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48)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5호)
윤선구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226쪽
(2017. 7. 11.)



  데이비드 흄은 근대경험론의 완성자이자 현대 영미철학의 선구자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경험론과 현대 영미철학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철학이다. 그러나 흄의 철학은 칸트의 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칸트가 합리론의 완성자인 라이프니츠의 철학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것도 흄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흄의 철학은 칸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상인 것이다. 흄의 주저는 <인성론>이다. 그러나 그 자신
이, 그 책이 너무 어렵게 쓰여져서 사람들이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까 걱정하였을 정도로 이 책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흄이 <인성론>의 내용을 쉽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하여 새로 쓴 책이 바로 <인간지성의 탐구>이다. 이 책은 매우 체계적이고 간결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특히 흄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인성론> 보다 <인간지성의탐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P.i)


  흄의 철학은 근대 시민 사회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계약론적 윤리설뿐 만 아니라 공리주의의 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담스미스와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스미스와 함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이론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직 성숙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 제체제로의 발전이 필요한 우리 사회는 철학 전공자뿐 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흄 자신이 <인간지성의 탐구> 1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철학은 정밀하고 난해한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탐구하여 사회적인 이득이 되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P.ii)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는 <인성론> 제1권인 “지성에 관하여”를 재구성하여 서술하고, 여기에 기적에 관한 문제와 신 존재 논증 등 종교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경험론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을 덧붙인 책이다. 이 책의 핵심 과제는 사실과 존재에 관한 추론의 원리 및 필연적 연결 관념의 근원을 규명하는 것이다. 흄은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대상은 이미지일 뿐 실재가 아니라고 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를 지각이라 명하고 지각을 생생함의 차이에 따라 생생한 인상과 그의 모사인 관념으로 나눈다. 필연적 연결 및 의지 자유의 문제를 비롯하여 대개 철학적인 문제들은 관념이 모호하거나 개념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 흄은 이들 문제가 다루는 관념의 근원이 되는 인상을 규명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기 때문에 때로 모호하기도 하지만 인상은 생생하기 때문에 명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11)


  흄은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거의 반복적인 경험으로부터 미래에도 동일한 관계가 발생하리란 추론을 하는 이유를 탐구하여, 이러한 추리는 이성에 근거한 추론이 아니라 습관에 의한 추리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은 동물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므로 더욱 진리임이 입증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검토하여, 대상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경험이 반복되면 습관에 의해 관념들 사이에 연결이 형성되고 이로부터 필연적 연결의 인상이 발생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 의지자유는 불가능하고, 이 문제는 단지 개념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본다. 그리고 흄은 이러한 입장을 종교철학적 문제에 적용하여 기적에 대한 증언은 기적을 증거할 수 없고, 결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신을 추론하는 신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P.11)

  
흄은 외부 물체세계에 대하여 데카르트 및 로크의 실재론적 입장과 라이프니츠 및 버클리의 관념론적 입장 모두 입장 부정한다. 그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정신 외부에 물체 세계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 경험으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은 정신 안에 있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 대상은 이성으로도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성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단지 관념 사이의 관계만을 탐구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P.13)


  흄은 정신 외부에 관념에 대응하는 물체세계가 존재하는가 여부를 탐구하는 대신, 정신 안의 지각을 관념과 인상으로 구분하고 관념에 대응하는 인상을 탐구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는다. 인상은 원초적이고 생생한 지각이다. 이에 대해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며 덜 생생하다. 흄은 인상을 알 수 없는 근원에서 발생하여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감각인상과 관념이나 인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반성인상으로 구분한다. 감각인상의 근원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근원을 탐구할 수 없고, 반성인상의 근원은 탐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흄은 모든 관념은 단순관념으로 분해될 수 있고, 단순관념은 그에 대응하는 인상의 모사라고 본다. 즉 인상을 모사함으로써만 관념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흄이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하며 경험론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13)


