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청소년문학 20년
박상률 / (주)학교도서관저널 / 212쪽

(210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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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가 진즉에 `운동`이 되었다. 예전엔 독서가 이력서의 취미 란을 많이 채웠다. 이제 독서는 취미 수준도 못 된다. 예전엔 “밥이 육체의 살을 찌운다면 독서는 영혼의 살을찌 운다” 리는 말도 곧잘했다. 이제 독서는 영혼의 살을 찌우지 못한다. 영혼은 모두 `외출 중`이고 저마다 밥벌이에만 목을 매단다. 그러면서 언제 시간이 나서 책을 읽겠느냐고 비명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독서는 영혼의 살을 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 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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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나는 집에다 크고 작은 장난감을 많이 모아 놓고 있다. 모두 내가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이다.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지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고 했다.(『피블로 네루다 자서전』, 민음사, 2008)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란다.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있는 아이를 잃고 산단다. 노는 건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중요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물리학자는 피터팬이어야 한다. 더 이상 자라선 안 된다”라고. 시인이고 물리학자고 다 '아이'를 강조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높이 사기 때문일 것이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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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른들에게 청소년 소설을 권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른의 문제가 곧 아이들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 이다. 부모가 이혼하면 아이들은 어찌해야 할까? 집안이 경제적으로 고만하여 가족이 흩어져야 한다면 아이들은 자유로울까? 게다가 살인적인 대학 입시 경쟁은 아이들을 원초적으로 주눅 들게 하고 있다. 이래저래 압박을 받고 방황하는 아이들.그런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현상적인 청소년 문제보다도 내 안에 공존하고 있는 청소년에게 더붙들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내가 완전히 떠나 보내지 못한 청소년이 내안에 같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 시절을 완전히 태워 버렸으면 나도 그 시절에 붙들리지 않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그게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청소년문학에 꽂히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또래 어른들은 곧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잊어 버린다. 물론 자기 안에 있는 청소년도 떠올리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청소년만 바라본다. 그러니 잔소리만 하게 된 다. “우리 클 때는 안 그랬는데”하면서......
   나는 내 안의 청소년을 잘 다독여야 내 밖의 청소년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이 우선은 자신의 밖에 있는 청소년이라도 잘 이해해야 한디는 생각에 그런 책을 썼다 오로지 꼰대 같은 잔소리만 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를 바리는 미음에서 말이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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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첫째,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동심을 갖추는 것이다(현상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것). 둘째로는 절대자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너나 잘하세요). 그리고 셋째로는 자기 꼬라지를 아는 것이다(너 자신을 알라). 그런게 인 문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엔 아무데나 인문학을 갖다 붙인다. 책 좀 보면, 말 좀 잘하면, 학력이나 세상의 지위가 높으면 저절로 인문학 수준도 높아질까?
  괴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니는 인문학人文學에서 문文의 뜻을 단순히 '글월 문'만이 아니고, '무늬'나 '조화'의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사람人의 무늬'이거나 '사람 사이의 조화'이다. 근데 개나 소나 말이나 다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인문학은 사람의 무늬도 아니고 조회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개나 소나 말이 사람이 아닌 까닭도 있겠지만.
  하여간 나는 인문학의 첫 걸음은 무엇보다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말하려면 아무 선입견도 없고,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 어린이는 아무런 선입견이 없으며, 어린이 마음을 가진 이는 이해관계가 없다.​
​(P.120)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없어지는 것일 게다. 경이로움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생기는 것이니깨 어른들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호기심도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배우는 말은 “엄마”이고 그 다음은 “왜?”란다. 난로에서 주전자 물이 끊고 있다 아이는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주전자 뚜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신기해서 그걸 만지려 한다 이른들은 기겁을 하며 말린다. 그때 아이는 는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왜?”
  어린이는 이처럼 질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나 일일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신의 성장 수준에 맞게 세상을 알아갈 것이므로. 그럼에도 어른들은 조바심을 내며 답을 가르쳐 주려 한다. 그게 치맛바람이 되어 쓸고 간 뒤 이제는 선행학습을 한다. 미리 답을 가르쳐 주고자 하는, 자상하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배려일까?
​(P.123)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0퍼센트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의 대중화가 실현되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가는 대학, 오히려 안 가면 안 될까? 개나 소나 다 가니까 다녀 두어야 한다고? 그러면 스스로 개나 소가 되는 격이다 내 생각엔 중고등학교 때 일찌감치 재능을 발견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면 굳이 대학 을 안 가도 무방할 것 같다. 대학을 기는 목적이 직업을 얻기 위해서라면그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선 학번 때문에 대학을 다녀야 할 성싶다. 대학 입학년도가 나이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하니 대학을 안 다닐 수 있겠는가.
(P.136) ​
​​

