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메식당
무레 요코 / 푸른숲

(2012.08.14.)

 

  <카모메 식당>은 영화 <카모메 식당>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 전 무레 요코에게 의뢰하여 집필한 소설이다. 소설 <카모메 식당>은 영화와 줄기는 같지만, 영화에 소개되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사치에의 어린 시절부터 식당을 내기까지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과정, 핀란드를 선택한 이유, 진짜 인생을 찾기로 결심하고 일본을 떠나온 미도리 이야기, 마음 둘 곳 없이 여행을 시작한 마사코와 영화에는 담지 못한 세 여인의 크고 자은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소풍 가던 날, 도시락을 만들려고 일어난 사치에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니 아버지가 평소에는 기왓장을 깨 보이거나, 제자들을 힘차게 내동댕이 치던 손으로 오니기리를 만들고 있었다.
  “아빠.”
  사치에가 부르자 아버지는 깜작 놀라서 돌아보더니 “언제나 네가 만들어서 네가 먹지 않냐. 오니기리는 남이 만들어준 게 제일 맛있는 법이다”라며 연어, 다시마, 가다랑어 포를 넣고 만든 큼직한 오니기리를 내밀었다. 오니기리 말고는 계란말이도 닭 튀김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치에는 그걸 들고 소퐁을 갔다.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가 싸준 알록달록하고 예쁜 도시락에 비해, 아버지가 만들어준 투박한 오니기리는 모양새는 별로였지만 사치에에게는 최고로 맛있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중학교 3년 동안 소풍과 운동회날만큼은 도시락을 손수 싸주었고, 그것은 언제나 오니기리였다.
(p. 18)

 

 

  “난 잘 지은 밥이랑 채소 절임이랑 된장국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학교에서 사치에가 그렇게 말할 때, 친구들은 “할머니 같아”라며 다들 웃었다. 그녀에게 최고의 식사는 바로 그것이었다. 연구 삼아 여러 가게를 돌며 식사를 하면 사치에는 원재료의 맛을 속인 기름과 조미료의 맛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그런 진한 맛이 좋다면 맛있게 먹었다.
  “화려하게 담지 않아도 좋아. 소박해도 좋으니 제대로 된 한끼를 먹을 만한 가게를 만들고 싶어.”
(p. 20)

 

 

  취직한 지 10년이 넘도록 “빨리 불어나기를!”를 하고 통장에 찍힌 숫자를 문질러댔다. 가게를 개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잡지에 실리면 정신없이 읽었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는 가게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치에는 옛날 식당처럼 이웃 사람들이 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음식은 소박하지만 맛있는 그런 식당이 좋았다. 겉으로만 세련되고 알맹이 없는 가게는 절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도쿄에서는 그런 가게가 많아져가는 경향이었고, 잡지에 실렸다거나 예약을 하기 힘들다거나 하는 것이 식당의 평가 기준이 되고 있었다.
  ‘요즘 일본인들이 맛을 알긴 아는 걸까?’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일본은 유행이라면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금세 눈앞의 새로운 것에 달려든다.
(p. 22)

 

 

  사치에는 항구에 서서 발밑으로 걸어가는 뒤룩뒤룩 살찐 갈매기를 보며 말해싸. 갈매기는 “뭐야?” 하는 얼굴로 사치에를 돌아보더니, 뒤뚱뒤뚱 걸어가버렸다.
  “갈매기……라.”
  일본에서 갈매기라고 하면 귀여운 해군 아저씨를 상징하거나 흘러간 가요에 조연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핀란드 갈매기는 어딘지 모르게 태평스럽고 뻔뻔한 것이 마치 자신을 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갈매기…… 그럼 카모메(일본어로 갈매기) 식당…… 으로 할까요?”
  또 다가온 다른 갈매기에게 말을 걸자 갈매기는 부리부리한 눈을 껌벅거렸다.
  “좋아요. 카모메 식당. 결정했습니다!”
(p. 36)

 

 