  흄에 의하면,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할 때는, 결과를 산출하기에 꼭 필요한 정도의 능력만을 원인에 부여해야지 그보다 더 큰 능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경험으로 인식하는 원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정도의 능력밖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에서는 악과 무질서로 가득 찬 이 세계로부터 그것을 창조한 원인이 선하고 전능하다고 추론한다, 이것은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인에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추론이라는 것이다.
(P.16)


  흄은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라고 본다. 인상은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정신 안에 존재하며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일종의 관념이다. 그러나 보다 생생하다는 사실에 의해 흄이 의미하는 인상의 모사로서의 관념과 구별된다. 관념을 다루는 학문은 관념의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인상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인상을 다루는 탐구는 오류에 빠질 수 없다. 따라서 관념을 다루는 탐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 탐구에서 다루는 관념이 어떤 인상으로부터 기인하는 가를 밝히면 된다. 만일 관념의 원상에 해당하는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관념은 허구에 불과하다. 흄은 신 존재나 영혼불멸과 같은 전통 형이상학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을 다루게 되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흄에게 있어 참된 형이상학과 폐기해야할 형이상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다루는 관념이 기원하는 인상이 존재하는가 여부이다. 그가 부정하는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이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P.30)


  일반인들은 우리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것이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철학자들은 우리의 감각기관 앞에 나타나는 물체 세계가 실재가 아니라 정신 안에 존
재하는 일종의 관념 또는 표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실재로서의 외부 대상은 우리의 태도와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 지각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P.32)


  흄은 보다 생생한 지각을 인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인상이란 용어는 일상 언어에서의 인상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 언어에서의 지각이 흄이 인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흄뿐만 아니라 근대철학자들에게서 지각은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정신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상이다. 그들이 지각대상을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로 여기지 않고, 정신 내의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이 관념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관념이란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에 대하여 정신 안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에게서의 인상도 정신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대철학의 일반적인 용어에 따른다면 관념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흄에게 있어 인상이나 관념은 정신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생생한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상은 관념의 원상이므로 보다 더 생생하고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기 때문에 인상 보다 덜 생생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상과 관념 사이의 차이는 단지 생생함의 정도 차이만은 아니다. 관념이 인상의 모사이며, 주관에 의해 다양하게 변형이 가능한데 비해 인상은 관념의 원형이며,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수동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P.32)


  기적이란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사건인 까닭에 우연적인 사건이다. 물론 그 원인이 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신에게 조차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적적인 사건도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세계에서 기적의 원인과의 관계는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흄은 우연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것은 원인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어떤 사건의 원인을 잘 알지 못할 때 그 사건을 우연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적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의가 가능하다. 기적이란 자연 세계 안에서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건인데. 우리가 원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흄은 구체적으로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논의는 나를 포함하여 누군가가 기적을 경험하였다고 증언한다면, 그 증언이 과연 기적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P.37)


  흄의 <인간지성의 탐구>는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밀한 추리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탐구과정이 고통스럽고 사람을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불확실하고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흄은 형이상학이 불확실하고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형이상학적 탐구를 중단하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 탐구가 대중적인 견해와 모순되는 결과에 이른다 하더라도 결과가 오류가 아니라 대중의 견해가 오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앞선 철학자들의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은 성공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은 인간 지성의 능력을 탐구하여 인간에게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탐구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흄은 모든 형이상학적 탐구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본성의 탐구를 통하여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탐구할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구분하고 단지 우리가 탐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한 탐구만을 배제하였을 뿐이다.
(P.58)


