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베이컨 신논리학
홍성자 / 김광옥 / 주니어김영사 / 227쪽
(2016. 2.  10.)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17세기 초 거의 모든 중대한 지식의 발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나서 2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철학자들은 관찰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것이었죠.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면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가장 일치하는 것이 진리이다.'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답니다.
  이러한 당시 학문 풍토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론에 문제 제기를 시작한 책이 바로 베이컨의 <신논리학>입니다. <신논리학은>은 어떤 책일까요?
  '아는 것이 힘이다.'
  베이컨이 한 이 유명한 말은 <신논리학>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자연을 잘 아는 것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신념이지요. 이 자연을 어떻게 하면 잘 알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아가는 책이 바로 <신논리학>입니다.
(P.6)



  베이컨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많이 알수록 인간에게 이익이 된다고 보았어. 그러면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왜 자연에 대한 탐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혹시 방해가 되는 것은 없을까? 이러한 고민을 풀어 놓고 그 방법을 찾아가는 책이 바로 <신논리학>이야. 그런데 왜 책 이름이 논리학도 아니고 <신논리학>일까?
  <신논리학>의 원래 제목은 라틴어로 'Novum Organum'이야. 라틴어에서 Organum은 기관 이외에도 방법, 논리, 규준의 뜻을 담고 있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논리학 저서의 제목이 <오르가논 Organon>으로 붙여졌는데 이것은 논리학이 학문 연구의 도구, 기관이라는 의미였지. 그런데 왜 베이컨은 책 제목에 New를 붙였을까? 베이컨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맞서 새로운 방법을 주장하거든.
(P.15)



  1620년 출간된 <신논리학>의 표지에는 지브롤터 해협의 헤라클레스의 기둥 사이를 지나는 배가 그려져 있어. 지브롤터 해협 사이엔 두 개의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를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렀지. 그런데 옛부터 이곳은 세상의 끝을 표시하는 지점이었다고해. 옛날 사람들은 세상의 끝이 깊은 낭떠러지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지브롤터 해협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던 거지. 그래서 베이컨은 배가 지중해를 나와 큰 바다로 나아가듯이 <신논리학을 통해 중세를 넘어 근대의 학문 세계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꿈을 표지 그림에 담고 싶었던 것 같아. 베이컨이 <신논리학>을 쓴 목적에는 인간이 자연을 알고 지배함으로써 실질적인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 그래서 <신논리학>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야.
(P.17)

 

 

 

  과거에 학문이 진보를 방해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앞날의 희망의 근거도 그만큼 많다고 할 수 있는 거지. 또 다른 학문진보 희망의 근거는 학문하는 태도에서 나와. 베이컨은 학문하는 태도를 '개미'의 방법과 '거미'의 방법, '꿀벌'의 방법에 비유했어. 개미는 재료를 모이기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거미는 자신의 속에서 거미줄을 끌어내지. 그런데 꿀벌은 꽃에서 재료를 모아 그것을 꿀로 변형시켜 내놓아. 여기서 베이컨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베이컨이 개미의 방법을 갖고 있다고 본 사람들은 경험론자들이야. 단순한 경험들을 단지 모으기만 할 뿐 제대로 된 공리를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인 거지. 거미의 방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독단론자들로, 지성의힘으로 생각에만 의존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야. 베이컨은 참된 철학자라면 꿀벌의 방법을 써야 한다고 보았어. 베이컨은 꿀벌처럼 모은 재료를 지성의 힘으로 변화시켜 연구해야 한다고 보았지. 경험의 능력과 이성의 능력을 잘 결합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희망이 가능한 거야.
(P.164)

 


