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산책자의 명상, 말제브르에게 보내는 편지 외 
  장자크루소 /진인혜 / 책세상 / 237쪽
(2017.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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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고 나에 대한 보고서를 서둘러 미리 준비하는 데에 내 마지막 날들을 바치고자 한다.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달콤한 즐거움에 온전히 몰두하자. 그것만이 사람들이 내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니까. 내 내면의 성향을 성찰함으로써 그것을 더 바람직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악을 바로잡게 된다면, 내 명상이 완전히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비록 이 땅에서는 내가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내 마지막 날들을 완전히 낭비한 것은 아니리라. 날마다 산책하며 보내던 여가 시간은 종종 매력적인 명상으로 가 득 차곤 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내게 다시 찾아을 수도 있을 그런 명상들을 이제부터 글로 남겨놓으려 한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읽을 때마다 큰 즐거움이 되돌아오리라. 나는 내 마음 의 참된 가치를 생각하면서 내 불행과 박해자들과 치욕을 잊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글은 내 몽상에 관한, 일정한 형식이 없는 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많은 질문들이 있을 것인 데, 고독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깊이 몰두하게 되기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산책하면서 내 머리를 스쳐가는 낯선 생각들 역시 모두 이 글 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한 것을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것이다. 보통 전날의 생각은 다음날의 생각과 잘 연결되지 않는데, 그런 식으로 전후 맥락 없이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 금과 같은 기이한 상황에서 내 정신에 매일의 양식이 되는 감정과 사고 가 무엇인지 알아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내 본성과 기질을 새로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고백》의 부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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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자기 안에 있고, 행복해지기를 원할 줄 이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사오 년 전부터 나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영혼이라면 명상 중에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내적 환희를 습관적으로 맛보아 왔다. 이렇게 홀로 산책하면서 이따금 느끼던 그 황홀과 도취는 나를 박해하던 자들 덕분에 알게 된 즐거움이 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나 자신 속에 지니고 있던 보물을 결코 발견하지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물이 그토록 즐비한데, 어떻게 다 정확하게 기록하겠는가? 그 많은 달콤한 몽상들을 회상하려하면서, 나는 그것을 묘사하기는커녕 다시 몽상에 빠져들었다. 몽상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어떤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인데, 기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면 곧 그런 상황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P.26)


  우리는 태어나면서 경기장에 들어가고, 죽어서야 거기서 나온다. 경주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마차를 잘 모는 법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랴? 그때는 오직 어떻게 그 경기장에서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늙은이의 공부는, 아직도 해야 할 공부가 남아 있다면, 오직 죽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 나이의 사람들이 가장 공부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노인들은 아이들보다 더 삶에 집착하고, 젊은 사람들보다 더 마지못해 생을 마감한 다. 그들의 모든 노고는 이생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삶의 종착지에서 자신들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생 기울인 모든 정성, 평생 모은 전 재산, 밤잠을 설치며 이룩한 모든 결실...... 떠날 때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 그들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얻으려는 생각은 살아 있는 동안 전혀 해보지 않았다.
​(P.37)


​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홀로 품고 있는 의견에서 오류와 편견밖에 보지 못한다. 그들은 나와 정반대되는 체계 속에서 진리와 명증성을 찾는다. 심지어 내가 성실하게 체계를 확립한다는 것도 믿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나 자신은 꿋꿋하게 그 체계에 몰두해보지만, 거기서 극복할 수 없는 난제만을 발견 할 뿐이다. 나는 그 난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체계에 대한 주장을 굽힐 수도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현명하고 견식 있는 인간은 나뿐이란 말인가? 무언가를 그대로 믿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 마음에 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조금도 견고해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 이성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도 헛되게 보일 현상에 대해 내가 명백하게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나를 박해하는 자들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 한 채 그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나 자신의 실천 원칙이라는 망상 속에 머물러 있느니, 차라리 그들의 실천 원칙을 채택해 똑같은 무기로 싸우 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나는 나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나는 쉽게 속는 사람이고, 헛된 오류의 희생자이자 순교자일 뿐이다.​
(P.48)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진실은 모든 선(善)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장님이다. 그것은 이성의 눈과도 같다. 그 진실을 통해 인간은 행동하는 법, 인간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는 법, 해야 할 일을 하는 법, 진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법을 배운다.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진실은 늘 선하기만 하지는 않다. 그것은 때때로 악하기도 하며, 하찮은 것일 때가 많다. 인간이 알아야 할 것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꼭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은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가 많건 적건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자산이며, 어디서 그 자산을 발견 하든 인간에게는 그것을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있다. 또한 그것은 가장 부당한 방식으로 도둑질하지 않고는 빼앗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자산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고 해서 빼앗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55)


