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 <리바이어던>
(Leviathan) (1996)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13호)
진병운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228쪽
(2017. 6. 7.)




  한국과 세계 근대사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조성한 전쟁과 전쟁을 통해서, 근대의 인류와 한국인은 무엇이 인간인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전쟁이란 국가의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이 자신의 모든 지식, 도덕, 명예, 부, 아니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절대 가치라는 절대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절대 가치를 그것의 절대적인 적으로부터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 상태에서 인간적인 힘으로선 최대의 힘이 다수의 인간이 동의하여 단 하나의 자연적 또는 사회적 인격에 그들의 모든 힘을 집결시킴으로써 탄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지상의 신, 토마스 홉스의 국가이다.
(P.ii)


  ‘리바이어던’이란 이름의 출처는 다름 아닌 기독교의 성서이다. 성서에서 리바이어던은 여호와의 적이며 혼돈의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으며 또 때로는 악어나 고래의 형상이 부여되고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신화적 상상의 소산으로서 추정된다. 홉스의 경우, 만일 그가 리바이어던을 악과 연상하여 생각했다면 이 이름을 그의 대작의 제명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부여한 책의 본문 17장 13절에서 “우리 시민이 평화와 안전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불멸의 영원한 신 하나님 아래서 우리를 통치하는 유한한 신, 곧 리바이어던의 덕분이다.”고 명기하고 있는 저자 홉스에게는 리바이어던이란 시민의 생명을 지상의 폭력적인 죽음으로부터 보호하는 국가통치권자로서의 정부를 지시하는 이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홉스가 통치권자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명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은 그들의 자연 본
성에서 오는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서로 협력하여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한 피조물이기에 그들의 순조로운 사회생활을 위해선, 스스로가 본문 28장 27절에서 천명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들의 온갖 자만과 교만을 압도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을 불러내어 이를 다시 거만(pride)의 왕이라고 명명했던 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데에 있기도 하다.
(P.32)


  홉스의 이 저서가 이렇게 세계사적 리바이어던의 위상을 점하게 된 연유는 고대·중세·근대로 분절된 세계사의 결론부인 근대를 그 방법과 내용에 의해 가장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는 데에 있다. 근대의 으뜸가는 특징인 자연 과학의 대두로 한편 전통 철학과 종교의 권위가 근저부터 뒤흔들리면서 다른 한편 인간은 우주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전대미문의 미궁에 빠지게 되는데, 홉스는 그의 <리바이어던>에서 이와 같은 근대적 현실을 철학·종교·과학·정치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웅대한 시스템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홉스는 동 저서에서 전통 세계의 와해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여 최초의 자연과 인간 질서를 드러내고 이 자연 질서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리바이어던으로 대표되는 정치공동체를 창출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철학서로서 분류되는 <리바이어던>은 근대라고 하는 세계 속에서 인류가 생존하기를 원하는 한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정치체제, 곧 근대국가의 설계도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모든 종교와 철학의 근본적 인 문제였던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도 과학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해답을 가져올 것을 자임하고 있다.
(P.39)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상존하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연 이성의 명령인 자연법에 따라 맺게 되는 ‘사회계약’의 결과 통치권을 부여받은(authorization) 인공적 인격체(artificial person)로서 우리 시민이 ‘평화와 안전’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불멸의 영원한 신아래서 우리를 통치하는 유한한(mortal) 신, 곧 <리바이어던>의 덕분이다. 홉스에서 리바이어던이라고 칭하는 국가 통치자는 압도적인, 인간으로선 어느 누구도 저항 불가능한 힘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유한한(finite)존재로서 무한한(infinite)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incomprehensible)신과는 엄격히 구별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이 사회계약이란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는 만큼 그것의 존재 이유나 힘의 성질 따위가 피통치자 백성이 [자신의 자연 이성에 따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만큼 홉스는 그의 <리바이어던>을 통해 ‘절대주의’의 대명사로 간주되면서도 동시에 ‘사회계약’을 리바이어던 곧 국가통치권자의 구성 원리로서 제시함으로써 ‘근대성’(modernity)의 성격을 규정하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네 가지 이념을 설파하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명실상부한 원조로서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P.41)