  귀납법이야말로 학문의 진보에 희망을 가져도 좋다는 근거거든. 수집된 자료로부터 일반적 공리를 수립할 때 지금까지 사용해 온 것과는 다른 방식을 써야 한다고 했지? 그것이 바로 베이컨이 강조하는 '귀납법'이야. 베이컨은 귀납법을 두 가지로 구분했어. 하나는 '단순 나열의 유치한 귀납법'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귀납법'이야. 단순 나열의 유치한 귀납법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소수의 사례를 두드러진 사례들만 가지고 판단하는 거야. 때문에 믿을 만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늘 뿐만 아니라, 한 가지라도 반대 사례가 나타나면 결론이 당장 무너지게 되는 위험이 있는 방식이야. 참된 귀납법은 적절한 배제와 제외에 의해 자연을 분해한 다음, 부정적 사례를 필요한 만큼 수집하고 나서 긍정적 사례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거야. 부정적 사례를 살펴본다는 것은 마치 토론을 잘 하는 사람이 상대편의 반론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자기 논리를 세우는 것과 같은 논리겠지. 반론에도 무너지지 않는 논리가 강한 논리니까. 베이컨은 참 된 귀납법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 못한 많은 일들을 해야 하고 또 삼단논법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어. 참된 귀납법의 도움을 받으면 공리를 발견하기도 쉽고 개념을 규정하기도 쉬워지지. 이렇게 과거의 잘못과 결별하고 잘못을 시정한다면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의 길이 열리겠지.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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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신기관> (Novum Organum) (The New Organon) (1620)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12호)
박은진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26쪽
(2016. 2.  8.)



  베이컨의 <신기관>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적인 논의를 잘 보여준다. 중세의 신(神) 중심의 사회와 그 논의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되면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 자신의 힘으로 자연을 연구하고 자연에 대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베이컨은 서양 근대 사상과 근대 철학의 큰 두 흐름의 하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즉 근대의 경험론과 이성론(또는 합리론)에서, 경험론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이 두 흐름은 신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나타난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요약할 수 있다. 경험론은 인간의 경험을 또 이성론은 인간의 이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제 모든 것은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설명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서양 사회에서 신과 종교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이전에 비해서 그 역할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P.i)



  1605년 영어로 발표되고 1623년에는 라틴어로 새롭게 출간한 <학문의 진보>는 (<대혁신>의 제2부로 나온) <신기관>과 함께 베이컨에게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진보>에서 베이컨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학문이 또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종교의 잘못된 권위에 억눌린 학문을 제자리로 돌려, 새로운 시대의 학문상을 구축하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배웠던 실용적 학문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의 논의를 한다.
(P.5)



  사람들은 베이컨을 철학적으로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근대의 경험론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이는 베이컨이 중세말의 자연과 인간에 관한 관점을 새로운 시각으로 확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그 당시의 막 발전해 나가던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중세 말에서 근세 초기에 활발히 나타났던 이런 자연과학적 시도는 그 시기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에게 함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를 경험론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P.8)



  경험론이란 이제 인간의 지식이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경험의 과정 속에서 점차적으로 생긴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입장이다. 그리고 경험론자들이 생각하는 경험은 우선 감각 경험을 말한다. 즉 대체로 그들은 사물의 진상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그 사물을 관찰하고 만져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어진 그 사물에 관한 지각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성의 관념들을 (그것들이 관찰된 사실에 의하여 확증되기 이전에는) 단순히 상상에서 온 허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인식 가운데에서 제일 원리, 본유 관념, 이성의 구성 등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었다.
(P.8)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 해석과 인간 세계에 관한 잠언들’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나눠 있다. 이 책에서 제1권은 내용에 따라 완전히 재구성된 제2권의 요약이다. 이 책의 제1권은 130개의 항목으로, 그리고 제2권은 모두 52번으로 번호 붙은 항목들로 이루어졌다.
  제1권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편견들, 즉 네 가지 우상을 하나 하나 논박하고, 자신이 내세우는 새로운 방법론을 보여준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학문의 진보를 위한 방법론으로 귀납법을 말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과학을 연구하면서 피해야 할 것들을 지적하며, 동시에 과학자들이 연구하면서 따라야 할 사항들을 제시한다.
  제2권은 제1권에서 지적했던 네 가지의 우상에서 해방된 인간 지성이 과학적 발견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세세히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제1권에서 제시한 귀납법의 원리에 따른, ‘참된 귀납법’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다.
(P.12)