  책을 하찮게 여기는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더욱더 책을 읽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가정 독서 모임을 비롯 이런 저런 독서 모임이 많다. 중학교에선 자유학기제가 실시되어 교과서 밖의 책을 읽을 기회가 더 많아졌다. 작년에 자유학기제를 시범적으로 행한 몇몇 학교와 도서관에선 이미 '진로 탐방'과 '독서 교육'을 명분으로 내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기회에 늘 하는 말은 “나쁜 책은 없다”이다. 나쁜 책은 없으니까 아무런 책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자고 말한다 나쁜 책도 최소한 '반면교사' 역할은 할 거라 여기면서!
(P.155)​


  청소년의 성장이 어느 시대, 누구의 이야기가 되든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일반소설도 살인이 나오든 대리 만족을 하든 카타르시스를 느끼든 어쨌든 영혼이 한 뼘 자라는 걸 느끼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뭐하러 읽겠습니까? 작가들이 이 시대 아이들 얘기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즘 시대 이야기는 아이들 본인들이 더 잘 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들의 이야기는 시시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고요. 오히려 엄마 아빠의 청소년기가 궁금하지요. 이거 사실 상당히 영업 비밀인데(웃음) 제가 15 년간 써 온 방법인데요. 조선 시대든 30년 전이든 아이들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쓰는게 청소년 소설이지, 요즘 아이들 이 즐겨하는 인터넷이든 게임이든 이런 걸 다룬다고 무조건 청소년 소설이 되는 게 아닙니다. 외피를 어떻게 쓰고 있든 간에 보편적인 것을
다뤄야지요. 젊은 작기들이 보편적인 핵심보다 외피만 다루려다 보니 소재주의로 가는 것 같아요.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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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책읽기
안건모 / 산지니 / 280쪽
(2107.10.17.) 



  저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에도 세상은 원래 그렇고, 그런 세상 에서 그렇게 사는 게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세 상을 바로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교과서가 아닌 책, 인문사회책이었습니다. 책이 나를 캄캄한 동굴 속에서 꺼내주었습니다. 책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의 내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박사모'나 '가스통 할배' 같은 극우주의자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세월호 타령이냐고 짜증 내는 젊은이처럼 남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드가 원지, 왜 그런 걸 한국에 배치하면 안 되는지 모르는 멍청이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열다섯 명이나 나은 대통령 후보 가운데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는 바보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젊은 이들한테 세상을 가르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P.7)


  지금도 저는 책으로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삶을 위한 정치혁명』을 보고 한국의 투표 제도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을 보고 아직까지 한국의 학교 교육이 아이들을 순종, 굴종시키는 교육이리는 사실 도배웁니다.『노동의 배신』을 보고 미국 사회의 '불평등의 깊은 골'과 추악한 현실을 깨닫고, 그것은 또 바로 우리 한국 사회 모습이라는 사실도 배웁니다.『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를 보고 시민들은 국가로부터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디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또『의사 김재규』와『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를 보고 박근해의 말로를
예상하기도 했 습니다. 저는 이렇게 책을 보면서 세상을 배우고, 또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좋은 책으로 세상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P.7)


