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 (1762)
(철학사상 별책 제2권 제5호)
전병운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42쪽
(2017. 8. 20.)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 이념을 땅 끝까지 실현해낸 세계사의 최종적 결과이다. 이 민주주의 역사의 사상적 시조가 다름 아닌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이다. 양자 공히 천부인권과 주권재민 원칙을 토대로 정치사회[국가] 이론을 세웠다. 특히 루소는 그의 사후 그의 소책자<사회계약론>을 가지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사부가 됨으로써 그의 주권재민 사상의 과격한 역사 추진력을 입증하였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대혁명을 뿌리로 해서 출발한 근대 사상과 사회 운동 일반에는 대체로 루소의 영감과 정신이 어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그의 법치국가 사상과 주권 이론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헤겔의 법과 권리의 철학에서 완성을 보게 된다. 그러나 루소의 정신과 저작은 다양하여 법과 주권이라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머리로 알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는 인간을 아마도 루소보다 강력히 주장하고 입증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낄 줄 아는, 특히 동정이라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 오직 인민이 주권자인 법치국가에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다재다능한 저술가의 결론이다.
(P.i)


사회계약론은 4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편은 제사회의 형성과 사회계약을 다루고 있다. 사회 질서라는 것은 그 자체가 여타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이것은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사회 질서라는 것의 근원을 찾는다면 최초의 약속, 곧 만장일치의 원시적 합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자연 상태에 살던 인간들이 각자가 혼자서 삶의 역경을 처리해 나갈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때까지의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까지 없던 새로운 힘과 능력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 그들은 각 개인의 힘과 능력을 결합하여 삶에 대한 장애를 극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개별 구성원의 재산과 신체를 전체의 공동 힘으로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형태의 결합체를 찾아내는 것이다. 또 개인 구성원은 이러한 형태의 결합체를 통하여 자신을 전체에 결합시키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결합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유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다. 이 문제의 해결이 다름 아닌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에 의해서 각자는 자신의 모든 힘과 존재를 일반 의지의 절대적 지도 하에 전체의 공유물이 되도록 양도한다. 이 계약 행위로부터 하나의 정신적 집단이 결과하고, 이 집단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 수만큼의 구성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각자는 자신을 유보 없이, 송두리째 양도하였기 하였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이 조건에 있어서 평등하며, 따라서 결합 자체가 완벽하다. 또 각자는 구성원 전체에게 자신을 양도하였기 때문에 구성원 중 어
떠한 누구에게도 자신을 양도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집단을 국가 또는 주권자라고 명명한다. 구성원들은 하나의 전체로서 인민이라고 부르며,또한 이와 동시에 주권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시민이며, 법에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신민이다. 바로 이 사회계약에 의해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시민 사회로 이행하며, 본능으로부터 풀려나 도덕성과 정의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행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적 자유와 그의 손이 닿는 한의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의 자연적 권리를 상실하게 되는것 또한 사실이지만, 대신에 공공 재산의 일부를 위탁받은 자가 됨으로써 그가 갖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한 공인된 소유권과 시민적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P.1)


  주권과 입법을 제2편은 주제로서 다루게 된다. 주권, 곧 일반의지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의지라는 것이 넘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권은 또한 불가분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상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지가 일반적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인민 전체의 의지를 지시하며, 의지가 일반적이 아니다 라고 할 경우 그것은 전체 중 한 분파의 의지를 지시한다. 전자의 의지를 말과 힘으로 옮기는 것이 주권행위이며, 이때 의지는 법이 된다. 후자의 경우, 의지는 하나의 특수의지이거나 일개 행정 조치다. 또는 기껏해야 그것은 일개 행정 법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정치 이론가들은 주권의 원천을 분해할 수 없는 나머지, 주권을 주권이 적용되는 제 방식으로 분해하여 왔다. 즉, 주권을 힘과 의지로, 입법권과 집행권, 조세권과 사법권과 교전권, 내치와 외치 등으로 분해하여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이론가들은 주권자를 별개의 부품들로 구성된 공상적 존재로 만들었다. 마치 한 신체에선 두 눈을 떼어 내고 또 다른 한 신체에서 양 팔을, 또 다른 신체에선 발을 취하여, 이것 모두를 함께 모아 한 사람을 만든 것처럼. 일본에선 요술사들이 어린아이한 명을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조각들로 잘라 낸 다음, 그 조각들을 한 개씩 공중으로 던지면, 이것들이 떨어지면서 조립되어 그 어린아이가 살아온다고 하는데, 우리 이론가들이 하는 일이 미상불 이런 종류의 요술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정치 이론가들이 했던 방식에 따라, 주권의 여러부분들에 의해 행사된다고 생각되었던 권한들은 실재에선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주권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예외 없이 최고 의지를 예상하고 있으며, 단지 이 의지를 할당된 관할 구역 안에서 집행할 따름이다.
(P.3)


