나 완만하게 오르막인 루비콘 평원을 거스르다가 목적지에 도달할 무렵엔 아주 가파른, 거의 20도에 육박한 경사를 동반한 커브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라 결코 녹록한 과정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터.
  페달을 밟을 때 왼발과 오른발을 내딛을 때마다 헤닝은 ‘1월 1일, 1월 1일’이라고 일종의 박자를 맞추면서 운행을 했는데, 맞바람이 심해 거의 고개를 숙인 상태로 페달만 밟는 단순 노동의 와중에 자연스럽게 아내 테레자와 아들 요나스, 어린 딸 비비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를 떠올린다. 젊은 부부에게 가장 곤란한 일 가운데 하나가 육아다. 더구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휴가는 평소보다 삶이 힘겨워지는 사건을 뜻하며, 육아기간 동안의 직장은 더 이상 휴식의 적이 아니라 아이들의 끝없는 참견에서 벗어나는 방어 전략일 수 있다고, 엄마이기도 한 작가 율리 체는 고백한다. 작 중에서 헤닝은 테레자와 육아와 일을 둘이 공평하게 나누어 책임지기로 약속했다. 헤닝은 좌파 성향의 출판사에, 테레자는 회계사무소에 다니는데 하루 네 시간 근무 조건인 반일제 근무에 대하여 오히려 회계사무소가 더욱 관대하게 포용을 했다고 한다. 헤닝은 사실 별로 할 말이 없다. 자기보다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테레자가 훨씬 많은 봉급을 받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가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면 경제적/수입 측면을 감안해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가 어디 있겠는가. 일면 까칠한 현대 여성으로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많은 소득을 올리는 테레자는 자신의 가정생활이 평온해야 한다는 강박적 낙관주의에 입각해 있는 상태. 이에 반해 헤닝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어머니가 남매를 키우기 위해 모든 희생을 다 해야 했던 어려움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서 아직도 혀짤배기 발음을 하는 동생 루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움직이지 않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루나는 가끔, 그러나 올케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주 오빠의 집에 들어와 며칠이고 그들이 만든 홈 오피스에서 머무르다 가고는 한다. 게다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아득한 시절의 기억.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기억 속의 음화”(이청준의 소설 제목에서 차용)에서 비롯하는 극도의 불안이랄까 혼돈이랄까 아니면 의식의 지배 비슷한 것들로 어느 시점부터 이명이 발생하더니, 이어서 오싹하는 전율과 팔이 가렵다가 피부 군데군데에 통증이 생기고, 구강건조와 심장의 불규칙 박동까지 초래하는 ‘그것’의 침공을 받기 시작했다.
  심장내과를 거친 후에도 ‘그것’의 발작이 계속되어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테레자에게 고백을 했고, 테레자는 번-아웃 상태 같다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보라 권해 진료를 받아보니 짐작대로 공황발작이란 진단을 받는다. 발작이 시작하면 ‘공황’상태를 맞아 최고의 공포 상태가 되지만 결코 공황발작으로 인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신체적 비상사태에 접어들더라도 신체의 영구적 손상은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니까. 공황장애라는 것은, 발작과 발작 사이, 그러니까 발작을 하지 않은 정상시기에마저도 닥쳐올 다음번 발작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 괴롭힐 정도라고 한다.
