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기술
유시민 / 생각의 길 / 368쪽
(2017.04.23.)


  누가 쓴 책이든, 무엇에 관한 책이든 비판적으로 읽는 게 기본입니다. 정치인만 그런 게 아니라 기업인, 교수, 평론가도 거짓말을 하거나 틀린 주장을 하니까요. 책은 모두 사람이 쓴 겁니다. 가방끈이 얼마나 길든, 하는 일이 뭐든, 사람은 다 비슷한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잘 속이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지고,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고 하는 동물, 우리는 모드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누가 쓴 어떤 책이든 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P.30)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답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무엇이 내 것이고 뭐가 남의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틀에 박힌, 진부한, 상투적인 글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 글을 씁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나다운 시각과 색깔로 써야 한다.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생각과 표현에서 멀어져야 한다."
(P.42)


  절대적 진리를 내세워 생각이 다른 이를 말살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마치 그런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살려면 불관용을 부추기는 생각, 논리, 태도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싸우는 게 보기 싫다는 이유로 이런 싸움을 못 하게 하면 안됩니다. 권력자가 내린 명령을 국민이 일사불란 따라가는 바람에 융악한 범죄가 일어나 나라가 망한 사례가 허다합니다. 싸우는 정치가 나쁜 게 아니라 '싸우는 정치는 나쁘다'는 주장이 나쁩 겁니다. 무엇을 두고 어떻게 싸우는지 따지지 않고 싸운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인을 비난하고 정치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는 지식인과 언론인을 믿지 마십시오.
(P.55)


  악플은 그 대상이 된 사람의 잘못이 아니며 그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닙니다. 악풀은 쓴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남루하며 황폐한지 보여 주는 증거일 뿐이에요. 남의 문제를 가지고 왜 내가 고민합니까?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요. 저는 그저 이렇게 생가합니다. "악플 다는 데도 열정이 필요한데, 나름 참 애쓰면서 열심히 사는구나." 그러면서 제가 해야 할 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집중합니다. 악플과 싸우는 데는 단 1초도  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댓글이라고 모두 악플로 취급하는 건 현명하지 않습니다. 표현 방법이 적절치 않거나 거칠어도 비판으로 인정할 수 있는 댓글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정말 그런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있고요. 그렇지만 해명을 하거나 반박을 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같은 글을 여기저기 반복해서 올리는 경우는 '온라인 스토커'로 간주해서 무플로 대응하는 게 맞습니다.
(P.74)


  저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가진 종을 전적으로 신회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욕망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욕망은 아름답고 또한 추악합니다. 이성은 고결하지만 때로 나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빛나는 선과 끔찍한 악을 다 저지릅니다. 저는 인간의 사악함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악함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여서 악한 사람 자신도 스스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회악이 생기면 그 원인을 나쁜 사람한테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악이 악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P.101)


   소개서도 모범 답안이나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잘 쓴 자기소개서와 그렇지 않은 자기소개서가 있다는 것을 분명합니다. 어떤 것이, '잘 쓴 자기소개서'일까요? 저는 자개소개를 할 때 두 가지를 반드시 챙깁니다.
  첫째,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거짓 없이 그리고 명확하게 요약합니다. 자기소개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심각한 '정보 불균형'이 있어요. 쓰는 사람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 다 알지만, 읽는 사람은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소개서에는 읽는 사람이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소가 없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사실을 과장한다는 느김을 주지 말아야 하는 거죠. 자기 자랑으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일수록 소박하고 담담한 문장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둘째, 자기소개서는 글쓴이가 읽는 사람들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써야 합니다. 읽는 사람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느낄 만한 사실을 중심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려면 철저하게 읽는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자기 인생을 요약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소개서를 쓸 때는 내가 그 조직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능, 경력, 인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도드라지게 강조해야 합니다. 읽는 사람의 관점에서 나의 인생을 발췌 요약하는 거죠.
(P.108)