  근대 국가의 역사적 해체나 이론적 분석 과정에서 드러나는 <리바이어던>의 현실화로서의 국가 통치 체제의 절대화 경향은, 근대의 대표적인 부르주아 국가 영국에서, 그것도 다름 아닌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시조 로크에 의해서도, 이미 그 위험이 경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로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맞서 이보다 29년 후에 발간된 자
신의 <시민통치론>에서 실제로 [절대주의 통치체제 대신에] 대의 정치체제(representative government) 및 시민 저항권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홉스에 비해 로크에 이르러 지대한 이론적 발전을 본 것은 사실이며, 이는 후자가 동일 저서에서 주장한 재산권 이론이 오늘날 자본주의 정당화 이론의 골자인 점을 헤아릴 때 더더욱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로크의 시민이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이며, 그러므로 ‘시민 통치론’은 ‘부르주아 통치론’에 지나지 않고 ‘대의 민주주의’란 ‘형식적 민주주의’에 다름 아님을 지적한 루소를 비롯한 마르크스, 레닌의 비평을 고려할 때, 그의 <시민통치론>이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지우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또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시민통치론>이 <리바이어던>을 벗어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전자의 구성 원리 중 하나로서 정치 공동체[국가, commonwealth]의 성립 이전에 사람들은 자연적인 권리로서 생명·자유·재산이란 소위 불가양도의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로크 자신의 자연권 이론 자체에 있다.
(P.45)


  홉스 정치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로 정의하는 데 있다. 전쟁 상태라 하면 우선 사생결단의 물리적 충돌을 의미하나 홉스는 여기에다 일종의 냉전이라 할 수 있는 적대 관계도 포함시키고 있다. 즉 홉스에게선 쌍방 중 어느 쪽이나 타방을 공격할 의도가 상존하고 따라서 어느 쪽이나 자기를 지키기 위해선 타방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적대 관계 역시 전쟁 상태로 규정되고 있다.
  “만인이 만인에게적인 전쟁 상태에 수반되는 온갖 사태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창의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장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상태에 수반되는 사태와 동일하다. 이런 상태에선 근로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근로의 과실이 불확실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토지의 경작도 항해도 있을 수 없으며, 해로로 수입되는 물자의 이용, 편리한 건물, 다대한 힘을 요하는 물건의 운반이나 이동을 위한 도구, 지표면에 관한 지식, 시간의 계산, 기술, 문자, 사회 등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쁜 일은 끊임없는 공포와 폭력에 의한 죽음의 위험이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빈궁하고 더럽고
잔인하면서도 짧다.”
(P.54)


  데카르트의 경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반면, 홉스는 물체[물질] 일원론의 입장에서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물체의 운동이란 유물론적 기계론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홉스의 철학은 데카르트와는 달리 우선 서양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 철학과는 분명한 단절을 선언하면서 당시 케플러의 지동설이나 갈릴레오의 관성의 법칙에 의해 확립되고 있었던 자연 과학을 자신의 방법론이나 존재론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홉스에게서 초자연적 절대자인 신과는 관계없이 가톨릭 교권을 배제하고 오로지 자연 이성에 따라 리바이어던이라고 하는 인공 인간을 지상의 최고 권위로서 구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일원론적 기계론 철학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P.86)


  일종의 인공 인간으로 생각되고 있는 <리바이어던>의 소재인 인간이 형식적으론 흡사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 상태에서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질 내용에 있어선 이는 어디까지나 자연 상태가 아니고 사회 상태에 들어와서 타락하여 그 본래의 모습[본성]을 상실한 인간을 기술하고 있음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홉스가 ‘자연 상태’라는 이름[개념] 하에서 기술하고 있는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실은 중세의 질서를 받치고 있던 기독교의 권위와 스콜라 철학의 붕괴와 더불어 생존하기 위해선 자신의 이기적인 힘과 지략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근대인이었고, 따라서 이는 홉스가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역사적 현실로서의 인간을 기술, 분석하고 일반화했던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귀납적 방법을 거친 결과이기에, 리바이어던이라는 명칭을 갖게 될 인공 인간의 ‘소재’이며 ‘제작자’인 ‘인간’을 독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마음을 읽어보기만 하면 자명한 진리로서 승인하게 될 것이라고 홉스는 권두언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P.93)