  어제 밤, 유럽인 특유의 유별난 송구영신 파티가 푸에르토 델 카르멘의 ‘라스 올라스’ 호텔에서 있었다. 밤 9시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던 파티에 네 식구가 다 참석하는 것은 당연했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뷔르젤렌에서 온 독일 중년부부가 (독일인 기준으로)아이들의 가볍지 않은 소란을 너그럽게 이해해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대각선에 위치한 테이블에 혼자 앉은 프랑스 남자가 테레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테레자 역시 프랑스 남자의 테이블까지 가서 오랜만에 프랑스 어를 사용해본다는 구실로 친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 거슬렀다. 그러다가 식사도 다 끝나고 술도 어느 정도 마신 다음 댄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헤닝에게 손을 벌리며 함께 춤을 출 것을 요구할 때는 기쁘기도 했다.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 춤을 추자고 해서. 허리를 굽히고 아이들과 손을 잡기도 하고, 다른 부모처럼 아이들을 허공에 솟구치게 하기도 할 때까지. 바로 옆에서 테레자가 프랑스 남자와 몸을 완전히 밀착시킨 채 플로어 위를 유영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이들의 모습을 본 요나스가 ‘“저 남자는 누구야?”라고 묻고 비비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 전까지는.
  어제 밤, 헤닝은 처음으로 환시를 경험한다. 란사로테 섬에 있는 것이 분명한 감탄할 만 한 집 가운데 하나. 당연히 흰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넓은 홀 안의 소파, 테레자 몸 위의 프랑스 남자. 뒷모습. 그의 척추를 따라 좌우로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는 부드러운 털. 이어서 공황발작이 시작됐고, 이제는 어지간하면 발작 중이어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혼자 처리하는 것이 습관이지만 일종의 우연의 사고로 옆에서 자고 있던 테레자의 잠옷의 깃을 잡아 당겼고, 그래야 했을 정도로 심한 공포가 밀려왔던 것인데, 그리하여 잠에서 잠깐 나온 테레자는 처음으로, 함께 살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 난리법석도 이제 신물이 나. 모든 게 당신 위주로만 돌아가는 것 같아?”
  “당신 노이로제 때문에 온 식구가 스트레스를 받아. 제발 정신 좀 차려!”
  “남자답게 굴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는 마치 비웃듯이 나지막하게 코를 골면서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혈관 속에 포도당이 거의 떨어진 헤닝은 빌린 자전거를 타고 20도 경사의 비탈길을 바람을 안은 채 올라가는 것보다는 쉬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노이로제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 상대가 사랑할 만한 남자가 되는 것, 더 많이 웃고, 장난치고, 일상의 자잘한 슬픔 속에서 해학을 발견하는 것. 이런 것들이 지금, 1월 1일 아침에 빌린 자전거 위에서 20도 경사의 언덕을 오르는 것보다는 덜 어려울 것이라 여기면서.
  어쨌거나 헤닝은 1월 1일 아침, 맞바람을 맞으며 언덕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루비콘 평원을 건넌 다음이었으니.
  나는 율리 체, 이 여자의 소설은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선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 2018년 공쿠르상 수상작
니콜라 마티외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낯선 소설가. Wikipedia에서 검색해보니, 1978년 6월생, 2014년 데뷔작인 미스터리 범죄소설 <짐승에겐 전쟁뿐 Aux animaux la guerre>으로 히트를 쳐 프랑스 3채널에서 6부작 시리즈로도 만들었으며, 두 번째 작품인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로 2018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단다. 그 외에는 별로 특기할 사항이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작품 발표의 간격을 감안하면 올해 쯤 혹시 새 작품 하나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내 희망사항이다. 나는 이이의 데뷔작을 읽어보지 않았다. 검색해보니 아직 번역본도 나오지 않았다.