  흄은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라고 본다. 인상은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정신 안에 존재하며 그 기원을 알 수없는 일종의 관념이다. 그러나 보다 생생하다는 사실에 의해 흄이 의미하는 인상의 모사물로서의 관념과 구별된다. 관념을 다루는 학문은 관념의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인상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인상을 다루는 탐구는 오류에 빠질 수 없다. 따라서 관념을 다루는 탐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 탐구에서 다루는 관념이 어떤 인상으로부터 기인하는가를 밝히면 된다. 만일 관념의 원상에 해당하는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관념은 허구에 불과하다. 흄은 신 존재나 영혼불멸과 같은 전통 형이상학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을 다루게 되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흄에게 있어 참된 형이상학과 폐기해야할 형이상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다루는 관념이 기원하는 인상이 존재하는가 여부이다. 그가 부정하는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이란 인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을 다루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P.61)


  흄이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흄은 이를 위해 인간 본성, 정확히 표현하면 인간지성의 능력을 탐구하기로 한다. 즉, 흄은 형이상학이 불확실하고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질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형이상학을 불신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이를 통하여 인간지성이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하여 탐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인 후, 결론적으로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P.65)


  경험론은 모든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온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로크와 버클리도 또한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등 경험론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흄은 경험론적 원리를 끝까지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간 최초의 철학자이다. 합리론자들은 본유관념의 존재를 인정하고 본유관념을 통하여 사실이나 존재에 대한 인식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런데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경험론의 원리는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흄도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를 통하여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경험론적 원리의 가장 명확한 표현이며, 관념의 기원이 되는 인상을 조사하여 관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사실과 존재에 관한 흄 철학의 주요 방법인 것이다.
(P.69)


  일반인들의 소박한 견해는 우리의 지각 대상들이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조금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면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흄은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지각 대상이 정신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견해를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째 이유는 외부의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위치나 시각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항상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각 대상들은 지각 주체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데카르트 및 로크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물체의 성질에 대한 관념들 중 소리, 색, 맛, 냄새 등과 같은 제2성질의 관념은 우리 주관에 의해 형상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모양, 크기, 수와 같은 제1성질의 관념은 주관에 의해 임의로 형성된 것으로 간주할 수 없고, 이에 대응하는 외부사물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관념 사이에는 본질적이 차이가 없고, 따라서 제1성질의 관념도 정신 안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P.72)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것이 사물이 아니라 정신 안에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해서, 이러한 견해가 바로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의 배후에는 실재로서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감각 내용이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적 사물의 표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와 엄밀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 안에 존재하는
물체의 관념과 대응하는 외부의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세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물체의 관념에 대응하는 외부의 물체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데카르트와 로크가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이 경우에는 정신 안에 존재하는 지각은 정신 외부의 물체세계를 표현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입장은 버클리와 라이프니츠의 입장인데 정신 외부에 물체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정신 안의 관념뿐이라는 입장이다. 세 번째 입장은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정신안에 존재하는 관념 또는 지각의 존재만 알 수 있을 뿐, 정신 외부에 이에 대응하는 물체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흄과 칸트가 이러한 입장의 대표자이다.
(P.73)


흄에게서의 관념의 의미는 일상언어에서의 관념과 거의 비슷한 것이 되었다. 흄이 데카르트나 로크가 무차별적으로 관념이라고 부른 것을 관념과 인상으로 구분한 이유는, 데카르트와 로크가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하고 그에 대응하는 외부 사물의 존재여부를 탐구하는 것을 철학적 탐구의 과제로 삼은 데 대해, 흄은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외부 물체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알 수 없고 철학은 단지 정신 안에 존재하는 혼란스런 관념을 명확히 하는 것을 탐구의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모사를 통하여 생겨나므로 본성 상 불확실하지만 인상은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불확실한 관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 관념이 기원하는 인상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고, 그 인상에 대응하는 외부대상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P.87)


  흄은 모든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본유관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흄의 경험론적 입장에 대한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상은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그 근원은 알 수 없다. 흄은 <인성론>에서 인상이 우리의 주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지, 외부의 사물로부터 오는 것인지, 또는 우리를 창조한 신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인성론> 제1권, 제3부, 제5절참조). 데카르트나 로크에게서는 인상이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로부터 온다. 버클리와 라이프니츠는 신이 우리에게 넣어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변이성에 의한 형이상학적 주장인데,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주장이다. 따라서 흄은, 우리는 인상의 근원을 밝힐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P.88)