제3편은 정부와 그 운영이 본편의 주제다. 국가 존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법을 제정하여야 하나, 이로 충분치 않고 제정된 법을 집행하는 것이 또한 필수적이다. 입법권은 주권자, 곧 일반의지에 속하나, 그렇다고 해서 주권자 자신이 집행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선 주권자는 별도의 대행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대행자는 주권자와 신민의 사이에 서는 매개자로서 일반의지의 지도 하에 법을 적용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바로 정부의 기능이며, 정부는 그러니까 주권자의 관리이지, 주권자 자신은 아닌 것이다. 정부를 구성하는 한 명 또는 수 명의 행정관은 집행권의 수탁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주권자의 공무원이며, 그들의 직책은 사회계약의 결과가 아니고, 위탁된 책임이다. 행정관은 주권자로부터 명령을 받아 이를 인민에게 전달하며, 주권자는 이들의 권한을 자기 뜻대로 제한, 수정, 취소할 수 있다.
(P.5)


  기하학적 논증 체계를 갖춘 이 고도의 이론적 추상적 작품이 어떻게 사변 철학의 영역을 넘어 유럽 전역에 걸친 광범위한 독자층을 발견하고, 급기야 세계를 바꾸는 프랑스 대혁명의 ― 철학자 헤겔에 의하면 ― 사상적 사부의 저술이 되었을까? 오늘날 정치 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루소의 이 저술이 1762년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20여 판을 거듭했고, 혁명 전야의 이데올로기에 폭넓게 배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 사실, 루소 자신이 정치적 권리의 원리들에 관한 ‘소론’(작은 논문, petit traité)이라고 부른 이 저술은 광범위한 일반 독자층을 통하여 결국 <공산당 선언>처럼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는 혁명가들의 소책자 내지 입문서, 심지언 정치 팸플릿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헤겔, 셸링, 피히테, 칸트가 프랑스 대혁명을 인류사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대사건으로 기념하고 그것의 사상적 바탕을 조성하는데 루소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사회계약론>이란 제명을 단 이 소책자의 역사적 사명은 이 혁명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P.11)


  루소에 있어서 인민주권은 국가의 최고 권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국가구성 원리로서 모든 정치적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루소 정치학에서는 따라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국가만이 ‘참된’ 국가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민이 자기 자신을 직접 지배, 통치하는 것은 아니다. 주권자인 인민은 자신의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 general will)의 표현인 법의 제정과 자신의 고유한 이 입법권에 종속시킨 행정부의 집행권을 통하여서만이 신민(臣民; sujet, subject)인 자신과 국가를 통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루소에게 있어선 겉보기와는 달리 직접 민주주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이란 일반의지의 표현인 만큼 개별적인 대상을 그 내용이나 목적으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법의 집행도 입법권자인 인민 총회와는 별도의 행정부(gouvernement,government, 정부)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인민은 주권자로서 법을 제정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제정한 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신민인 것이다. 이렇게 국가 생활에서 법의 보편적 지배 원칙에 대한 신념과 이 원칙에 의해서만이 시민(citoyen, citizen, 그리스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사상에 주목할 때, 우리는 루소를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치사상의 후계자이면서 동시에 칸트와 헤겔의 법철학 선구자로서 생각할 수 있다.
(P.15)


