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가족
천명관 / 문학동네 / 292쪽
(2013. 7. 27.)

 

 


  전철을 타고 엄마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낭떠리지 말고도 또하나의 선택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나이 마흔여덟에 칠순이 넘은 엄마 집에 얹혀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쪽팔리고 민망한 일이었지만 더 끔직한 건 엄마 집엔 이미 쉰 두 살이 된 형이 얹혀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p. 12)

 

 

  날은 점점 더 따뜻해졌다. 기찻길을 따라 걷다보면 철길 옆으로 어느새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집을 떠난 지 이십여년 만에 우리 삼남매는 모두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일찍이 꿈을 안고 떠났지만 그 꿈은 혹독한 세상살이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작이 나고 말았다. 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삼남매를 엄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p. 39)

 

 

  미국적인 삶에 2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헤밍웨이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피츠제럴드의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영화감독의 삶에 2막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바꾸고 싶다. 감독들에겐 두 가지 종류의 비애가 있다. 하나는 제 아무리 충무로 생활을 오래 했어도 데뷔를 하기 전엔 그저 익명의 감독 지망생일 뿐, 유령처럼 아무런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불행한 건 일단 영화를 한 편 찍고 나면 그때부턴 평생 영화감독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 가운데 데뷔작이 곧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확률이 칠십 퍼센트이며 세 편 이상 영화를 만들 확률은 십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감독은 감독이되 더 이상 영화를 직을 수 없는 유령감독으로 충무로의 뒷골목을 배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끝내 공연되지 않을 2막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채.
(p. 118)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우리 식구들에겐 그토록 여려운 일이었던가? 형제간의 따뜻한 우애와 건강하고 깨끗한 아이들, 서로에 대한 걱정과 벼려, 유순하고 성실한 가족고성원들, 사랑이 넘치는 넉넉한 저녁식사...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걸까? 그래서 실은 그것이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일까?
(p. 141)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자존심이 없으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에 비수 같은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다.
  오하마는 언젠가 그들에게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 절대 품어서 안되는 위험한 생각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p. 222)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내 앞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운좋게 피해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나는 언젠가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거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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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3)
이윤기 / 웅진지식하우스 / 296쪽
(2013.07.08.)

 

 

 

  올륌포스 신들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의 그리스인들도 잘 알고 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신들은 당대를 살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꿈과 진실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합의해서 도출해낸 보편적인 꿈과 진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신들에 대한 경건함은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경건함, 그 시대 도덕률에 대한 경건함이라 고 생각한다. 신화에는 이 경건함을 한결같이 지키는 사람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바로‘신 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승한다. 하지만 신화에는 이 상승의 정점에서 갑자기 오만해지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깃털 날개 달았다고 하늘로 오르려다 떨어져 죽은 이카로스의 오만이 바로 이 오만이었다. 날개 달린 말 페가소스를 탔다고 올륌포스에 오르려고 했던 벨레로폰의 오만이 바로 이 오만이었다.‘ 오만(hybris)’은 신화시대영웅들이잘걸리는난치병이었다. 이 난치병 환자들은 바로‘신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점으로 날아오르게 한 바로 그 날개 때문에 추락한다.
  신화는 무엇인가? 신들에 관한 이야기다. 신들이 없었다면 신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신들이 없어도 신화는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없어도 신화는 존재할 것인가? 인간이 없으면 신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신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 세상을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 세상을 놓고 올륌포스 신들과 기간테스, 즉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신들이 싸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p. 15)

 

 

  나는, 신화를 믿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믿는다고 대답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는 한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신화를 믿는다고 해서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깎아놓고 내 색시가 되게 해달라고 아프로디테에게 비는 식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신화의 진실이다. 퓌그말리온의 진실과 그가 기울이는 정성이다. ‘퓌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말은, 스스로를 돌아보되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경우에 나타나는 효과를 뜻하는 말로 지금도 줄기차게 쓰이고 있다.
(p. 34)