  오니기리를 주문하는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자칭 일본 마니아인 토미가 드물게 자기 돈을 내고 오니기리를 사먹은 적이 있다. 연어는 몰라도 가다랑어 포는 삼키는 데 애을 먹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오니기리를 고집했다. 나라는 다르지만 만드는 사람이 마음을 담아 만든 음식을 언젠가 이곳 사람들도 알아줄 거라고 믿었다. 손님에게 추천한 음식을 거절당해도 그녀는 주눅 들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했다.
(p. 44)

 

 

  “시장이란 곳은 어째서 이렇게 즐거울까요. 매일 와도 질리지 않죠? 어디서 어떤 물건을 파는지 다 알고 있는데 어째서 질리질 않는 건지, 그게 신기합니다.”
  미도리는 오렌지를 들고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언제나 똑같으니까 오히려 질리지 않는 거 아닐까요? 파는 사람도 파는 물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고, 아무리 시장이어도 파는 물건들이 축 늘어져 있으면 아무도 사지 않잖아요. 하늘 바로 아래서 팔고 있으니 속이 확 뚫리는 기분도 들고 말이에요.”
(p. 83)

 

 

  사치에는 앞으로 가게의 방침에 대해 생각했다. 미도리의 말처럼 매상을 생각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최우선으로 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기대를 품고 찾아와 식사를 하고 즐겁게 돌아가면 된다. 가게가 잘되는 건 아니지만, 가게에서 팔고 있는 어떤 것이든, 커피든 홍차든 빵이든 과자든 그걸 먹어 본 사람들이 반드시 다시 찾아오고 있다. 그 사람들이 친구를 데리고 와주기도 해서 손님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가게에 대한 신뢰다. 화려한 광고나 행사를 하지 않았지만, 이웃 사람들이 와주고 있었다.
(p. 106)

 

 

  “도쿄에 있을 때는요, 스트레스가 쌓이고 짜증날 때가 있잖습니까. 그걸 노래방이나 쇼핑 혹은 섹스로 얼버무리고나 하잖습니까.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우거진 숲이 많고 사람도 차도 적어서 답답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도쿄에 살던 사람은 전원 생활로 치유를 받기도 하잖아요. 자연이 모든 것을 치유해 주지 않는 걸까요. 좀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도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치에는 슬행법을 시작했다.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고 모두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어디에 살든 어디에 있든 그 사람 하기 나름이니까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죠. 반듯한 사람은 어디서도 반듯하고, 엉망인 사람은 어딜 가도 엉망이에요.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p. 148)

 

<영화 카모메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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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 책벌레

(2012.07.12.)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은 경제 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과 역사로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결합은 중요하고도 필요하다. 역사의 교훈은 경제적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 어렵다. 반면, 경제 이론은 역사적 배경에서 분리되면 따분해진다.
(p. 11)

 

 

  봉건 시대에는 토지만이 거의 모든 필요한 재화를 생산했고, 그래서 사실상 토지만이 부의 열쇠였다. 부의 척도는 단 한 가지, 즉 보유한 토지의 양으로 결정됐다. 자연히 토지 쟁탈전이 계속 벌어졌고, 그래서 봉건 시대가 전쟁의 시대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p. 25)

 

 

  봉건 시대 초기에는 토지만이 부의 척도였다. 상업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부가 출현했다. 즉, 화폐 재산이었다. 봉건 시대 초기에 화폐는 활력이 없었고, 유동적이지 않고 정지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화폐는 활력 있고, 유동적이며 움직이는 것이 됐다. 봉건 시대 초기에 토지를 보유한 성직자와 기사는 사회적 위계의 맨 위에 있었으며, 사회적 위계의 맨 아래에 있는 농노의 노동으로 살아 갔다. 이제 새로운 집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즉, 매매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 가는 중간 계급이었다. 봉건 시대에는 부의 유일한 원천인 토지 보유가 성직자와 귀족에게 지배 권력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부의 새로운 원천인 화폐 소유는 떠오르는 중간 계급에게 부분적인 정부 참여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p. 53-4)

 

 