  루소에 있어서 주권이 양도될 수 없고 그 행사가 오로지 인민에 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권이란 본질적으로 일반의지이며, 인민이 자유롭다함은 다름 아닌 인민이, 개인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타자의 의지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자유의 정의 때문에 루소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자는 곧 인간의 자격을 포기하는 자며, 인민이 자기 자신의 의지인 주권을 양도하는 행위는 곧 인민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정치통일체(corps politique, body politic, 국가)의 해체를 초래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자유는 자신의 의지의 행사에 있기 때문에, 의지의 행사는 양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 자신 말고 타인에게 대행(represent)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P.18)

  
  홉스의 경우에서도, 그의 사회계약 조항들이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들의 비참한 정황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되었음은 자명하다. 그에게서 자연상태는 다름 아닌 전면적 전쟁과 광폭한 혼돈의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들의 자연적 자유를 유보 없이 양도하여 절대적 권력에 순종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런 계약 조건은 누가 보더라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보다는 유리할 것이고, 그러니까 삶의 본능, 곧 죽음의 공포뿐 아니라, 이성 역시 모든 수단을 다하여 이 상태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논리에 의해, 로크의 자유주의적 계약론 역시 자연상태에 관한 그의 사상에 의해 설명된다. 로크에 있어서 자연상태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이미 자연법에 따른 의무 사항들이 있으며, 이로 인해 이 원시적 인간 조건은 벌써 상호원조와 평화의 상태인 것이다.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 시민사회에 들어와 제정되는 법의 목적도 자연법을 비준하고 자연법에 따른 의무사항들을 공고히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크에 있어서 국가의 제 기능이 극단적으로 제한되고 그 역할이 자연법
에 의해 인정된 개인적 제 권리의 보호에 한정되는 것이다. 또 무릇 도덕성 자체가 시민사회 형성에 선행하는 만큼, 국가는 달리 수행할 도덕적 사명이 없으며, 그 활동은 구성원의 재산, 자유, 생명의 보호에 한한다.
(P.31)


루소에게 있어서도 이 전쟁상태가 정치사회의 설립을 불가피하게하고 부자들의 발의와 주도에 따라 사람들은 협약에 의해 결합하여 공동 권위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정치사회와 법의 기원이고 기원일 수밖에 없다”고 루소는 <불평등기원론>에서 설파하고 있다. 루소에 있어선,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은 어디까지나 고립인 만큼 인간이 타인과 충돌하게 될 까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상태가 나타나고 또 이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해 정치사회가 창설되기 위해선 먼저 인간들은 고립을 떠나 서로 가까워지고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독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는 것은 ‘사회적 동물’이 되고 난 이후의 일인 것이 사회성의 발전과 욕정의 발전은 쌍을 이루어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때만이 홉스가 말한 전쟁이 일반적인 상태로서 생겨나는데, 홉스가 이런 전쟁을 자연상태로 간주한 까닭은 전쟁이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내부에서만 발전할 수 있는 욕정에 기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연적 독립이 인간들 사이에 전쟁상태를 빚어내기 위해선 인간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그들의 욕정이 잠에서 깨어나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P.76)


루소에게서 총체적(total)양도는 개인의 자연권을 폐지하는 데 귀착되지 않고, 자연권을 시민의 권리로 환원시키기 위한 인위적 장치로서 작용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각 구성원은 그의 천부의 자유를 시민적 자유와 바꾸고, 만물에 대한 무한하지만 불확실한 권리를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과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니만치 개개인은 사
회계약 이후에도 여전히 자연상태에서같이 자유롭다고 루소가 강변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은 ‘사회적 삶’을 살면서도 더 이상 타인의 지배를 당할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개개인을 모든 종속관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바로 사회계약의 목적인 것이다.
(P.111)


시민들이 자유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들처럼 독립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법에의 복종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사회계약 이후의 인간이 시민적 자유의 형태 하에 그의 자연적 독립과 대등한 가치만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것 이외에도 정의, 도덕성, 덕성이 시민적 상태의 자산에 속한다. 도덕적 삶은 오직 사회적 삶과 함께 시작하며, 인간의 법에 대한 복종은 그를 온갖 사적 개인적 종속으로부터 지켜주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이성과 상의하고 자기의 욕정을 지배하고 자신의 성향에 저항하는 권능을 부여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계약에 의해 자연 상태에서 시민 상태로 이행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지적 도덕적 진보를 위한 제 조건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홀로 떨어져 살았을 때는 단지 가능태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던 그의 가장 고귀한 기능들, 곧 이성과 양심은 훈련되고 발휘되는 과정을 거쳐 발전하고, 그의 존재는 좀더 높은 단계의 자유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소가 설파한 사회계약의 참된 존재이유이고 그 정당성의 근거이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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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Du Contral social)
장 자크 루소 / 이환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26쪽
(2017. 8. 18.)



