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장 그르니에 / 민음사
(2012.07.01.)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 및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밀어붙이며 나사로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작 놀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p. 26)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p. 31)
인간들은 남이 자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없으며 우리들의 입장이란 성립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그러니 도망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런데 발 딛고 도망칠 단 한 치의 단단한 땅도 없다.
(p. 45)
비밀스러운 삶. 고득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루소는 에름농빌에 숨어 살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부대꼈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생활이라면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영위했던 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도무지 변화라곤 없는 데다가 계속적이며 공개적인, 그리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데카르트는 그 비밀을 충실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살았던 집에다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기념판을 붙여놓았지만 사실 그 집은 시내의 한가운데 있는 평범한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p. 78)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난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p. 95)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콜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썼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지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멀미 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잊어버린다(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다른 그 무엇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식>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p. 97)
루소가 비엔 호숫가에서 맛보았다고 느낀, 그리고 <단순하며 항구적인 것>이라고 그리도 잘 묘사한 그 극도의 희열이란 것은 오히려 어떤 마비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루소는 그의 비참과 죽음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 내가 보기에는 극도의 희열이란 어떤 사람들에겐(나는 그들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비극적인 것과 구별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희열은 비극성의 절정인 것이다.
(p. 161)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을 찾아가서 시계가 정오를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리에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p.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