  중세에는 자신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모으는 것도 부도덕하다고 생각했다. 성서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당시의 한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먹고 사는 데 충분한 것을 갖고 있는데도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또는 나중에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것을 가지려고, 또는 자식들을 부유하고 중요한 인물로 만들려고 부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모든 사람은 사악한 탐욕, 육욕, 자기 과시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연 경제의 기준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변하고 있던 화폐 경제에 그 기준을 그냥 적용했다. 만약 어려분이 여러분의 돈을 사용한 대가로 이자를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팔아서는 안 되는 시간을 파는 것이었다. 시간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었고, 여러분은 그것을 팔 권리가 없었다.
(p. 58-9)

 

 

  역사책을 읽어 보면 이런저런 왕들의 야망,정복,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진다. 그런 책들의 강조점은 완전히 틀렸다. 국왕들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기보다 왕권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힘, 즉 그 시대의 상인과 금융업자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국왕들은 언제나 상인과 금융업자의 재정적 원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바로 왕권의 배후에 있는 권력이었다. 16~17세기의 200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됐다. 전쟁은 돈이 들었다. 화폐를 가진 사람들, 즉 상인과 은행가들이 그 자금을 조달했다.
(p. 120-1)

 

  임근 노동자들도 고통을 받았다. 물가 상승의 시대는 거의 언제나 임금 상승의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만사가결국은 잘 풀렸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는 중대한 함정이 있다. 그 함정이란 임금은 결코 물가와 똑같은 속도로 상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금 상승은 보통 싸워서 얻어야 한다. 임금 상승은 대개 탄압에 부딪히는 의식적인 대중 행동으로 획득하지만, 물가는 시장의 작용으로 상승한다. 노동자는 그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p. 132)

 

 

  영국에서는 1689년쯤에, 그 다음에 프랑스에서는 1789년 이후에, 시장이 자유를 위한 투쟁은 중간 계급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혁명이 봉건제에 치명타를 가했다는 점에서 1789년은 중세의 끝으로 기록될만하다. 봉건 사회는 기도하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서 중간 계급 집단이 생겨났다. 중간 계급의 힘은 여러 해에 걸쳐서 점점 더 증대했다. 그들은 봉건제에 맞서 길고도 고된 투쟁을 전개했고, 특히 세 차례 결정적인 전투를 치렀다. 첫째는 종교개혁, 둘째는 영국 혁명, 셋째는 프랑스 혁명이었다. 18세기 말 그들은 마침내 낡은 봉건 질서를 파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해졌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제 대신, 이윤 창출을 제1의 목적으로 하는 상품의 자유 교환에 기초한 전혀 다른 사회 체제가 등장했음을 알렸다.
  우리는 그 체제를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p. 192-3)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 건물,기계류,원자재 등이 그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산다. 자본주의 생산은 이것들이 결합됨으로서 이루어진다. 화폐가 자본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하자. 오늘날 산업 자본가는 현금을 거의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런데도 거액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생산수단, 즉 그의 자본은 그가 노동력을 구매함에 따라 증대한다.
(p. 198)

 

 

  노동자들이 조건 개선, 임근 인상, 노동 시간 단축을 획득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노동자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 자신의 조직, 즉 노동조합이었을 것이다.
(p. 238)

 

 

  맑스가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였다. 맑스는 사회에 분명한 힘[세력]들이 작용할 때만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노동자 계급만이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전 경제학을 자본가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맑스의 경제학은 노동자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가가 고전 경제학에서 도움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듯이, 노동자는 맑스 경제학에서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 경제 이론의 근본적인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p. 267)

 

 

  맑스는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노동자가 착취당한다고 말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는 숨겨져 있고 은폐돼 있다고 맑스는 말했다.
(p. 268)

 

 

  산업의 독점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똑같이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금융의 독점이었다. 맑스는 이것을 예견했다. 대규모 “자본주의 생산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힘, 즉 신용 제도가 무대에 등장한다. 이것 자체가 경쟁이라는 전투에서 새롭고 강력한 무기일 뿐 아니라, 많든 적든 사회의 표면에 흩어져 있는 가처분 화폐를 끌어들여 개별적이거나 연합한 자본가들의 손안에 쥐어 주는 보이지 않는 실이다. 신용은 자본의 집중을 돕는 특수한 도구다.”
(p. 302)

 

 

