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의 핵심
조셉콘래드 / 민음사
(2012.06.15.)
이윽고 곡선을 그리며 눈에 띄지 않게 기울어지고 있던 태양은 나직이 떨어져 그 이글거리던 백열 상태에서 빛도 열기도 없이 탁하기만 한 붉은색으로 변했으며,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덮고 있던 어둠의 감촉에 질려 사색이 된 채 갑자기 사라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p. 9)
이 세계의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과는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약간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하는 약탈 행위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 행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이 못 된다고. 이 불미로운 행위를 대속해 주는 것은 이념밖에 없어요. 그 행위 이면에 숨은 이념이지. 감상적인 구실이 아니라 이념이라야 해. 그리고 그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지. 이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이거든
(p. 15)
나는 해안을 지켜보았지. 배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는 해안을 지켜보면 어떤 정체불명의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어. 저만큼 우리 앞에 전개되는 해안은 미소를 짓는가 하면 상을 찌푸리기도 했고, 매혹적이고 장려한가 하면, 야비하고 무미하거나 야만적이기도 했는데, 늘 <이리 와서 알아내 보라>고 속삭이는 듯한 모습만 보이면서 침묵하고 있었다네.
(p. 29)
사람들은 그의 명에 복종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불안감, 바로 그거였어. 어떤 명확한 불신감이 아니라 그저 불안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구. 이런, 뭐라 할까, 이런 능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
(p. 49)
단순히 표면적인 일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다보면, 표면 뒤의 실체, 바로 그 실체는 사라지고 만나네, 내면의 진실은 감추어져 있는데, 그건 다행이지, 다행이야. 그러나 그것이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사뭇 느낄 수는 있었지. 그 신비로운 정적이 내가 벌이는 보잘것없는 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자주 느낄 수 있었단 말일세. 마치 자네들이 한번 뒹구는 데 반 크라운식의 보수를 받고 각기 제나름의 줄타기 재주를 부리는 광경을 지켜보듯이 말이네
(p. 78)
아무리 두려워도 배고픔을 이길 수는 없고, 아무리 참을성이 있어도 배고픔을 닳아 없어지게 할 수는 없으며, 배고픔이 있는 곳에서는 그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먹지 못할 것은 없는 법이네. 그리고 미신이니, 믿음이니,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바람이 조그만 불어도 날려갈 만큼 가벼운 것들이 아닌가. 질기게 달라붙는 굶주림의 마성, 우리를 격분케 하는 그 고통, 그것이 빚어내는 엉큼한 생각들, 암울하게 우리를 짓누르는 그 포악함 등을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나는 알고 있다네.
(p. 95)
그가 행동인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것은 그가 많은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라는 사실이며, 또 그 재주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며 실재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의 담론 능력이요 그의 이야기라는 사실이었어. 다시 말하면 그 타고난 표현력이라든가, 그 당혹감을 주는 것, 그 깨우침을 주는 것, 그 가장 고양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경멸할 만한 것, 고동치는 빛의 흐름, 혹은 어떤 뚫을 수 없는 암흑의 핵심에서 흘러나오는 속임수로 가득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네.
(p. 106)
나는 그 명성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쓸 만큼 썼기 때문에, 내가 원한다면, 이제는 발전의 쓰레기통에다 그것을 담아 문명의 쓰레기들 사이에서, 좀 비유적으로 말해, 이제는 쓸모없게 된 문명의 잔재들 사이에서, 그것이 영원히 잠들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권리가 내게 있다고 해도 아무 논란이 있을 수 없을 거야.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그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사람이야. 그 정체가 무엇이든 그가 평범한 사람만은 아니었어. 그에게는 아직껏 원시적 초보 상태에 있던 인간들을 매혹하거나 겁줌으로써 그들이 자기를 위해 몹쓸 악마의 춤을 추도록 하는 능력까지 있었던 거야.
(p. 114)
나는 그 묵묵히 무겁게 드리운 밀림의 마력을 깨려고 애를 썼지. 그 마력은 그간 잊혀져 왔던 야수적 본능을 일깨움으로써, 또 그간 충족되어 온 괴물 같은 열정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밀림의 무자비한 가슴속으로 그를 끌어들이고 있는 듯했어. 오직 그 마력만이 그를 숲과 덤불의 가장자리로 끌어내어 원주민들이 불을 지펴놓고 북을 치면서 불길한 주문을 외고 있는 곳으로 가게 했다고 나는 확신했네, 그리고 오직 그 마력만이 불법을 자행하던 그 영혼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허용되는 소망의 한계를 넘도록 유인했던 거야.
(p. 150)
암흑의 핵심으로부터 급하게 흘러내리는 갈색 강물은 우리를 바다 쪽으로 싣고 갔는데 상류로 올라갈 때에 비해 그 속도가 두 배나 빨랐지. 그런데 커츠의 목숨 또한 그의 심장으로부터 냉혹한 세월의 바다 속으로 썰물처럼 재빨리 빠져나가고 있었어. 지배인은 아주 평온해 보였고 아무런 심각한 걱정거리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포용적이고 만족스런 눈초리로 우리 두 사람을 싸잡아서 바라보고 있었지. 말하자면 그 <일>이 자기가 바랄 수 있는 방향으로 최대한 원만희 매듭지어진 셈이라는 표정이었어.
(p. 154)
어느 날 저녁 나는 촛불을 들고 들어오다가 커츠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죽음을 기다리며 여기 암흑 속에 누워 있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구. 촛불은 그의 눈에서 1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지.
그때 그의 표정에 나타난 변화와 비슷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야. 오, 내가 그 변화에 감동했다고는 할 수 없고, 오직 매혹되었을 뿐이지. 마치 베일이 찢어지면서 어떤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 그 상앗빛 얼굴에서 나는 음침한 오만, 무자비한 권세, 겁먹은 공포, 그리고 치열하고 기약 없는 절망이 표정이 감도는 것을 보았거든. 완벽한 앎이 이루어지는 그 지고한 순간에 그는 욕망, 유혹 및 굴조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세세하게 되살아보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는 어떤 이미지, 어떤 비전을 향해 속삭이듯 외치고 있었어. 겨우 숨결에 불과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두 번 외치고 있었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p. 157)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안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환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p.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