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 예담 / 288쪽
(2017. 1.  16.)




  연안파는 더 이상 조직원을 늘리지 않았다. 집은 클수록 좋고 사무실은 작을수록 좋다는 게 보스인 양사장의 지론이었다. 미련하고 덩치만 큰 건달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떼 지어 몰려다니며 연장질을 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였다. 조직원이 많아지면 밥값만 많이 들고 경찰의 이목만 끌뿐, 별 실속이 없었다. 대신 조직은 종식처럼 쓸 만한 행동대원들을 적당한 거리에 두고 관리하며 필요할 때마다 이용해왔다. 돈만 주면 언제든 각목을 들고 금방 달려올 비정규직 건달들이 뒷골목에 넘쳐났다. 바야흐로 건달들도 청년시럽의 위기를 겪는 중이었다.
(P.12)



  인천의 노회한 건달은 바야흐로 노화와 투쟁하는 주잉었다. 진정한 철학은 젊음이 모두 스러지고 난 뒤에야 시작되는 법, 평생 주먹질만 하고 살아온 그의 삶은 이제 철학적 해결만이 유일한 길이 되었다. 물론 종교적인 해결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신의 존재를 믿기엔 너무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제 뭐든 너무 많은 아는 나이가 되어 굳이 신의 섭리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자신에게 뭐가 닥쳐 올지 잘 알고 있었다. 축 처진 불알에 파이프가 고장 나 빤쓰는 늘 축축하고 지속적인 불면에 시달리며 놀랄 일도 감탄할 일도 없는 일상이 지루하게 펼쳐질 것이다. 쉰 살이 넘어가면서 그는 오래전에 날아간 머리카락처럼 자신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이 모두 떠나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더 나이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깨달음으로 인한 임울한 기분은 어딘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물귀선처럼 들러 붙어 뒤덜미를 잡고 늘어졌다.
(P.16)



  구십 년대 내내 승합차에 여자들을 싣고 다니며 업소에 부려주던 그는 새천년이 되자 사업영역을 확장해 노래방 도우미는 물론, 파출부, 공사판 잡부, 공장 일용직 등 공단을 배후로 형성된 거대한 인력시장에 뛰어들었다. 언제부턴가 회사는 더는 정식직원을 채용하지 않았다. 사대보험 들어주고 보너스까지 줘가며 노조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그것을 노동시장의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노동시장이 유연해질수록 인력시장으로 내몰리는 노동자의 숫자는 늘어났고 승합차는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대신 경쟁업체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 아웃소싱은 더 이상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P.071)



  양 사장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견디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를 위협하는 건 이제 라이벌 조직이 아니었다. 검찰도 아니었고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믿을 수 없는 부하들도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적은 어둠 속에 널려 있는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피로처럼 쌓여가는 무기력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 불안은 육체와 일체가 된 듯 익숙해진 외로움과 한데 뒤섞여 온몸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다.
(P.279)



  벤치에 앉아 잠시 담배를 피우던 양 사장은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세상살이에 대해 배운 건 모두 그의 아버지가 가르쳐준 거였다. 미끼를 어떻게 꿰는지, 어떤 물살에 낚시를 던져야 고기가 올라오는지, 어디를 때려야 상대가 한 방에 쓰러지는지...... 살아 있는 동안 그는 아버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증오했지만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양사장은 자신을 너무 사랑했고 그의 아버지는 평생 자신을 너무 증오했다는 거였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해를 받을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죽고 없어 세상에 그 혼자뿐이었다. 양 사장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의 아니보다 자신의 나이가 더 오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사는 건 내남없이 모두가 외로운 일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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