  베이컨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경험으로 자연을 관찰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선입견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자연에 대한 예측을 배척한 이유도 여기 있다. 베이컨이 쓴 비유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편견인 ‘우상’(idola)에 관한 것이다. ‘우상’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그리고 거짓에로 말려들게 만드는 마음의 모든 경향이다. 베이컨은 그러한 우상을 네 가지로 구별했다. 그 네 가지의 우상은 첫째가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둘째가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셋째가 ‘시장의 우상’(idola fori),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이다.
(P.12)



  철학사의 논의에서 근대 철학은 경험론과 이성론 (또는 합리론)의 두 경향으로 전개된다. 이 두 경향의 시작은 영국의 베이컨과 프랑스의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이다. 대체로 이들의 논의는 앞선 시기의 학문적 논의인 스콜라 철학에 대한 차가운 비판으로 시작한다. 그 여러 가지의 비판 가운데서도 앞 시기의 학문의 특성과 방법에 대한 비판은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는 비판 다음에 나타나는 새로운 학문을 구축하는 데에 필요한 방법론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 1622)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 1637)에 비견될 수 있다. 새로운 방법으로 베이컨은 경험과 실험으로 나타나는 귀납법을 내세우는 반면,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는 연역법을 내세운다.
(P.13)



  ‘종족의 우상’은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고유한 것으로, 사람들을 오류로 끄는 위험한 충동을 가리킨다. 베이컨에 의하면, 인간은 항상 감정과 의지 때문에 자칫 그릇된 판단에로 이끌려가기가 쉽다. 이것은 사람들이 단순함을 추구하거나 어떤 목적을 추구하려는 성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P.14)



  ‘동굴의 우상’은 어느 정도 각 개인의 특수성에서 나타나는 오류로, 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성향을 말한다. 베이컨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동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만의 동굴에 머물러 있을 때 동굴 밖에서 들어오는 자연의 빛은 원래와는 다르게 바뀌기가 쉽다. 이런 비유와 함께 베이컨은 다른 우상의 경우와 달리 동굴의 우상에 대해서는 어떤 지침을 내리지 않고 있다. 단지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성향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베이컨은 말한다.
(P.14)



  ‘시장의 우상’은 우리가 언어에 현혹되기 쉬운 경향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시장에 가서 단지 물건을 사고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어와 일치하는 실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보듯이 운명의 여신을 실재하는 신으로 숭배한다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오는 ‘제1질료’, ‘부동의 운동자’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논쟁을 벌이는데, 이것은 우리가 가지는 한 가지의 우상이라는 것이다.
(P.15)



  ‘극장의 우상’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전통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극장의 우상에서 가장 나쁜 예는 미신과 신학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잘 볼 수 있다. 이보다는 낫지만 또 다른 예로는 사람들이 모든 철학적 논의에서 얻는 이와 유사한 영향을 들 수 있다. 이런 우상을 피하면서 자연과 세계에 관한 논의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베이컨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이유이다.
(P.15)



  경험론자인 베이컨은 자연과 세계에 접근하는 경험적 방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귀납을 강조한다. 우리가 자연과 세계에서 얻으려는 결론은 이성론자들과는 달리 이미 우리의 마음속의 관념들을 전제로 삼단논법 또는 연역추리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자연과 세계에서 제대로 관찰된 사실들을 잘 정리해서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찰된 사실들을 잘 엮어낼 적절한 원리가 없다면,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따라서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을 자연에 관한 진리가 잘 드러날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이 귀납법이라는 것이다.
(P16.)



  철학이 인간 지성에 도움 되기 위해서는 절제 있는 철학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우상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절제한 철학은 결코 인간의 지성에 도움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결국 학문 연구에도 긍정적일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은 철학이나 철학체계라고 해서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베이컨이 드는 무절제한 철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독단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의 불가지론 또는 회의론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베이컨 이전에 나타났던 학문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에 기초해서 중세의 논의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리켜서 베이컨은 ‘죽은 학문’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서 그리고 이와 대비해서 베이컨은 자신이 내세우려는 학문을 산 학문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P.65)

 


  베이컨은 단순히 경험론자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는 이성이나 합리론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학문의 진보에서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경험이지만, 자연의 올바른 해석은 경험의 부족함과 오류를 이성으로 얻어낸 공리로 메우고 고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이컨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에서 이성과 공리는 숨겨져 버렸다. 그렇지만 베이컨의 희망은 학문의 진보를 위한 경험과 이성의 조화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 경험에 대한 강조는 그 어떤 학자에 비해서 두드러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경험론의 창시자이고, 경험론자이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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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관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
프랜시스 베이컨 / 진석용 / 한길사 / 319쪽
(2016. 2.  8.)