  역사상 모든 시대에 항상 공황이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전에 일어난 공황과 그 후에 일어난 공황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18세기 이전에 가장 흔한 형태의 공황은 흉작이나 전쟁과 같은 어떤 비정상적인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광황, 즉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발생한 공황은 비정상적인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경제체제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비쳐진다. 이러한 공황의 특징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다. 이러한 공황에서는 가격이 상승하지 않고 하락한다. 여러분은 공황과 불황의 또 다른 특징들도 알고 있다. 노동과 자본 모두의 실업, 이윤 감소, 그리고 생산과 유통 모두에서 산업 활동의 일반적인 둔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역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자본 설비, 노동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데도 생산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경제학자들의 대답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여러분이 처음에 그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광황의 원인은 비밀로 남을 것이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남기는 교환을 위해서 상품을 생산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생산수단 소유자들에게 이윤을 얻을 기회가 주어질 때만 땅에서 광물을 채굴하고, 농작물을 수확하고,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고, 산업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상품을 사고 판다.

  그들이 모두 옳기도 하고, 또 모두 틀리기도 하다. 임금이 오르고 사회복지가 확대되면 늘어나는 상품 공급을 흡수할 시장이 마련될 것이라는 홉슨의 주장을 옳다. 그러나 임금 인상은 단기적으로는 생산의 이윤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그는 틀렸다. 낮은 임금과 복지 삭감이 단기적으로 생산의 이윤을 증가실킬 것이라는 하이예크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임금 삭감은 늘어나는 상품 공급을 흡수할 시장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는 틀렸다. 홉습은 대중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시장을 획복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반면, 하이예크는 대중의 구매력을 감소시킴(임금 삭감)으로써 수익성을 회복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칼 맑스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딜레마다. 자본주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는 공황을 피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맑스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없다고 말했다. 공황을 없애려면 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그는 썼다.
(p. 330)

 

 

  자본가들이 국가 계획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런 계획이 반드시 소득 분배의 문제를 새로운 논쟁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이론에 따르면, 너무나 불평등한 소득 분배조차도 ‘자연 법칙’의 결과이기 때문에 정당하다. 소득 분배가 매우 불공평하다는 비난에 직면한 자본가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허게 말할 것이다. ‘왜 우리를 괴롭히는가? 누구나 자기가 받을 만한 것을 받는다. 그것이 자연 법칙이다.’ 그러나 계획 경제에서는 소득 분배의 문제를 그렇게 가볍게 처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꽃 튀는 쟁점이 되고, 더 이상 비인격적인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앙 조정 기구의 중요한 임무가 된다.  대중의 감정이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오늘날 존재하는 엄청난 소득 격차가 상당히 감소할 것임은 분명하다. 계획에 따라서 대중은 더 많은 소득을, 자본가는 더 적은 소득을 얻을 것이다.
  이런 이유를 보면 그런 발전을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자본가라는 것은 당연하다.
(p. 342)

 

 

  동인도 제도 사람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에 관한 아서 모건의 이야기에는 자본가들을 위한 교훈이 담겨 있다. “그들은 코코야자 열매를 따서 원숭이의 맨손이 겨우 통과할 만한 구멍을 판다. 그 속에 설탕 덩어리 몇 개를 넣고 코코야자 열매를 나무에 매단다. 원숭이는 코코야자 열매에 손을 밀어 넣어 설탕을 쥐고 주먹을 빼려고 애쓴다. 그러나 구멍이 작기 때문에 원숭이의 꽉 쥔 주먹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탐욕 때문에 원숭이는 파멸한다. 왜냐하면 원숭이는 목표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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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2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스군요. 반갑습니다. ;^^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 아침나라

(2012.07.08.)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야 잘 보이려고 버둥대는데, 난 그렇지도 않아요. 배우 노릇을 하면서도 분명한 자아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에요. 사실 자아를 갖지 않아야 배우 노릇을 할 수 있다고요. 그렇다고 부자나 유명인이 되기 싫다는 얘긴 아니에요. 언젠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질 계획을 세우고 있죠. 그렇게 된다고 해도 뚜렷한 자아를 갖고 살고 싶어요. 어느 화창한 아침 잠에서 깨어 ‘티파니’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내 본모습 그대로이길 바라죠.
(p. 62)

