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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0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평점 :
<나의 사촌 레이첼>을 재미있게 읽어 이 현대문학에서 나온 단편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영화 <여왕 마고>에서 보듯 16세기 말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 등 위그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간 프랑스 가계의 후손, 대프니 듀 모리에의 책은 이제 겨우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니 이이의 작품에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단편집 《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를 이를테면, ‘별식’ 이나 ‘외식’ 또는 ‘특식’이라 말하고 싶다. 그럴 정도로 맛있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이, 자주 먹으면, 질린다. 이 책을 한 방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게 앉은 자리에서 백설탕 입힌 튀김 도넛 아홉 개를 계속해 먹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특식이라서 첫입에 반한다. <지금 쳐다보지 마>의 첫 장면. 아들과 딸을 키우다가 작은 아이라서 더 사랑을 주었던 딸 크리스틴을 치명적인 뇌수막염으로 잃어버려 상처를 입은 부부 존과 로라. 시간이 흘러 로라의 상처가 치유되고 삶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만들기 위해 떠난 베네치아 여행. 베네치아의 동북쪽 작은 섬 토르첼로의 카페에 앉은 부부의 뒤편에 스코틀랜드 쌍둥이 할머니가 남편 존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고 있다. 존은 연애 시절에 곧잘 로라와 그랬듯이 아내에게 나직하게 속삭인다.
“지금 쳐다보지 마. 할머니로 변장한 남자 쌍둥이가 당신 뒤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 연쇄살인범 아니면 갱단일 거야. 아마 살인 쪽이겠지.”
물론 장난이다. 로라 역시 옛 시절처럼 일부러 냅킨 한 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줍는 시늉을 하며 쌍둥이 할머니를 관찰한다. 키가 큰 쌍둥이 가운데 관절염이 있는지 좀 구부정한 언니 할머니는 시력을 잃은 맹인인 대신 초능력이 갖게 되었는데 이 언니가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던 건 마주 앉은 존이 아니라, 존의 옆에 서 있는 죽은 딸 크리스틴이었다. 이런 얘기를 화장실에서 만난 동생 할머니가 로라에게 전해주어 알게 된 존은 에든버러에서 온 쌍둥이 할머니들을 일종의 사기꾼으로 여기게 된다.
이날 밤, 베네치아의 한 식당에서 다시 할머니들을 우연히 만나고, 물론 존은 할머니들이 스토킹한 것으로 추측을 하지만, 하여튼 식당에서 할머니는 로라에게 크리스틴이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반드시 내일 안으로 베네치아를 떠나야 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안타까워 한다고 전한다. 소설에서 영혼이나 정령의 예언은 언제나 맞는다는 소설작법 2장 4절에 따라 존은 이제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내일 베네치아를 떠나지 않으면 큰 불행을 맞이하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내 로라가 이 영혼의 말을 전해주는 스코틀랜드 할머니 자매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니 이것도 하늘의 뜻일 듯. 그러나 저 그리스 시대부터 한 피조물이 영혼 또는 신이 어떻게 운명을 정할지 미리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피한 인간이 과연 하나라도 있었느냐는 말이지.
그런 방법으로 처음부터 결론을 짐작할 수 있는 독자들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나중에 바다 위에 띄워놓은 나룻배 위를 새처럼 날 듯 달려가 어두운 건물 속으로 몸을 숨기는 소녀가 후드 티 비슷한 옷의 모자를 휙 제치고 사고를 치는 장면, 사실 이게 압권이긴 한데, 이때의 반전이 얼마나 독자를 비워버리게 하는지, 이건 특식이야, 특식, 하고 감탄을 하게 만드는지는 정말로 읽어본 사람들만 안다.
다음 작품이 미국의 저 위대한 스릴러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로 만든 <새>다. 흑백 영화로 모르긴 몰라도 KBS의 명화극장을 통해 다섯 번은 봤을 거다. 볼 때마다 다음 장면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늘 긴장하게 만드는 클래식 공포영화. 소싯적에 이 영화 보고 꿈 깨나 꿨다. 영화에선 흑백화면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금발로 추정되는 미녀 멜라니 다니엘즈가 해변 마을로 도착하면서 새들이 꼬이기 시작해 그녀와 함께 사라지나, 듀 모리에의 새들은 더 지독하다. 마치 문명을 말살하기 위해 사미엘이 보낸 병사들 같다.
내용은 다 아실 듯. 영화 <새>와 많이 다르긴 하다. 그래도 새들의 침공이니 뭐. 영화를 볼 때, 새들이 사람만 보면 족족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언제는 또 전깃줄에 앉아 사람이 지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만 보기만 해서, 저 새들이 가끔 얌전한 건 왜 그럴까, 의아해한 것이 기억이 났다. 전깃줄 위에 앉은 참새 세 마리 시리즈도 당연히 생각나고. 그건 새들의 공격성이 달에 의하여 지배받기 때문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지구가 달에 의해 지배받는 대표적 현상이 조수다. 책에서 수도 런던을 비롯한 모든 영국의 호모 사피엔스만 공격하는 새들은 밀물이 밀려올 때만 마치 강시나 좀비처럼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인간의 방어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히며, 조금의 사정도 없이 마치 쇠처럼 잔혹하게 살해하고 또 포식한다.
<새>. 히치콕 영화의 원작으로 빼어난 영화를 미리 보았음에도 이것 역시 특식 메뉴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이후의 작품부터는 객관적으로 작품의 질을 따지기 전에 풍성한 특식을 이미 두 번 먹은 이후라서 특식의 효용이 팍 떨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전부 환상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야 할 것들이지만 세 번째 실린 <호위선>의, 죽은 지 한 세기 이상이 지난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선장으로 있는 배의 호위를 받는다는 설정은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린다. 진짜 아쉬운 작품이 네 번째 <눈 깜짝할 사이>. 매력적인 환상 소설이며 심지어 심령소설이기도 하고 만일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단편소설 현상문예에 당선시키고 싶지만, 아쉽게도 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특식을 포식한 다음이라서 효용성이 확 떨어져 심봤다, 가 외쳐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말하노니, 이 책을 읽으실 분은 한 주일에 딱 한 편씩, 모두 여덟 주에 걸쳐 읽으시기를 권한다. 아니면 적어도 월요일과 목요일에 한 편씩도 괜찮을 듯.
하루 날 잡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일은 제일 무식하게 읽는 방법임을 명심하시라. 아, 난 진짜 무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