  글쓰기 실력 향상을 목적으로 삼아 책을 읽는다고 해서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독서는 간접 경험이에요. 제대로 간접 경험을 하려면 글쓴이에게최대한 감정을 이입한 상태로 글을 읽어야 합니다.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에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P.153)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책을 많이 읽는 데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책 속으로 젖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읽어도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책을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책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는 하지만 공감 할 수 없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글슨이가 잘못 섰거나, 잘 쓴 글이지만 나하고는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책은 덮어 두는 게 현명합니다. 억지로 읽으려면 괴롭기만 할 뿐 남는 게 없을 겁니다.
(P.161)


  기쁜 일이 있을 때 저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기쁠 때는 다른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느라 아예 책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슬플 때, 분할 때, 억울할 때,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는 책을 펼칩니다. 그런 감정을 대면하는 방법, 그것과 공존하는 방법, 그 무게를 견디는 방법을 책에서 찾습니다.
(P.168)


  어린 시절에는 무엇을 배우려고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귀하게 다가오는 것은 배움보다 느낌어었어요. 여러분도 '배우는 책 읽기'를 넘어 '느끼는 책 읽기'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넓고 깊고 섬세하게 느끼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자 텍스트로 타인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이 생길 겁니다.
(P.169)


  글을 잘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감정 등의 내용, 그리고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할까요?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글 쓰는 기술은 외모입니다. 롱다리, 브이라인, 에스라인, 빨래판 복근 같은 것이죠. 내용은 사람이 가진 것이에요. 체력, 돈, 재능, 지식입니다. 감정 이입 능력은 성격, 마음씨,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흔희 외모를 부러워하고 돈과 지식을 선망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격과 마음씨와 인생관입니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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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관한 편지

존 로크 / 공진성 / 책세상 / 171쪽
(2017.04.19.)

 

로크는 종교의 자유가 국가에 의해서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그것을 국가의 간섭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로크는 무엇보다도, 당시로서는 모든 종교인이, 그리고 세속화한 오늘의 상황에서는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공존의 정치적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공존의 틀을 파괴해가면서까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도 않고, 그 틀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구로 만들지도 않는다. 이 일을 위해 중요한 것이 영역의 구분이다. 이 영역은 공간적으로, 시각적으로, 개념적으로 깔끔하게 선을 긋듯이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와 국가, 종교와 정치라는 영역의 구분은 그 두 영역 모두에 걸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각각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고,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해석해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업은 일회적이지도 않다. 평화적인 공존을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영역을 미세하게 구분하는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로크는 우리에게 그 해석 작업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P.8)



   국가에 관한 것과 종교에 관한 것이 구분되어야 하고, 교회와 공화국 사이의 경계가 제대로 정해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혼의 구원을 걱정하고 공화국 의 안녕을 걱정하는, 혹은 마치 그런 것처럼 가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분쟁에도 한계가 정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P.21)



  어느 누구도, 자유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이익을 일부분조차 자발적으로 박탈당하지는 않으므로, 통치자는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에게 처벌을 가하기 위해서 무력, 곧 자신의 모든 신민들의 신체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통치자의 모든 사법권은 오로지 이 세속적 이익에만 미치고, 세속 권력의 모든 권리와 지배는 오로지 이 세속적 재산의 보호화 증진에만 국한되며, 영혼의 구원에까지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장되어서도 안 되고 확장될 수도 없습니다.
(P.22)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신성에 적합하다고[신이 받으신다고] 그들이 믿는 방식에 따라 신을 공적으로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인간들의 자유로운 사회입니다.
(P.26)



  어떤 개인도, 어떤 교회도, 심지어 공화국도 시민적 재산을 침해하고 강탈할 그 어떤 권리를 종교의 구실 아래 가질 수 없습니다. 저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한 권리 주장이] 인류에게 끝없는 분쟁과 전쟁의 원인을, 그리고 강탈, 학살, 영원한 증오를 향한 선동을 얼마나 공급해왔는지를 스스로 숙고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지배가 [신의] 은총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종교가 무력과 무기로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게 된다면, 우애는 물론, 안전과 평화도 결코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고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P.37)