  1992년 7월에 열다섯 살. 1977년 5월생인 소년 ‘앙토니 카사티’가 주인공이다. 모두 네 부로 되어 있다. 1992년부터 2년 간격으로 1998년까지, 네 번의 여름을 그렸다. 각 부의 표제로 대중음악의 제목을 달아놓았다. 1부가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2부는 건스앤로지스의 "You Could Be Mine", 3부는 프랑스 힙합 그룹 쉬프렘 NTM의 곡인 "La Fièvre:열병", 월드컵에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의 레블뢰 군단이 우승을 하는 4부가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인데, 아쉽게도 내가 서양 대중음악에 관심이 없어진 이후에 발표한 곡들이라 왜 이런 노래들을 표제로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책을 읽어가면서 뭐 그러려니, 어떤 의미이겠거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마티외가 프랑스 북구 보주 주 에피날에서 태어나 인근 소도시에서 성장해 그런지 소설은 프랑스 북동쪽에 있는 가상의 소도시 에일랑주를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진행된다. 먼저 에일랑주 시에 관해 약간의 소개가 필요하다. 오랜 동안 사실상 에일랑주를 먹여 살려온 프랑스 최고의 철강업체 “메탈로르”가 세계적인 불황을 맞아 드디어 용광로의 불을 끔으로 해서 급기야 에일랑주는 깊고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버린다. 한 시절에는 전 프랑스를 통틀어도 이 유서 깊은 회사에서 직공으로 일할 사람이 없어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의 옛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부터 이민을 받아 공장을 운영해도 모자랄 판국이었지만 이제 이민자들은 흑인과 더불어 프랑스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는 계급으로 전락해 다른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에일랑주에서도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
  토종 프랑스인이라고 하더라도 회사가 극도로 침체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퇴직을 선택하고 정부나 전 회사가 제공해주는 기술교육을 받은 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저임금을 받는 단순기능직에 재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취업 희망자는 많은 대신 일자리가 워낙 없어서 재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사소한 말썽에라도 휘말리면 당장 해고당해 매일의 호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떨어진다.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렇게 퇴직 후 직업교육을 받고 지게차 운전기사로 재취업을 했다가 해고당한 인물 가운데 파트릭 카사티 씨가 있었으니, 이이가 우리의 주인공 앙토니 카사티의 친아버지다. 작중 상당히 중요한 조연이다. 지금, 그러니까 책의 1부에서의 직업은 각종 집수리를 해주고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인데, 책 속의 첫 번째 여름인 1992년 7월 역시 집수리 업계의 성수기인지라 잔디 깎기나 수영장 청소 정도는 외아들 앙토니에게 맡겨야 할 정도였다.
  이때 앙토니의 나이 열다섯. 땅딸한 몸집, 꾀죄죄한 행색, 265 사이즈 발과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도 모자라 눈이 극심한 짝짝이라서 마치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눈길로 사물을 보는 것처럼 보이는 그저 그런 아이. 학교에서는 꼴찌에 뚜벅이, 여자 친구 하나 없고 별일 없이 지내는 일조차 버거워 보이지만, 열다섯이란 나이의 소년은 이제 가정에서 어머니의 영원한 웬수 사이로 접어들었고, 틈만 나면 아버지의 권력 밖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그러나 무엇보다 여성에 관해서, 특별히 해부학적 관점에서 펄펄 끓는 리비도를 다스리기 힘들 때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여성분 계시다면 이순원의 <19세>, 적극 추천한다. 그리하여 이 여름에도 호수 건너편에 있다고 말만 들었던 누드 비치를 엿보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고 근육도 탄탄하며 얼른 보면 스물두세 살처럼 보이는 사촌 형을 꼬드기는 것으로 무려 670쪽의 장편소설은 시작한다.
  그래 둘은 수상 클럽 레오라그랑주에 몰래 들어가 보트를 무단으로 꺼내 타고 호수, 1년 전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에 롤랭 씨의 아들이 빠져죽은 호수를, 도중에 들켜 클럽 직원들의 추적을 받으며 죽자고 건너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드디어, 아무도 없는 텅 빈 누드 비치에 도착한다. 인생이 원래부터 다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할 나이니까. 문제의 사촌. 4부까지 등장하지만 전형적인 조연으로, 현재 직업은 학생, 부업은 마리화나 판매지만 사실 뭐가 직업이고 뭐가 부업인지는 본인 스스로도 헷갈린다. 왜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누드 비치에서 누드 여성은 한 명도 만나지 못하는 반면 에밀랑주 시의 최고 계급의 자제들과 마리화나를 매개로 친분을 맺게 되고, 급기야 당일 밤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청을 받는다. 마리화나를 듬뿍 가져온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경찰당국에 의하여 마리화나 집중 단속이 불과 얼마 전에 벌어져 지금 대마 풀 한 포기 보기도 어려웠던 실정이니 그럴 만하기도 했다.
