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드의 물고기 책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유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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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고른 건 당연히 플래너건의 2012년 맨-부커 수상작인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공감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하게는 알고 있지 않았던, 2차 세계대전 중 자바 섬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포로로 잡힌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의 비참한 경험, 열악한 음식, 구타, 극한의 노동, 말라리아, 뎅기열, 부종, 콜레라, 이질 등의 질병 같은 것들, 전쟁이란 명목으로 벌어진 인간집단에 의한 다른 인간집단에 대한 학대를 실감나게 그렸던 것이 마음에 와 닿아서 이번에 같은 작가가 2001년, 40세 전성기의 나이에 출간한 <굴드의 물고기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빅벨리해마, 켈피, 가시복, 별바라기, 쥐치, 장어 등 모두 열두 종의 어류를 표제로 한 부part로 구성한 독특한 책이다. 1부 ‘빅벨리해마’는 일인칭 화자, 이름을 ‘시드 헤밋’이라 유추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나’는 실업률이 높은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직업 없이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도 그냥 놀 수는 없어서 썩어가는 고가구를 사들여 거기에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모욕을 추가해 돈 많은 미국 관광객에게 테즈메이니아의 옛 이름인 벤디먼스랜드 고미술품 협회라는 유령단체의 보증서를 붙여 고가로 팔아먹기도 한다. ‘나’의 보호관찰관, 즉 공무원이라서 가명으로만 등장하는 ‘레니 콩가’도 이 지역에서 가구 위조는 매우 전망이 좋은 직업이라고 선언하고는 썩은 가구에 모욕을 가하는 일에 가세를 하는 것도 모자라, 베트남에서 콩나물시루 같은 폐정크선을 타고 무작정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온 난민 라이 푸 훙 씨를 영입해 과감하게 고가구 제조 공정을 추가해버린다.
  존경심을 품으라는 이유로 ‘훙 선생’이라고 불리우기를 바라는 훙선생은 베트남에서 증기 기중기 기사로 있었으나 진짜 야심은 시인이 되는 거였다. 문학은 훙선생의 종교 자체라서, 그는 빅토르 위고를 모시는 불교 종파인 까오다이교의 정식 신자였단다. 이 양반에 의하여 첫째 파트인 ‘빅밸리해마’가 탄생하고 이어 물고기 파트가 등장할 수 있으니 소개를 해야 할 밖에.
  태즈메이니아에 ‘살라망카’라는 항구가 있었나보다. 나는 책을 읽으며 고가구 위조를 하고, 살라망카, 하니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스페인의 살라망카만 생각하고, 거기가 내륙지방인데 어떻게 항구가 있을까, 싶어서 구글, 위키피디아 등을 아무리 검색해도 항구라는 내용이 없었다. 왜 이런 유난을 떨었는가 하면, 부두 근처 오래된 창고 건물에 있던 고물상에서 1940년대 흑목黑木 옷장과 낡은 함석 고기 찬장이 눈에 띄었고, 찬장 안엔 과월호 여성잡지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는데 그 속에 비단 끈 같은, 제본할 때 표지나 책등에서 몇 가닥 빠져나온 것이 눈에 띄어 봤더니 윌리엄 뷜로 굴드라는 유형자가 1828년에(조심하시라, 책의 27쪽에는 1928년이라고 나와 몇 페이지 더 넘어가면 마구 헷갈리게 되어 있으니), 지금은 태즈메이니아라고 불리는 밴디먼스랜드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는 유형지, (허구의) 세라 섬에서 외과의사가 과학연구목적으로 이곳에서 잡히는 모든 어류를 그림으로 묘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린 책이었다.