  루소의 자연인은 고도의 추상 작업(abstraction)의 결과로서 본인 스스로가 말한 대로 [이성에게만 존재하는] 이성 상의 존재(et̂ re de raison)인 반면, 홉스의 자연인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성찰(introspection)하는 경험적 심리학(empirical psychology)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양자의 정치학 내지 국가론은 공히 자연
인 곧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는 만큼, 자연인 파악에서의 이와 같은 방법론상의 차이는 결국 루소의 국가를 이상주의 국가로 홉스의 국가를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국가로 규정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P.101)


  홉스의 <리바이어던> 창조 내지 저술 목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로서 규정되는 자연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결과하는 죽음의 공포라고 하는 보편적인 정념을 해결하는 데에 있다. 전쟁 상태나 죽음의 공포가 철학자 홉스의 지적 전유물이 아니고 17세기 인간 일반이 실제로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담고 있었기에 지상에 평화를 확립할 수 있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근대 국가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감각 기능과 무관한 정념은 없으며” “인간 이성 안에 있는 모든 개념은 최초엔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감각기관에 의해 포착되었던 것이다.”는 인식론 원칙에 입각했던 홉스는 실제로 그 생애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내외의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았고 따라서 전쟁과 죽음의 공포와 평화라는 것을 두뇌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감성을 통해서도 알고 있었다.
(P.108)


  홉스에서 ‘사회계약론’은 로크나 루소에서처럼 반드시 민주정체에 이르는 절차가 아니고 민주정체, 귀족정체, 군주정체 중 그 어느 정체에로도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리바이어던>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홉스의 ‘주제’는 “통치 형태의 여하를 불문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데 충분하기만 하면 모든 권력은 마찬가지이다.”라는 점을 증명하고 “어떻게 사회계약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의 권력으로서의 주권이 탄생하는가를 논증”하는 것이었다. 즉 홉스에서 사회계약론 ‘국가의 종류’나 ‘정부 형태’에 관한 논의를 넘어서 그의 ‘절대주권론’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학자들이 <리바이어던>의 저자에서 굳이 민주주의자의 면모를 찾아내는 것은 어쩌면 근대사를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사로 보는 역사관의 필연적인 소산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이 몸소 군주정에 대한 의회주의자들의 도전과 후자의 전자에 대한 승리를 목격했었기에 근대와 더불어 대두한 민주주의 이념의 혁명적 기세를 실감하고 있던 홉스 자신은, 정작 정치와 국가를 민주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당대의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그것이 군주정체든 민주정체든 이유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못하는 것은 자기들로선 참가의 희망이 없는 군주 정체보다도 그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민주적 합의체에 호의를 품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의 야심이 그 까닭이다.”(18장 4절, p.117) 이렇게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원천인 사회계약론을 공유하면서도 그 결과가 도무지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홉스의 독창성이고 그의 대작 <리바이어던>의 특징이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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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리바이어던
(서울대선정 인문고전 50선 11)
손기화(글) / 주경훈(그림) / 주니어김영사 / 211쪽
(2017. 6. 5.)




  리바이어던(Leviathan)이 뭘까? 이름에서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 않아? 원래 리바이어던은 구약 성경의 <이사야서>와 <욥기>에 나오는 하느님의저주를 받은 뱀, 악어 혹은 용으로 묘사되는 짐승의 이름이야. 욥기 41장에서 리바이어던은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창이나 작살로 찔러도 아무 소용이 없고, 철을 지푸라기같이 다루는 동물로 묘사되어 있어. 그래서 땅 위에 그 어떤 것도 리바이어던만큼 무서운 것이 없고 온갖 자만한 것과 교만한 것을 압도하는 짐승으로 나오지. 이 짐승은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면서 하느님과 대적하는 것으로 자주 등장하곤 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홉스는 리바이어던의 막강한 힘을 높이 평가했어. 리바이어던의 힘에 의해 안전과 질서가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힘을 가진 통치자, 이것이 홉스가 생각하는 리바이어던이야.
성경에서는 모든 전쟁과 혼란이 인간의 통ㅈ되지 않는 열정과 교만함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지. 그래서 홉스는 인간의 열정과 교만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이 있어야 한다고 본 거야.
(P. 12)