  사람들의 말을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의해 판단하면 종종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그 결과라는 것이 항상 뚜렷하고 파악하기 쉬운 것은 아닐 뿐더러, 말해진 상황에 따라 무한히 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말을 평가하고 그 말의 악의나 선의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다. 거짓을 말하더라도 속이려는 의도가 있어야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며, 속이려는 의도도 항상 해를 끼치려는 의도와 결부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때로는 정반대의 목적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말이 결백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명백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을 오류에 빠트리더라도, 그 오류가 그들 자신을 비롯해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확신을 갖기란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어떤 거짓말이 완전히 결백하기란 어렵고 드문 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기이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말올 하는 것은 중상인데, 이것이야말로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나쁜 거짓말이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이익도 피해도 주지 않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허구이다.
(P.58)


   이러한 모든 성찰을 통해 결론을 내려보건대, 내가 스스로 내세운 진실성은 사실이 정확히 그러했느냐보다는 올바름과 공정함이라는 감정에 더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실제로 생활할 때 나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양심의 도덕적 지시를 따랐다. 나는 종종 많은 이야기를 지어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런 원칙을 따르다 보니 다른사람들에게 흠 잡힐 거리도 적잖이 제공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땅히 취해야 할 이득보다 더 많은 이득을 누리지도 않았다. 진실이 하나의 미덕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런 이유에서인 듯하다.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진실이란 선도 악도 초래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고 믿을 만큼 그런 구별에 대해 만족스럽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 의무는 그토록 세심하게 숙고하면서도, 과연 나 자신에 대한 의무는 충분히 검토해보았는가? 타인에 대해 정당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해야 한다. 그것은 정직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품위에 바쳐야 하는 경의이다. 내 대화가 빈곤하다고 어쩔 수 없이 악의 없는 허구로 보충한 것은 잘못이었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 쓰는 재미에 이끌려 실제 사실에 인위적인 장식을 덧붙인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다. 꾸며낸 이야기로 진실을 장식 하는 것은 결국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0)


  나는 긴 생애의 변천 속에서 가장 달콤한 즐거움과 가장 강렬한 쾌락의 시기가 가장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시기로 기억되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흥분과 열정의 짧은 순간은 아무리 강렬해도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보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점에 불과하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 드물고 빨리 지나가 버리므로 하나의 상태를 구성할 수 없다. 내 마음이 아쉬워하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영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자체에는 강렬함이 전혀 없지만, 그 상태가 지속되면 매력이 증가하여 마침내 거기서 지고의 행복을 발견하게되는 것이다.
(P.79)