제1분의 주제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의 지배자로 믿기도 하는데, 실은 이 사람은 더 심한 노예가 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뒤바뀜이 생겨났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에는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힘(폭력)과 그것으로 연유되는 결과만을 고려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 '한 국민이 복종을 강요당하고 또 그대로 복종하는 한 그들은 잘하고 있다. 이 국민이 속박에서 벗어날 힘을 갖게 되고 이내 그것을 떨쳐 버린다면 그들은 더 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은 그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간 것과 똑같은 권리로 이것을 되찾는 것이므로 그들이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되거나 아니면 애초에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간 것이 부당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P.5)
 

노예제도에 관하여

어떤 인간도 자기와 같은 인간에 대해 자연적 권위를 가지고 있찌 않고 또 힘은 어떤 권리도 만들어 내지 않으므로, 계약만이 인간 상호간의 정당한 모든 권리의 기초로 남는다.
(P.11)


사회계약에 관하여

나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생존에 해로운 장애물들이 그 강력한 저항력으로써, 각 개인이 그 상태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능가해 버린, 그런 시점에 사람들이 이르렀다고 가정해 본다. 인간은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낼 수는 없고 단지 기존의 힘을 통합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단결하여 그러한 저항을 이겨 낼 힘의 총화를 이루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 힘의 총화는 다수의 협력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각자의 힘과 자유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수단인 만큼 어떻게 해야 각자는 자신을 해치지 않고 또 자신을 돌볼 의무에 소홀함이 없이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모든 공공의 힘으로부터 각 구성원의 신체와 재산을 벙어방고 보호해 주는 한 연합의 형태, 그리고 이것에 의해 각 개인은 전체와 결합되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연합의 형태를 발견할 것." 이것이 곧 사회계약이 그 답을 주어야 할 근본 문제이다.
사회협약에서 그 본질이 아닌 것을 제거해 버린다면 우리는 이 협약이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체와 모든 능력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전체 의사의 최고 감독하에 둔다. 그리고 우리는 각 성원을 전체와 불가분의 부분으로서 한몸으로 받아들인다."
(P.19)


주권은 양도할 수 없다

전체 의사만이 국가의 힘을 공동 이익이라는 국가 설립의 목적에 따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인해 사회의 설립이 필요해 졌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 이해관계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은 개개의 여러 이해 가운데 존재항는 공통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이해가 서로 일치되는 합치점이 없다면,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오직 이 공동 이익을 기반으로 통치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주권은 오직 전체 의사의 행사이므로 결코 양도될 수 없고, 또 주권자는 오직 집합적 존재이므로 그 자신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권력은 이양될 수 있지만 의사는 그렇지 않다.
(P.35)


주권은 분할될 수 없다

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이것은 분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사란 전체적이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거나 하기 때문이다. 의사는 국민 전체의 의사이거나 아니면 단지 그 일부의 의사이다. 전자의 경우 공표된 의사는 주된 행위이고 법이 된다. 후자의 경우 이것은 하나의 개별젇 의사이거나 행정기관의 행위일 뿐이며 고작해야 일종의 시행령이다.
(P.37)


전체 의사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

앞서 논술한 바에 따라서 전체 의사는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항상 공익을 도모한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그러나 국민의 의결이 항상 동일한 공정성을 가진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항상 자기의 이익을 바라지만 무엇이 자기 이익인가를 늘 알고 있지는 않다. 국민은 결코 매수되지는 않지만 기만당하는 일은 종종 있다. 이 경우만은 국민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의 의사와 전체 의사 사이에는 흔히 많은 차이가 있다. 후자는 오로지 공익에만 유의하는 반면 전자는 사리를 염두에 두며 개별적 의사들의 총화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개개의 의사들 중에서 서로 파괴하는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들을 제거해 버리면, 상이한 의견들의 총화로서 전체 의사가 남는다.
(P40.)