 

 

  “가여운 녀석. 이름도 없는 가여운 녀석. 이름이 없으니 좀 불편하긴 해요. 하지만 내겐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 줄 권리가 없어요. 다른 주인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죠. 어느 날 우린 강가에 갈 거고, 서로 헤어질 거예요. 고양이는 독립적이고 나도 그래요. 나와 사물이 어울리는 공간을 찾을 때까진 아무 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그게 어디가 될지 잘 몰라요. 하지만 어떤 광경일지는 알아요.”
  “‘티파니’랑 비스할 거예요. 내가 보석에 홀딱 빠져서 그런 건 아니고요. 좋죠. 하지만 마흔살이 되기 전에 다이아몬드를 치장하면 볼품 없어요. 다이아몬드는 나이든 여자한테만 어울려요. 하지만 내가 ‘티파니’에 열광하는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잘 들엉봐요. 아득한 나날을 알아요?”
  “우울한 거랑 같은 건가요”
  “아뇨 이니에요. 우울한 기분은 자꾸 살이 찐다거나 비가 너무 오랫동안 내리기 때문에 생가는 감정이죠. 서글픈 기분일 뿐이에요. 하지만 아득한 건 아주 끔찍해요. 겁이 나고 땀이 뻘뻘 나는데도 뭐가 두려운지 모르죠. 나쁜일이 닥칠 거라는 건 알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는 거예요. 당신도 그런 기분을 느끼나요?”
  “굉장히 자주 느끼죠. 그걸 ‘공허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맞아요, 공허감.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글쎄요, 술이 도움이 되죠”
  “그건 시도해봤어요. 아스피린도 먹어봤고요. 러스티는 나더러 마리화나를 피워야 된대요. 그래서 한동안 해봤는데 웃음만 나요. 가장 효과가 큰 방법은 택시를 잡아타고 ‘티파니’로 가는 거죠. 그곳에 가면 곧장 마음이 가라앉죠. 그 적막감과 당당한 광경... 거기서는 나쁜일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멋진 양복을 차려입은 친절한 신사들이 있고, 은과 악어가죽 냄새가 기분 좋게 풍기는 곳이니까요. ‘티파니’에 간 것과 비슷한 기분을 주는 집을 찾을 수 있다면, 가구를 사들이고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겠어요.”
(p. 63-65)


 

  “왜 ‘여행중’이고 썼어요?”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명함에요? 그게 우스운가요?”
  할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실 내가 내일 어디 살고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여행중’이란 문구를 넣으라고 했죠. 어쨌거나 그런 명함을 주문한 건 돈 낭비였어요. 다만 거기서 뭔가 간단한 걸 사야 될 것 같았거든요. 명함은 ‘티파니’에서 만든 거예요.”
(p. 68)

 

 

  사람의 성격은 자주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 몸도 몇 년에 한 번씩은 변한다. 바람직하든 아니든, 변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여기 변하지 않을 두 사람이 있었다. 마일드레드 그로스먼과 할리 골라이틀리. 둘의 공통점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너무 일찌감치 개성을 얻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벼락부자처럼 균형 감각이 없어진다. 한 사람은 머리가 큰 현실주의자로 몰입했고, 다른 사람은 균형 감각이 없는 낭만주의자로 빠졌다. 나는 장래에 그들이 레스토랑에 앉은 모습을 상상했다. 그때도 마일드레드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음식의 영양가를 궁리할 테고, 할리는 음식을 게걸스레 먹는 데 몰두하겠지. 절대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왼쪽에 있는 낭떠러지도 쳐다보지 않는 단호한 걸음으로 인생을 시작해, 똑같은 걸음으로 인생의 끝에 다다르리라.
(p. 92)

 

 

  “누구나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런 특권을 주장하기 전에 그렇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마땅해요“
(p. 99)

 

 