  과학자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분석하듯이 홉스는 국가를 통치하는 데 근본이 되는 힘을 분석하고 있어. 그는 가장 위대한 힘이 국가의 힘이라고 보았고 그 힘은 사람들 간의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고 보았어. 그리고 통치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은 그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동의로 통치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란 거지. 더구나 홉스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 사람의 가치를 비유하고 있어.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가격을 결정하듯이
(P.57)


  종교는 사람에게만 존재해. 신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그리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생각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야. 사람들은 행운과 불운의 원인을 탐구하는 일에 아주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미래에 대한 지속적인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필요롷 하지. 그래서 무한하고 전능한 신을 쉽게 인정하게 만들어. 홉스는 사람들의 환상이나 환영, 그리고 꿈 따위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고 했어. 무지한 사람들은 마녀, 유령 등의 마력이 재난을 가져온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 그걸 아는 악한 사람들은 마녀나 유령들이 실재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이런 무지한 사람들의 약점을 잡고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지.
(P.63)


  통치자와 통치를 받는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이 상태에서는 오직 힘만이 정의가 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만으로 살아게게 될 거야. 홉스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평등하다고 간주하고 있어. 인간이 그 정신적, 신체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비슷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거야. 역설적으로 이 능력의 평등이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돼. 자연적으로 타고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달려들게 되거든. 그러므로 만약 어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가지길 원한다면 둘 다를 만족시킬 수는 없게 되고 둘은 적이 되지. 결국 자기 보존의 목적이나 때로는 향락을 목적으로 서로를 파괴하게 돼.
(P.66)


  사람들이 어떤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도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오는 어떤 권리나 자신이 희망하는 어떤 다른 이익을 고려하기 때문이야. 선천적으로 경쟁심이 많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잊진 않았겠지? 그런 사람들이 권리를 포기할 때에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어떤 유익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생겨. 우선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할 권리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을 수 없어.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저항권'이라는 거야. 또한 자신을 상처 입히거나 가두어 두려는 사람들에게 저항할 권리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 이런 경우 참는 것은 어떤 이익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야.
(P.78)


  홉스가 제시한 사회 계약의 중요한 결과는 자신을 보호해 줄 공동의 힘을 세우는 것이야. 이것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자연권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양도하면서 성립돼. 이로써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통치권을 받게 되고 그 통치권을 이용하여 권리를 야도해준 개인들의 안전 보장을 책임지게 되는 거야. 홉스는 이런 통치자를 인격체로 보고 있어. 인격체(Person)의 라틴어 어원은 'persona'인데 이것은 연국에서 '가면'을 뜻하고 법정에서는 '대리인'을 뜻하지. 홉스가 의미하는 인격체는 통치자를 가리키고, 그는 통치를 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사람이야. 이 이론으로 홉스는 통치권에 대한 기존의 전통을 뒤바꾸게 된 거야. 위의 신이 아니라 아래의 백성들이 통치자에게 권위를 부여한 거야. 홉스의 이런 생각은 당시 왕의 통치권이 신으로부터 나왔다는 왕권신수설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통치권은 신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통치권에 대한 불복종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고 이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개인들은 통치자를 결정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행사할 수가 없었어.
(P.96)


  통치자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통치자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면 백성들은 그가 칠행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지. 결국 통치자가 자신의 명령으로 자연법을 어긴 경우에도 통치자뿐 아니라 백성들도 자연법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거야. 통치자에게 권한을 위임할 때에는 그 책임까지도 같이 지겠다는 것을 포함하는 거야. 훌륭한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들이고 국민들이 성숙하지 못하다면 자신들이 한 잘못된 선택에 대해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거야.
(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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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바이어던
(e시대의 절대사상 002)
김용환 / 홉스 / 살림 / 283쪽
(2017. 5. 27.)