 

 

  인류는 근대를 맞으면서 프로메테우스 시대를 꽃피웠다가 디오뉘소스의 반격을 받았다. 이제 헤르메스 시대가 왔다. 현대는 헤르메스의시대다. (중략)‘ 이성’을신의은총으로 믿던데카르트는 산업 사회를 열었다. 하지만 곧 니체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 현대의 헤르메스, 빌 게이츠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준 것으로 전해지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다. 그는 흙으로 인간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프로메테우스’라는 말은‘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이치와 이성을 앞세워 처음으로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에게 저항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유럽 산업 사회의 사상적 틀을 마련한 데카르트는 프로메테우스에 자주 견주어진다.
(p. 246)

 

 

  “저기 큰 인간과 맞서고 있는 작은 인간을 보라. 이기지 못할 겨루기에 저리도 열심인 것은 그저 어리석기 때문인가? 도끼가 일으키는 불꽃은 무엇인가? 불꽃이 일면 일수록 겨루기가 격렬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 경이의 불꽃, 기적의 섬광은 부딪침을 통해서만 번쩍이는 것인가? 제우스 신의 권능이 두려워, 손수 빚은 인간의 궁상을 수수방관해야 하는 나 초라한 프로메테우스여! 큰 인간을 상대로 힘을 겨루는 저 작은 인간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냐!” 프로메테우스는 사흘 낮 사흘 밤 내내, 제우스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자신을 희생하되 그 희생의 값으로 인간에게 얻어줄 수 있는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제우스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에 도전하고, 인간에게는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인간의 손으로 넘어오면 가장 유익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어야 했다. 제우스 신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그리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저 퀴클롭스(외눈박이 거신)로부터 선물로 받은 벼락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나흘째 되는 날, 제우스 신의 벼락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 그 대신 벼락에서 불을 붙여내어 인간에게 가져다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p. 252)

 

 

  오비디우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노래로 기나긴『변신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제 나의 일은 끝났다. 제우스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노래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영생불사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오비디우스를 보라. 자신이 한 일은 제우스의 분노도 소멸시킬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지 않는가? 명성을 통하여 영생불사를 얻었으니 영원히 살 것이라지 않는가? ‘영원히’까지는 모르겠지만 2천 년 전에 그가 쓴 책을 우리가 이렇게 읽고 있으니, 신화는 참 힘이 세다 싶다.
(p.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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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
이윤기 / 웅진지식하우스 / 352쪽

(2013. 06. 29.)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어릴적에 보았던 세계문학전집의 시작은 그리스로마신화로 부터 시작했다. 아마도 서양의 인간시대 이야기의 시작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시작되서 그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읽기의 시작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으려고 했는데 그리스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사전 지식이 없어서 시작하기가 벅찼다. 그래서 일단 그리스로마 신화로부터 시작한다.

 

 


  미궁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도 그 의미를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신화는 미궁과 같다. 신화라는 미궁속에서 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를 알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독자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상상력이다. 열두 고지의 글을 신화 이해의 열쇠로 삼은 이 책은 필자가 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한 책이 아니다. 열두 꼭지의 글에는 신화 이해와 해석에 필요한 열두 개의 열쇠가 숨겨져 있다 각각의 열쇠에는 무수한 꼬마 열쇠들이 매달려 있다. 큰 열쇠, 작은 열쇠로 독자들이 나름대오 열기 바란다. 필자의 해석은 필자의 실타래이지 독자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아니다.
(p. 10)

 


  대지와 우리 육신 사이에는 신발이 있다. 신발의 고무 밑창 하나가 우리와 대지 사이를 갈라 놓고 있다. 대지는 무엇인가? 인간이 장차 돌아가야 할 곳이다.
  그러면 신화는 무엇인가? 옛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신화는, 옛 이야기는 언제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시대와 아득한 선사 시대,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시대 사이에 신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인지도 모른다.
(p. 40)