  인상은 단순 인상이든 복합인상이든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이것을 복합하거나 변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상을 우리의 자의에 의해 변형하면 이것은 이미 관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관념을 자의적으로 변형하거나 여러 다른 관념들을 합성할 수 있다. 이 때 우리의 상상력은 무제한의 자유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단지 주어진 자료를 합성하고 변형하는 자유뿐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관념들을 합성하거나 변형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재료들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흄은 이러한 기본적인 재료들을 단순 관념이라고 부른다. 단순관념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 낼 수 없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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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흄
이준호 / 살림 / 288쪽
(2016. 7. 9.)



  진리라고 것이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성은 회의주의로 귀결되고, 몽상은 진리라고 믿고 있으면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흄은 독단과 회의의 뿌리는 동일하다고 한다. 즉 이성의 필요 없는 사변 때문에 독단과 회의가 발생한다. 불완전힌 이성의 한계를 자각해야한다. 이성의 한계는 경험이다. 이성이 경험을 넘어서면 필요 없는 사변에 빠질 수밖에 없고, 독단과 몽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흄 철학의 기초이다. 근대 유럽철학은 흄에 이르러 비로소 형이상학적 몽성과 이 몽상에 바탕을 둔 독단의 잠에서 벗어난 것이다.
(P.15)


  흄은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구분한다. 인상은 감각, 정념 그리고 정서 등을 가리킨다. 흄은 이 인상들이 사라진 뒤에 남은 잔상을 관념이라고 하지만, 관념에서도 반성 인상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인상이 관념보다 먼저 발생한다는 것은 오부 대상에 대한 감각 지각으로 국한된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관념은 논리적, 수학적 개념까지 포함한다. 인상과 관념의 종류는 발생 순서, 형태, 그리고 그 원인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된다. 흄은 모든 지각의 기원을 감각 인상이라고 하지만, 감각 인상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P.36)


  진리 문제에서 철학적 관계는 사실과 논증의 두 영역으로 구분된다. 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실의 영역에서 철학적 관계는 그 관념들의 변화가 전혀 없어도 변할 수 있고, 논증의 영역에서 철학적 관계는 우리가 비교하는 관념들에 완전히 의존한다. 따라서 논증의 영역에서는 관념이 변하지 않는 한 관계도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 총리가 말로써 한국을 침탈했던 과거사를 반성한다고 강조해도, 그 말의 진위에 대한 판단은 반성했다는 사실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사실의 영역에서 진리는 개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의존한다. 반면에 논증의 영역에서는 수학 공식에 따라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처럼 오직 개념들의 관계만 고려한다.
(P.48)


  논증의 영역에서 사실과 무관하게 개념들의 관계를 추론함으로써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추론을 사실 문제에 적용할 때에는 지식일 수 없고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대상들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 결론은 틀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논증의 영역에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실 문제에 적용할 경우에 그 지식은 신념의 단계로 전락하게 된다.
  흄이 지식을 이와 같이 구분햇던 것은 당시 라이프니츠가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분햇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두 진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은 차이가 있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궁극적으로 이성의 진리가 사실의 진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다. 반면에 흄의 경우 이성의 진리, 즉 논증을 사실 문제들에 대해 적용할 수 있지만 논증은 사실의 영역에서 대상과 판단의 불확실성 때문에 개연성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흄과 라이프니츠의 이런 차이점을 하찮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유럽 지성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P.51)