  근대 시민사회의 토대들인 개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이념들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원리들이다. 이중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상의 형성에 홉스 철학이 던진 빛은 깊고도 긴 그림자를 우리 시대에까지 드리우고 있따. 홉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근대 철학, 그리고 우리 시대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철학자이다.
(P.11)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근대 국가를 사회계약론이라는 토대 위에 새롭게 세우려는 원대한 꿈이 담긴 작품이다. 그리고 홉스는 자신의 이 작품이 현실 정치가, 특히 군주의 손에 들려져 그로 하여금 백성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주는 현실 정치를 펴는 데 교과서가 되길 희망했다. 이 작품은 근대 시민사호의 성립과정과 정부 구성의 원리를 제공해주는 사회계약론에 관한 대표적인 고전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마키아벨리를 계승하는 홉스의 이 작품은 서양 정치 사상사의 맥을 잇는 로크의 <시민정부론>과 더불어 근대를 대표하는 정치 이론서이다.
(P.21)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은 1부 <인간에 관하여>와 2부 <국가에 관하여>에 관심을 가장 많이 보여 왔는데, 홉스의 사회, 정치 철학이 대부분 이 두 곳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리바이어던>의 전체 분량으로 보면 그 절반에 가까운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호브가 논의한 주제는 종교, 신학적인 문제들이다. 3부 <그리스도 왕국에 관하여>에서 홉스는 자신의 독특한 방식, 즉 계약론적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으며, 4부 <어둠의 왕국에 관하여>에서는 잘못된 성서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철학이 어둠의 왕국을 지배하는 세력들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명실상부하게 홉스의대표작이다. 따라서 이 한 권의 책 속에는 그의 인간론, 도덕론, 정치론, 정교철학, 형이상학과 인식론 등이 모두 담겨 있다. 그의 전체 사상을 핵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중요 개념과 그가 취한 입장들을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일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P.44)


  건강하고 생산성 있는 새로운 철학은 늘 새로운 방법론을 요청한다. 마치 새 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그러하다. 근대 철학의 출발점에 서서 베이컨이 <새로운 기관>에서 우상론과 귀납론으로, 그리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통해 새로운 철학을 위한 방법론을 모색했듯이 전통 철학에 강한 불신을 가졌던 홉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요구 앞에 직면했다.
  홉스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냄으로써 낡은 철학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새로운 철학을 위해 선택한 방법론의 모습을 포착하는 일은 그가 그린 학문의 나무 전체를 이해하는 밑그림이 된다.
  홉스의 방법론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여져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이 '분해와 결합의 방법' 이다. 분해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을 가장 작은 단위로 분해하여 더 이상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토대를 찾아가는 과정을 말하며, 결합이란 그 토대로부터 점차 복잡한 것으로 종합해 과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분해와 결합은 분석과 종합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철학에서 방법은 알려진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또는 알려진 결과로부터 원인을 찾아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사물들의 원인을 알아내는 데는 분해와 결합 또는 부분적인 분해와 결합이외의 방법은 없다. 결합을 종합적이라 부르는 것처럼 분해는 보통 분석적 방법이라 부른다."
(P.48)


  세계화와 무한 경쟁 시대라고 말하는 현대 사회에서 주로 목격되는 인간관계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자(강대국)와 약자(약소국)가 한 울타리 안(세계화)에서 같이 먹이를 놓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WTO 체제)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투는 상황이 강자들이 말하는 허울 좋은 세계확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잔인한 경쟁체제에서 실제로는 공정하지도 않은 게임을 강요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7세기의 자연상태와 21세기의 세계화 논리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은 삶의 조건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공통성 때문이다.
(P.73)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보더라도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며 그 책임도 국민들이 져야 한다는 홉스의 말은 상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어떤 통치자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그 결정을 내리는 국민들의 정치적 역량과 관련되어 있다. 훌륭한 통치자를 택하고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국민들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홉스를 절대군주론자로만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계약론과 권위 부여하기 이론을 통해서 보면 홉스의 정치론에는 민주주의의 이론과 유사한 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P.92)