 

 

  크로노스는 왜 낫을 가지고 다녔던 것일까? 크로노스는 왜 아내가 낳은 족족 자식을 삼켜 버렸던 것일까? 크로노스는 '시간', 즉 세월이라는 뜻이다. 크로노스의 모습이 종종 모래시계와 함께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신의 이름은 크로노스는 시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어 '크로니클(chronicle, 연대기)', '크로노미터(chronometer, 시계)', '크로노메트리(chronometry, 시간 측정법)' 등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심킨다는 것은, 세월은 이 땅에 태어나도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는 잔혹한 자연의 진리를 상징한다. 크로노스가 큰 낫을 들고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크로느스는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끝나게 한다. 크로노스가 들고 다니는 거대한 낫은 크로노스가 지닌,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끝나게 하는 자연의 법칙을 상징한다.
(p. 60)

 

 

  올륌포스 산에는 신들의 궁전이 무수히 있다. 무수한 궁전 한가운데엔 큰길이 하나 툭 터져 있는데, 이 길은 밤중이면 당에 사는 인간의 눈에도 보인다. 이 길의 이름이 바로 '비아 락테아(Via Lactea)', 즉 '젖의 길' 이라는 뜻이다. 비아 락테아는 영어 '밀키웨이(Milky Way)'이며, 우리말로는 '은하수'가 된다. 신들의 궁전은 바로이 비아 락테아 좌우로 좍 펼쳐져 있다.
(p. 77)

 

 

  제우스는 여성이나 여신의 몸을 빌리지 않고 딸은 낳은 일이 있다.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싶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면 불가능하다 싶은 일도 곧잘 일어나는 데가 신화의 무대다. 제우스는 자기 일에 사사건건 간섭해서 나무라기도 하고 충고하기도 하는 여신 메티스를 삼켜 버린 적이 있다. 메티스는 '지혜로운 충고'라는 뜻이다. 제우스가 이렇게 한 것은 성가신 메티스를 제거하는 동시에 메티스의 지혜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제우스가 갑자기 머리르 싸쥐고 방바닥을 뒹굴었다. 제우스가 머리를 싸쥐고 뒹구는 까닭을 제일 먼저 짐작한 신은 올륌포스의 꾀주머니 헤르메스였다. 헤르메스는 대장장이를 불러 창으로 제우스 두개골을 조금 까내게 했다. 그러자 투구를 쑤고 창과 방패를 무장한 여신이 함성을 지르면서 튀어나왔다. 이 여신이 바로 지혜와 정의로운 전쟁의 여신 아테나다.
(p. 96)

 

 

  신화는 프로메테우스가 흙에다 물을 부어 이기고 신들의 형상과 비슷한 인간을 빚어 이를 이레 동안 볕에다 말리고 여기에다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꼭지가 따라붙는다. 그가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놓으려고 하는 찰나,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지나가다가 나비 한 마리를 날려 보냈다는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이 나비는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빚은 인간의 콧구멍속으로 들어갔다.
  그리스어로 나비는 '프쉬케(psyche)'다. 그러면 진흙 인간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간 프쉬케는 무엇인가? 영어 '사이크(psyche)'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말은 '정신' 또는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p. 119)

 

 

  사람들은 흔히 유럽 문화의 두 기둥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한다. 헬레니즘이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라스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일어나 로마로 이어진 문화를 말한다. 그렇다면 헤브라이즘은 무엇인가? 구약 성서에 잘 그려져 있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들의 문화를 말한다. '천국'과 '지옥'과 '부활'은 유대인드링 일군 헤브라이즘의 저 세상에나 등장하는 말들이다.
(p. 200)

 

 