  어떤 책이 좋은 책일까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이 세상을 보여주는 책, 둘째, 이 세상을 이해하는 책, 셋째, 이 세상을 변혁하는 책입니다. 저는 한 가지 더 추가합니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책에서 세상까지 배울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소개하는 책이 그런 책입니다. 하지만 책 에 써 있는 그대로 맹목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비판적으로 읽기. 그래서 제목이 '삐딱한 책 읽기'입니다.
이 책은 제가 재미있는 책을 읽고 쓴 '세상 이야기'입니다.
(P.9)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
  이병창은 책에서 먼저 철학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철학자는 그 시대의 혁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단다. 자기 시대를 넘어서려 할 때 철학이 시작된디는 말이다. '철학이 가장 상대하기 힘든 것은 상식이다. 그 시대 생각의 기본적 들은 너무 자명하다. 아무도 그런 상식이 전제되어 있디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철학은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전복하려는 학문이다. 철학이 상식을 넘어서려 하는데 상식을 통해 보여달리는 건 철학을 배반하라는 말과 같다고 한다. 이병창은 이 책에서 경험주의 대신 변증법적 인식으로 사고하라고 권유한다. 개인주의 대신 공동체주의를, 민주주의 대신 자치의 사회를, 욕망의 자유 대신에 진정한 자유, 자주성의 길을 내세운다. 이병창은 어려운 철학을 독자에게 쉽게 전달해주려고 애를 썼다. 젊은이들이 물었던 '우리에게는 왜 꿈이 없을까?'라는 질문에 이병창은 오히려 “정말 꿈이 없는 건가요? 그 이유는 뭡니까?” 하고 묻는다. 이어 청년들에게 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 아닐 거 라고 결론을 내린다. 결국 시대적 상황이 청년을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한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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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역사 이야기)
  자본가들은 우리 노동자들에게 역사를 잘못 이해하도록 끊임 없이 세뇌시켜왔고 노동자들의 생각을 지배해왔다. 박준성 선생은, 수많은 역사책이 “왕이나, 지도자나, 위인이나, 장군이나, 많이 가진 자들이 마치 똑똑하고 힘이 있어 역사를 움직여 온 것처럼” 나와 있지만, 그 뒷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노동의 역사』리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를 빌려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혼자 다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가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순신 장군 혼자 나무를 베어 거북선을 만들고 혼자만 나라 걱정하며 싸우다 죽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의식을 불어 넣는다. 박준성 선생은 길거리에서도 자본주의가 알게 모르게 서민들을 세뇌시킨다는 것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했다.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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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이면
이승우 / 문이당/ 300쪽
(2017. 10. 16.)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지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P.23)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런 것처럼 그 역시 법을 범한다. 범죄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범죄 행위의 결과로서의 급부(給付) 때문이 아니라, 금지된 법을 범하고 있다는 순간의 팽만한 정신의 오락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원죄는 재물의 획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야훼가 진노한 것은 사람이 먹어치운 과일 하나의 손실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을 했다는 것이 참된 이유였다. 세상의 모든 형벌도 태초의 야훼를 닮는다. 어떤 법도 재물의 손실 때문에 극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모든 극형의 대상은 고래로 정신적인 것이다. 요컨대 금지된 법을 범함으로써 누리는 정신의 오락성이 언제나 법집행자의 큰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P.33)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 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P.85)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나는 가장 서툴다. 서툰 것을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상처를 입는다. 궁색한 선택이지만, 그래서 유일한 나의 대안은 사람 곁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참혹하고 질긴 생래적인 외로움은 어쩔 것인가. 하여 나는 나의 물색없는 외로우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P.109)
 

  예감은 열람이 금지된 숙명의 세계를 부지불식간에 엿보고 만 자의 머리 위에 그 부정에 대한 징벌로 떨어지는 벼락, 그 벼락 같은 천재지변의 떨림이다. 그래서 숙명은 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숙명은 비극의 광배(光背)를 두르고 있게 마련이다. 숙명적이라는 말이 비극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P.112)