<과학 시대의 전망>(베이컨의 '신기관'과 그의 사상)


  <신기관>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베이컨은 제1권을 '(우상) 파괴편으로 제2권을 '(진리' 건설편'으로 부르고 있다. 제1권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경구에서 시작해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편견들, 즉 네 가지 '우상'을 하나 하나 논박하고, 자신이 제창한 귀납법의 개요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중세를 뚫고  솟아나는 근대정신의 파릇파릇한 싹을 만나게 된다. 제2권에서는 우상에서 해방된 인간의 지성이 과학적 발견을 위해 걸어야 할 길, 즉 '참된 귀납법'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유치한 것도 많고 우스운 것도 있지만, 현대 과학이 달나라를 정복하고 빛의 속도에 육박하기까지 과학사의 위인들이 얼마나 고된 노력을 했는지, 어떤 관점으로 과학을 인도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P.14)


  1. 인간은 자연의 사용자 및 자연의 해석자로서 자연의 질서에 대해 실제로 관찰하고, 고찰한 것만큼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은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P.39)


  13. 삼단논법은 학문의 원칙으로도 적합하지 않으며, 중간 수준의 공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연의 심오함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단논법은 인간의 동의를 얻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대상[자연]에 적용될 수는 없다.
  14. 삼단논법은 명제로 구성되고, 명제는 단어로 구성되고, 단어는 개념의 기호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건물의 기초에 해당하는) 개념들이 모호하거나 함부로 추상된 경우, 그런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세운 구조물은 결코 견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귀납법'만이 우리들이 유일한 희망이다.
(P.41)

  
  38. 인간의 지성을 고질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우상과 그릇된 관념들은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조차도 얻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용의 주도하게 그러한 우상들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않는 한, 학문을 혁신하려고 해도 곤경에 빠지고 말 것이다.
  39.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에는 네 종류가 있다. (편의상) 이름을 짓자면 첫째는 '종족의 우상'이요, 둘째는 '동굴의 우상'이요, 셋째는 '시장의 우상'이요, 넷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40. 이러한 우상들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음 참된 귀납법으로 개념과 공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상들을 찾아내는 것만 해도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소피스트의 궤변을 연구하면 논리학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우상에 대한 올바른 연구 역시 자연에 대한 해석에 도움이 된다.
(P.48)


  '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그 자체에, 인간이라는 종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주장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릇된 주장이지만, 인간의 모든 지각은 감각이든 정신이든 우주를 준거로 삼는 것잉 ㅏ니라 인간 자신을 준거로 삼기 쉽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다. 표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은 사물을 그 본모습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나오는 [반사]광선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는데, 인간의 지성이 꼭 그와 같다.
(P.49)


  42.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상이다. 즉 각 개인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오류와는 달리) 자연의 빛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동굴 같은 것을 제 나름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인 고유의 특수한 본성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그가 받은 교육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그가 읽은 책이나 존경하고 찬양하는 사람의 권위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첫인상의 차이(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생겼는지, 아니면 선입관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생겼는지)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은 (각자의 기질에 따라) 변덕이 심하고, 동요하고, 말하자면 우연에 좌우되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인간은 넓은 세계에서가 아니라 상당히 좁은 세계에서 지식을 구하고 있다'고 했는데, 매우 정확한 지적이라 하겠다.
(P.50)


  43. 인간 상호간의 교류와 접촉에서 생기는 우상이 있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모임에서생기는 것이므로 '시장의 우상'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인간은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하는데, 그 언어는 일반인들의 이해수준에 맞추어 정해진다. 여기에서 어떤말이 잘못 만들어졌을 때 지성은 실로 엄청난 방해를 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학자들이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새로운 정의나 설명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태를 개선하지는 못한다. 언어는 여전히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모든 것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이나 일삼게 하고, 수많은 오류를 범하게 한다.
(P.50)