  둘은 흔쾌히 초대를 수락했는데, 특히 잘 사는 애들 가운데 ‘스테파니 죠수아’라고 하는 여자애를 보고 앙토니가 홀딱 반해버렸다. 2부에서 보면 죠슈아 씨는 시장 자리를 염두에 두고 현재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시의 법관, 검사, 변호사, 은행가, 고위경찰 등등 중요한 모든 사람들이 회원으로 있는 수상클럽을 관리하는 협회의 회장으로 있는 사람이니 만일 극심한 마리화나 공급부족 현상이 없었다면 앙토니는 바라보지도 못할 계급간 차이가 있었을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스테파니는 비슷한 부류의 알렉스와 해 볼 거 다 해 본 사이. 그러나 수시로 헤어지고 다시 화해하고 그런 사이. 문제는 파티가 벌어지는 저택이 너무 멀리 있어 자신들의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는 턱도 없어, 앙토니의 아버지가 아끼고 아끼는,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탈까 말까 하는 오토바이 야마하 YZ의 신세를 져야한다는 것에 있다. 하여튼 중간과정 생략하고 말하자면 야마하를 타고 파티에 끼어서 마리화나 피우고, 술 퍼마시고, 심지어 혈관확장제 흡입까지 해서 홀랑 까무러쳤다가 아침에 깨보니 아랍인 출신 깡패 두목 비슷한 하신이 야마하를 훔쳐간 것. 이제 앙토니의 앞날엔 아버지한테 얻어터져 인생의 종막을 고하는 일만 남았다.
  여기까지 읽으면 늦게야, 그것도 별 임팩트 없이 등장하는 모로코 출신 이민자의 아들이자 믿음 없는 무슬림인 하신 부알리 역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 집 밖에서는 잔인한 폭력배요 그들의 두목이긴 하지만 집 안에선 늙고 허약한 아버지의 명령에 거역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휘두르는 정의의 채찍, 곡괭이 자루에 머리통이 터져도 깩 소리 한 번 않으며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전형적인 아랍인 아들이다. 비록 아버지 말렉 부알리 씨가 일자리를 찾아 모로코에서 프랑스 시골 촌 도시까지 흘러든 별 볼 일 없는 남자인 것을 아들이 충분히 알더라도 말이지. 이 아이는 세계 최고급이라고 자부하는 모로코 마리화나를 전 유럽에 유통시켜 그 웬수놈의 돈을 왕창 벌 생각을 가득 품고 있는 야심가. 그러던 어느 날, 훔친 오토바이를 팔아넘길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왔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앙토니의 말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프랑스 주부인 엄마 엘렌이 억지로 앙토니를 끌고 말렉 씨를 찾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당신은 나를 모욕했소, 라고 말렉 씨가 엘렌에게 반응한 다음인 것을 당연히 모르는 상태로 현관문을 연 순간, 비쩍 마르고 늙은 아버지한테 작신,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얻어터진 후, 앙토니 집 앞에 문제의 오토바이, 이미 엉망으로 찌그러진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확 불태워버린다. 훤한 대낮에. 이렇게 시작한다.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과거에는 화려했으나 이제 형편없이 몰락한 도시의 전체적인 음울한 분위기와 이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들. 또 하나는 이 속에서 사춘기를 맞고 성장해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 열아홉 살이 되어 군대에 가고 서로 성적 교섭을 맺고 어느 새 사용하는 언어에서 욕설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도 모른 채 스물한 살이 된다. 그들의 절절했던 소원, 에일랑주를 뜨고 말거야, 라는 각오가 그리 만만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장면들을 담담하게 써놓은 마티외. 이 가벼운 비극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물론 돈 많고 어여쁘고, 처음엔 어찌됐건 간에 나중엔 공부도 잘하게 되는 부잣집 따님들은 결국 대학생이 되고 많은 급여를 받는 안정된 직장인이 되어 에일랑주를 떠서 파리로, 캘리포니아로, 캐나다로 뜨는 데 성공을 하지만, 결코 세상엔 예외라는 것이 흔하지 않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8-0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 작품이 별 다섯 개군요?! 저는 초반 조금 읽다가 좀 시시한 거 같아서 일단 덮었는데. ㅎㅎㅎ 다시 잘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0-08-03 10:27   좋아요 0 | URL
그냥 평범합니다. 쇼킹한 것도 없고 시시하다는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10대 아이들이 흔히 쓰는 욕설이 초반에 많이 나와서 그건 좀 거슬리는데요, 우울한 도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더라고요. ㅎㅎㅎㅎ 근데 제가 뭘 알아야지요.