법의 분류

정치법, 민법, 형법 외에 가장 중요한 법이라 할 네번째 법이 추가된다. 그것은 대리석이나 청동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은 사실상 국가의 진정한 구조이며 날이 갈수록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다른 법들이 낡고 쇠약해질 때 그것들을 되살리거나 대체하며, 국민을 그 제도의 정신 가운데 보존하고 부지불식간에 권위의 힘을 관습의 힘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도덕, 습관 특히 여론에 대해서인데, 이것은 정치가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지만 다른 모든 부분의 성공은 바로 이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훌륭한 입법자는 개별적인 법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은밀히 이것에 머리를 쓰고 있다. 여러 특수법들은 궁륭의 아치에 불과한 것들로서, 도덕이야말로 형성 되기에는 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은 이 아치를 확고히 지탱하는 확고부동한 종석위 역할을 하는 것이다.
(P.73)


  어떤 국가가 만 명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자. 이 때 주권자는 집단적으로 그리고 조직체로서 고려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민의 자격을 개별적인 존재는 개인으로 간주된다. 이렇듯 주권자와 국민과의 관계는 이 경우 만 대 일이 된다. 다시 말해 국가의 각 구성원은 주권적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한다 해도 자기 몫으로 소유하는 것은 이 권위의 1만분의 1에 불과하다. 국민의 수가 십만 명이 된다고 해도 국민의 신분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으며 각 개인은 동등하게 법의 지배를 받는 반면 그들의 투표권은 10만분의 1로 감소되어, 결과적으로 법의 제정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십분의 일로 축소된다. 결국 국민은 항상 하나로 유지되는 만큼 주권자와의 비례는 시민의 수에 비율로 커진다. 따라서, 국가가 커지면 커질수록 개인의 자유는 더욱 감소된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P.79)


군주정치에 관하여

왕들은 절대군주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 있는 최서의 방법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멀리서 외쳐댄다. 이 원리는 훌륭하고 어떤 점에서는 매우 진실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블행히도 궁정에서는 이런 말을 항시 비웃을 것이다. 국민의 사랑에서 유래되는 권력은 물론 가장 강한 권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안정하고 조건부의 권력이이서, 군주들은 결코 이것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훌륭한 국왕도 자기의 지배력을 잃지 않은 채 마음만 내키면 잔인해질 수 있기를 원한다. 정치를 논하는 설교사가, 국민의 힘이 곧 군주의 힘이므로 군주의 가장 큰 이익은 국민이 번영하고 증가하고 강력해지는 것이라고 아무리 군주에게 말해도 소용없다. 그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군주의 개인적 이익은 첫째로 국민이 약하고 가난하여 군주에게 반항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국민이 항상 완전하게 복종하고 있다는 가정하에서라면, 군주의 이익은 국민이 강력해져서 그 힘이 바로 자신의 힘이 되어 이웃 나라들에 위세를 떨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이익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것이며, 또한 두 가정은 양립될 수 없는 것이므로, 군주들은 항상 자기들에게 직접 이익이 되는 원칙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무엘(구약에 나오는 예언자)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환기시킨 것이 이것이고, 마키아벨리가 명백하게 보여 준 것도 이것이다. 그는 국왕들을 가르치는 척 가장하면서 실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공화주의자의 책이다.
(P.95)


정부의 월권을 방지하는 방법

정부를 수립하는 행위는 계약이 아니라 법이라는 것, 행정권의 수임자는 국민의 지배자가 아니라 관리라는 것, 국민은 그들을 원할 때 임명하고 또 퇴임시킬 수 있다는 것, 관리들은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 문제이고 국가가 그들에게 위임한 책무를 맡음으로써 시민의 의무를 다할 뿐 그 조건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는 전연 없다는 것이다.
(P.131)


(해설)