  통치를 신의 은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일종의 지배이다. 정치에 대한 종교의 지배이고, 그것도 특정 종파의 지배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종교 자체의 파괴이고 구원의 실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크는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로크는 구원에 대한 열심으로 위장된 지배를 향한 욕망을 비판하고,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본래적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배 현상이 정치와 종교, 공화국과 교회를 구별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두 영역 간의 경계를 허무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 구별 작업이 우선해야 한다고 로크는 주장했다. 국가에 관한 것과 종교에 관한 것, 교회와 공화국 간의 경계가 올바르게 확정된다면 위선은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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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드러커 매니지먼트
피터 드러커 / 남상진 / 청림출판 / 376쪽
(2017.03.28.)



  매니지먼트 없이는 조직도 없다
  매니지먼트는 오늘날 기업, 정부 기관, 대학, 연구소, 병원, 군 등 여러 기관의 다양한 조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매니지먼트가 성과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조직이 없으면 매니지먼트도 없다. 그러나 매니지먼트가 없다면 조직도 없다.
  한편 매니지먼트는 소유권, 계급,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것이어야 한다. 매니지먼트란 성과에 대한 책임을 바탕으로 하는 객관적인 기능이다.
(P.12)


  기업의 목적은 기업 외부에 있다. 기업은 사회에 속한 기관이며 그 목적 역시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 시장을 만드는 것은 신이나 자연이나 경제적인 힘이 아니다. 바로 기업이다. 기업은 일단 고객의 욕구가 감지되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기업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고객이다. 고객이야말로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매기고, 경제적 자원을 부로, 자원을 제품으로 바꾸는 유일한 객체다. 고객이 구입하는 것은 제품과 서비스 자체가 아니며 그것들이 제공하는 효용이다. 이렇듯 기업의 목적은 한 가지,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
(P.27)


  일과 노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며 일은 사람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일의 생산성을 올리는 데 필요한 것과, 사람이 생동감 있게 일하는 데 필요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따라서 일과 노동의 역학관계를 잘 살펴 매니지먼트해야만 한다.
  노동자가 만족하더라도 일이 생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다. 반대로 일이 생산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사람이 생동감 있게 일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실패다.
(P.81)


  매니저에게는 두 가지 역할이 있다.
  첫 번째 역할은 투입한 자원의 합계보다 큰 것을 만들어 내는 생산체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비슷하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지휘자의 행동, 비전, 지도력을 통해 음악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매니저는 그의 자원, 특히 인적 자원의 모든 강점을 발휘 시키는 한편 모든 약점을 제거해야 한다.
  두 번째 역할은 모든 결정과 행동에 있어 현재 필요한 것과 미래에 필요하게 될 것을 조화시켜가는 것이다. 어느 것을 희생시키더라도 조직은 위험에 처한다. 오늘을 위해 내일 희생되는 것을, 혹은 내일을 위해 오늘 희생되는 것을 잘 계산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희생을 최소화해야 하며 무엇보다 조기에 보완해야 한다.
(P.116)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결정한 내용을 실행에 옮기고 때때로 수정해 줄 사람, 나아가 미래의 매니지먼트를 이끌어 갈 사람을 미리미리 시험하고 선택하여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니저는 육성되는 것이지 선천적인 자질을 가진, 타고난 부류가 아니다. 따라서 미래의 매니저를 육성하고 확보하고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운이나 우연에 맡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P.174)

 
  성과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성과란 항상 백발백중이 아니다. 성과란 장기적인 것이다. 때문에 실패하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자는 신용할 수 없다. 이들은 겉치레에 가까운 일, 무난한 일, 하찮은 일 외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약점이 없다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약점 때문에 좋지 못한 평가를 내린다면 사람들의 의욕은 사라지고 사기도 떨어질 것이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이다. 뛰어난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을 시험하려 들기 때문이다.
(P.188)