  야성적인 것은 사랑하지 마세요. 벨 씨. 그게 그이의 실수였어요. 그는 늘 집에 야생 동물을 데려왔어요. 날개에 상처 입은 매 같은 거요. 한 번은 다리가 부러진 살쾡이를 데려왔어요. 하지만 야생 동물한테는 마음을 줄 수 없는 법이죠. 마음을 쏟을수록 그것들은 더욱 강인해져요. 강해져서 숲으로 달아나죠. 나무 위로 날아가거나. 그 다음에는 더 높은 나무로 가고. 결국 하늘로 날아가죠. 마침내 그렇게 끝나고 만다니까요, 벨 씨. 야성적인 것을 사랑하면 결국 하늘을 쳐다보는 것으로 끝나고 말아요.
(p. 116)

 

 

나는 카포티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문장을 읽을 때는
어디에서 반전이 될지 알 수 없는 무서움이 있다.
또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는 고독한 소년의 눈이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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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 / 민음사

(2012.07.01.)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 및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밀어붙이며 나사로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작 놀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p. 26)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p. 31)

 

 

  인간들은 남이 자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없으며 우리들의 입장이란 성립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그러니 도망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런데 발 딛고 도망칠 단 한 치의 단단한 땅도 없다.
(p. 45)

 

 

  비밀스러운 삶. 고득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루소는 에름농빌에 숨어 살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부대꼈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생활이라면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영위했던 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도무지 변화라곤 없는 데다가 계속적이며 공개적인, 그리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데카르트는 그 비밀을 충실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살았던 집에다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기념판을 붙여놓았지만 사실 그 집은 시내의 한가운데 있는 평범한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p. 78)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난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p. 95)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콜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썼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지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멀미 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잊어버린다(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다른 그 무엇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식>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p. 97)

 

 

  루소가 비엔 호숫가에서 맛보았다고 느낀, 그리고 <단순하며 항구적인 것>이라고 그리도 잘 묘사한 그 극도의 희열이란 것은 오히려 어떤 마비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루소는 그의 비참과 죽음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 내가 보기에는 극도의 희열이란 어떤 사람들에겐(나는 그들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비극적인 것과 구별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희열은 비극성의 절정인 것이다.
(p. 161)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을 찾아가서 시계가 정오를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리에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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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조셉콘래드 / 민음사

(2012.06.15.)



  이윽고 곡선을 그리며 눈에 띄지 않게 기울어지고 있던 태양은 나직이 떨어져 그 이글거리던 백열 상태에서 빛도 열기도 없이 탁하기만 한 붉은색으로 변했으며,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덮고 있던 어둠의 감촉에 질려 사색이 된 채 갑자기 사라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p. 9)



  이 세계의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과는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약간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하는 약탈 행위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 행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이 못 된다고. 이 불미로운 행위를 대속해 주는 것은 이념밖에 없어요. 그 행위 이면에 숨은 이념이지. 감상적인 구실이 아니라 이념이라야 해. 그리고 그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지. 이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이거든

(p. 15)



  나는 해안을 지켜보았지. 배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는 해안을 지켜보면 어떤 정체불명의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어. 저만큼 우리 앞에 전개되는 해안은 미소를 짓는가 하면 상을 찌푸리기도 했고, 매혹적이고 장려한가 하면, 야비하고 무미하거나 야만적이기도 했는데, 늘 <이리 와서 알아내 보라>고 속삭이는 듯한 모습만 보이면서 침묵하고 있었다네.

(p. 29)



  사람들은 그의 명에 복종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불안감, 바로 그거였어. 어떤 명확한 불신감이 아니라 그저 불안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구. 이런, 뭐라 할까, 이런 능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 

(p. 49)



  단순히 표면적인 일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다보면, 표면 뒤의 실체, 바로 그 실체는 사라지고 만나네, 내면의 진실은 감추어져 있는데, 그건 다행이지, 다행이야. 그러나 그것이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사뭇 느낄 수는 있었지. 그 신비로운 정적이 내가 벌이는 보잘것없는 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자주 느낄 수 있었단 말일세. 마치 자네들이 한번 뒹구는 데 반 크라운식의 보수를 받고 각기 제나름의 줄타기 재주를 부리는 광경을 지켜보듯이 말이네

(p. 78)



  아무리 두려워도 배고픔을 이길 수는 없고, 아무리 참을성이 있어도 배고픔을 닳아 없어지게 할 수는 없으며, 배고픔이 있는 곳에서는 그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먹지 못할 것은 없는 법이네. 그리고 미신이니, 믿음이니,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바람이 조그만 불어도 날려갈 만큼 가벼운 것들이 아닌가. 질기게 달라붙는 굶주림의 마성, 우리를 격분케 하는 그 고통, 그것이 빚어내는 엉큼한 생각들, 암울하게 우리를 짓누르는 그 포악함 등을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나는 알고 있다네.