  1755년에 발표된 <불평등기원론>도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루소는 원시인에 대한 목가적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자연의 상태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적인 삶을 영위했다. 숲속에서의 거칠은 생활은 그를 건장하고 민첩하고 감각적으로 발달된 존재로 만들었으며, 그의 지적 활동이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욕구에 의해 움직인 그들은 극히 단순하고 찰나적인 욕구를 쉽사리 만족시킬 수 있었다. 요컨대 원시인들은 행복햇고, 그들 사이에는 불평등은 없었다. 왠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의 상태에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으며, 그들은 각기 독립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제2부는 이 자유로운 인간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각자기 속박 속에 얽매이고 마침내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불평등의 사회적 관계에 묶이게 되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 인간은 처음에는 자유롭게 결합되었다. 가족과 지역에 따른 결합 속에서 각자는 독립을 누리며 개인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나갔다. 그러나 농업과 야금술의 발명은 노동의 분할을 초래하였고, 상호 의존의 관계를 낳았다. 농작에서 소유가 유래되었고, 소득의 불평등은 부의 분배의 불평등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법을 만들어 지배자로 군림하였고, 마침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사회적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는 필경 전제체제를 탄생시킴으로서 사회의 불의는 극에 달한 것이다.
(P.185)


  1762년에 발표딘 <사회계약론>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 루소는 계약의 본질에 관한 일반적 고찰을 펼친다. 모든 전제주의는 불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힘은 어떠한 정당한 권리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정부의 기초는 협약에 있다. 즉 각 개인으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모든 자연적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공동체는 그 대신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게 하는 협약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평등'이 보존되고(왜냐하면 조건은 만인에게 동등한 것이기 때문에), '자유'도 또한 보장된다(왜냐하면 각 개인은 만인에게 소속됨으로써 그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계약'으로써 인간은 자연적 신분에서 시민의 신분으로 옮아간다.
제2부에서 주권과 법의 문제가 거론된다. 주권은 전체 의사의 행사로서 양도될 수도 없고 분할될 수도 없다. 어떤 개별적 이익의 연합도 이를 헤쳐서는 안 된다. 정치체의 보존은 법에 의해 보장되어 있으며, 법은 집단생활의 문제에 대한 전체 의사의 적용을 명한다. 법은 집단생활의 문제에 대한 전체 의사의 적용을 명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지만, 법의 제정은 지역과 시대와 모든 특수한 조건에 따라 변한다.
제3부는 정부 및 정부의 여러 형태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한 기구가 필요한데, 이것이 곧 정부다. 민주정치는 전 국민 또는 절대다수의 정부를 가리키고, 귀족정치는 소수의 정부, 그리고 군주정치는 한 사람의 통치를 가리킨다. 민주정치는 이상적인 것이지만 탐낼 만한 것은 아니다. 선거에 입각한 귀족정치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이다. 한 정부가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위임받은 권한이 의회에 의해 주기적으로 통제받아야 하고 도 갱신되어야 한다.
제4부는 특수한 정체제에 대한 고찰로 특히 로마 정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루소는 전체 의사는 때때로 잘못 인식된다 할지라도 결코 파괴될 수 없고 항상 절대다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그는 개인적 행복의 열망과 사회생활의 요청 사이에서 어던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참된 정치의 원리로서 전체 의사의 존중과 시민의 자결권 또는 주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공동체에는 공공이익을 위해 각 개인이 감수해야 할 희생을 결정지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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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inegalite parmi les hommes)
(1755)
장 자크 루소 / 주경복 / 책세상 / 224쪽
(2017. 8. 15.)


불평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불평등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가?
가끔 생각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 봐야 할 책이다.
  자연상태에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맺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홉스의 생각과는 틀리게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악의 상식적인 구별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할 필요도 없었고 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불평등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게 되면서 소유의 개념이 생겨나고 힘에 의해 능력에 의해 생겨나게되는 소유량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이 발생하게 된다고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행복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실제로 남부럽지 않게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에 비해 자신이 더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무엇인가 남보다 못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재산이 부족하거나, 명예가 부족하거나, 권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사랑이 부족하거나,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못하여 상대적으로 그것을 더 가진 자와 비교하게 된다. 그러면 왜 나는 남보다 잘살지 못하는가? 왜 나는 남보다 높은 명성을 누리지 못하는가?
이 책에서 장 자크 루소는 이런 물음들에 답하려고 애쓴다. 정답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그럴듯한 답을 말하고 있다. 그는 옛날 어느때인가 모든 사람달이 평등하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불평등이 싹텄고, 그것이 자라고 심화되어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살던 그때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는 왜, 어떻게 깨졌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루소는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P.6)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에서는 행복하게 살았던 자연 상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채롭게 전개된다. 제2부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떠나고 인위적인 힘이 개입되면서 행복을 잃어가는 모습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해서 자연 상태로 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나타난다는 홉스(Thomas Hobbes)의 성악설을 루소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의 인간의 선악의 개념을 초월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과 악의 상식적인 구별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할 필요도 없었고 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듯이 악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그들에게는 악을 행할 조건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다.
(P.7)