  신화 시대 의술의 신인 아폴론에게는 아스클레이피오스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아스클레에피오스는 트라카라는 도시에다 요즈음의 의과 대학교 겸 부속 병원 비슷한 것을 세우고 의술을 가르치는 한편 환자를 치료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술 학교는 뒷날 수많은 명의를 배출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명의가 바로 오늘날 '의성', 즉 의술의 성인으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다. 모든 의과 대학생들은 의사가 될 때 히포크라테스를 본받자는 뜻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것을 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고대의 의과 대학 및 그 부속 병원 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신전을 지키던 신관은 이 신전에다 흙빛 뱀을 기른 것으로 전해진다. 신관들은 독이 없는 흙빛 뱀을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술을 상징하는 휘장의 지팡이는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지팡이이며, 뱀은 바로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사자인 독 없는 흙빛 뱀인 것이다. 의술을 상징하는 오늘날의 휘장에까지 지팡이와 뱀이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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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6)
빅토르 위고 / 송면 / 동서문화사 /315쪽

(2013. 06. 22.)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그의 영혼에 나타났다 . 즉,  기꺼이 받고 다시 돌려 준 친절,  헌신 , 자비,  관용 , 연민에서 나온 준엄의 훼손 , 개인성의 승인,  단호하게 사람을 벌하는 일도 죄를 짓게 할 수도 없다는 것 , 법의 눈에도 눈물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인간에게 의존하는 정의와는 반대방향을 택하는 일종의 신에 의존하는 정의 . 그는 여태껏 알지 못했던 도덕의 태양이 암흑 속에서 무섭게 뜨는 아침을 보았다 . 그 아침은 그를 겁나게 했다.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 독수리의 눈을 가질 것을 강요당한 부엉이였다.
(p. 2087(17))

 

 

 그들은 빛났다. 그들은 다시 불러올 수도, 다시 찾아낼 수도 없는 순간에, 모든 청춘과 온갖 기쁨의 눈부신 교차점에 있는 것이었다. 장 프루베르의 시구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도 마흔 살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승화된 결혼이었고 젊은 두 사람은 두 송이의 백합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지 않고도 서로 황홀해하고 있었다. 꼬제뜨는 마리우스를 영광 속에 바라보고 마리우스는 꼬제뜨를 제단 위로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 그 영광 속에 신이 되어 결합한 두 사람은 그 깊숙한 속에서, 꼬제뜨에게는 안개 저쪽에, 마리우스에게는 불꽃 속에서, 하나의 이상이, 현실이, 입맞춤과 꿈의 만남이, 원앙침이 보이는 것이었다.
(p. 2161(91))

 

 

  장 발장은 생각하고 있었다. 회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겨울이었다. 몹시 추운 12월에 그녀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거의 헐벗은 몸으로 떨고 있었다. 가련하고 조그마한 발이 나막신 속에서 새빨개져 있었다. 장 발장은 누더기 옷을 벗기고 이 상복을 입혀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자기를 위해 상복을 입는 것을 보고, 아니, 무엇보다도 따뜻한 옷을 입는 것을 보고 무덤 속에서 기뻐했을 것이다. 장 발장은 또 몽페르메이유의 숲을 생각했다. 둘이서 그 숲을 지났었다. 꼬제뜨와 둘이서. 그때의 날씨며, 낙엽진 나무들이며, 새들이 떠나버린 나무들, 햇빛이 비치지 않는 하늘을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는 즐거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장 발장은 조그만 옷가지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목도리를 속치마 옆에, 긴 양말을
구두 옆에, 소매 달린 짧은 윗옷을 긴옷 옆에,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녀는 이것들과 똑같이 조그마했다. 커다란 인형을 팔에 안고 루이 금화를 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 그밖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숭엄한 백발 머리가 맥없이 침대 위로 떨어지고, 그 불요불굴의 늙은 가슴은 날카롭게 찢어지고 얼굴은 꼬제뜨의 옷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만약 그때 계단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무섭게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으리라.
(p. 2175(105))

 

 