  
  홉스는 국가 또는 통치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리바이어던'이라는 용어를 선택했을까? 이 용어의 출처는 물론 구약성서이다. 욥기 41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리바이어던 무적의 힘을 가진 바다 동물의 이름이다.
  성서에서 이 동물은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며, 하느님의 적대자며,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홉스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반대의 뜻으로 리바이어던을 차용하고 있다. 통치와 질서를 보장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의 소유자이며,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교만함을 억누리고 그들을 복종하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P.97)
  

  "다수를 속이는 일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속이는 일보다 더 쉽다."
  "모든 인간은 어리석어서 더 좋은 것을 대신 세우기 전에 이미 있는 좋은 것을 파괴하고 만다."
(P.129)


  흄은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들에게 종교심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의 활동(질서와 조솨)에 데한 관찰에서가 아니라 삶의 사건들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희망과 공포의 감정이 라고 보았다. 특히 이런 감정은 기적, 계시, 엄청난 자연적 변화 등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 자연 속에서 신(들)의 흔적을 느끼게 만든다. 알 수 없는 원인에 대해 추적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할 때 희망과 공포의 감정은 종교적 대상에 대해 자연스러운 복종을 하도록 만든다.
(P.141)

 
  우리는 근대인들이 물려준 문화, 기술, 사상의 빚을 많이지고 살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지식인 사회에서 근대와 탈근대에 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근대정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위상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근대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토대들인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이념들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원리들이다. 이 중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의 형성에 홉스 철학이 던진 빛은 깊고도 긴 그림자를 우리 시대에까지 드리우고 있다. 홉스는 근대 철학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시대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철학자이다.
  "홉스는 마키아벨리보다 더 분석적이며, 보댕보다 더 간결하며, 데카르트보다 더 역사적이며, 스피노자보다 더 통찰력이 있으며, 로크보다 더 일관성이 있으며, 아마도 이들 모두보다 더 근대적이었다."
(P.184)
 

  사람의 본성 가운데에는 분쟁의 세 가지 주된 원인이 있는데, 첫째 경쟁심은 사람들을 무엇인가 얻기 위해 공격하게 만든다. 둘째, 자기 확신의 결핍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학 만들며, 셋째, 영광에 대한 명성을 얻기 의해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떨게 만드는 공통의 힘이 없는 동안 사람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같은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P.213)


  공동의 권력을 세우는 유일한 길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부여하는 일이다. 이것은 동의나 화합 이상의 것이며, 그들 모두의 참된 통일이다.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통일된 군중은 커먼웰스, 키비타스라 불린다. 이것은 위대한 리바이어던 또는 유한한 신의 탄생이다. 우리들이 평화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것은 이 유한한 신 덕분이다 국가란 하나의 인격체로서, 다수가 상호 신약에 의해 스스로 그 인격체가 하는 행위의 본인이 되며, 그 목적은 그가 공동의 평화와 방어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다수의 모든 힘과 수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 인격첼ㄹ 이끌고 있는 이가 통치자며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밖의 모든 사람은 그의 신민이라 부른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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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 박병덕 / 민음사 / 240쪽
(2017. 5. 26.)



  싯다르타 앞에는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소원으로부터 벗어나고, 꿈으로부터 벗어나고, 기쁨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비우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멸각시키는 것, 자아로부터 벗어나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상태로 되는 것,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평정함을 얻는 것, 자기를 초탈하는 사색을 하는 가운데 경이로움에 망므을 열어놓는 것,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만약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모든 충동이 침묵한다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그러니까 존재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 이제 더 이상 자아가 이닌 것, 그 위대한 비밀이 눈뜨게 될 것이었다.
(P.27)


