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 양진호 / 165쪽
(2017. 1.  24.)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는 스피노자가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이 출판된 1663년은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에서 <지성개선론>의 집필을 그만두고 레이든 대학 인근의 레인스 뷔르흐로 이사한 지 2년이 되는 해이다. 데카르트의 사상이 크게 유행하던 그곳에서 스피노자는 같은 하숙집에 살던 신학과 학생 카세아리우스 에게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 2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작성했던 교재에 다량의 원고를 추가하고 <형이상학 반성>을 부록으로 실어 출판한 것이 이 책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이다.
(P.6)


  데카르트는 사물을 탐구하면서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진행하기 위해 다음 네 가지를 시도했다.
  1. 모든 선입견 버리기.
  2. 모든 것을 올려 세울 토대 찾기.
  3. 오류의 원인 밝히기.
  4. 모든 것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기.
  그런데 그는 첫째, 둘째, 셋째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 속으로 불러들이는 일에 착수했다. 그러나 의심 말고는 다른 어떤한 것도 목표로 삼지 않았던 회의주의자와는 달리, 데카르트는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켜서 마지막에는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학문의 토대를 발견하고자 했다.
(P.13)


  우리는 인식하는 모든 사물을 상상력에서 어떤 그림으로 본뜨는 일에 익숙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자들 과 똑같이 긍정적으로 상상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그 자체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부정 능력에 못지 않은 긍정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이란, 영혼이 대상에 의해 감관들에서 자극을 받아 움직인 뒤, 두뇌에 남겨진 자취를 감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감각 내용은 단지 헛갈린 긍정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신이 부정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양태를 마치 존재자처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P.75)


  우리는 인간의 정신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오로지 제 본성에 따라 그 자체로만 고찰하자면 인간의 정신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다. 즉 생각할 수 있고, 다시 말해 긍정하고 부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정신은 외부의 것에 의해 결정되거나, 아니면 오로지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정신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사유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아니 할 수밖에 없는 실체임을 감안할 때 [생각은 오로지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사유 활동이 오로지 인간의 정신을 자신의 원인으로 인지하는 한에서 이러한 사유 활동을 결정이라고 한다. 거꾸로 인간의 정신이 이러한 활동[=결정]을 산출 하기에 충분한 원인으로 파악되는 한에서 이러한 인간의 정신을 의지라고 한다.
(P.99)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연역법에 기초한 논리학(Organon)을 학문의 방법론으로 채택한 것을 비판하고 실험에 기초한 귀납법을 참된 학문의 방법론이라 주창함으로써 데카르트에 앞서 근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러한 방법에 대한 반성은 <신기관>에 다양한 아포리즘의 형태로 남아 있다. 물론 중세 스콜라 철학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논적으로 삼는 일은 근대 초기에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며, 베이컨은 물론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이 철학적 전선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이들이 모두 철학적 방법론에 몰두했던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학을 고안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노력은 칸트의 선험론적 논리학과 헤겔의 변증법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새로운 논리학에 대한 탐구는 근대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 역사 그 자체였다.
(P.125)


  스피노자는 관념과 관념의 대상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참된 관념의 형상이 어떤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본성 자체에 의존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관념에 대한 모든 외부적 원인을 배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외적 인과율을 거부함으로써 그는 사물의 질서와 인식의 순서를 통일할 수 있었다. 신의 관념은 더 이상 어떤 초월적 타자가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제 능력으로써 제 안에서 길어낼 수 있는 관념들 가운데 가장 완전한 관념, 가장 높은 완전성을 지닌 관념이다. 그리고 우리의 탐구 방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완전한 관념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 생각의 생각은 관념의 관념이 되었으며,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다루는 학문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다루는 학문이 되었다. 바로 여기가 <에티카>의 출발점이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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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3
요슈타인 가아더 /장영은 / 현암사 / 296쪽
(2017. 1.  18.)



  오늘날 '철학자'란 말은 쉽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해 쓴다. 철학자란 무엇보다도 철학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대답을 구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꼭 자기 고유의 철학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철학의 역사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철학자라고 한다.
(P.12)



  칸트는 처음부터 옳고 그름의 차이는 한갓 감정 문제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 합리주의자들과 같은 견해를 가졌다. 모든 사람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안다. 그것으 배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이성에 내재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 칸트는 모든 사람에게나 도덕 영역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늘 말해 주는 '실천 이성'이 있다고 믿었다.
(P.26)



  헤겔 이전의 모든 철학 체계는 인간이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영원한 기준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흄과 칸트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모든 인식의 기초가 무엇인지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이 세계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을 초월한 전제들에 관해서만 얘기해 왔다.
  헤겔은 그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전제는 발견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인간 인식의 기초는 세대가 바뀜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헤겔은 '영원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을 초월하는 이성도 업다고 보았다. 철학적 사유의 유일하고 확고한 출발점은 역사 그 자체라는 것이다.
(P.68)