  필요한 양식을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인간은 각자 원하는 곳으로 가서 자유롭게 먹고 즐기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먹이 다툼을 벌이는 일들이 생기면서 자연과 인간 개개인의 독대를 통한 직접적 관계가 깨지고 점차 인간 사이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공동체가 형성되어갔다. 공동체 속에서 각 인간은 남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존재가 상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존재가 상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좋고 나쁨이 생겨나고 선악이 나타나며 불평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힘이 있거나 재주가 있거나 말 잘하는 사람이 돋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게 되었고, 드디어 사유물을 남보다 많이 지니게 되었다. 약삭빠르고 힘있는 자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약한 자는 점점 더 상대적으로 박탈을 겪게 되었다. 개인의 가치가 졵에서 소유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생산 수단의 사유화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소유에 종속시켰다. 루소가 볼 때 사유 재산제도야말로 인간 불평등의 뿌리이며 불행의 근원이다.
(P.8)


  예리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최근 이십 대 팔십의 사회라 일컬어지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또 하나의 사회 계약과 불평등의 기원을 발견하고 있다. 이십 퍼센트가 잘살고 팔십 퍼센트가 못살게 딘다는 것을 알면서 사람들은 강대국이나 초국적 자본의 논리를 따라 나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못사는 팔십 퍼센트에 들지 않고 이십 퍼센트에 들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루소에 따르면 인류는 그런 막연한 환상들 때문에 불평등의 골을 점점 더 깊이 파왔다.
이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아직도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평등의 문제는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서구 각국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지만 불평등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루소의 사상은 지금도 살아 있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의 주장을 통해 이 시대의 불평등 구조를 새롭게 되새겨볼 만한 것이다.
(P.11)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다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P.45)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따. 그러나 그가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인간은 약한 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건강해진다. 홉스는 우리 법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개인으로 하여금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그 원인이, 바로 홉스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개인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따라서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나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발달이나 법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대문이다. "어떤 사람이 악덕을 모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미덕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유익하다."
(P.79)


  굴종의 끈은 인간 상호간의 의존과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 필요성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이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P.92)


  자연 상태에서는 불평등을 거의 느낄 수 없으며 그 영향도 거의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 나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자기 '완성 가능성' 이나 사회적인 덕성, 그 밖에 자연인이 잠재적으로 받은 여러 가지 능력은 그 자체만으로 결코 발전할 수 없으며, 그 발전을 위해서는 외부적인 원인 -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원시적인 처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 의 우연한 협력이 필요했음을 이미 밝혔으므로, 이네 나는 인간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서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에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검토하고 비교해보려 한다.
(P.92)


  부를 나타내는 표시(화폐)가 발명되기 전에는 부는 주로 토지와 가축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실질적 재산이엇다. 그런데 상속 재산의 수나 범위가 늘어나 땅 전체를 덮고 서로 경계를 접하게 되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자기 재산을 늘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 각자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 지배와 굴종 또는 폭력과 약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편 부유한 자들은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다른 모든 쾌락을 무시하게되었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새로운 노예를 얻기 위해 기존의 노예를 부려 이웃 사람들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고기맛을 한번 알게 된 굶주린 늑대가 다른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사람만 잡아먹으려 하는 것과 같았다.
(P.112)


  푸펜도르프는 "인간은 합의나 계약에 따라 재산을 남에게 양도하듯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나 자유 같은 자연의 본질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그것운 누가 향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할 권리까지 있는지는 적어도 확실치 않다. 설사 사람들이 재산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유를 양도할 수 있다 하더라도, 권리를 이양함으로써 비로소 부친의 재산을 향유하게 된 자식들에게는 그 차이가 상당할 것이다. 자유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자연에게서 받은 선물이므로, 어느 부모도 자식들에게서이 자류를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법률가들은 노예의 자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된다고 엄숙히 선고했는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P.125)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네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문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국가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시대는 혼란과 재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을 갖게 된다. 전제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여기서는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진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민은 이미 주인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법률도
(P.135)