  흄의 인식론에서 감관을 통해 지각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역도 성립된다. 따라서 감각적 지각의 대상은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있지만,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유와 대상은 정확히 일치하는 대응 관계가 아니다. 즉 사유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유할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다. 사유의 원천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감각 경험은 모든 인식의 원천이다. 감각 경험의 원인으로 간주되었던 물질적 실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의 구성해 낸 창조물이며, 경험적을 정당화 될 수 없다면 이성이 독단적으로 구성한 허구이다. 이와 같은 논증은 실체로서 정신 및 신의 존재에도 적용되며, 이것이 곧 형이상학적 허구에 대한 비판이다.
(P.60)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오성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 <도덕에 관하여> 등 총 3권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에서 흄은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정념들의 작용과 사회 제도의 성립 과정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흄은 당대의 자연 과학이 구축한 방법론을 자신의 학문 체계에 차용하여 자연 과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고, 후자에 대해서 회의적 태도를 고수한다. 인간의 감각에서 직접 유래하는 감각 인상 이외의 것을 상상력이 구성한 관념이라고 여기는 흄의 인식론은 바로 자연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흄의 인식론의 방법은 인간의 갖가지 정념과 사회 제도를 설명하는 데까지 적용되며, 이 때문에 흄은 대표적인 자연주의자로 분류된다.
(P.121)


  나의 유일한 희망은 철학자들의 사변에 전환점을 제공함으로써, 또 오직 철학자들만이 확증과 확신을 기대했던 주제들을 그들에게 더욱 뚜렷이 지적해 줌으로써, 지식의 진보에 내가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에 관한 유일한 학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본성은 여태까지 가장 무시되어 왔다. 이것을 내가 조금만 더 유행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때때로 나를 억누르던 저 나태로부터 나의 기질을 드솟게 하는 데, 또 그 같은 울분에서 나의 기질을 가다듬는 데 이런 소망이 도움이 되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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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철학 가이드북
제임스 M. 러셀 / 김우영 / 휴머니스트 / 360쪽
(2016. 7. 6.)



  나는 의도적으로 그 대상을 전통적 철학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물론 학술서적들을 더 많이 선정했지만, 소설이나 동화, 과학 소설, 정치적 선전문도 포함했다. 나는 철학적 영감을 주는 많은 책이 엄밀하게 따지면 철학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나의 선정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중요하고 흥미로운 다수의 책이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나는 최종 목록에 포함된 책들이 시사하는 바가 많고 철학적으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철학 사상이 발견될 수 있는 책들의 범위를 한눈에 보여 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P.10)


  우리를 단 한 번이라도 속인 적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르네 데카르트)
(P.16)


  그리스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철학의 역사는 다수의 서로 다른 철학적 질문을 망라하게 마련이지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지식의 문제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확실한 지식을 보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이것은 플라톤의 동굴 인간에서 데카르트의 악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를 괴롭힌 질문이다.
(P.17)


<리바이어던>
  홉스는 기계론적 우주관을 취했다. 인간의 사고를 비롯한 모든 것을 물리적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감각과사고는 그 물리적 작용을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즉 물리적 자극이 신경에 의해 정신적 반작용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기술함으로써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었다. 데카르트가 심신을 병존하는 별개의 실체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을 제안했다면, 홉스는 만물이 물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는 관점에 입각한 철학을 전개했다.
(P.42)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흄은 회의론적 접근법을 자아에도 적용했다. 흄은 우리의 자아 관념이 자명한 진리라는 사실을 의심한 최초의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나는 생각하고 있다". 도는 "나는 행동하고 있다." 등) 실제로는 오직 지각과 관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나'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범위의 감각과 사고를 경험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감각과 사고를 경험하는 '내'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그는 우리가 단일한 자아를 갖고 있다는 관념이 범주 오류라고 단언하고, 사실 자아는 지각들의 다발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사고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확실한 지식이라는 데카르트의 가정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다면, 데카르트가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합리적 가정은 "행각이 있다." 정도이다.
(P.63)


<순수 이성 비판>
  칸트의 체계는 우리의 지식이 관념들의 형상 세계에 국한된다는 의미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은 헤겔과 피히테의 절대적 관념론으로 이어졌다). 칸트는 우리가 영혼의 지속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지, 우리가 인과율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존재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지도 고찰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그가 내린 결론은 우리가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P.69)


<철학의 위안> (알랭 드 보통)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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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L'etranger (1942)
알베르 카뮈 / 김화영 / 책세상 / 248쪽
(2017. 6. 9.)



