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 김경원 / 갈라파고스 / 240쪽
(2016. 1.  25.)



  젊을 때 마르크스를 읽고 '피가 끓어올라, "사회를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인간이 하는 일이 '별로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학습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가지 역사가 보여준 것에 따르면,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사회를 바꾸자'고 외친 정치 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숙청과 강제수용소를 통해 스스로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청년 시기에 마르크스를 배우고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운동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은, '인간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지금 당장 여기에서 실현하기에 인간은 너무 약하고 너무 사악하며 너무 비열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합니다. 이것은 아주 귀중한 경험적 앎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그들은 그런 인간을 '용서하는' 것도 배웁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행위가 청년의 성장과의시고하의 필수 단계로 여겨져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꽤 오래전에 그런 습관은 사라졌어요.
(P.9)


  사회 문제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한마디로 압축해보면, 결국 실천적으로 '어떻게 성숙한 어른을 키워낼 것인가'라는 문제로 수렴됩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래요 사회 전체를 한번에 전면적으로 '올바른 사회'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사회가 공정하고 누구에게나 선을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성숙한 어른'의 수를 조금씩 늘려가는 것은 가능합니다.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일단 근현대 일본 사회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 방법으로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성숙한 어른'이 줄었습니다.
(P.12)


  저는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 서적을 읽어왔고, 특히 인간 사회의 구조나 역사를 파악하는 방법론인 사적유물론에 특히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마르크스의 영향이 몸에 베어 있겠지요. 또한 <자본론>을 포함한 경제학 체게에 대해서도 무릎을 탁 치며 받아들인 부분이 말할 수 없이 많아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는 제가 무언가를 연구하고자 할 때 '재미있는 시가'을 제공해주는 참조항일 뿐이에요. 마르크스는 현대 경제나 정치, 여성의 지위나 가족, 저출산 문제 같은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지요.
(P.28)


  <공산당 선언.을 관통하는 기본 사상 즉 ① 역사의 어느 시대라도 경제적 생산 및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편성이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정신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② 따라서 (태곳적 토지 공유가 붕괴한 이후)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는 것, ③ 그러나 이 투쟁은 지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착취와 억압 및 계급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영구적으로 해방하지 않고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 이 기본 사상은 단 한 사람, 오로지 마르크스에게서 나왔다.
(P.29)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어느 수준에서 자신의 사고가 막혀 있는가, 자신이 얼마나 인습적인 사고 틀에 갇혀 있는가, 이런 점은 뼈가 시리도록 잘 알 수 있어요. 마르크스를 읽고 있으면 스스로의 사고틀이 외부의 충격으로 덜컹 흔들려서 우리 벽에 균열이 생기고 철창이 휘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마르크스가 나를 우리 밖으로 꺼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내가 우리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스스로가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수를 궁리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법이니까요.
(P.42)


  드디어 마지막 문장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훌륭하기 짝이 없는 맺음말이죠.
  내 생각에는 '결기하라'도, '타도하라'도, '탈환하라'도 아니고, '단결하라'고 한 점이 참 훌륭합니다.
  '세계를 획득한다'는 거대한(대체로 환상적인) 목표를 위해 마르크스가 우선 제시한 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단결'이란 몸짓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지극히 전투적인 전투적인 매니페스토의 마지막을 '우애'라느 말로 맺은 것입니다.
  정의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싸움을 앞두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서 '단결'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위대하다고 느껴요.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내걸고 '혁명' 투쟁을 전개해왔지요. 하지만 그들 '혁명가'의 매니페스토 대부분에는 마지막 맺음말에 그다지 따뜻함이 깃들어 있지 않아요.
  참된 혁명의 선언은 '미움'아니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우애'를 담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돼요. 이렇게 아주 인간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르크스는 19~20세기에 출현한 무수한 혁명가들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P.52)


  "이론은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인 힘으로 변한다. 이론은 사람을 향해 호소하듯이 논증을 할 때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고 이론이 근본적 일 때 사람을 향해 호소하듯이 논증하게 된다. '근본적'이란 사태를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 이것은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구절인데, 마르크스는 '이론'이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해요. 그러기 위해서 이론은 사물(근대 사회의 구조)을 근본에서 파악하고 사회 변혁의 내용을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독일 철학을 그러한 것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어요.
(P.75)


  저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르러 대체로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마르크스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해요. 그러면 어떤 점 때문에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출발점에 섰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적유물론'의 기본적인 해명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적유물론(유물론적인 역사관)이란 인간 사회가 무슨 이유로, 이떻게 원시 사회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는가, 인간 사회는 어더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제까지의 역사는 앞으로 일어날 사회 발전에 어떠한 시사잠을 던져주는가 같은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적유물론은 인간 사회의 일부 - 정치라든가 경제라든가 문화 같은 것 - 가 아니라 전체를 통째로 다루면서 그 역사(변화)와 구조(짜임새)를 이름 그대로 '유물론'의 입장에서 탐구해간 학문이기도 하고, 또 마르크스주의에서 아주 중요한 이론적 요소인데요. <독일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기본적인 골격을 처엄으로 분명하게 밝힌 저술이라고 볼 수 있어요.
(P.166)


  사적 유물론이 '유물론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 사회의 역사적인 변화의 원동력을 '신'이나 '자아' 같은 사회 외부에 있는 어떤 정신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 자체의 내부에서 탐구한다는 뜻이에요. 생물의 진화나 우주의 진화를 '신'의 의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의 자연과학이 취하는 당연한 태도인 것처럼, 인간 사회의 진화도 사물 자체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사적유물론의 입장이에요. 그것은 생물이 진화나 우주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호의 진화에 대해서도 과학적이며 구명이 가능하다는 견지에 서 있지요.
(P.167)


  이 책을 읽고 '마르크스에게는 내 지성을 단련해줄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구나' 하는 예감이 스친다면 나로서는 아주 기쁜일입니다. 나도 학생 시절에 그런 직감이 들어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거든요.
  '지성을 단련하는' 일은 물론 마르크스를 달달 외우거나 옿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크스는 도대체 현실 세계 - 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였어요 - 의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마르크스의 언어를 따라가면서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결과 마르크스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가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가는 일. 그런 훈련을 해나가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단련'이겠지요.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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