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inegalite parmi les hommes)
(1755)
장 자크 루소 / 주경복 / 책세상 / 224쪽
(2017. 8. 15.)


불평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불평등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가?
가끔 생각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 봐야 할 책이다.
  자연상태에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맺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홉스의 생각과는 틀리게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악의 상식적인 구별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할 필요도 없었고 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불평등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게 되면서 소유의 개념이 생겨나고 힘에 의해 능력에 의해 생겨나게되는 소유량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이 발생하게 된다고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행복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실제로 남부럽지 않게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에 비해 자신이 더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무엇인가 남보다 못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재산이 부족하거나, 명예가 부족하거나, 권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사랑이 부족하거나,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못하여 상대적으로 그것을 더 가진 자와 비교하게 된다. 그러면 왜 나는 남보다 잘살지 못하는가? 왜 나는 남보다 높은 명성을 누리지 못하는가?
이 책에서 장 자크 루소는 이런 물음들에 답하려고 애쓴다. 정답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그럴듯한 답을 말하고 있다. 그는 옛날 어느때인가 모든 사람달이 평등하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불평등이 싹텄고, 그것이 자라고 심화되어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살던 그때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는 왜, 어떻게 깨졌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루소는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P.6)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에서는 행복하게 살았던 자연 상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채롭게 전개된다. 제2부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떠나고 인위적인 힘이 개입되면서 행복을 잃어가는 모습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해서 자연 상태로 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나타난다는 홉스(Thomas Hobbes)의 성악설을 루소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의 인간의 선악의 개념을 초월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과 악의 상식적인 구별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할 필요도 없었고 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듯이 악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그들에게는 악을 행할 조건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다.
(P.7)


  필요한 양식을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인간은 각자 원하는 곳으로 가서 자유롭게 먹고 즐기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먹이 다툼을 벌이는 일들이 생기면서 자연과 인간 개개인의 독대를 통한 직접적 관계가 깨지고 점차 인간 사이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공동체가 형성되어갔다. 공동체 속에서 각 인간은 남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존재가 상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존재가 상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좋고 나쁨이 생겨나고 선악이 나타나며 불평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힘이 있거나 재주가 있거나 말 잘하는 사람이 돋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게 되었고, 드디어 사유물을 남보다 많이 지니게 되었다. 약삭빠르고 힘있는 자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약한 자는 점점 더 상대적으로 박탈을 겪게 되었다. 개인의 가치가 졵에서 소유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생산 수단의 사유화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소유에 종속시켰다. 루소가 볼 때 사유 재산제도야말로 인간 불평등의 뿌리이며 불행의 근원이다.
(P.8)


  예리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최근 이십 대 팔십의 사회라 일컬어지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또 하나의 사회 계약과 불평등의 기원을 발견하고 있다. 이십 퍼센트가 잘살고 팔십 퍼센트가 못살게 딘다는 것을 알면서 사람들은 강대국이나 초국적 자본의 논리를 따라 나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못사는 팔십 퍼센트에 들지 않고 이십 퍼센트에 들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루소에 따르면 인류는 그런 막연한 환상들 때문에 불평등의 골을 점점 더 깊이 파왔다.
이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아직도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평등의 문제는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서구 각국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지만 불평등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루소의 사상은 지금도 살아 있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의 주장을 통해 이 시대의 불평등 구조를 새롭게 되새겨볼 만한 것이다.
(P.11)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다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P.45)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따. 그러나 그가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인간은 약한 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건강해진다. 홉스는 우리 법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개인으로 하여금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그 원인이, 바로 홉스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개인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따라서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나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발달이나 법의 구속 때문이 아니라,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대문이다. "어떤 사람이 악덕을 모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미덕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유익하다."
(P.79)


  굴종의 끈은 인간 상호간의 의존과 인간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적 필요성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이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P.92)


  자연 상태에서는 불평등을 거의 느낄 수 없으며 그 영향도 거의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 나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지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자기 '완성 가능성' 이나 사회적인 덕성, 그 밖에 자연인이 잠재적으로 받은 여러 가지 능력은 그 자체만으로 결코 발전할 수 없으며, 그 발전을 위해서는 외부적인 원인 -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원시적인 처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 의 우연한 협력이 필요했음을 이미 밝혔으므로, 이네 나는 인간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서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에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검토하고 비교해보려 한다.
(P.92)


  부를 나타내는 표시(화폐)가 발명되기 전에는 부는 주로 토지와 가축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실질적 재산이엇다. 그런데 상속 재산의 수나 범위가 늘어나 땅 전체를 덮고 서로 경계를 접하게 되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자기 재산을 늘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 각자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 지배와 굴종 또는 폭력과 약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편 부유한 자들은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다른 모든 쾌락을 무시하게되었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새로운 노예를 얻기 위해 기존의 노예를 부려 이웃 사람들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고기맛을 한번 알게 된 굶주린 늑대가 다른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사람만 잡아먹으려 하는 것과 같았다.
(P.112)


  푸펜도르프는 "인간은 합의나 계약에 따라 재산을 남에게 양도하듯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나 자유 같은 자연의 본질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그것운 누가 향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할 권리까지 있는지는 적어도 확실치 않다. 설사 사람들이 재산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유를 양도할 수 있다 하더라도, 권리를 이양함으로써 비로소 부친의 재산을 향유하게 된 자식들에게는 그 차이가 상당할 것이다. 자유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자연에게서 받은 선물이므로, 어느 부모도 자식들에게서이 자류를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법률가들은 노예의 자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된다고 엄숙히 선고했는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P.125)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네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문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국가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시대는 혼란과 재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을 갖게 된다. 전제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여기서는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진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민은 이미 주인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법률도
(P.135)


  지금까지 나는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 정치적인 사회의 성립과 폐해를,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할 수 있는 범위에서 오로지 이성의 빛에 따라, 그리고 최고 권한을 가진 권력에 대해 신의 권리를 결재하여 허가하는 신성한 교의와는 무관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통해, 불평등은 자연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모든 문명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는 불평등의 형태를 이 점과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충분한 답을 준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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