  지식도 별로 없고 일하는 태도도 시원찮으며 판단력이나 행동력이 결여되어 있더라도 매니저로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총명하며 일을 잘 처리하더라도 성실함이 부족하여 조직을 파괴시키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이들은 특히 조직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인적 자원에 해를 끼친다. 조직의 정신을 손상시키고 업적을 저하시키ㅡㄴ 이런 자들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P.191)


  무엇에 관한 의사결정인지를 분명히 하려면 문제에 대한 견해에서 시작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차이는 상당 부분 '무엇에 관한 의사결정인가'에 대한 인식 차에 기인한다. 문제 인식의 차이가 해답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인식 방법이 있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효과적인 의사결정의 첫걸음이다. 잘못된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만큼 보람 없는, 나아가 해를 끼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P.197)


  경청은 커뮤니케이션의 전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실현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말을 이해함으로써 유효하게 되는데 이는 아랫사람에게도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경청을 강조하는 생각의 근본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다는, 즉 수신하는 쪽에서 시작한다는 인식이 있다. 이는 경청이 전부가 아니며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P.207)


  톱매니지먼트는 아이디어의 채택을 자신의 책무로 여겨야 한다. 뛰어난 아이디어는 늘 비현실적이며 이것을 손에 넣으려면 시시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 중 무엇이 뛰어나고 현실성이 있는지 식별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톱매니지먼트는 아이디어를 장려하는 데 멈추지 않고 '아이디어가 실제적이고 가능성이 있으며 효과적인 것이 되려면 어떤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가'를 계속 따져야 한다. 세련되지 못한 시시한 아이디어라도 실현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까지 검토해야 한다.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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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 <통치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
(철학사상 별책 제2권 제4호)
정윤석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37쪽
(2017.03. 22.)


  로크의 Two Treatises of Government를 <통치론>이라 번역 하였다. 원래 영어 제목에 충실하다면, <통치이론>(統治二論) 혹은 <통치에 관한 두 논문>이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국내 학계의 관행에 따라 <통치론>이라고 번역하기로 한다. 로크의 <통치론>은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발발한 이듬해인 1689년에 출판되었으며, 그해 11월에는 서점에서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통치론>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 중 한 명인 래슬릿이 밝힌 것처럼, 로크는 1679년에 이미 통치에 대한 연구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681년 또는 늦어도 1683년경에는 이미 실질적으로 <통치론>의 거의 대부분을 완성한 상태였다(P. Laslett, 1956, pp.40-55). 이렇게 이미 완성된 책을 로크는, 오늘날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다음 해의 신모델을 그 전년도 말에 이미 시장에 내놓듯이, 당시 출판계의 관행에 따라 <통치론> 역시 1690년도를 출판년도로 하여 간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필자는 <통치론>이 1689년에, 또 어떤 필자는 1690년에 출판된 것으로 기술하는 혼란은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P.8)


  로크의 <통치론>은 시기를 달리하여 쓰여진 두 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상 첫 번째 논문을 <제1론>(“The First Treatise of Government”)으로, 두 번째 논문을 <제2론>(“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으로 부르는 것이 영미학계의 관행이다. <제1론>은 「로버트 필머경 및 그 추종자들의 그릇된 원칙과 근거에 대한 지적과 반박」(“The False Principles and Foundation of Sir Robert Filmer and His Followers are Detected and Overthrown”), 그리고 <제2론>은「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시론」(“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d, and End of Civil-Government”)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제1론>은 영국 내전 시기의 왕당파 저술가인, 켄트주의 시골 귀족 로버트 필머 경의 정치적 저술에 대한 장문의 비평이다. 필머는 그의 정치적 권위 이론의 비타협적 성격으로 인해 다른 왕당주의 이데올로그들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필머에 대한 로크의 비판을 담고 있는 <제1론>은 오늘날 그 자체적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로크 당대에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는 주로 <제2론>만이 번역, 출간되었고, 오늘날 영미에서도 <제2론>만을 대학의 교재로 사용하는 것이 주된 관행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통치론>은 <제1론>을 제외하고, 로크가 서양의 근대 정치사상에 건설적으로 기여한 바를 담고 있는 <제2론>만을 다루고 있다.
(P.9)


