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 문학동네 / 194쪽
(2017. 1.  13.)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탵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저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P.15)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럭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P.21)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P.43)



  새벽 어스름 속을 걸어본 적 있니.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따뜻하고 연약한 것인지 실감하며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딛는 새벽, 모든 사물의 몸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와, 방금 잠이 씻긴 두 눈 속으로 기적처럼 스며들어오는 새벽.
(P.72)



  무더운 칠월의 밤이다.
  흑판 양쪽 가장자리에 설치된 선풍기 두 대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다. 강의실 양쪽의 창문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 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 없고 아름다운 세게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P.92)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P.112)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럭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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