  44. 철학의 다양한 학설과 그릇된 증명방법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생기게 된 우상이 있는데, 나는 이를 '극장의 우상'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금까지 받아들여지고 있거나 고안된 철학체계들은, 생각건대 무대에서 환상적이고 연극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각본과 같은 것이다. 현재의 철학체계 혹은 고대의 철학체계나 학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각본은 수없이 만들어져 상연되고 있는데, 오류의 종류는 전혀 다르지만 그 원인은 대체로 같다. 철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철학 이외에] 구태의연한 관습과 경솔함과 태만이 만성화되어 있는 여러 분야의 많은 요소들과 공리들도 마찬가지다.
(P.51)


  46. 인간의 지성은 (널리 승인되고 있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든 아니면 자기 마음에 들어서이든) 한번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을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그에 합치되도록 만든다. 아무리 유력한 반증 사례들이 있다 해도 무시하거나 경멸하거나 그것만 예외로 치부해 제외하거나 배척하고 만다. 이것은 순전히 처음에 내세운 주장의 권위가 손상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은 또한 황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하더라도 부정적인 사례보다는 긍정적인 사례에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자극도 더 크게 받는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이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이다. 긍정적인 사례와 부정적인 사례를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 올바른 명제의 수립을 위해서는 부정적 사례를 더욱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P.53)


  67. 지성은 어떤 철학체계에 동의하기에 앞서, 먼저 그 철학이 무절제한 것은 아닌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무절제한 철학들은 우상을 고착화하고 영속화해서 그 우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차단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절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엇이든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학문을 단정적이고 독단적인 것으로 만들고 마는 사람들의 무절제요, 또하나는 불가지론에 빠져 아누 목표 없이 무턱대고 연구만 하는 사람들의 무절제이다. 전자는 지성을 억압하고 후자는 지성을 약화시킨다.
(P.73)


  70. 경험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우수한 논증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실제로 이루어진 실험의 범위 안에서만 그러하다. 왜냐하면 어떤 실험에서 얻은 경험을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례에까지 무분별하게 적용할 경우에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P.76)


  95. 지금까지 학문에 종사한 사람들은 경험에만 의존했거나 독단을 휘두르는 사람들이었다. 경험론자들은 개미처럼 오로지 모아서 사용하고, 독단론자들은 거미처럼 자기 속을 풀어서 집을 짓는다. 그러나 꿀벌은 중용을 취해 뜰이나 들에 핀 꽃에서 재료를 구해다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한다. 참된 철학의 임무는 바로 이와 비슷하다. 참된 철학은 오로지 (혹은 주로) 정신의 힘에만 기댈 것도 아니요, 자연지나 기계적 실험을 통해 얻은 재료를 가공하지 않은 채로 기억 속에 비축할 것도 아니다. 그것을 지성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능력(경험의 능력과 이성의 능력)이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것보다 더 긴밀하고 순수하게 결합된다면(아직은 아니지만)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것으로 희망의 근거를 삼아도 좋다.
(P.107)


  130. 자연을 해석하는 기술 그 자체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제시한 지침이 매우 유용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이것이 필요불가결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자연지와 경험지를 앞에 놓고 다만 두 가지만 주의하면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정신 본래의 힘만으로도 우리가 설명한 자연에 대한 해석 방법에 도달할 수 있다. 첫째로 고정관념을 버리는 일이며, 둘째로 적당한 시기가 될 때까지 성급한 일반화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이다. 왜냐하면 정신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상태에서 정신이 올바르고 성실하게 활동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자연에 대한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제시한 지침을 따르면 그 해석이 한결 수월해지고 좀더 확실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의 지침에 덧붙일 것이 없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정신의 활동을 정신 그 자체의 본래적 기능에 대해서는 물론, 사물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고찰해야 하기 때문에 발견의 기술은 발견 그 자체와 함께 진전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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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근본문제에 관한 10가지 성찰
나이절 워버턴 / 최희봉 / 자작나무 / 336쪽
(2016. 2.  2.)