  자연적인 상태 그대로 있는 한, 그 누구도 타인에 대해 독점적인 사적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이용되도록 주어진 이상, 그것이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데 유용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주어진 공유물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로크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노동이다.
“노동이야말로 그것들(사유물)과 공유물간의 구별을 가져온다. 노동이 만물의 공통된 어머니인 자연보다 더 많은 무엇을 그것들에 첨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그의 사적인 권리가 된다.”(28절)
(P.31)

 
  로크는 화폐를 도입하기 이전에는 아무도 자신의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화폐의 도입은 인간의 욕망 확대와 연관된다. 이에 따라 불평등한 재산을 정당하게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과 정당성이 동시에 열린다(캐롤 페이트만, 1995. pp.249-250 참조). 그런데 왜 인간은 화폐의 도입 이후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가? 로크가 화폐의 도입과 함께 생겨난다고 본 인간이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자 하는 욕구란 무엇인가?
(P.39)


  로크의 자연상태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홉스와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이 주된 오해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홉스에게 자연상태는 ‘격정과 적의에 의해 산출된 폭력적 충돌의 상태‘이며, 이러한 치명적 위험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성향을 극복하게 하여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게 한다. 반면 로크에게 자연상태는 좀더 온건하고 이성적인 상태이며,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반사회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기도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홉스가 ‘자연상태‘의 개념을 통해 공권력의 부재 상황 즉 정치적 권위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면, 로크는 ‘자연상태‘의 개념을 통해 ‘하느님 자신이 인간들을 세상에 둔 조건‘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이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로크의 자연상태 개념은 홉스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홉스의 자연상태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술이라면 로크의 자연상태는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P.43)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의 위반을 막을 권리와 의무를 맡는 역할은 개인이외에는 수행할 주체가 없다. 만일 누군가 자연법을 어길 때, 즉 다른 무고한 사람을 공격할 때, 이를 저지하여 자신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혹은 이미 행해진 해악에 대한 배상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자연법은 유명무실한 법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합법적으로 다른 인간에게 해악을 가할 수 있는 권리”(8절)를 뜻하는 처벌권을 자연상태에서는 모든 개인이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상태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해 권력을 갖게 된다. 이때 권력이란 침해에 비례하여 보복을 가할 수 있는 권력을 뜻하며, 이미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배상을 받아 내고, 앞으로 있을 지도 모르는 범죄를 예방하는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상태에서의 만인이 다른 만인에 대해 갖는 권력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른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이며 자의적인 권력과는 구분된다. 로크의 경우 자연상태에서도 자연법
즉 이성과 양심이 이 모든 것을 이끌기 때문이다.
(P.49)


  자연상태와 인간본성에 대한 로크의 이중성은 로크가 살던 사회관과 인간관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것은 형식적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권리의 실질적인 불평등을 동시에 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양면성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홉스의 이론은 이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어서 이를 정당화 이론으로 삼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 평등을 공언하고 그러한 평등을 자연법에 부과하면서도 동시에 불평등에 대한 자연법적 정당화를 발견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바로 로크의 이론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맥퍼슨, 1990).
(P.53)


사회 계약론의 기원
사회 계약 관념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다. 이 개념은 B.C. 4세기인 플라톤의 시대에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19세기말 스펜서(H. Spencer)의 저작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사회 계약론의 위대한 시기는 무엇보다도 홉스와 로크 그리고 루소가 자신의 사상을 개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651년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출간부터 1689년 로크의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을 거쳐 1762년 루소의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이 나오기까지 약 1세기 동안에 사회 계약론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등장하여 이후 정치 사상사에 심대한 영향을 주게된다.
(P.60)