  나는 <인간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위하여 오랜 시간 노력하였지만 아직도 그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 친구,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뿐이며, 그것은 도처에 있고, 그것은 아트만이고, 그것은 나의 내면과 자네의 내면,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하였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P.35)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 딱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P.61)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이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이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P.158)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선량하고 마음씨 좋고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며, 어쩌면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성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특성이 아니었다. 자기를 그 초라한 오두막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 아버지라는 사람이 소년에게는 지겨운 존재였다. 아들이 볼 때 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소년에게는 지겨운 존재였다. 아들이 볼 때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정말로 지겹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무례한 행동을 하여도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미소로 대하고, 자기가 아무리 막된 욕을 퍼부어도 다정하게 대하고, 자기가 아무리 악의를 보여도 선의로 대꾸하였는데,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소년의 눈으로 볼 때는, 늙고 음흉한 위선자의 가장 가증스런 교묘한 술수였던 것이다. 소년한테는 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위협을 받는 편이, 학대를 당하는 편이 오히려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P.179)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P.202)


  나는 사상들을 가졌었지. 그래, 그리고 이따금씩 인식들을 가져본 적도 있었지. 나는 가끔씩,한 시간 정도 아니면 하루 정도, 마치 사람들이 가슴 속에 생명이 고동치는 것을 느끼듯이, 나의 가슴속에서 지식이 살아 있음을 느끼곤 한 적이 있었네, 그것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었지. 그라나 그것들은 자네에게 전달하기란 나로서는 힘든 일일 것 같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업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P.205)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산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하아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P.210)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보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뜻이 언제나 약간 다랄져 버리게 되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도어버린다는 이야기야. 그래. 그렇지만 이것도 매우 좋은 일이며 그리고 내 마음에도 아주 쏙 드는 일이야. 어느 한 사람에게는 소중한 보배이자 지혜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동의하고 있어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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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책읽기
안광복 / 학교도서관저널 / 320쪽
(2017. 05. 05.)


  글을 쓰는 건 책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의 수준은 그가 읽은 글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울림 있는 글, 촌철살인의 지혜를 안기는 글은 맨땅에서 나오지 않는다. 좋은 책을 수도 없이 읽고 가슴으로 감동을 오랫동안 보듬어야 한다.
  하지만 훌륭한 책을 만나는 경험은 생각만틈 흔치 않다. 친구들 사귀는 데도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 봐야 나에게 맞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책도 마찬가지다. 좋은 책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책을 많이 접해야 한다. 내 책상 위에 끊임없이 이 서적들이 쌓이고 또 쌓이는 이유다.
(P.4)


  나는 좋은 책보다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주는 데 공을 들인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많을 것, 청소년 독서 지구력에 걸맞은 분량일 것, 교과서나 영화 등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맞닿아 있을 것, 삶의 아쉬운 부분을 건드리며 해법을 궁리하게 할 것, 이것들은 청소년이 사랑에 빠지기 쉬운 책들이 갖추고 있는 가족 유사성이다. 그러나 읽고 싶어지는 글에는 이 모두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책의 매력을 일러 주고 싶었다.
(P.6)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읽고 싶은 책들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문·사·철은 고전을 읽는 사람들이 밝아 가는 순서이다. 소설 같은 문학에서 시작해, 역사 책을 지나 깊고 어려운 철학 책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거꾸로 철학, 사학, 문학으로 독서 단계를 밟아 가기란 아주 어렵다. 걷기도 더려운 어린아이에게 물구나무서기부터 시키는 꼴이기 때문이다.
  독서가 '취미'이기는 참 어려운 세상이다. 지하철에서도 책보다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는 이들이 훨씬 많아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책 읽기를 즐겼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독서가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도 없었다. 독서가 왜 중요한지, 도서를 취미로 삼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지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P.44)


