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율리 체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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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율리 체는 6년 전인 2012년에 카나리아 제도의 북섬을 무대로 흥미로운 작품 <잠수 한계시간>을 출간한 적이 있다. <새해>는 체의 2018년 출간 작품으로 또다시, 카나리아 제도 동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령 화산섬인 란사로테 섬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테레자 와 헤닝 가족을 그리고 있다.
  81쪽 까지 이어지는 첫 번째 챕터는 주인공 헤닝이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여 사이클링 복장이 아닌, 조깅화와 면 소재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빌린 산악자전거를 타고 해발 5백 미터에 위치한 ‘페메스’라는 산악마을까지를 목표로 라이딩하는 과정을 담는다. 나는 자전거 라이딩에 흥미가 없어 잘 모르지만, 제대로 된 신발과 복장을 하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심한 맞바람이 몰아쳐 가뜩이나 완만하게 오르막인 루비콘 평원을 거스르다가 목적지에 도달할 무렵엔 아주 가파른, 거의 20도에 육박한 경사를 동반한 커브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라 결코 녹록한 과정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터.
  페달을 밟을 때 왼발과 오른발을 내딛을 때마다 헤닝은 ‘1월 1일, 1월 1일’이라고 일종의 박자를 맞추면서 운행을 했는데, 맞바람이 심해 거의 고개를 숙인 상태로 페달만 밟는 단순 노동의 와중에 자연스럽게 아내 테레자와 아들 요나스, 어린 딸 비비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를 떠올린다. 젊은 부부에게 가장 곤란한 일 가운데 하나가 육아다. 더구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휴가는 평소보다 삶이 힘겨워지는 사건을 뜻하며, 육아기간 동안의 직장은 더 이상 휴식의 적이 아니라 아이들의 끝없는 참견에서 벗어나는 방어 전략일 수 있다고, 엄마이기도 한 작가 율리 체는 고백한다. 작 중에서 헤닝은 테레자와 육아와 일을 둘이 공평하게 나누어 책임지기로 약속했다. 헤닝은 좌파 성향의 출판사에, 테레자는 회계사무소에 다니는데 하루 네 시간 근무 조건인 반일제 근무에 대하여 오히려 회계사무소가 더욱 관대하게 포용을 했다고 한다. 헤닝은 사실 별로 할 말이 없다. 자기보다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테레자가 훨씬 많은 봉급을 받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가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면 경제적/수입 측면을 감안해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가 어디 있겠는가. 일면 까칠한 현대 여성으로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많은 소득을 올리는 테레자는 자신의 가정생활이 평온해야 한다는 강박적 낙관주의에 입각해 있는 상태. 이에 반해 헤닝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어머니가 남매를 키우기 위해 모든 희생을 다 해야 했던 어려움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서 아직도 혀짤배기 발음을 하는 동생 루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움직이지 않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루나는 가끔, 그러나 올케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주 오빠의 집에 들어와 며칠이고 그들이 만든 홈 오피스에서 머무르다 가고는 한다. 게다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아득한 시절의 기억.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기억 속의 음화”(이청준의 소설 제목에서 차용)에서 비롯하는 극도의 불안이랄까 혼돈이랄까 아니면 의식의 지배 비슷한 것들로 어느 시점부터 이명이 발생하더니, 이어서 오싹하는 전율과 팔이 가렵다가 피부 군데군데에 통증이 생기고, 구강건조와 심장의 불규칙 박동까지 초래하는 ‘그것’의 침공을 받기 시작했다.
  심장내과를 거친 후에도 ‘그것’의 발작이 계속되어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테레자에게 고백을 했고, 테레자는 번-아웃 상태 같다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보라 권해 진료를 받아보니 짐작대로 공황발작이란 진단을 받는다. 발작이 시작하면 ‘공황’상태를 맞아 최고의 공포 상태가 되지만 결코 공황발작으로 인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신체적 비상사태에 접어들더라도 신체의 영구적 손상은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니까. 공황장애라는 것은, 발작과 발작 사이, 그러니까 발작을 하지 않은 정상시기에마저도 닥쳐올 다음번 발작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 괴롭힐 정도라고 한다.
  어제 밤, 유럽인 특유의 유별난 송구영신 파티가 푸에르토 델 카르멘의 ‘라스 올라스’ 호텔에서 있었다. 밤 9시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던 파티에 네 식구가 다 참석하는 것은 당연했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뷔르젤렌에서 온 독일 중년부부가 (독일인 기준으로)아이들의 가볍지 않은 소란을 너그럽게 이해해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대각선에 위치한 테이블에 혼자 앉은 프랑스 남자가 테레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테레자 역시 프랑스 남자의 테이블까지 가서 오랜만에 프랑스 어를 사용해본다는 구실로 친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 거슬렀다. 그러다가 식사도 다 끝나고 술도 어느 정도 마신 다음 댄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헤닝에게 손을 벌리며 함께 춤을 출 것을 요구할 때는 기쁘기도 했다.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 춤을 추자고 해서. 허리를 굽히고 아이들과 손을 잡기도 하고, 다른 부모처럼 아이들을 허공에 솟구치게 하기도 할 때까지. 바로 옆에서 테레자가 프랑스 남자와 몸을 완전히 밀착시킨 채 플로어 위를 유영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이들의 모습을 본 요나스가 ‘“저 남자는 누구야?”라고 묻고 비비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 전까지는.
  어제 밤, 헤닝은 처음으로 환시를 경험한다. 란사로테 섬에 있는 것이 분명한 감탄할 만 한 집 가운데 하나. 당연히 흰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넓은 홀 안의 소파, 테레자 몸 위의 프랑스 남자. 뒷모습. 그의 척추를 따라 좌우로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는 부드러운 털. 이어서 공황발작이 시작됐고, 이제는 어지간하면 발작 중이어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혼자 처리하는 것이 습관이지만 일종의 우연의 사고로 옆에서 자고 있던 테레자의 잠옷의 깃을 잡아 당겼고, 그래야 했을 정도로 심한 공포가 밀려왔던 것인데, 그리하여 잠에서 잠깐 나온 테레자는 처음으로, 함께 살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 난리법석도 이제 신물이 나. 모든 게 당신 위주로만 돌아가는 것 같아?”
  “당신 노이로제 때문에 온 식구가 스트레스를 받아. 제발 정신 좀 차려!”
  “남자답게 굴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는 마치 비웃듯이 나지막하게 코를 골면서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혈관 속에 포도당이 거의 떨어진 헤닝은 빌린 자전거를 타고 20도 경사의 비탈길을 바람을 안은 채 올라가는 것보다는 쉬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노이로제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 상대가 사랑할 만한 남자가 되는 것, 더 많이 웃고, 장난치고, 일상의 자잘한 슬픔 속에서 해학을 발견하는 것. 이런 것들이 지금, 1월 1일 아침에 빌린 자전거 위에서 20도 경사의 언덕을 오르는 것보다는 덜 어려울 것이라 여기면서.
  어쨌거나 헤닝은 1월 1일 아침, 맞바람을 맞으며 언덕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루비콘 평원을 건넌 다음이었으니.
  나는 율리 체, 이 여자의 소설은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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