  사회계약은 두 개의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관념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는 ‘통치 계약‘(혹은 ‘정부 계약‘: the contract of government, pacte de gouvernement, Herrschaftsvertrag)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계약‘(the contract of society, pacte d'association, Gesellschaftsvertrag)이다. 통치 계약이란 통치자와 신민 간에 맺어지는 계약을 말한다. 이러한 통치 계약은 논리적으로 사회 계약을 전제한다.
  통치 계약이란 권력(potestas)만을 창출하는 계약이며, 사회 계약이란 오직 사회(societas) 자체를 창출하는 계약이라 정의 내릴 수 있다. 홉스, 로크, 루소가 관심을 가지고 강조했던 것은 통치 계약이 아니라 바로 사회 계약이었다. 홉스의 사회 계약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는 일단 형성된 후에 자신의 모든 권리와 권력을 비우고 주권자인 리바이어던에게 넘겨줄 수 있으며, 리바이어던은 공동체와 아무런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통치 계약의 어떠한 한계에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크의 사회 계약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는 일단 형성된 후에 정부와 계약을 맺지 않지만, ‘수탁자‘(fiduciary, trustee)로서 정부를 임명하고, 신탁의 성격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 근거하여 신탁 위반을 이유로 정부를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 계약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 계약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통치자와 신민의 구분 없이 자치적이고 따라서 서로간에 통치 계약을 체결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P.63)


  사회 계약론에 대해서 비판자들은 이 관념이 정치적 삶의 해석에 있어서 유기적이 아니라 기계적이며, 정치적 의무의 정당화에 있어서 윤리적이 아니라 법률적이며, 정치적 사회와 정치적 권위의 설명에 있어서 역사적이 아니라 선험적이라고 비판한다.
  비록 사회 계약론이 기계적이고, 법률적이며, 선험적일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사회 계약론을 통해 사람들은 두 개의 가치를 항상 마음속에 신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유와 정의의 가치이다. 즉 힘이나 강제적 물리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가 통치의 기초가 된다는 자유의 가치와, 무력이 아니라 정당함이 모든 정치 사회와 정치 질서의 기초가 된다는 정의의 가치가 사회 계약론을 통해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을 규제하는 일반적 가치로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P.69)


  로크에게 정치 사회란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자신이 자연적으로 갖는 권리에 대한 집행권을 공공체에 양도한 것을 말하며, 모든 정치 사회는 반드시 자유로운 성인의 자발적 동의와 협정을 토대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자연상태에서 이미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이러한 자유를 포기하고 일정한 법률의 지배를 받는 정치 사회를 결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로크는 자연권이 보장하는 권리를 자연 상태에서는 향유하는 것이 불확실하고 또 끊임없이 침해당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P.91)


  인민들에 대한 전쟁상태를 초래하는 자들에 대한 인민의 저항은 반란이 아니다. 정당한 권리 없이 무력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든지 법에 근거함이 없이 무력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가 무력을 사용하는 상대방에게 전쟁상태를 도발하는 셈인데, 이 상태에서 이전의 모든 유대는 취소되며, 그 밖의 모든 권리가 중지되며,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침략자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다. 로크는 군주에 대한 모든 저항이 반란이 아님을 분명히 강조한다(232절). 무질서를 야기하는 것,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고자 정당한 정부의 구조와 틀을 전복시키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죄악이라고 단정짓고 나서(230절) 이러한 죄악에 대해서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정당방위이며, 이는 자연법이 허용하는 것이라고 옹호한다(233절).
(P.126)


  월린이나 아렌트가 지적하는 로크와 이를 계승하는 자유 민주주의에 내재된 역설, ‘정치성의 승화’와 ‘사회성에 의한 정치성’의 흡수를 극복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자유 민주주의 이론의 라이벌이었던 마르크스주의는 후보 자격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시 ‘정치성’의 핵심을 ‘사회성’ 즉 경제적 문제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자율적 영역으로서 정치성을 부인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쌍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시민에 의한 정치적 판단과 활동이라는 자연적 권리의 유지와 양립 가능한 ‘정치성’에 대한 이해가 될 것인데, 자유 민주주의가 대의제, 간접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참여, 직접 민주주의의 이념이 대안의 후보로 적절해 보인다. 우리는 사회 계약에 대한 루소의 해석과 자주관리적인 평의회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에서 이러한 대안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루소에 따르면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결성하는 계약에서 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대표자에게 권리를 위임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 포기의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정치적 권리를 상이한 자격, 새로운 정치 공동체의 시민이라는 집단적 자격을 가진 자신들에게 양도하는 것이다(J.J. Rousseau, 1968. p.62).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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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론
존로크 / 강정인, 문지영 / 까치 / 254쪽
(2017.03.15.)




