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가족
천명관 / 문학동네 / 292쪽
(2013. 7. 27.)

 

 


  전철을 타고 엄마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낭떠리지 말고도 또하나의 선택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나이 마흔여덟에 칠순이 넘은 엄마 집에 얹혀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쪽팔리고 민망한 일이었지만 더 끔직한 건 엄마 집엔 이미 쉰 두 살이 된 형이 얹혀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p. 12)

 

 

  날은 점점 더 따뜻해졌다. 기찻길을 따라 걷다보면 철길 옆으로 어느새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집을 떠난 지 이십여년 만에 우리 삼남매는 모두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일찍이 꿈을 안고 떠났지만 그 꿈은 혹독한 세상살이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작이 나고 말았다. 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삼남매를 엄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p. 39)

 

 

  미국적인 삶에 2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헤밍웨이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피츠제럴드의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영화감독의 삶에 2막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바꾸고 싶다. 감독들에겐 두 가지 종류의 비애가 있다. 하나는 제 아무리 충무로 생활을 오래 했어도 데뷔를 하기 전엔 그저 익명의 감독 지망생일 뿐, 유령처럼 아무런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불행한 건 일단 영화를 한 편 찍고 나면 그때부턴 평생 영화감독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 가운데 데뷔작이 곧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확률이 칠십 퍼센트이며 세 편 이상 영화를 만들 확률은 십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감독은 감독이되 더 이상 영화를 직을 수 없는 유령감독으로 충무로의 뒷골목을 배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끝내 공연되지 않을 2막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채.
(p. 118)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우리 식구들에겐 그토록 여려운 일이었던가? 형제간의 따뜻한 우애와 건강하고 깨끗한 아이들, 서로에 대한 걱정과 벼려, 유순하고 성실한 가족고성원들, 사랑이 넘치는 넉넉한 저녁식사...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걸까? 그래서 실은 그것이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일까?
(p. 141)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자존심이 없으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에 비수 같은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다.
  오하마는 언젠가 그들에게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 절대 품어서 안되는 위험한 생각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p. 222)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내 앞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운좋게 피해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나는 언젠가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거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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