<옮긴이의 말>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에서 기본이 주제들을 간략한 문체와 쉬운 용어로 요약해 놓았다. 이 책은 현대 철학의 핵심 분야를 대표하는 '신' '도덕성' '정치' '실재하는 세계' '과학' '마음' '예술'이라는 일곱 가지 주제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색다른 점은 철학 탐색의 여정을 종교나 도덕과 같은 비교적 친근한 주제로부터, 인식론이나 존재론과 같은 생소한 주제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P.17)


<머리말>

  철학은 활동이다 특정한 물음들에 대해 사고하는 한 방법이다. 그 가장 뚜렷한 특징은 논리적 논증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철학자들은 전형적으로 논증을 다룬다. 이들은 논증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이들의 것을 비판하거나 또는 두가지 모두를 한다. 철학자들은 또한 개념들을 분석하고 명료히 한다.
(P.22)


  철학을 공부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존재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 물음을 다룬다는 데 있다. 우리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때때로 기본적인 철학적 물음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 신이 존재함을 보이는 증명은 가능한가? 우리의 삶에는 목적이 있는가? 어떤 것을 옳거나 그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법을 어기는 것은 과연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한낱 꿈에 지니지 않을 수 있는가? 망므은 신체와 다른가, 아니면 우리는 그저 물질에 불과한 존재인가? 과학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등. 심지어 어떤 사람은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도 말한다. 그 기반이 되는 원리를 한 번도 검토하지 않고 틀에 박힌 삶을 지속하는 것은 마치 한 번도 정비된 적이 없는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P.25)


  철학을 공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폭 넓은 문제에 대해 더욱더 명료히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좋은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사고의 방법은 수많은 상황에서 유용할 수 있다. 어떤 입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증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기 때문이다.
(P.27)


  나는 앞에서 철학이란 하나의 활동임을 강조했다.그렇기에 이 책을 단지 수동적으로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사용된 논증을 아주 외워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철학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철학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기초적인 논증에 대한 확고한 지식은 제공해 줄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 책의 가장 이상적인 독서는 사용된 논증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반대 논증들을 고려하며 비판적으로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사고를 자극하기 위해 쓰였지 사고를 대신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다면, 당신은 분명히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많은 것들을 찾아낼 것이며, 그러는 동안에 당신 자신의 신념을 명료히 하게 될 것이다.
(P.31)


  어떤 행위를 옳거나 그러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한다 또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 논의해 온 물음이다. 만일 고문, 살인, 잔혹행위, 노예제, 강간 및 도둑질과 같은 것들이 왜 그른지 말할 수 없다면, 이런 것들을 금지하는 행위가 어떻게 정당회될 수 있겠는가? 도덕성은 단지 편견의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신념에 대해 올바른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의 분야는 대개 윤리학(Ethics) 또는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으로 알려져 있다.
(P.87)


  의무에 기초한 도덕이론이라고 해서 모두 신의 존재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의무에 기초한 도덕이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 칸트의 이론은 도덕을 넓은 맥락에서 많은 무신론자들도 설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술한다. 바록 칸트가 기독교 개신교의 전통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고, 그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지라도 말이다.
(P.94)


  대표 민주주의는 어떤 점에서 국민에 의한 정부를 실현하지만, 다름 점에서 그렇지 못하다. 이 제도은 선출된 사람들이 국민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국민에 의한 정부를 실현한다. 그러나 이런 대표들이 일단 선출되고 난 뒤에는 언제나 국민의 바람대로 안건을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자주 선거를 치르는 것이 공직의 남용을 방지하는 길이다. 유권자의 바람을 존중하지 않는 대표들은 재선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P.162)


  나는 스프에 파리가 한 마리 빠져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것을 볼 수 있고 필요하다면 만질 수 있고, 심지어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과 실제로 내 앞에 있는 것 사이의 정확한 관계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정말로 바깥에 있는 저 대상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가? 내가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는가? 아무도 대상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도 그것들은 계속해서 존재하는가? 나는 과연 외부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가?
  이것들 모드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 주변에 대한 지식을 얻는가에 관련된 물음들이다. 즉 이것들은 지식론(theory of knowledge) 또는 인식론(epistemology)으로 알려진 철학의 한 분야에 속한다.
(P.187)