  소크라테스는 사람을 좋아하는 쾌활한 사람이었지만, 고독도 즐길 줄 알았다. 그에게는 다이몬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다이몬은 그의 마음속에 있던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고민이 있을 때, 그는 다이몬에게 묻곤 했다. 소크라테스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다이몬과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가장 좋은 친구는 자시 자신이다. 내 문제를 나만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나'를 피해 도망 다닌다. 친구를 만나고 게임에 빠져 들고 텔레비전을 보면사, 자신과 온전히 만나는 시간을 피하려 한다. 텅 비고 불행한 자신의 영혼과 마주하기가 두려운 탓이다. 행복해지려면 자신 안의 '다이몬'부터 가꿔야 한다. 다이몬은 내가 나 자신을 튼실하게 대할 때 자라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독서'에 있다. 책 읽기는 내 영혼을 위한 근력 운동이다.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내 영혼에 힘을 길러보자. 책 읽기는 내 영혼을 맑고 강하게 만든다. 튼튼해진 영혼은 더 이상 중독거리를 찾지 않는다. 현명한 마음 속 친구에게 스스로 답을 묻게 된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고독과 침묵속에서 책과 씨름하며 자신만의 다이몬을 가꿔 보자.
(P.86)


역사를 이끈 위인은 하나같이 '독서'가 취미였다. 개천에서 용이 된 영웅은 더더욱 그랬다. 코르사카 촌뜨기 귀족이었던 나폴레옹은 어디서나 책을 읽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식자공에 불과했지만,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허겁지겁 흡입하다시피 했다.  농민의 아들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아버지가 된 마오쩌둥의 책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은 책에서 무엇을 찾았을까? 돈 많이 벌고 출세할 방법을 찾으려고 책장을 파고 들었을까? 이들은 책을 통해 '위대함을 향한 욕망'을 깨닫고 몸에 익혔다. '위대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깨친 자는 영혼을 끊임없디 드높이려 한다. 자기 목숨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용기, 부귀영화에 휘둘리지 않는 결연함은 '위대함을 향한 욕망'에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더불어 살며 배우는 존재라는 뜻이다. 여기서 '위대함을 향한 욕망'을 틔울 수 있는 방법 두가지를 제안한다. 위대하고 고귀한 인물과 가까이 하거나, 그런 삶과 가치를 담은 책을 보거나
(P.134)


  과학에는 타협이 없다. 과학자들에게 진리란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은 언젠가 만물의 이치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궁극 이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를 향한 과정에서 검증과 논쟁은 있어도 적절한 수준에서의 절충은 있을 수 없다. 과학이 엄밀하고 객관적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P.202)


  지금의 청소년은 관계 맺는 능력이 부족하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서로의 감정을 헤아리며 보듬는 데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청소년은 그럴 여유가 없다. 학업 과제를 감당하기에도 늘 시간은 부족하다. 사람을 만나 깊은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다. 환경 또한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생활 공동체가 없다. 가족끼리 얼굴을 맞대기도 쉽지 않다. 야근을 밥 먹듯하는 아버지와 학원에 매달려 있는 자녀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청소년들은 동네 어른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과 윗사람과의 관계가 서걱거리는 까닭은 여기에도 있다.
  미숙한 관계 맺기는 숱한 문제를 불러온다. 우울증은 감기 만큼이나 흔한 질병이 되었다. 대화를 원활하게 풀지 못하니 폭력처럼 상식적이지 못한 방법들을 쓰기도 한다. 그렇다면 관계를 맺는 기술을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답은 독서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조언을 해 줄 친구나 어른이 없으면, 책을 통해서라도 이를 가르쳐야 한다. 인간관계를 다루는 청소년 자기계발서와 심리학 책들이 속속 등장하는 현실을 고깝게만 볼 일은 아니다.
(P.242)


  즐겁게 다독하는 비법은 다른 게 없다. 마음이 끌리는 책, 나에게 절실한 책을 보면 된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안 보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라고 했다. 이 명언이 '가시가 돋쳐야 한다'는 의무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의하기 바란다. 이 말의 의미는 독서가 재미있고 즐거워서 안 읽고는 못 버틴다는 뜻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겠는가? 그러면 필독서 목록을 뒤지기 전에 자신의 관심사부터 챙기자. 절실하게 낄리는 것은 무엇인가? 연애, 성적, 출세, 부모와 갈등 풀기? 지금 나이 관심사는 다독자의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다.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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