잠자냥 2020-08-03 10:37   좋아요 0 | URL
네, 말씀하신 것처럼 비속어가 너무 많이 나와서 ㅎㅎㅎ 아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한데.... 공쿠르상에 낚인 것인가... 하면서 일단 책을 덮었습죠. ㅎㅎㅎ

Falstaff 2020-08-03 10: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본문에 썼다시피, 아이들이 나이 먹어가면서 욕설 비속어의 빈도가 낮아집니다. 지들도 대가리가 커가는 것이겠지요. ㅎㅎㅎㅎㅎ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2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는 우리나라 거의 최초의 동화작가 마해송, 어머니는 마산고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한 무용가 박외선. 1939년 도쿄 태생. 시를 읽어보면 어쨌든 전쟁 이전부터 한국에 와서 살다가 전쟁도 겪고 서울고등학교와 세브란스 의학교와 서울의대 대학원을 마치고 공군 의무관으로 입대한다. 그러다가 1965년, 공군 장교임에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 모처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66년에 제대한다. 이러니 내 나라에 정이 있겠는가. 제대하고 얼마 있지 않아 미국 오하이오로 가서 의사생활을 하는 한편 활발하게 시를 써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다른 시리즈도 아니고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두 번째 자리를 얻는다. 이이는 본인이 의사로 미국에 가서 의사를 지냈고, 한 살 아래 소설가 박상륭은 1969년 캐나다로 건너가 병원 안치실의 청소부를 했다. 둘의 공통점은, 박정희 정권하고는 같은 하늘을 이고 지내기 힘들어 했다는 것. 대표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는 것. 병원에서 근무했다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은, 만일 당신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세대라면 권하지 않겠다. 2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1975년 말부터 1980년 중순까지 약 4년간의 작품이며, 2부는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펴낸 《평균율 1》(1968)과 《평균율 2》(1972)를 중심으로 실었다. 특히 2부를 열면 많은 시어들이 한문으로 씌어 있다. 당시엔 독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보다 정확한 뜻을 알리기 위하여 흔히 한문으로 쓰고는 해서 오히려 이런 표현이 당연했겠지만 요즘 세대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해독 불가능의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 독후감에서는 그런 분들을 위해 한자를 전부 우리말로 바꿔 옮기려 한다. 원문과 달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마종기는 세브란스 재학 중에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다. 혜산은 또한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을 하니, 정지용-박두진-마종기, 한국 서정시의 큰 줄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그러나 마종기는 모더니즘적 애매함과 개인적 사유에 함몰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래이되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공통의 감정을, ①자신의 직업인 의료업, 그리고 ②지리적으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의 생활이란 두 가닥의 주된 줄기에서,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의 말대로 쉬운 언어를 사용해 그리고 있다. 사실 말이 직업은 의사요, 사는 곳은 미국이라, 이지 의사라는 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깊은 성찰을 해야 하며,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시인에게 언제나 아스라한 그리움을 갖게 만드는 지리적으로 적대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증례 2>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옆집 브레이셔 할머니는 여름밤 등의자에 앉아 미국이민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뉴욕시의 교육으로 아직 안경 속에 온정이 있어도 보이는 쓸쓸한 발음, 자식은 성공을 해 옆에 없고 혼자 사는 2층방에 빛나는 과거의 사진틀.