  나는 '정치권력'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것은 사형 및 그 이하의 모든 처벌을 가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는 권리이며, 또한 재산(property)을 규제하고 보전할 목적으로 그러한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무력을 사용하는 권리이며, 이 모든 것을 오로지 공공선을 위해서만 행사하는 권리이다.
(P.9)


  자연상태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유를 박탈하고자 하는 자는 그 상태에서는 그 자유가 그밖의 모든 것의 기초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필히 상정된다. 사회사애에서그 사회나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속하는 자유를 빼앗고자 하는 자는 그들로부터 그밖의 모든 것을 빼앗고자 의도하는 것으로 상정되고 그리하여 전쟁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되듯이 말이다.
(P.24)


  참다운 의미에서 법이란 자유롭고 지적인 행위자가 자신의 적절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제한하기 보다는 인도하는 것으로서, 그 법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의 일반적 선(good)을 넘어서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법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면 법은 무용한 존재로서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법이 어떻게 오해되든 법의 목적은 자유를 폐지하거나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능히 법을 이해할 수 있는 피조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법이 없는 곳에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타인의 구속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은 것인데, 법이 없는 곳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P.58)


  인간은 완전한 자유와 자연법상의 모든 권리 및 특권을 간섭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다른 어떤 사람 또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평등하게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 타인의 침해와 공격으로부터 그의 재산, 곧 생명, 자유, 자산을 보존할 권력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법을 위반한 것을 심판하고, 그 위반행위가 의당 치러야 한다고 그가 확신하는 바에 따라 다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권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정치적 사회도 그 자체 내에 재산을 보존할 권력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 사회의 모든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존재하거나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각각의 구성원이 이 자연적 권력을 포기하고, 공동체가 제정한 법에 따라 모든 사건에 관해서 그 보호를 호소할 수 있는 공동체의 수중에 그 권력을 양도한 곳, 오직 그곳에서만 비로소 정치사회가 존재하게 된다.
(P.83)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각각 개별적인 동의에 의해서 공동체를 결성했을 때, 그 공동체는 일체로서 행동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되며, 그 권력은 오직 다수의 의지와 결정에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공동체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직 그 구성원들의 동의뿐인데, 한 단체는 한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으므로 가장 커다란 힘, 곧 다수의 동의가 그것을 이끄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한 단체, 한 공동체로서 활동하거나 존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실상 공동체를 결성한 각 개인은 동의를 통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합의한 셈이다. 그러므로 동의에 의해서 모든 개인은 다수가 결정하는 바에 구속된다. 그러므로 동의에 의해서 모든 개인은 다수가 결정하는 바에 구속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정법에 의해서 활동할 권한을 부여받은 회의기구에서 그 실정법이 특별한 수를 명시하지 않은 경우, 다수의 결의가 전체의 결의로서 통용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즉 다수가 자연법과 이성의 법에 의해서 전체의 권력을 가지고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P.93)


  인간이 처음으로 결합하여 사회를 형성하자마자 자연히 공동체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다수는 그 모든 권력을 장악한 다수는 그 모든 권력을 공동체를 위해서 수시로 법률을 제정하고 그들이 임명한 관리에 의해서 그 법률을 집행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부형태는 완전한 민주정이된다. 또는 그것과 달리 입법권을, 선택된 소수 또는 그들의 상속인들이나 후게자들의 수중에 위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정부형태는 과두정이 된다. 또는 그와 달리 한 사람의 손에 맡길 수도 있는데, 그러게 되면 군주정이 된다. 만약 군주와 그의 상속인들의 수중에 맡겨지면 세습군주정이 된다. 만약 살아 있는 동안만 군주에게 맡기고, 그가 죽은 후에는 후계자를 지명하는 권리가 다수에게 돌아가면 선거군주정이 된다.
(P.125)