  자, 내가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를 들고 나온다고 하자. 그것들은 거짓이거나 꾸며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내 자아의 어느 층에선가 충동질을 받고 튀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층에서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층의 진실이 모든 층의 진실을 담당할 수 있을까. 그것이 층들을 관통 하는 '작살'의 진실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답을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이 맡은 역(役)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19의 층은 18의 층을 감춘다. 20의 층은 19의 층을 왜곡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감추고 왜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나는 내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로 들어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안다.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이다. 과거란 결국 인상(印象)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상은 실체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체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용납되기도 한다.
​(P.115)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대로, 그 어두운 방은, 말하자면 내 자아의 투시에 다름아니었다. 내가 웅크리고 앉아 지낸 그 어두운 공간은 실상 나의 자폐적인 내부였던 것이다.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 세상과의 불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 또는 원인으로서 자아의 지하굴 속에 거하는 행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을 (지하의 세계)라고 불렀다. 여기서 지하는, 그곳이 지상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하늘이라고 해도 무 방하다. 아, 적은 아무데도 없는데 고통은 도처에 널려 있다. 나는 그 책을 내 방에 깔린 어둠의 눈을 빌려 이주 조금씩 읽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조그만 문고판 책의 행간에 무수히 그어진 붉은 줄들은 공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예컨대 동지의식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는 이단의 내가 여기에 또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
(P.123)


  막스 데미안을 만다는 젊은 시절의 에밀 싱클레어가 내 꿈속으로 자주 나타나곤 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참으로 원했던 것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동료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를 만나 이 껍데기의, 그림자만의 세계를 성토하는 것이었다. 내가 발견하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내밀한 지하의 세계를 대화로, 마음으로 누리는 것이었다.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P.127)


  어떤 책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우리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등 치는 악몽이라고 비유한 글을 읽었다. 제임스 조이스였을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고, 그일지라도, 본래의 뜻에 상당한 왜곡이 가해졌을 지 모른다. 기억은 사실의 편이 아니라 편들고 싶은 자의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편들고 싶은 자를 편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여서는 안된다.
(P.140)


  어떤 일의 시작에는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뻥 뚫린 동굴과 같은 캄캄한 영역이 있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또는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운명적인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는 식이다. 운명적이라고 발음하는 순간처럼 운명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운명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운며ㅇ이 깃들이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P.153)


  그녀의 이름이 종단임을 알게 되었다는 걸 그날의 소득으로 쳐야 할지. 떠밀려나오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름은 내게 중요하기 않았다. 이름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가장 제한적인 정의이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편의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면 구별할 필요가 없을 때는 어떤가. 구별함 없이도 이미 총체적인 인식에 이르러 있을 경우에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오히려 그 새로운 이름이 참된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경우가 그랬다.
(P.163)


​  한 작가의 각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소설들을 만든다. 삶의 파편들은 때로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더 자주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기도 한다. 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책 밖에 있고, 작가가 쓴 글들은 책 속에 갇혀 있다. 독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는 한 작가가 써 놓은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그 각각의 소설들에 드러나 있거나 감취져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조합함으로써 나름대로 한 작가를 만든다. 그런 뜻에서 소설이 없으면 삶도 없다.
(P.192)

​​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그런 질문을 무색하게 만드는 발언을 했다.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예컨대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거나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편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들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 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한다.
​(P.260)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취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 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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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영성 / 스마트부스 / 304쪽
(2017. 10. 6.)


