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청소년문학 20년
박상률 / (주)학교도서관저널 / 212쪽
(2107.10.20.)
책 읽기가 진즉에
`운동`이 되었다. 예전엔 독서가 이력서의 취미 란을 많이 채웠다. 이제 독서는 취미 수준도 못 된다. 예전엔 “밥이 육체의 살을 찌운다면
독서는 영혼의 살을찌 운다” 리는 말도 곧잘했다. 이제 독서는 영혼의 살을 찌우지 못한다. 영혼은 모두 `외출 중`이고 저마다 밥벌이에만 목을
매단다. 그러면서 언제 시간이 나서 책을 읽겠느냐고 비명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독서는 영혼의 살을 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 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
(P.6)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나는 집에다 크고 작은 장난감을 많이 모아 놓고 있다. 모두 내가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이다.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지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고 했다.(『피블로 네루다 자서전』, 민음사,
2008)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란다.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있는 아이를 잃고 산단다. 노는 건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중요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물리학자는 피터팬이어야 한다. 더 이상 자라선 안 된다”라고. 시인이고 물리학자고 다 '아이'를
강조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높이 사기 때문일 것이다.
(P.46)
내가 어른들에게 청소년 소설을 권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른의 문제가 곧 아이들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 이다. 부모가 이혼하면 아이들은 어찌해야
할까? 집안이 경제적으로 고만하여 가족이 흩어져야 한다면 아이들은 자유로울까? 게다가 살인적인 대학 입시 경쟁은 아이들을 원초적으로 주눅 들게
하고 있다. 이래저래 압박을 받고 방황하는 아이들.그런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현상적인 청소년 문제보다도 내 안에
공존하고 있는 청소년에게 더붙들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내가 완전히 떠나 보내지 못한 청소년이 내안에 같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 시절을
완전히 태워 버렸으면 나도 그 시절에 붙들리지 않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그게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청소년문학에 꽂히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또래 어른들은 곧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잊어 버린다. 물론
자기 안에 있는 청소년도 떠올리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청소년만 바라본다. 그러니 잔소리만 하게 된 다. “우리 클 때는 안
그랬는데”하면서......
나는 내 안의 청소년을 잘 다독여야 내 밖의 청소년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이 우선은
자신의 밖에 있는 청소년이라도 잘 이해해야 한디는 생각에 그런 책을 썼다 오로지 꼰대 같은 잔소리만 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를 바리는 미음에서
말이다.
(P.102)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첫째,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동심을 갖추는 것이다(현상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것). 둘째로는 절대자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너나 잘하세요). 그리고 셋째로는 자기 꼬라지를 아는 것이다(너 자신을 알라). 그런게 인 문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엔 아무데나
인문학을 갖다 붙인다. 책 좀 보면, 말 좀 잘하면, 학력이나 세상의 지위가 높으면 저절로 인문학 수준도 높아질까?
괴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니는 인문학人文學에서 문文의 뜻을 단순히 '글월 문'만이 아니고, '무늬'나 '조화'의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사람人의 무늬'이거나 '사람 사이의 조화'이다. 근데 개나 소나 말이나 다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인문학은 사람의 무늬도 아니고 조회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개나 소나 말이 사람이 아닌 까닭도 있겠지만.
하여간 나는 인문학의 첫 걸음은 무엇보다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말하려면 아무 선입견도 없고,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 어린이는 아무런 선입견이 없으며, 어린이
마음을 가진 이는 이해관계가 없다.
(P.120)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없어지는 것일 게다.
경이로움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생기는 것이니깨 어른들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호기심도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배우는 말은 “엄마”이고 그 다음은 “왜?”란다. 난로에서 주전자 물이 끊고 있다 아이는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주전자 뚜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신기해서 그걸 만지려 한다 이른들은 기겁을 하며 말린다. 그때 아이는 는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왜?”
어린이는 이처럼 질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나 일일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신의 성장 수준에 맞게
세상을 알아갈 것이므로. 그럼에도 어른들은 조바심을 내며 답을 가르쳐 주려 한다. 그게 치맛바람이 되어 쓸고 간 뒤 이제는 선행학습을 한다.
미리 답을 가르쳐 주고자 하는, 자상하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배려일까?
(P.123)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0퍼센트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의 대중화가 실현되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가는 대학, 오히려 안 가면 안 될까?
개나 소나 다 가니까 다녀 두어야 한다고? 그러면 스스로 개나 소가 되는 격이다 내 생각엔 중고등학교 때 일찌감치 재능을 발견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면 굳이 대학 을 안 가도 무방할 것 같다. 대학을 기는 목적이 직업을 얻기 위해서라면그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선 학번 때문에
대학을 다녀야 할 성싶다. 대학 입학년도가 나이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하니 대학을 안 다닐 수 있겠는가.
(P.136)
책을 하찮게 여기는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더욱더 책을 읽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가정 독서 모임을
비롯 이런 저런 독서 모임이 많다. 중학교에선 자유학기제가 실시되어 교과서 밖의 책을 읽을 기회가 더 많아졌다. 작년에 자유학기제를 시범적으로
행한 몇몇 학교와 도서관에선 이미 '진로 탐방'과 '독서 교육'을 명분으로 내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기회에 늘 하는 말은 “나쁜
책은 없다”이다. 나쁜 책은 없으니까 아무런 책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자고 말한다 나쁜 책도 최소한 '반면교사' 역할은 할 거라
여기면서!
(P.155)
청소년의 성장이 어느 시대, 누구의 이야기가 되든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일반소설도
살인이 나오든 대리 만족을 하든 카타르시스를 느끼든 어쨌든 영혼이 한 뼘 자라는 걸 느끼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뭐하러 읽겠습니까?
작가들이 이 시대 아이들 얘기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즘 시대 이야기는 아이들 본인들이 더 잘 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들의 이야기는
시시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고요. 오히려 엄마 아빠의 청소년기가 궁금하지요. 이거 사실 상당히 영업 비밀인데(웃음) 제가 15 년간 써
온 방법인데요. 조선 시대든 30년 전이든 아이들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쓰는게 청소년 소설이지, 요즘 아이들 이 즐겨하는 인터넷이든
게임이든 이런 걸 다룬다고 무조건 청소년 소설이 되는 게 아닙니다. 외피를 어떻게 쓰고 있든 간에 보편적인 것을
다뤄야지요. 젊은 작기들이
보편적인 핵심보다 외피만 다루려다 보니 소재주의로 가는 것 같아요.
(P.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