 숙명이 늘 곧기만 한 것은 아니다 . 사람들 앞에 놓인 저마다의 숙명이 언제나 곧고 넓게 뻗어 있지는 않다 . 거기에는 막바지도 있고 , 막다른 골목도 있으며, 어두운 모퉁이도 있고 ,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불안한 십자로가 있다. 지금 장 발장은 가장 위태로운 그러한 기로에 부딪쳐서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악의 마지막 갈림길에 도달해 있었다 . 그는 그 캄캄한 분기점을 눈앞에 보고 있었다. 몇 번의 괴로운 전환이 있을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의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 하나는 그를 유혹했고, 또 하나는 그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하나?
 그를 두렵게 하는 길은 , 인간이 어둠을 똑똑하게 확인하려 할 때마다 언뜻 보이는,  저 신비로운 집게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다 .
   장 발장은 이번에도 다시 무서운 항구와 미소짓는 함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 영혼은 회복할 수 있지만 숙명은 되돌릴 수 없다는것은 과연 진실일까? 불치의 숙명! 무서운 일이다 .
(p. 2178(108))

 

 

  행복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들은 행복한 것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 얼마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인생의 그릇된 목적인 행복을 소유함으로써 참다운 목적인 의무를 얼마나 잊고 있는지!
(p. 2248(178))

 

 

  너희들 , 너희들은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어디라도 좋으니까 한쪽 구석에 장소를 표시할 만한 돌 밑에다 나를 묻어 다오.  이건 내 뜻이다 . 돌에는 이름을 새기지 말도록 해라 . 만약 꼬제뜨가 이따금이라도 와 주기만 한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기쁘겠다.  당신도 와 주오 , 뽕메르씨 군. 내가 늘 당신을 사랑했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고백해야겠소. 제발 그 점을 용서해 주시오 .
   그러나 지금은 이 아이와 당신 , 두 사람이 내게는 한 사람이오 . 나는 당신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소. 당신이 꼬제뜨를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p. 2300(230))

 

 

그가 잠들었네. 운명은 그에게 몹시 가혹했어도
그는 살았네. 천사를 잃어버리자 그는 죽었네 .
올 일은 찾아왔네
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
(p. 230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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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3)
빅토르 위고 / 송면 / 동서문화사 / 415쪽

(2013.06.08.)

 

 

 

  어떤 사물이든 반사되는 빛은 엷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남에게 주는 기쁨이란 기묘한 것이어서, 없어지기는 커녕 한층 더 밝은 빛이 되어 자기에게 되돌아오고 더욱 더 아름답게 작용한다.
(p. 917)

 

 

  빠리의 지붕 위로 올라오는 연기는 세계의 사상이다. 빠리를 진흙과돌더미라고 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빠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정신적인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빠리는 위대한 것 이상으로 무한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빠리가 용감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p. 959)

 

 

  인류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숭고한 교훈이 산꼭대기 위에 영원히 걸려 있어야만 한다. 대담무쌍한 행동이 역사를 눈부시게 해준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빛이다. 여명의 빛은 돋아오를 때는 단호하다. 용감하게 시도하고, 도전하고, 고집하고, 노력하고 자기에게 충실하고, 운명과 맞붙어 싸우고, 비극적인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파국을 막고, 때로는 부정한 힘에 대항하고, 때로는 승리의 도취를 경멸하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며, 저항을 계속할 것. 그들을 분발케 하는 빛이다.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빛이 프로메테우스의 횃불에서 깡브론느 장군의 도자기 파이프에까지 전달되어 가는 것이다.
(p. 960)

 

 