  과학적 방법은 이전의지식 획득 방법에 비하면 커다란 진일보였다. 역사적으로 과학은 '권위에 의한 진리'의 자리를 대신했다. 권위에 의한 진리는 여러 중요한 '권위자들'의 견해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교회의 가르침 따위가 이를 대표하며, 무엇을 주장하ㅡ냐가 아니라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 수용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와 달리 과학적 방법은 테스트의 필요성과 어떤 주장이든 이에 대해 자신하기 전에 먼저 결과들에 관한 상세한 관찰을 행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 방법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모드가 믿을 수 있을 만큼 정말로 신뢰할 만한 것인가? 과학은 어덯게 진행되는가? 이런 종류의 것들이 과학철학자가 제기하는 물음이다.
(P.229)


  마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비물질적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사고는 그저 물질의 한 측면, 즉 두뇌 안에서 자극되는 신경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단지 정교한 로봇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이 심리철학(마음의 철학)의 범위에 속하는 문제들이다.
(P.255)


  우리 자신과 세계를 기술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우리는 보통 정신적 측면고 물질적 측면을 구분한다. 그러나 몸과 마음 사이에 과연 진정한 구분이 있는가? 아니면 이 구분은 단지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편리한 방식에 불과한가? 마음과 몸의 진정한 관계를 설명하는 문제는 '심신 문제(마음/몸 문제, mind/body problem)'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마음과 몸은 분리되어 있으며 우리들 저마다는 마음과 몸 양자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심신 이원론자라 불린다. 정신적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 물질적인 것과 동일한 것이며, 우리는 살과 피에 불과하며, 분리된 심적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물질주의자라고 한다.우리는 먼저 이원론과 이것에 대한 주요 비판을 고찰할 것이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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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 김경원 / 갈라파고스 / 240쪽
(2016. 1.  25.)



  젊을 때 마르크스를 읽고 '피가 끓어올라, "사회를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인간이 하는 일이 '별로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학습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가지 역사가 보여준 것에 따르면,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사회를 바꾸자'고 외친 정치 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숙청과 강제수용소를 통해 스스로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청년 시기에 마르크스를 배우고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운동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은, '인간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지금 당장 여기에서 실현하기에 인간은 너무 약하고 너무 사악하며 너무 비열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합니다. 이것은 아주 귀중한 경험적 앎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그들은 그런 인간을 '용서하는' 것도 배웁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행위가 청년의 성장과의시고하의 필수 단계로 여겨져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꽤 오래전에 그런 습관은 사라졌어요.
(P.9)


  사회 문제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한마디로 압축해보면, 결국 실천적으로 '어떻게 성숙한 어른을 키워낼 것인가'라는 문제로 수렴됩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래요 사회 전체를 한번에 전면적으로 '올바른 사회'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사회가 공정하고 누구에게나 선을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성숙한 어른'의 수를 조금씩 늘려가는 것은 가능합니다.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일단 근현대 일본 사회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 방법으로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성숙한 어른'이 줄었습니다.
(P.12)


  저는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 서적을 읽어왔고, 특히 인간 사회의 구조나 역사를 파악하는 방법론인 사적유물론에 특히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마르크스의 영향이 몸에 베어 있겠지요. 또한 <자본론>을 포함한 경제학 체게에 대해서도 무릎을 탁 치며 받아들인 부분이 말할 수 없이 많아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는 제가 무언가를 연구하고자 할 때 '재미있는 시가'을 제공해주는 참조항일 뿐이에요. 마르크스는 현대 경제나 정치, 여성의 지위나 가족, 저출산 문제 같은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지요.
(P.28)