  병원에서 위독을 알려도 그랬지. 색감 있는 카드와 항공편 꽃다발이 석양에 밝아도 방문객 없는 할머니 ㅡ 당신은 외국의사의 내 환자. 대국의 외로움은 내 눈에 보인다. 차가운 철판부검대에서 골(骨:뼈)을 자르고 얼굴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뜯어내어도, 조용하게 입 다문 당신의 외로움, 내 눈에 보인다.


  (중략)


  사람이여, 그리웁고 사랑스런 사람이여. 망자의 사지에 힘주던 핏물로써 네 몸을 이제 기억할 수는 없다. 어느날 우리의 복강에서도 이름모를 산꽃이 피고 변형된 생애가 다시 자라면, 그때 이 현세의 산란한 바람을 다스려 우리는 서로 보리라. 산골짜기 냇물 속에서 만나리라, 사람이여.  (띄어쓰기와 오기는 전부 원시를 따랐습니다. 이하 인용도 마찬가지.)



  위의 인용을 보면 미국에서 의사의 직업을 하며 평소 알던 다른 나라 출신의 할머니가 죽어, 할머니를 해부하고, 삶과 죽음이 우화의 세계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종기의 시는 어렵지 않다. 마지막 연 ‘우리는 서로 보리라’ 하는 것에서 과연 이들은 어디서 보게 되기를 기대할까. ‘산골짜기 냇물 속에서 만나리라’를 미국의 어느 곳이라고 읽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라 믿는다. 만나고자 하는 대상이 뉴욕에 살던 브레이셔 할머니일지언정 시인이자 의사와 할머니가 만나는 곳은 극동 아시아의 작은 산골짜기가 아닌가 싶다.
  <미스터 제임스 밀러에게> 라는 시에서는, 한국의 영등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제임스 밀러, 혹은 한국에 대한 일정한 시각을 갖고 있는 미국인들을 대표해서 소환한 제임스 밀러를 향해 시인은 쓰게 얘기한다.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네 묘한 조소로 끝나 버리는
  영등포가 아니다.
  영자도 순자도 봉순이도 있겠지만
  맘마상 어쩌구로 끝나 버리는
  영등포는 아니다.


  피난을 가서 장바닥을 싸돌고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워 보면 안다.
  토마토가 고기덩어리가 휴지 조각이 함께
  부글부글 오장이 끓던 꿀꿀이죽,
  그 맛을 음미해 봐서 안다.
 
  (중략)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명랑한 가발 공장도 섰겠고
  입체교차로가 드라이브에 좋다지만
  내 군대 3년의 영등포에는
  막걸리와 한기만이 있었다.


  (중략)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고국을 떠난 지 벌써 수 년,
  모든 미스터 제임스 밀러여
  내 상기되고 떨리는 목소리는
  스무살의 네 혈기 앞에서 중심을 잃는다.



  마종기가 공군 의무장교로 있던 시절의 근무지가 영등포였단다. 당시에 영등포 역전 주변은 서울에서 유명한 사창가 가운데 한 곳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의사선생으로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아는 어떤 미국인 제임스 밀러가 우연히 한국을 알고, 영등포를 안다고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개발도상국도 되지 못했던 후진국을 고국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위의 중략부분에 있다시피) “초조와 열등감이 빗물처럼 산발하고 / 공연한 내 정신의 무질서를 밤마다 토하”던 곳, “그리고는 창피해서 골방의 이불을 덮던 / 우리들의 참으로 희귀하고 진하던 청춘”의 기억까지 서성거리게 되는 것 아닐까.
  마종기가 고문을 당하던 1965년이 지나고 66년이 되면 아버지 마해송이 별세한다. 부친과 가까웠던지 시인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를 많이 남겼던 것 같다. 이 시집에서도 몇 편을 볼 수 있는데, 부모 이야기를 하면서 누선을 자극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유독 이 시의 전문을 소개하면서 독후감을 마치고자 하는 것은, ‘마종기’라는 시인의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리 쉬운 단어들만 모아, 쉬운 글을 쓰면서도 공감을 하게 만드는지, 혀를 차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부친을 닮아 동시를 쓴 듯한 기분, 그러면서도 시인의 의사 직업과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도 잘 보여준다.



  선종 이후 · 4  (善終 以後)



  가끔 당신을 만나요.
  먼 나라 낯선 도시에
  나는 지금 살지만
  나를 찾아온 환자 중에서도
  비슷한 윤곽, 안경과 대머리
  당신은 미소하시겠지만
  나는 말없이 반가와서 속으로 울어요.


  가끔 당신을 만나요.
  외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고
  가끔 당신의 살이 더 희어지고
  눈이 파래지더라도
  당신이 환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사이로
  대견하게 나를 보시는 마음을 알아요.