좋았던 점
- 저자의 생각들 중에서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느끼게(확인하게) 해준 내용들이 많았다
-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의 글을 쓸것인가를 먼저 정하고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거나 지금까지 정리 해놓은 자료 들 중에서 수집하여 글을 쓴다는 것
- 이 작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얘기 해온 책읽은 후의 생각하기에 대해서이다 특히 작가는 책읽은 후 산책하며 몽상하는 방법을 자주 쓴다고 한다
- 하나의 독서 법을 추천해주는 책들에 비해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가면 독서법들을 자기 방식으로 정리한 점이 참 좋았다
초보자들이 책을 읽기 시작할때 참고 할수 있는 독서법들이 잘 정리되어 있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서법을 선택해 실천해 볼수 있는 팁까지 잘 정리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아쉬웠던 점
- 작가 자신의 생각보다 관련된 자료들의 예시들이 나열식으로 계속되서 좀 지루하다고 느껴진다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예시와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믹스 시켜 독자들이 읽을때 거부감(자신의 생각과 예시들의 거리감?) 좀 더 느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는 노하우가 좀 부족했던게 아닐까 생각든다
작가는 모든것을 새롭게 창조 할수는 없다 새롭게 느껴지는 지식도 결국 기존의 지식들의 틀 안에서 비집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가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어떻게 엮어 내 이야기를 풀어내느냐 하는 기술이 글쓰는 사람들의 능력의 차이이며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기술인것 같다
- 마지막으로 1년 300권의 책을 읽은 작가의 콘텐츠가 이 책만 볼때는 왠지 부실해 보이게 느껴진다 

그래도 작가 추천한 책들은 시간이 되면 한번 읽어 볼 책 목록에 포함시켜 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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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독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독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 이떠한독서법들이 있는가?
• 모두에게 효과적인 독서법이 있을끼? 있니편 그것은 무엇일까?
• 어떻게 하면 전정한 독서가가 될 수 있을까?
(P.7)
​ 

  내가 인간의 보편성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앞서 내가 품었던 독서와 관련된 의문을 풀기 위해서이다. '독서는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의미이며',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내 독서법이 보편적으 로 이롭게 적용할 만한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내붙 명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기[독서] 전에 인간이라는 나 자신을 읽어야[독아. 讀我]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나에게 좋은 것이 당신에게도 좋을 확률이 높다.'
  이제부터 니는 우리 모두가 하나씩 들고 다니는 '뇌를 중심으로 독서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독서라는 판도라 상자를 최신 뇌과학, 심리학, 행동경제학이리는 재료로 떠받치고, 스토리와 인문학이라는 날개를 달아 독자의 품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P.20)


​   정체성은 바닥에 검게 굳어 딱 달리붙은 껌딱지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지 버나드 쇼가 “삶은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장조 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정체성이라는 불변하는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정체성이 바로 본질이다. 인식이 변하면 본질도 바뀐다. 자기 자신을 고정적으로 보고 있다면, 이는 여자아이가 원래 분홍색 옷을 좋아하며 남지보다 경쟁심이 부족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것과 같다.
(P.44)

​ 
   1980년대에 밀린 위트록 박사는 독서를 이렇게 설명 했다.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읽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장조해 낸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 경험에 얽힌 기억, 글로 씌어진 문장, 절과 단락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나감으로써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독서는 뇌의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과 청각, 언어와 개념 영역을 기억과 감정의 부분들과 연결하고 통합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 이다.
(P.52)

​ ​
​  스티브 잡스는 “창의력이란 여러 가지를 연결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창의성은 연결이다. 하지만 잡스가 말한 '여러가지'가 '아무거나'를 뜻하지는 않으며, 서로 다른 낯선 것들을 연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창의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창의성은 낯선 것들의 연결이다”
(P.108)​​
​​

  독서를 많이 하는 부모의 집은 책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영복 선생은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사람은 그 부모보다 그 시대를 닮는다"고 했다. 사회과학서를 읽다 보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시대보다 부모를 닮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독서이다. 결국 부모 본인은 독서가가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P.127)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 주는가보다, 아빠나 엄마 품에 안겨 책 속의 새로운 세상에 동참하는 그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왜 부모의 품에서 책을 읽었던 아이들이 후에 훌륭한 독ㅎ서가가 되었을까? 나는 독서가 자연스레 부모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정서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독서를 통해 사랑을 느낄 때, 독서를 사랑하게 된다.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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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산책자의 명상, 말제브르에게 보내는 편지 외 
  장자크루소 /진인혜 / 책세상 / 237쪽
(2017. 10. 1.)
​ ​