  이 책이 특별하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예전 종이가 귀했던 때 흔히들 그랬듯이 세밀한 글씨로 빽빽하게, 하여간 종이의 여백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를 동반한 이야기를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형식으로 보면 일기나 일지라 할 수 있으나 때론 속세의 진흙탕에 매몰된 실제 사건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 거대한 유형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라 흉학범들이 몰리던 벤디먼스랜드, 또 그곳에서도 보급이나 파견 등이 극히 불량했던 외딴 세라 섬, 얼마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가 하면, 그곳의 우거진 밀림을 일컫기를 원주민을 제외한 사람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아 드라큘라 백작이 살던 ‘트란실바니아 숲’이라고 할 정도였던 곳에서 벌어진 책. 1820년대에 ‘검은 전쟁’이라 하여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원주민 학살이 대대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굴드가 물고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을 전쟁이 바로 끝난 시기 정도로 설정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가 빌리 굴드가 그림과 함께 기록한 내용에 흠뻑 빠져, 급기야 함석 찬장을 사버렸고,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책을 이용해 이득을 챙길 생각을 버리고 책의 진실, 이 지역에 있었던 역사의 진위 여부를 파헤치기에 이른다는 거. 그리하여 태즈메이니아 섬의 기록물 보관소의 킴 피어스 씨에게 도움을 받아 같은 책, 그러나 글이 없고 그림만 있는 굴드의 물고기 책을 올포트 도서관에서 또 한 권 발견하기에 이르고, 수형자 사망 기록에서 몇 명의 윌리엄 굴드를 발굴해낸다. 이 가운데 왼쪽 가슴에 파란 날개가 달린 붉은 닻 그림이 “Love & Liberty”라는 명문epitaph으로 둘러싸인 문신을 한 인물이 1828년에 세라 섬 유형지에 도착한 상습 위조전문가이자 화가인 윌리엄 뷜로 굴드가 맞다.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학의 전공 교수한테 쫓아가 책을 보여주고 진위 여부를 가리기에 이르렀지만 교수는 책 자체는 당시에 그리고 쓴 것이 맞으나, 내용은 전부 허황된 허위라고 판정을 한다.
  늘 책을 끼고 살던 ‘나’가 어느 날 호텔 바에 앉아 책을 모두 읽고 화장실에 갔다 와보니 탁자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던 것. 당연히 <물고기 책>도 사라져버렸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나’는 근본적인 무엇을 잃은 듯했고, 그 대신 기이한 전염병 같은, 지독한 짝사랑 비슷한 느낌에 감염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올포트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빌려와 그것을 보며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쓰기로 작정한다. 이 일을 ‘나’는 “굴드의 물고기 전부를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배를 만드는 것”이라 단정하면서, 소설은 본문을 시작한다.
  플래너건은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수용소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가혹한 처우를 현미경 적으로 관찰했다. 이번엔 태즈메이니아의 부속 섬인 유형지 세라 섬을 무대로 포로와 비슷한 범죄자 죄수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노역장을, 2차 세계대전 120년 전,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관찰하고 있다. 첫 장면이 바다 감옥. 영화에 가끔 나오는 건데, 만조 수위보다 낮은 곳에 감옥을 지어 문제 유형수들에게 징벌을 하는 의미에서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을 집어넣으면, 만조 때마다 호흡을 위해 머리 위 대들보에 매달려 머리, 때로는 코만 내밀고 견뎌야 하는 모습이다.
  처음에 책을 열 때부터 앞부분을 읽으면서 리처드 플래너건의 놀라운 필력에 혀를 차게 된다. 짧지 않은 문장으로 마땅하게 화려하기도 하고 반어적이기도 한 글을 읽는 재미에 푹 젖을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1부 격인 빅벨리해마를 제외하면 책의 무대가 딱 한 군데, 좁디좁은 세라 섬에 국한되어 있어서 중간 이후 한 시점이 지나면 지루해질 수도 있다.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역시 자바 섬 수용소와 강제노역장에 국한하지만 포로들의 각기 특색 있는 과거 시절과 행위와 노동과 치료 및 수술 등 장면이 다양한데 비하여 이 책은, 놀라운 필력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나처럼 질려버릴 위험이 있다. 작가도 이런 현상을 이해한 듯, 가끔 표현의 수위를 높이기도 하나, 내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어림도 없는 의견이지만, 만일 분량을 250쪽 정도로 팍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존 바스의 요절복통 유쾌한 작품 <연초 도매상>을 떠올렸다. 기발한 상상력과 적절하게 코믹한 문장에 정상인이라면 상상을 하지 못할 엽기적 장면까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굴드의 물고기 책>은 <연초 도매상>에 대지 못한다. <연초 도매상>은 아메리카 대륙에 오기까지 온갖 우여곡절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다음에 겪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독자를 끊임없이 감탄하게 만들지만, 아쉽게도 이 책 <굴드의 물고기 책>은 처음부터 고양되었던 호기심과 경탄과 재미와 긴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이것이 전형적인 아마추어의 감상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상찬한 바 있음도 기억할 만하다.
  한 줄로 내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재미있지만 아쉬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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