  정치권력은 모든 사람이 자연상태에서 가지고 있다가 사회의 수중에 넘긴 것이며, 사회에서는 사회가 명시적 또는 묵시적 신탁 - 그 권력이 구성원들의 복지와 재산의 보존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 과 함께 스스로 정한 통치자에게 넘긴 권력이다. 이 권력의 목적과 척도는 그것이 자연상태에서 모든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인류사회의 모든 성원, 곧 인류 일반을 보존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위정자의 손에 있을 때에도 그 사회 구성원들의 생명, 자유, 소유물을 보존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나 척도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최대한 보존되어야 하는 그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이 될 수 없다. 그 권력은 단지 법률을 제정하고 거기에 형벌을 부가하는데, 그 형벌이란 전체의 보존을 위해서 너무나 썩은 부분, 그렇기 대문에 건전하고 건강한 부분을 위협하는 부분만을 잘라내는 것이다.
(P.162)


  자연은 부권, 정치권력, 전제권력 중에서 첫번째 것, 곧 부권을 양찬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미성년기 동안 자식들이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이해력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함으로써 자식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자발적인 합의가 두번째의 권력, 곧 정치권력을 통치자에게 수여한다. 그것은 신민들에게 그들의 재산의 소유와 사용에서의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신민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권리의 몰수는 세번째, 곧 전제적 권력을 주인에게 부여한다. 그것은 주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재산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다.
(P.164)


  각 개인이 사회에 들어갈 때 그 사회에 양도한 권력은 사회가 존속되는 한 결코 개인들에게 되돌아가지 않으며, 항상 공동체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권리가 없이는 어떠한 공동체도, 어떠한 국가도 존재할 수 없으며, 그러한 상태는 원래의 합의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가 입법권을 그들의 후계자를 정하는 지침 및 권위와 더불어 일단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회에 부여하고, 그 집회가 그들과 그들의 후게자들을 통해서 지속되면, 통치가 지속되는 한 입법권이 결코 인민에게 되돌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입법부에 영구히 지속될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정치권력을 입법부에 양도한 셈이고 다시 회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입법부의지속에 일정한 한계를 부과하고 이 최고의 권력을 몰수당한 경우에는 통치권의 몰수나 기간의 종료와 더불어 그 권력은 사회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인민은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며, 스스로 입법권ㄴ을 계속 자기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정부형태를 수립할 것인가, 아니면 예전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입법권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맡길 것인가를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결정한 권리를 가진다.
(P.229)


  로크의 정치사상이 기여한 점은 인민에 대한 저항권의 인정이다. 만약 통치자가 피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그 신탁을 이행하지 않으면, 인민의 저항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인민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 로크는 정부와 사회를 구분하였기 때문에 이 점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에 그는 내전과 여러 차례에 걸친 정부의 전복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여전히 유지되는 것을 목격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제정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무정부상태일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그 전제정치를 감내할 필요가 업다고 로크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로크는 저항권의 존재를 분명히 주장하기는 하였지만, 언제,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그 저항권이 행사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명료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다.
(P.248)


  로크의 정치사상은 그것이 최대한 보급되던 그 절정기에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18세기 초에 흄은 사회계약이론에 대해 그것이 결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그 이론이 경험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원시적 인간은 근대적인 계약의 관념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다고 흄은 주장하였다. 게다가 그는 역사와 당대의 정부를 검토해보면 그러한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믿을 수 있는 증가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흄은 계약이론이 근본적으로 인간은 '왜 정부에 복종해야 하는가' - 나아가 '왜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 라는 질문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왜 사람들을 약속을 지켜야 하고 왜 복종해야 하는 가라고 묻는다면, 진정한 답변은 그들이 맺은 약속이 아니라 오직 그것이 지닌 용도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뿐이다. 곧 그렇게 해야만 사회와 정부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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