​​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고 나에 대한 보고서를 서둘러 미리 준비하는 데에 내 마지막 날들을 바치고자 한다.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달콤한 즐거움에 온전히 몰두하자. 그것만이 사람들이 내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니까. 내 내면의 성향을 성찰함으로써 그것을 더 바람직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악을 바로잡게 된다면, 내 명상이 완전히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비록 이 땅에서는 내가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내 마지막 날들을 완전히 낭비한 것은 아니리라. 날마다 산책하며 보내던 여가 시간은 종종 매력적인 명상으로 가 득 차곤 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내게 다시 찾아을 수도 있을 그런 명상들을 이제부터 글로 남겨놓으려 한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읽을 때마다 큰 즐거움이 되돌아오리라. 나는 내 마음 의 참된 가치를 생각하면서 내 불행과 박해자들과 치욕을 잊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글은 내 몽상에 관한, 일정한 형식이 없는 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많은 질문들이 있을 것인 데, 고독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깊이 몰두하게 되기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산책하면서 내 머리를 스쳐가는 낯선 생각들 역시 모두 이 글 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한 것을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것이다. 보통 전날의 생각은 다음날의 생각과 잘 연결되지 않는데, 그런 식으로 전후 맥락 없이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 금과 같은 기이한 상황에서 내 정신에 매일의 양식이 되는 감정과 사고 가 무엇인지 알아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내 본성과 기질을 새로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고백》의 부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P.21)
​​

  나는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자기 안에 있고, 행복해지기를 원할 줄 이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사오 년 전부터 나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영혼이라면 명상 중에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내적 환희를 습관적으로 맛보아 왔다. 이렇게 홀로 산책하면서 이따금 느끼던 그 황홀과 도취는 나를 박해하던 자들 덕분에 알게 된 즐거움이 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나 자신 속에 지니고 있던 보물을 결코 발견하지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물이 그토록 즐비한데, 어떻게 다 정확하게 기록하겠는가? 그 많은 달콤한 몽상들을 회상하려하면서, 나는 그것을 묘사하기는커녕 다시 몽상에 빠져들었다. 몽상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어떤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인데, 기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면 곧 그런 상황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P.26)


  우리는 태어나면서 경기장에 들어가고, 죽어서야 거기서 나온다. 경주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마차를 잘 모는 법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랴? 그때는 오직 어떻게 그 경기장에서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늙은이의 공부는, 아직도 해야 할 공부가 남아 있다면, 오직 죽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 나이의 사람들이 가장 공부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노인들은 아이들보다 더 삶에 집착하고, 젊은 사람들보다 더 마지못해 생을 마감한 다. 그들의 모든 노고는 이생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삶의 종착지에서 자신들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생 기울인 모든 정성, 평생 모은 전 재산, 밤잠을 설치며 이룩한 모든 결실...... 떠날 때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 그들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얻으려는 생각은 살아 있는 동안 전혀 해보지 않았다.
​(P.37)


​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홀로 품고 있는 의견에서 오류와 편견밖에 보지 못한다. 그들은 나와 정반대되는 체계 속에서 진리와 명증성을 찾는다. 심지어 내가 성실하게 체계를 확립한다는 것도 믿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나 자신은 꿋꿋하게 그 체계에 몰두해보지만, 거기서 극복할 수 없는 난제만을 발견 할 뿐이다. 나는 그 난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체계에 대한 주장을 굽힐 수도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현명하고 견식 있는 인간은 나뿐이란 말인가? 무언가를 그대로 믿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 마음에 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조금도 견고해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 이성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도 헛되게 보일 현상에 대해 내가 명백하게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나를 박해하는 자들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 한 채 그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나 자신의 실천 원칙이라는 망상 속에 머물러 있느니, 차라리 그들의 실천 원칙을 채택해 똑같은 무기로 싸우 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나는 나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나는 쉽게 속는 사람이고, 헛된 오류의 희생자이자 순교자일 뿐이다.​
(P.48)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진실은 모든 선(善)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장님이다. 그것은 이성의 눈과도 같다. 그 진실을 통해 인간은 행동하는 법, 인간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는 법, 해야 할 일을 하는 법, 진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법을 배운다.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진실은 늘 선하기만 하지는 않다. 그것은 때때로 악하기도 하며, 하찮은 것일 때가 많다. 인간이 알아야 할 것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꼭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은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가 많건 적건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자산이며, 어디서 그 자산을 발견 하든 인간에게는 그것을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있다. 또한 그것은 가장 부당한 방식으로 도둑질하지 않고는 빼앗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자산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고 해서 빼앗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55)


