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 <신기관> (Novum Organum) (The New Organon) (1620)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12호)
박은진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26쪽
(2016. 2.  8.)



  베이컨의 <신기관>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적인 논의를 잘 보여준다. 중세의 신(神) 중심의 사회와 그 논의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되면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 자신의 힘으로 자연을 연구하고 자연에 대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베이컨은 서양 근대 사상과 근대 철학의 큰 두 흐름의 하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즉 근대의 경험론과 이성론(또는 합리론)에서, 경험론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이 두 흐름은 신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나타난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요약할 수 있다. 경험론은 인간의 경험을 또 이성론은 인간의 이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제 모든 것은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설명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서양 사회에서 신과 종교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이전에 비해서 그 역할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P.i)



  1605년 영어로 발표되고 1623년에는 라틴어로 새롭게 출간한 <학문의 진보>는 (<대혁신>의 제2부로 나온) <신기관>과 함께 베이컨에게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진보>에서 베이컨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학문이 또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종교의 잘못된 권위에 억눌린 학문을 제자리로 돌려, 새로운 시대의 학문상을 구축하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배웠던 실용적 학문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의 논의를 한다.
(P.5)



  사람들은 베이컨을 철학적으로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근대의 경험론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이는 베이컨이 중세말의 자연과 인간에 관한 관점을 새로운 시각으로 확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그 당시의 막 발전해 나가던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중세 말에서 근세 초기에 활발히 나타났던 이런 자연과학적 시도는 그 시기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에게 함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를 경험론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P.8)



  경험론이란 이제 인간의 지식이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경험의 과정 속에서 점차적으로 생긴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입장이다. 그리고 경험론자들이 생각하는 경험은 우선 감각 경험을 말한다. 즉 대체로 그들은 사물의 진상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그 사물을 관찰하고 만져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어진 그 사물에 관한 지각을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성의 관념들을 (그것들이 관찰된 사실에 의하여 확증되기 이전에는) 단순히 상상에서 온 허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인식 가운데에서 제일 원리, 본유 관념, 이성의 구성 등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었다.
(P.8)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 해석과 인간 세계에 관한 잠언들’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나눠 있다. 이 책에서 제1권은 내용에 따라 완전히 재구성된 제2권의 요약이다. 이 책의 제1권은 130개의 항목으로, 그리고 제2권은 모두 52번으로 번호 붙은 항목들로 이루어졌다.
  제1권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편견들, 즉 네 가지 우상을 하나 하나 논박하고, 자신이 내세우는 새로운 방법론을 보여준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학문의 진보를 위한 방법론으로 귀납법을 말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과학을 연구하면서 피해야 할 것들을 지적하며, 동시에 과학자들이 연구하면서 따라야 할 사항들을 제시한다.
  제2권은 제1권에서 지적했던 네 가지의 우상에서 해방된 인간 지성이 과학적 발견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세세히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제1권에서 제시한 귀납법의 원리에 따른, ‘참된 귀납법’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다.
(P.12)



  베이컨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경험으로 자연을 관찰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선입견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자연에 대한 예측을 배척한 이유도 여기 있다. 베이컨이 쓴 비유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편견인 ‘우상’(idola)에 관한 것이다. ‘우상’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그리고 거짓에로 말려들게 만드는 마음의 모든 경향이다. 베이컨은 그러한 우상을 네 가지로 구별했다. 그 네 가지의 우상은 첫째가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둘째가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셋째가 ‘시장의 우상’(idola fori),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이다.
(P.12)



  철학사의 논의에서 근대 철학은 경험론과 이성론 (또는 합리론)의 두 경향으로 전개된다. 이 두 경향의 시작은 영국의 베이컨과 프랑스의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이다. 대체로 이들의 논의는 앞선 시기의 학문적 논의인 스콜라 철학에 대한 차가운 비판으로 시작한다. 그 여러 가지의 비판 가운데서도 앞 시기의 학문의 특성과 방법에 대한 비판은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는 비판 다음에 나타나는 새로운 학문을 구축하는 데에 필요한 방법론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 1622)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 1637)에 비견될 수 있다. 새로운 방법으로 베이컨은 경험과 실험으로 나타나는 귀납법을 내세우는 반면,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는 연역법을 내세운다.
(P.13)



  ‘종족의 우상’은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고유한 것으로, 사람들을 오류로 끄는 위험한 충동을 가리킨다. 베이컨에 의하면, 인간은 항상 감정과 의지 때문에 자칫 그릇된 판단에로 이끌려가기가 쉽다. 이것은 사람들이 단순함을 추구하거나 어떤 목적을 추구하려는 성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P.14)



  ‘동굴의 우상’은 어느 정도 각 개인의 특수성에서 나타나는 오류로, 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성향을 말한다. 베이컨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동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만의 동굴에 머물러 있을 때 동굴 밖에서 들어오는 자연의 빛은 원래와는 다르게 바뀌기가 쉽다. 이런 비유와 함께 베이컨은 다른 우상의 경우와 달리 동굴의 우상에 대해서는 어떤 지침을 내리지 않고 있다. 단지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성향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베이컨은 말한다.
(P.14)



  ‘시장의 우상’은 우리가 언어에 현혹되기 쉬운 경향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시장에 가서 단지 물건을 사고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어와 일치하는 실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보듯이 운명의 여신을 실재하는 신으로 숭배한다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오는 ‘제1질료’, ‘부동의 운동자’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논쟁을 벌이는데, 이것은 우리가 가지는 한 가지의 우상이라는 것이다.
(P.15)



  ‘극장의 우상’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전통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극장의 우상에서 가장 나쁜 예는 미신과 신학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잘 볼 수 있다. 이보다는 낫지만 또 다른 예로는 사람들이 모든 철학적 논의에서 얻는 이와 유사한 영향을 들 수 있다. 이런 우상을 피하면서 자연과 세계에 관한 논의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베이컨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이유이다.
(P.15)



  경험론자인 베이컨은 자연과 세계에 접근하는 경험적 방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귀납을 강조한다. 우리가 자연과 세계에서 얻으려는 결론은 이성론자들과는 달리 이미 우리의 마음속의 관념들을 전제로 삼단논법 또는 연역추리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자연과 세계에서 제대로 관찰된 사실들을 잘 정리해서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찰된 사실들을 잘 엮어낼 적절한 원리가 없다면,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따라서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을 자연에 관한 진리가 잘 드러날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이 귀납법이라는 것이다.
(P16.)



  철학이 인간 지성에 도움 되기 위해서는 절제 있는 철학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우상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절제한 철학은 결코 인간의 지성에 도움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결국 학문 연구에도 긍정적일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은 철학이나 철학체계라고 해서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베이컨이 드는 무절제한 철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독단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의 불가지론 또는 회의론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베이컨 이전에 나타났던 학문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에 기초해서 중세의 논의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리켜서 베이컨은 ‘죽은 학문’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서 그리고 이와 대비해서 베이컨은 자신이 내세우려는 학문을 산 학문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P.65)

 


  베이컨은 단순히 경험론자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는 이성이나 합리론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학문의 진보에서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경험이지만, 자연의 올바른 해석은 경험의 부족함과 오류를 이성으로 얻어낸 공리로 메우고 고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이컨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에서 이성과 공리는 숨겨져 버렸다. 그렇지만 베이컨의 희망은 학문의 진보를 위한 경험과 이성의 조화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 경험에 대한 강조는 그 어떤 학자에 비해서 두드러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경험론의 창시자이고, 경험론자이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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