  꽁브페르는 역사가 자연히 진보해 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기를 바랐다. 꽁브페르가 말하는 좋은 진보란 싸늘할지는 모르지만 순수한 진보, 도식적일지는 몰라도 나무랄 데 없는 진보,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진보였다. 미래가 전혀 손때 묻지 않고 찾아온다면, 그리고 민중의 덕의의 끝없는 진화가 아무것에도 방해되지 않고 실현된다면 꽁브페르는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기도라도 앴을 것이다.
  '선은 결백해야 한다'고 꽁브페르는 언제나 입러릇처럼 말했다. 혁명이 실로 위대한 것은 눈부신 이상을 응시하며 무서운 우레 속을 뚫고 피의 바다며 불의 바다를 넘어 그 이상을 향하여 한결같이 갈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보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오점이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을 한쪽의 대표, 당똥을 다른 쪽의 화신으로 본다면 둘 사이에는 백조의 날개를 가진 천사의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천사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p. 1055)

 

 

  자네들이 아무리 완전하고 뛰어나고 유능하다 해도 그런 건 내겐 상관 없어. 모든 장점은 단점과 통하네. 검약가는 인색한 사람과 가깝고 관대한 사람은 낭비하는 사람과 별 차이 없고, 용기는 허세와 같은 그릇이지. 매우믿음 깊게 말을 하는 자도 조금은 위선이 있는 법일세. 디오게네스의 외투에 구멍이 있듯이 미덕 속에도 악덕은 있어.
(p. 1079)

 

 

  마음이 약한 자를 비굴하게 만드는 무서운 시련, 그것은 또 마음이 강한 자를 탁월한 인간으로 만드는 바람직한 시련이다. 그것은 비열한 인간이나 신과 같은 인간을 만들려고 할 때면 반드시 운명이 인간을 던지는 도가니이다.
  왜냐하면 하찮고 작은 싸움 속에서야말로 많은 위대한 행위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빈궁과 치욕이 여지없이 달려드는 생활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끈덕지고 강한 남다른 용기를 떨쳐 한 걸음 또 한 걸음 저항해 마지않는다. 이윽고 그 누구의 눈도 미치지 않고, 어떤 명성도 없으며, 어떤 갈채의 나팔도 불지 않는 곳에서 숭고하고 신비로운 승리를 획득한다.
  인생, 불행, 고독, 빈곤이라고 불리는 것들 모두가 싸움터이며 거기에는 영웅이 있다. 그리고 이름도 없는 이 영웅들은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영웅들보다도 더 위대할 수도 있다.
(p. 1100)

 

 

  아직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영혼의 그런 첫 눈길은 여명의 하늘과 같은 것이다.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찬란한 것의 눈뜸이다. 장엄한 어둠을 어렴풋이 비추는 뜻하지 않은 번쩍임, 현재의 때묻지 않은 모든 것과 미래의 모든 정열로 이루어진 그 번쩍임의 위험한 매력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그것은 우연히 나타나서 기다리는 목적 없는 애정이다. 순수한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쳐놓은, 스스로 바라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느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올가미인 것이다. 그것은 한 여자로서 남자를 바라보는 눈길인 것이다.
(p. 1141)

 

 

  인류는 동등하다. 모든 인간이 다 같은 흙으로 빚어졌다. 적어도 이 세상에는 하늘이 정해 준 운명에 있어서는 하등 차별이 없다. 전세에서는 다 같은 어두움, 현세에서는 다 같은 육체, 내세에서는 다같은 한줌의 재, 그러나 인간을 만드는 원료에 무지라는 것이 섞이게 되면 그 원료는 시커멓게 변질한다. 그 지울 수 없는 검은 빛은 인간 내부 깊숙이 침투하여 거기서 악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p. 1167)

 

 

  생활이 어려워지고도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이란 그리 흔치 않다. 게다가 어느 경지에 까지 이르면 불운과 파렴치는 서로 혼합돼 구별할 수조차 없이 되고, 또 한 마디의 말, 즉 비참한 사람들, 레 미제라블이라는 숙명적인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 누구의 죄인가? 그들이 구렁텅이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한층 커다란 자비의 손을 베풀어야 하지 않는가?
(p.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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