(p. 95)



  그가 행동인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것은 그가 많은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라는 사실이며, 또 그 재주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며 실재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의 담론 능력이요 그의 이야기라는 사실이었어. 다시 말하면 그 타고난 표현력이라든가, 그 당혹감을 주는 것, 그 깨우침을 주는 것, 그 가장 고양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경멸할 만한 것, 고동치는 빛의 흐름, 혹은 어떤 뚫을 수 없는 암흑의 핵심에서 흘러나오는 속임수로 가득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네.

(p. 106)



  나는 그 명성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쓸 만큼 썼기 때문에, 내가 원한다면, 이제는 발전의 쓰레기통에다 그것을 담아 문명의 쓰레기들 사이에서, 좀 비유적으로 말해, 이제는 쓸모없게 된 문명의 잔재들 사이에서, 그것이 영원히 잠들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권리가 내게 있다고 해도 아무 논란이 있을 수 없을 거야.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그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사람이야. 그 정체가 무엇이든 그가 평범한 사람만은 아니었어. 그에게는 아직껏 원시적 초보 상태에 있던 인간들을 매혹하거나 겁줌으로써 그들이 자기를 위해 몹쓸 악마의 춤을 추도록 하는 능력까지 있었던 거야. 

(p. 114)



  나는 그 묵묵히 무겁게 드리운 밀림의 마력을 깨려고 애를 썼지. 그 마력은 그간 잊혀져 왔던 야수적 본능을 일깨움으로써, 또 그간 충족되어 온 괴물 같은 열정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밀림의 무자비한 가슴속으로 그를 끌어들이고 있는 듯했어. 오직 그 마력만이 그를 숲과 덤불의 가장자리로 끌어내어 원주민들이 불을 지펴놓고 북을 치면서 불길한 주문을 외고 있는 곳으로 가게 했다고 나는 확신했네, 그리고 오직 그 마력만이 불법을 자행하던 그 영혼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허용되는 소망의 한계를 넘도록 유인했던 거야.

(p. 150)



  암흑의 핵심으로부터 급하게 흘러내리는 갈색 강물은 우리를 바다 쪽으로 싣고 갔는데 상류로 올라갈 때에 비해 그 속도가 두 배나 빨랐지. 그런데 커츠의 목숨 또한 그의 심장으로부터 냉혹한 세월의 바다 속으로 썰물처럼 재빨리 빠져나가고 있었어. 지배인은 아주 평온해 보였고 아무런 심각한 걱정거리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포용적이고 만족스런 눈초리로 우리 두 사람을 싸잡아서 바라보고 있었지. 말하자면 그 <일>이 자기가 바랄 수 있는 방향으로 최대한 원만희 매듭지어진 셈이라는 표정이었어.

(p. 154)



  어느 날 저녁 나는 촛불을 들고 들어오다가 커츠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죽음을 기다리며 여기 암흑 속에 누워 있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구. 촛불은 그의 눈에서 1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지.

  그때 그의 표정에 나타난 변화와 비슷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야. 오, 내가 그 변화에 감동했다고는 할 수 없고, 오직 매혹되었을 뿐이지. 마치 베일이 찢어지면서 어떤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 그 상앗빛 얼굴에서 나는 음침한 오만, 무자비한 권세, 겁먹은 공포, 그리고 치열하고 기약 없는 절망이 표정이 감도는 것을 보았거든. 완벽한 앎이 이루어지는 그 지고한 순간에 그는 욕망, 유혹 및 굴조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세세하게 되살아보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는 어떤 이미지, 어떤 비전을 향해 속삭이듯 외치고 있었어. 겨우 숨결에 불과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두 번 외치고 있었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p. 157)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안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환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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