  <공산당 선언.을 관통하는 기본 사상 즉 ① 역사의 어느 시대라도 경제적 생산 및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편성이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정신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② 따라서 (태곳적 토지 공유가 붕괴한 이후)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는 것, ③ 그러나 이 투쟁은 지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착취와 억압 및 계급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영구적으로 해방하지 않고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 이 기본 사상은 단 한 사람, 오로지 마르크스에게서 나왔다.
(P.29)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어느 수준에서 자신의 사고가 막혀 있는가, 자신이 얼마나 인습적인 사고 틀에 갇혀 있는가, 이런 점은 뼈가 시리도록 잘 알 수 있어요. 마르크스를 읽고 있으면 스스로의 사고틀이 외부의 충격으로 덜컹 흔들려서 우리 벽에 균열이 생기고 철창이 휘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마르크스가 나를 우리 밖으로 꺼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내가 우리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스스로가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수를 궁리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법이니까요.
(P.42)


  드디어 마지막 문장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훌륭하기 짝이 없는 맺음말이죠.
  내 생각에는 '결기하라'도, '타도하라'도, '탈환하라'도 아니고, '단결하라'고 한 점이 참 훌륭합니다.
  '세계를 획득한다'는 거대한(대체로 환상적인) 목표를 위해 마르크스가 우선 제시한 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단결'이란 몸짓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지극히 전투적인 전투적인 매니페스토의 마지막을 '우애'라느 말로 맺은 것입니다.
  정의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싸움을 앞두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서 '단결'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위대하다고 느껴요.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내걸고 '혁명' 투쟁을 전개해왔지요. 하지만 그들 '혁명가'의 매니페스토 대부분에는 마지막 맺음말에 그다지 따뜻함이 깃들어 있지 않아요.
  참된 혁명의 선언은 '미움'아니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우애'를 담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돼요. 이렇게 아주 인간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르크스는 19~20세기에 출현한 무수한 혁명가들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P.52)


  "이론은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인 힘으로 변한다. 이론은 사람을 향해 호소하듯이 논증을 할 때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고 이론이 근본적 일 때 사람을 향해 호소하듯이 논증하게 된다. '근본적'이란 사태를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 이것은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구절인데, 마르크스는 '이론'이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해요. 그러기 위해서 이론은 사물(근대 사회의 구조)을 근본에서 파악하고 사회 변혁의 내용을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독일 철학을 그러한 것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어요.
(P.75)


  저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르러 대체로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마르크스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해요. 그러면 어떤 점 때문에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출발점에 섰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적유물론'의 기본적인 해명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적유물론(유물론적인 역사관)이란 인간 사회가 무슨 이유로, 이떻게 원시 사회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는가, 인간 사회는 어더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제까지의 역사는 앞으로 일어날 사회 발전에 어떠한 시사잠을 던져주는가 같은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적유물론은 인간 사회의 일부 - 정치라든가 경제라든가 문화 같은 것 - 가 아니라 전체를 통째로 다루면서 그 역사(변화)와 구조(짜임새)를 이름 그대로 '유물론'의 입장에서 탐구해간 학문이기도 하고, 또 마르크스주의에서 아주 중요한 이론적 요소인데요. <독일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기본적인 골격을 처엄으로 분명하게 밝힌 저술이라고 볼 수 있어요.
(P.166)


  사적 유물론이 '유물론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 사회의 역사적인 변화의 원동력을 '신'이나 '자아' 같은 사회 외부에 있는 어떤 정신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 자체의 내부에서 탐구한다는 뜻이에요. 생물의 진화나 우주의 진화를 '신'의 의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의 자연과학이 취하는 당연한 태도인 것처럼, 인간 사회의 진화도 사물 자체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사적유물론의 입장이에요. 그것은 생물이 진화나 우주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호의 진화에 대해서도 과학적이며 구명이 가능하다는 견지에 서 있지요.
(P.167)


  이 책을 읽고 '마르크스에게는 내 지성을 단련해줄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구나' 하는 예감이 스친다면 나로서는 아주 기쁜일입니다. 나도 학생 시절에 그런 직감이 들어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거든요.
  '지성을 단련하는' 일은 물론 마르크스를 달달 외우거나 옿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크스는 도대체 현실 세계 - 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였어요 - 의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마르크스의 언어를 따라가면서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결과 마르크스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가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가는 일. 그런 훈련을 해나가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단련'이겠지요.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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