  헤겔에겐 철학이 강의 흐름과 같은 것이었다. 강의 특정한 지점에서 이는 가장 작은 물결도 강의 상류에서 소용돌이가 일거나 물이 흘러내려 생기는 것이지. 그러나 또 중요한 사실은 네가 관찰하는 강의 그 지점에 어떤 종류의 돌과 굽은 부분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유나 이성의 역사도 그와 같은 강의 흐름과 같다. 그것은 네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모든 생각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네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삶의 조건이나 너의 생각을 결정짓는 모든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어떤 특정한 사상이 영원히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 특정한 사상이 네가 발 딛고 서 있는 그 곳에선 옳을 수도 있지.
(P.69)



  헤겔에게 역사란 단 한 줄로 길게 이어진 사상의 사슬이다. 물론 여러고리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그저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사슬이라고 한다. 역사를 철저히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새로운 사상은 대부분 이전에 생긴 다른 사상을 토대로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사상이 대두하면, 또 다른 새로운 사상이 다시 이에 대립한ㄴ다. 이런 식으로 상반되는 두가지 사유 방식이 생겨나고, 그 사이에 긴장이 감돌게 된다. 이러한 긴장은 앞의 두 사상에서 각각 최선의 것을 보존하려는 제삼의 사상으로 지양된다. 헤겔은 그것을 '변증법적 발전'이라고 했다.
(P.72)



  일반적으로 거대한 철학 ㅊ계이 시대는 헤겔과 함께 끝났다고 말하지. 헤겔 이후의 철학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거대한 사변적인 체계 대신 이제 이른바 '실존 철학'이 등장한다. '행동철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거다. 곧이어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문제는 세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하고 말하면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바로 이 유명한 말이 철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P.112)



  20세기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철학자로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다. 니체의 철학은 헤겔 철학과, 그것에서 출발한 독일 '역사주의'에 대한 반동의 성격을 갖는다. 니체는 헤겔과 그 추종자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실은 살아 있는 역사에 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했고, 그 관심을 삶 자체에 돌렸다. '가치 전도'에 대한 그의 주장, 특히 그가 '노예의 도덕'이라고 한 기독교 도덕의 전복을 요구한 것이 유명한데, 그것은 강자의 삶의 실현이 더 이상 약자 때문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니체에게는 기독교와 철학적 전통이 세계를 떠나 하늘과 관념의 세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본래적 세계로 간주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단지 가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초현실적인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고 말했다.
(P.201)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했지. 실존주의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이지. 사르트르의 인본주의는 르네상스 시대에서 우리가 공부한 인본주의와는 달리 더욱 우울한 모습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와 현세기의 몇몇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기독교였다. 그에 반해서 사르트르는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할수 있지. 그의 철학은 신이 죽어 버린 상황에서 인간의 실존을 냉혹하게 분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이 죽었다'는 유명한 말은 니체에게서 유래했다.
(P.202)



  실존주의는 전체적으로 사십 년 동안 유럽의문학을 지배했다. 사르트르도 소설과 희곡을 썼단다. 다른 주요 작가로는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 아일랜드의 사무엘 베케트, 루마니아의 유진 이오네스코와 폴란드의 비톨드 곰브로비츠가 있지. 이들을 비롯한 많은 현대 작가들의 특징은 부조리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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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 예담 / 288쪽
(2017. 1.  16.)




  연안파는 더 이상 조직원을 늘리지 않았다. 집은 클수록 좋고 사무실은 작을수록 좋다는 게 보스인 양사장의 지론이었다. 미련하고 덩치만 큰 건달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떼 지어 몰려다니며 연장질을 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였다. 조직원이 많아지면 밥값만 많이 들고 경찰의 이목만 끌뿐, 별 실속이 없었다. 대신 조직은 종식처럼 쓸 만한 행동대원들을 적당한 거리에 두고 관리하며 필요할 때마다 이용해왔다. 돈만 주면 언제든 각목을 들고 금방 달려올 비정규직 건달들이 뒷골목에 넘쳐났다. 바야흐로 건달들도 청년시럽의 위기를 겪는 중이었다.
(P.12)



  인천의 노회한 건달은 바야흐로 노화와 투쟁하는 주잉었다. 진정한 철학은 젊음이 모두 스러지고 난 뒤에야 시작되는 법, 평생 주먹질만 하고 살아온 그의 삶은 이제 철학적 해결만이 유일한 길이 되었다. 물론 종교적인 해결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신의 존재를 믿기엔 너무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제 뭐든 너무 많은 아는 나이가 되어 굳이 신의 섭리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자신에게 뭐가 닥쳐 올지 잘 알고 있었다. 축 처진 불알에 파이프가 고장 나 빤쓰는 늘 축축하고 지속적인 불면에 시달리며 놀랄 일도 감탄할 일도 없는 일상이 지루하게 펼쳐질 것이다. 쉰 살이 넘어가면서 그는 오래전에 날아간 머리카락처럼 자신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이 모두 떠나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더 나이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깨달음으로 인한 임울한 기분은 어딘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물귀선처럼 들러 붙어 뒤덜미를 잡고 늘어졌다.
(P.16)