  사람들의 말을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의해 판단하면 종종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그 결과라는 것이 항상 뚜렷하고 파악하기 쉬운 것은 아닐 뿐더러, 말해진 상황에 따라 무한히 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말을 평가하고 그 말의 악의나 선의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다. 거짓을 말하더라도 속이려는 의도가 있어야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며, 속이려는 의도도 항상 해를 끼치려는 의도와 결부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때로는 정반대의 목적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말이 결백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명백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을 오류에 빠트리더라도, 그 오류가 그들 자신을 비롯해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확신을 갖기란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어떤 거짓말이 완전히 결백하기란 어렵고 드문 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기이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말올 하는 것은 중상인데, 이것이야말로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나쁜 거짓말이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이익도 피해도 주지 않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허구이다.
(P.58)


   이러한 모든 성찰을 통해 결론을 내려보건대, 내가 스스로 내세운 진실성은 사실이 정확히 그러했느냐보다는 올바름과 공정함이라는 감정에 더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실제로 생활할 때 나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양심의 도덕적 지시를 따랐다. 나는 종종 많은 이야기를 지어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런 원칙을 따르다 보니 다른사람들에게 흠 잡힐 거리도 적잖이 제공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땅히 취해야 할 이득보다 더 많은 이득을 누리지도 않았다. 진실이 하나의 미덕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런 이유에서인 듯하다.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진실이란 선도 악도 초래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고 믿을 만큼 그런 구별에 대해 만족스럽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 의무는 그토록 세심하게 숙고하면서도, 과연 나 자신에 대한 의무는 충분히 검토해보았는가? 타인에 대해 정당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해야 한다. 그것은 정직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품위에 바쳐야 하는 경의이다. 내 대화가 빈곤하다고 어쩔 수 없이 악의 없는 허구로 보충한 것은 잘못이었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 쓰는 재미에 이끌려 실제 사실에 인위적인 장식을 덧붙인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다. 꾸며낸 이야기로 진실을 장식 하는 것은 결국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0)


  나는 긴 생애의 변천 속에서 가장 달콤한 즐거움과 가장 강렬한 쾌락의 시기가 가장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시기로 기억되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흥분과 열정의 짧은 순간은 아무리 강렬해도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보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점에 불과하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 드물고 빨리 지나가 버리므로 하나의 상태를 구성할 수 없다. 내 마음이 아쉬워하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영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자체에는 강렬함이 전혀 없지만, 그 상태가 지속되면 매력이 증가하여 마침내 거기서 지고의 행복을 발견하게되는 것이다.
(P.79)


  영혼이 아주 견고한 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서 완전히 휴식을 취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이 전 존재를 집중 할 수 있는 상태, 영혼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상태, 영원히 현재만이 계속되지만 그 지속을 강조하지도 않고 연속의 흔적도 전혀 남기지 않고 상실이나 즐거움, 쾌락이나 고통, 욕망이나 두려움에 대한 감정도 전혀 없이 오로지 우리 존재에 대한 감정만이 존재하는 상태, 그리하여 그 감정만으로 온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상태, 그런 상태가 있다면 그것이 지속되는 한 거기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것은 인생의 쾌락에서 찾을 수 있는 불완전하고 빈곤하고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혼에 공허한 부분을 남기지 않아 영혼으로 하여금 채울 필요를 느끼게 하지 않는 그런 만족스럽고 완전하고 충만한 행복이다. 나는 생피에르 섬에서 종종 그런 상태로 지냈다.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 가는 배 안에누워, 또는 물결치는 호수가에 앉아, 또는 아름다운 냇가나 자갈 위를 졸졸 흐르는 개울 가에 앉아 고독한 몽상에 잠길 때가 그런 때 였다.
(P.80)