  고통을 끝없이 보는 고통을 아시나요.
  두려움을 지키는 두려움의 계속
  내가 그 안에서 향방 잃은 표정이 되면
  어느 여가에 여기까지 오셔요.
  창밖에서 빗속으로 불러 주시는
  한밤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 들어요. (전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0-07-3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를 정말 전혀 모릅니다. 근데 이 글을 읽으며 머리가죽이 조여오는 건 왜일까요... 쉬운 단어로 쓴 시라는 폴스타프님의 말씀에 저도 마종기님의 시집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시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 안 읽고 가끔 폴스타프님 시집 리뷰 보는걸로 감동받곤 했었거든요.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07-31 12:57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셨다니 기쁩니다.
저도 아주 한정된 시만 좋아할 뿐입니다. 요새 시는, 제 생각에, 과하게 시인 개인의 사유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 같아서 다시 우리나라 근대시를 읽기 시작한 건데, 독후감 읽기에도 좋으셨다니 기분이 좋군요. ^^
 
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독일어 문화권에서는 센세이셔널을 일으킨 작가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이의 소설 작품들을 번역 출간했는데 이번엔 을유문화사에서 최신작 <망자들>(2016)을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내놓았다. 좋은 일이다. 나는 <망자들>을 읽자마자 크라흐트의 데뷔작인 <파저란트>와 <제국>을 보관해 두었다. 올해 안에 적어도 한 권은 읽을 듯하다.
  그 정도로 매력적이다.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1930년대 초중반의 5월. 비 내리는 도쿄에 어둠이 깔리고,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렀던 젊고 잘생긴 장교가 일본 특유의 의식인 할복자살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배를 스스로 갈라 죽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것을 알아 카이샤쿠, 즉 할복하는 사람의 뒤에 서 있다가 큰 칼로 목을 내리침으로써 빨리 죽음에 이르게 도와주는 사람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소설의 일본군 장교는 무릎을 꿇은 채 아주 예리하게 벼린 단도를 자기 복부, 단전부분에 꾹 누르고 엎어진다. 그러나 장을 찌른 것 가지고는 곧바로 죽음에 이르지 않아 (대개 여기가 카이셰쿠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다시 고통을 무릅쓰고 똑바로 앉아 칼을 위쪽으로 북 치켜 올렸고, 그래서 위에 손상을 주었는지 덩이진 피를 입으로 물컹물컹 쏟아내며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 순간, 벽 속에 숨어 있던 무비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고, 심지어 필름 돌아가는 소리도 약하지만 여전히 흘러나왔다.
  인화를 마친 필름을 가정용 영사기로 보고 있던 희대의 천재 아마카스 마사히코. 아홉 살이 채 안 되어 일곱 개의 언어를 마스터하고 산스크리스트어를 독학했으며 그랜드 피아노로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하이네를 독어로 읽었던 어린 시절부터 손톱을 물어뜯었고, 손톱에서 피가 나고 너덜너덜해지자 이젠 발톱까지 물어뜯었던 아이는 성장해 정부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면에 장교의 배에서부터 양비귀꽃 같은 피가 솟구치는 장면에서 눈길을 거두고 만다. 혐오스러워서. 예전에 중화제국에서 행해지던 능지처참 장면을 사진을 통해 본 적이 있는데(나도 있다.), 세상에는 재현하고 복사하면 안 되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동의한다). 아마카스는 이 필름을 자신이 직접 타이프 한 편지와 함께 베를린으로 보낼 생각이다. 진짜 느낌은 언어적 표현이나 슬로건 보다는 사진이나 영화를 중심으로 모습을 갖춘다는 신념에 따라, 할복 장면을 포함한 영화를 베를린에 보냄으로써 그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정체政體를 지지하려는 생각이었을까? 해석은 독자 마음이다.