  구십 년대 내내 승합차에 여자들을 싣고 다니며 업소에 부려주던 그는 새천년이 되자 사업영역을 확장해 노래방 도우미는 물론, 파출부, 공사판 잡부, 공장 일용직 등 공단을 배후로 형성된 거대한 인력시장에 뛰어들었다. 언제부턴가 회사는 더는 정식직원을 채용하지 않았다. 사대보험 들어주고 보너스까지 줘가며 노조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그것을 노동시장의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노동시장이 유연해질수록 인력시장으로 내몰리는 노동자의 숫자는 늘어났고 승합차는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대신 경쟁업체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 아웃소싱은 더 이상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P.071)



  양 사장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견디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를 위협하는 건 이제 라이벌 조직이 아니었다. 검찰도 아니었고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믿을 수 없는 부하들도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적은 어둠 속에 널려 있는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피로처럼 쌓여가는 무기력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 불안은 육체와 일체가 된 듯 익숙해진 외로움과 한데 뒤섞여 온몸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다.
(P.279)



  벤치에 앉아 잠시 담배를 피우던 양 사장은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세상살이에 대해 배운 건 모두 그의 아버지가 가르쳐준 거였다. 미끼를 어떻게 꿰는지, 어떤 물살에 낚시를 던져야 고기가 올라오는지, 어디를 때려야 상대가 한 방에 쓰러지는지...... 살아 있는 동안 그는 아버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증오했지만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양사장은 자신을 너무 사랑했고 그의 아버지는 평생 자신을 너무 증오했다는 거였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해를 받을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죽고 없어 세상에 그 혼자뿐이었다. 양 사장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의 아니보다 자신의 나이가 더 오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사는 건 내남없이 모두가 외로운 일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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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 문학동네 / 194쪽
(2017. 1.  13.)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탵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저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P.15)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럭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P.21)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P.43)



  새벽 어스름 속을 걸어본 적 있니.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따뜻하고 연약한 것인지 실감하며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딛는 새벽, 모든 사물의 몸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와, 방금 잠이 씻긴 두 눈 속으로 기적처럼 스며들어오는 새벽.
(P.72)



  무더운 칠월의 밤이다.
  흑판 양쪽 가장자리에 설치된 선풍기 두 대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다. 강의실 양쪽의 창문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 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 없고 아름다운 세게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P.92)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P.112)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럭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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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 문학동네 / 404쪽
(2017. 1.  11.)

 

 


  속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빠르기, 또 일정시간 동안 움직이는 물체가 이동한 거리. 빠르기에는 여러 사람이 고찰한 대로 도취가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말에는 느린 정도의 뜻으로 쓰이는 '지도'나 '느리기'라는 명사는 없고 그저 '느림보'라는 느리기의 속성을 가진 생물의 대표성만을 허용하고 있다. 느리기가 없으므로 당연히 거기에 함유될 그 무엇도, 도취든 죽음이든 망각이든, 없다.
(P.10)



  어찌 된 일인지 새로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 일본치하에서 헌병 조수, 순사 끄나풀을 지낸 사람이나 면서기, 군인, 관리들을 모두 옛날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아니, 일본인들이 가고 없는 빈 자리에 몇 계급씩 높여서 그들을 재기용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남긴 광복 후 초대 정부의 국부가 자신이 광복 전의 자리로 돌려보낸 사람 가운데 마사오의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정부'의 아버지라는 점에다 이제 모두 망자가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지하에서 통성명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P.13)



  역사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필요로 한다. 다만 신화의 주인공은 신이고 역사는 인간이 라는 점이 다른데 격변하는 시대 교체기에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영웅이 바로 마사오였다.
(P.19)



  인물은 저 혼자 인물로 나서 인물로 살다가 인물로 죽는가? 아니다. 처음부터 인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내 생각에 인물은 나, 우리 각자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그 인물을 존경하면 그 인물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된다. 내가 그를 사랑하면 그는 사랑받을 만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 된다. 내가 그를 그리워하면 그는 정말로 그리운 인물이 되고 내가 그를 증오하면 그는 누구에게도 증오를 받는 인물이 된다.
(P.35)


  이야기 자체의 흥미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사실의 목을 비틀고 쥐어짜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많다. 나아가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면서까지 이야기에 매달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데, 이야기의 중독성에 한번 당해 본 사람은 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촘촘하면 촘촘할수록 그 이야기의 그물을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그 그물은 하늘에서 인간의 욕망과 허영을 징치하기 위해 짜 놓은 그물인데 사람이 그것도 모르고 제 재주로 짠 줄 알고 좋아하다가 제 목을 그 안에 집어넣는 것이다.
(P.219)


  돌아오는 길, 고개 정상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지역은 여전히 회오리바람과 함께 피어오르는 비안개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은 눈부시도록 화창하다. 화창함은 이렇게 좋은 날씨에 무슨 일이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의 표정 같고 비안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시치미 떼는 사람의 얼굴 같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왜 망원경을 전망대 한쪽에만 설치하는지 휴게소 주인에게 물어 볼 생각이다. 망원경만이라도 밝고 어두운 세상 모두에 공평하게 설치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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