  사실 휴식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볍고 달콤한 생각들이 영혼의 밑바닥을 동요 시키지 않고 그 표면만 스쳐 지나갈 때, 휴식은 훨씬 더 기분 좋은 것이된다. 자신의 불행을 모두 잊고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는 충분 한 휴식만 있으면 된다. 그런 종류의 몽상은 조용한 장소만 있으면 어디서나 맛볼 수 있다.그런 까닭에 나는 바스티유 감옥이나 아무것도 보이 지않는 지하 감옥 안에서라도 기분 좋게 몽상에 잠길 수있을 거라고 종종 생각했다.
(P.82)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권 력을 지닌 사람은 인간의 나약함을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과다한 힘은 그를 다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거나, 설령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 하더라도 진정한 자기 자신보다 못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만 사용될 것이다.
(P.96)​

​​
  역경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한다.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경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실수이외에는 자책할 것이 없으므로 그 실수에 대한 내 나약함을 책망하고 위안을 얻는다. 계획적인 죄악을 결코 내 마음과 가까이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둔한 사람이 아니고야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내 상황을 응시하면서 그들이 초래한 상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를 수가 있으며,어떻게 고통과 절망으로 죽을 지경이 되지 않을 수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는 내 상황을 응시 하고도 거기에동요되지 않는다. 아마 다른이라면 공포감 없이바라보지 못할 그런 상태에서, 나는 자신을 위해 투쟁하지도 노력하지도 않고 거의 무관심하게 지내고 있다.
(P.117)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에서 우리는 결과보다는 의도에 더 신경을 쓴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왓장은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악의를 가진 사람이 고의로 던지는 돌멩이만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공격 행위는 때때로 빗나가는 수도 있지만, 그 의도는 결코 목표 달성에 실패하지 않는다. 운명이 주는 타격 중에서사람들이 가장 가볍게 느끼는 것은 물리적 고통이다. 불운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에 대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를 때 운명을 탓한다. 그들은 운명을 인격화하고 그것에 눈과 지능을 빌려주어, 그 운명이 고의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잃고 분해하는 노름꾼은 그런 식으로 누구를 향한것인지도 알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린다. 그는 운명이 고의로 자신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화낼거리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적에 대해 흥분하고 격노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맹목적인 필연성의 소행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은 그렇게 무분별하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기는 해도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자신을 집어삼킨 불행에서 물리적인 상처밖에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받는 타격은 일신에 상처를 줄 뿐, 마음에까지 이르지는못한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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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 줄곧 불행한 것은 오직 이기심 때문이다. 이기심이 침묵하고 이성이 입을 열 때 ,마침내 이성은 우리 힘으로 피할 수 없었던 모든 불행을 위로해준다. 심지어 불행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을 소멸시켜주기도 한다. 그럴 땐 불행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만 하면 가장 끔찍한 타격을 확실하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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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머지를 강조하는 것,전체적으로 조화를 부여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얼굴의 특징들은 모든 특징이 함께 해야만 온전한 결과를 나타낸다. 하나의 특징이라도 빠지면 얼굴이 왜곡되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내가 아는 것을 말하는 것 뿐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전체가 도출되고, 모든 것이 실제와 닮게 되는 것이다.
(P.154)


현대인은 자신의 크기에 맞추어 그들을 작게 만들지만, 나는 그들의 크기에 맞추어 나 자신을 크게 만든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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