  지금까지 나는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 정치적인 사회의 성립과 폐해를,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할 수 있는 범위에서 오로지 이성의 빛에 따라, 그리고 최고 권한을 가진 권력에 대해 신의 권리를 결재하여 허가하는 신성한 교의와는 무관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통해, 불평등은 자연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모든 문명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는 불평등의 형태를 이 점과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충분한 답을 준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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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안도현 / 문학동네 / 134쪽
(2017. 8. 14.)


연어, 라는 말 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
(P.7)


  연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연어를 옆에서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마음의 눈을 갖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눈,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 상상력은 우리를 이 세상 끝까지 가보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입맞춤이 뜨겁고 달콤한 것은, 그 이전의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 직전까지의 상상력 때문인 것처럼.
(P.11)


  누나는 늘 걱장만 하는 존재다. 누나는 나를 왜 옆에서 보지 못할까? 불곰과 물수리가 위에서 보려고 한다. 또한 누나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간섭하려고 든다. 간섭하는 게 사랑의 표시라도 되는 듯이. 누나는 사랑이 간섭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오히려 묵묵히 바라보거나 나란히 헤엄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정말 누나는 모르는 것이다.
(P.25)


  자기 욕망의 크기만큼 먹을 줄 아는 물고기가 현명한 물고기라고, 그는 생각한다. 연어는 연어의 욕망의 크기가 있고, 고래는 고래의 욕망의 크기가 있는 법이다. 연어가 고래의 욕망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연어가 아닌 것이다. 고래가 연어의 옥망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고래가 아닌 것처럼. 연어는 연어로 살아야 연어인 것이다.
(P.30)


  그리움, 이라고 일컫기엔 너무나 크고, 기다림, 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넓은 이 보고 싶음. 삶이란 게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 또한 견뎌내야 하는 거래지만, 이 끝없는 보고 싶음 앞에서는 삶도 무엇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P.39)


  우리가 강을 거슬러오르는 이유가 오직 알을 낳기 위해서일까? 알을 낳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 그게 우리 삶의 전부라고 너는 생각하니? 아닐 거야. 연어에게는 연어만의 독특한 삶의 이유가 있을 거야. 우리가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면 우리 삶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P.52)


  자신의 외모 때문에 고민하던 시절이 생각날 때마다 은빛연어는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는 동물들에게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음을 볼 줄 모르는 동무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마음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오만으로 가득 찬 생각이었음을 은빛연어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남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가?'
라고 은빛연어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마음 속의 또다른 연어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P.65)


  "이유 없는 삶이 있을까요?"
"네 말대로 이유 없는 삶이란 없지.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럼 아저씨의 삶의 여유는 뭔가요?"
"그건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그 자체야."
"존재한다는 게 삶의 이유라구요?"
"그래.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P.66)


  "삶의 특별한 의미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야."
"너는 어디엔가 희망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희망이란 것도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럼, 결국 희망을 차지 못했다는 말이니?"
"그래, 나는 희망을 찾지 못했어.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한 오라기의 희망도 마음 속에 품지 않고 사는 연어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연어였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어.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연어들이 많았으면 좋겠어."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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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 창비 / 247쪽
(2017. 8. 8.)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며 아내를 처음 마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말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를 신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P.9)
  

  전화가 끊겼다. 차라리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소리치고 화를 낸다면, 잔소리를 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 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래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내의 인내와 선의가 숨막힌다고,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나쁜 쪽이 되어가는 거라고 강변하고 싶었다.
(P.119)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뒤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자신의 애정을 확신하지 못한 것과 같이. 그가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역시 그녀는 확신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일생생활에 워낙 서투르기 때문에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따금 느끼기는 했다. 그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든 과장이나 아첨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늘 친절했고, 한번도 거친 말을 쓰지 않았으며, 이따금 존경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P.161)


  그녀는 국철 왕십리역의 실외승강장에 서서 유난히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후락한 철조 가건물들이 서 있었고, 차량이 다니지 않는 가장자리의 침목들 사이로 손질 안된 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P.196)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서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긔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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