(미국판 서문)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그에게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뇌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선고를 받게 된다.
(P.7)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은 알제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마랑고에 있다. 2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밤샘을 할 수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나는 사장에게이틀 동안의 휴가를 청했는데 그는 이유가 이유이니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네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주는 쪽이 오히려 마땅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모레, 내가 상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조문을 할 것이다. 지금은 어쩐지 어머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별다름이 없는 듯한 상태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만사가 다 공인된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P.21)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며, 어둠 속에 떠오른던 첫 별빛들을 희미하게 했다. 그처럼 온갖 사람들과 빛이 가득한 보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눈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로동은 젖은 보도를 비추고, 전차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나는 머리털, 웃음을 딘 얼굴, 혹은 은팔찌 위에 불및을 던지는 것이었다. 조금 뒤에 전차들이 점점 뜸해지고, 벌써 캄캄해진 밤이 나무들과 가로등 위에 내려 앉게 되면서 거리는 어느 틈엔가 인기척이 없어지고, 마침내 다시 쓸쓸해진 길을 고양이가 천천히 가로질러 가는 시각이 되었다. 그때에야 나는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었기 때문에 목이 좀 아팠다. 나는빵과 밀가루 식료품을 사가지고 올라와서, 요리를 해 가지고 선 채로 먹었다. 창 앞으로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려 했으나, 공기가 서늘해서 좀 추웠다. 나는 창문을 닫았고, 방 안으로 돌아오다가 거울 속에 알코올 램프와 빵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는 테이블 한 끝이 비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P.44)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이 내 뒤에서 죄어들고 있었다. 나는 샘으로 향하여 몇 걸음 나섰다. 아랍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덮인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87)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P.88)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주장이라고 대답하고, 지금까지 자기는 나의 변호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명확히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빠른 어조로 좀 더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의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곧 뒤이어 그는 발언권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도 늦었고, 자기의 진술은 여러 시간을 요할 것이니까 오후로 미루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법정은 이에 동의했다.
(P.136)


  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갑자기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했다. 내게 무슨 일이든 생길 때면 거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마침내 낮에만 조금 자두었다가 밤에는 꼬박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올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게끔 되었다. 가장 괴로운 때는,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 오는때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던, 그 분간하기 어려운 시각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귀가 그처럼 많은 소리,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들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바자국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으니, 어떻게 보면 그 시기 동안 줄곧 나는 어지간히 운수가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어머니는 가끔 말했었다. 하늘이 빛을 띠고 새로운 하루가 나의 감방으로 새어들 때, 형무소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서 내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 판자에 귀를 대고 제정신이 아닌 듯이 기다리노라면, 나중에는 나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나중에는 마치 헐떡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결국 나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나는 다시 한 번 24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었다.
(P.148)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 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보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너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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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딘 중고 매장에 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하게 매장 한 쪽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파란색 T셔츠 보게 되었는데

셔츠 가운데 그려진 하얀색의 고래가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살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올 여름 T셔츠를 많이 구매한 관계로 패스했는데...

 

얼마전 다시 방문한 중고매장에

다시 보게된 T셔츠에 쓰여진 글씨

가을할인 8,800원

마음이 한순간 무너져 버렸다. ㅠ.ㅜ

 

비록 내가 사고픈 모비딕 셔츠는 사이즈가

다 떨어져 사지는 못해지만

하얀색 연인 티셔츠를 구매하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 큰아이가 맘에 든다는

반지의 제왕 티셔츠까지 내 손에 들려지게 되었다.

 

요즘 대세라는 알라딘 굿즈..

음~ 사람 맘을 현혹시키는데 최고네 ㅋㅋ

 

다음엔 검은색 비틀즈 로고 머그컵 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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