  작품 속에선 영화와 편지를 보냄과 함께,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맞설 대안으로 유럽 영화의 대국인 독일의 감독, 아니면 오스트리아나 네덜란드 출신의 감독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때 아마카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감독 가운데 한 명이 ‘에밀 네겔리.’ 최근에 그의 영화 <풍차>를 보고 사건의 부재 속에서 신성한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감동을 받은 터이었다. 이런 차에 믿기지 않게 정말로 에밀 네겔리가 긴 항해 끝에 일본 고베 항에 발을 딛는다.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준수한 용모를 지닌 에밀 네겔리(그러나 이미 대머리가 상당히 진행된 중년의 사내)는 스위스 사람으로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프로펠러 항공기를 타고 이동 중이다. 세계상世界像에 대한 확고하고 건강한 회의를 품고 있는 네겔리는 식사 또는 식도락을 즐기지 않는 타입으로 양분섭취 과정은 지겹고 가끔은 심지어 역겹게 생각해 소량의 저녁식사 전까지 커피만 마시기도 하는 인물로 포도당 섭취의 부족은 어쩔 수 없이 주변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짜증을 부리는 일로 나타나기도 하는, 조금쯤 대하기 피곤한 사람에 속한다. 독일인 약혼녀 ‘이다 폰 윅스퀼’은 일 때문에 지금 일본에 가 있지만 자신도 몇 달 후 일본으로 가게될 지는 꿈도 꾸어본 적이 없다. 영화인 네겔리가 생각하기로 세계 영화 백년 역사상 천재가 딱 다섯 명이 있었다. 차례로 로베르 브레송, 장 비고,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오스 야스지로, 그리고 자신이란다. 앞의 네 명은 실제 인물이고 주로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이다.
  베를린에 도착하니 앞에서 얘기한 아마카스가 보낸 편지와 영화와는 전혀 별개로 독일제국의 문화상 후겐베르크가 거대 프로젝트를 네겔리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화상과 만남의 자리에서 동석하게 된 영화비평가이자 유대인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로테 아이스너는 뱀파이어와 유령에 관한 공포영화를 만들 것을 조언해주고, 자신들 역시 뱀파이어와 유령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낳고 자라고 공부하고 사랑했던 독일 땅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고백한다. 동시에 하는 말이, 영화 속 귀신은 반드시 잘 생기고 마른 동양인이어야 한단다. 즉 유럽에서는 유효기간이 끝난 브램 스토커 식의 드라큘라 대신 다른 존재의 죽음 같은 것을 찾아 일본으로 떠남으로 해서 처음에 후겐베르크가 제안한 거금 20만 달러의 제작비를 80만 달러까지 올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겔리는 약혼녀가 있는 일본 땅으로 출항하게 된 것.
  어렸을 때 네겔리는 늘 어마어마하게 비싼 와이셔츠에 좁은 커프스, 금으로 만든 얇은 손목시계를 찬 아버지의 가는 손을 동경해왔다. 그러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서 아버지는 평생 아들을 이름 ‘에밀’ 대신 ‘필립’이라 불렀는데 그게 유머로 서투르게 위장한 잔인함을 아들에게 투사한 행위라고 단정한 것은 먼 훗날 엘펜슈타인의 복음병원 임종실에서 아버지의 가는 손을 다시 붙잡았을 때였다. 일 년 전부터 이를 닦지 않아 공포스런 구취를 풍기며 죽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에밀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고 고개 숙인 그의 귀에 무엇을 속삭이려 했을까. 자신이 들은 것은 분명히 “하”라는 외마디. 독일어 발음으로 ‘H?’ 그건 모르겠지만 에밀은 틀림없이 자신이 단 하나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왔으니, 평생 단 한 번,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고, 그 저주는 백퍼센트 실현된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사람이 오래 떨어져 살았던 약혼녀 이다 폰 윅스퀼과 일본의 천재적 영화인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있는 일본에 도착하니, 그 순간 독자는 네겔리의 특별한 능력이 언제 발현될까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스토리 위주로만 읽으면 섭섭한 일이다. 글. ‘글’이라고 하면 ‘문장’의 집합일 터인데, 사실 개별적 문장이 감성에 호소한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다 모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글’을 읽는 일이 대단히 즐겁다는 것. 뭐라 한 마디로 딱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 생각났다, 글이 대단히 유혹적이다. 뭔가 곧 드러날 것 같은 비의를 숨긴 듯한 글, 문장의 연속이 매력적이다. 그리하여 난 이 작품은 스토리가 반, 문장의 조합으로써의 글을 감상하는 것이 또 반이라고 감정했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 역자가 간섭을 했겠으나, 번역본을 읽으면서도 크라흐트의 미학을 감지하는데 문제가 없다. 이러니 어찌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지 않을 수 있었겠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7-3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꼭 읽어보려고요. 배경이 일본 도쿄라는 점도 흥미롭네요.

Falstaff 2020-07-30 09:55   좋아요 0 | URL
옙. 흥미로우실 겁니다. 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이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