  영혼이 아주 견고한 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서 완전히 휴식을 취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이 전 존재를 집중 할 수 있는 상태, 영혼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상태, 영원히 현재만이 계속되지만 그 지속을 강조하지도 않고 연속의 흔적도 전혀 남기지 않고 상실이나 즐거움, 쾌락이나 고통, 욕망이나 두려움에 대한 감정도 전혀 없이 오로지 우리 존재에 대한 감정만이 존재하는 상태, 그리하여 그 감정만으로 온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상태, 그런 상태가 있다면 그것이 지속되는 한 거기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것은 인생의 쾌락에서 찾을 수 있는 불완전하고 빈곤하고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혼에 공허한 부분을 남기지 않아 영혼으로 하여금 채울 필요를 느끼게 하지 않는 그런 만족스럽고 완전하고 충만한 행복이다. 나는 생피에르 섬에서 종종 그런 상태로 지냈다.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 가는 배 안에누워, 또는 물결치는 호수가에 앉아, 또는 아름다운 냇가나 자갈 위를 졸졸 흐르는 개울 가에 앉아 고독한 몽상에 잠길 때가 그런 때 였다.
(P.80)


  사실 휴식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볍고 달콤한 생각들이 영혼의 밑바닥을 동요 시키지 않고 그 표면만 스쳐 지나갈 때, 휴식은 훨씬 더 기분 좋은 것이된다. 자신의 불행을 모두 잊고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는 충분 한 휴식만 있으면 된다. 그런 종류의 몽상은 조용한 장소만 있으면 어디서나 맛볼 수 있다.그런 까닭에 나는 바스티유 감옥이나 아무것도 보이 지않는 지하 감옥 안에서라도 기분 좋게 몽상에 잠길 수있을 거라고 종종 생각했다.
(P.82)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권 력을 지닌 사람은 인간의 나약함을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과다한 힘은 그를 다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거나, 설령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 하더라도 진정한 자기 자신보다 못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만 사용될 것이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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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한다.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경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실수이외에는 자책할 것이 없으므로 그 실수에 대한 내 나약함을 책망하고 위안을 얻는다. 계획적인 죄악을 결코 내 마음과 가까이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둔한 사람이 아니고야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내 상황을 응시하면서 그들이 초래한 상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를 수가 있으며,어떻게 고통과 절망으로 죽을 지경이 되지 않을 수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는 내 상황을 응시 하고도 거기에동요되지 않는다. 아마 다른이라면 공포감 없이바라보지 못할 그런 상태에서, 나는 자신을 위해 투쟁하지도 노력하지도 않고 거의 무관심하게 지내고 있다.
(P.117)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에서 우리는 결과보다는 의도에 더 신경을 쓴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왓장은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악의를 가진 사람이 고의로 던지는 돌멩이만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공격 행위는 때때로 빗나가는 수도 있지만, 그 의도는 결코 목표 달성에 실패하지 않는다. 운명이 주는 타격 중에서사람들이 가장 가볍게 느끼는 것은 물리적 고통이다. 불운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에 대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를 때 운명을 탓한다. 그들은 운명을 인격화하고 그것에 눈과 지능을 빌려주어, 그 운명이 고의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잃고 분해하는 노름꾼은 그런 식으로 누구를 향한것인지도 알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린다. 그는 운명이 고의로 자신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화낼거리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적에 대해 흥분하고 격노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맹목적인 필연성의 소행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은 그렇게 무분별하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기는 해도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자신을 집어삼킨 불행에서 물리적인 상처밖에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받는 타격은 일신에 상처를 줄 뿐, 마음에까지 이르지는못한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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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 줄곧 불행한 것은 오직 이기심 때문이다. 이기심이 침묵하고 이성이 입을 열 때 ,마침내 이성은 우리 힘으로 피할 수 없었던 모든 불행을 위로해준다. 심지어 불행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을 소멸시켜주기도 한다. 그럴 땐 불행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만 하면 가장 끔찍한 타격을 확실하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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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머지를 강조하는 것,전체적으로 조화를 부여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얼굴의 특징들은 모든 특징이 함께 해야만 온전한 결과를 나타낸다. 하나의 특징이라도 빠지면 얼굴이 왜곡되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내가 아는 것을 말하는 것 뿐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전체가 도출되고, 모든 것이 실제와 닮게 되는 것이다.
(P.154)


현대인은 자신의 크기에 맞추어 그들을 작게 만들지만, 나는 그들의 크기에 맞추어 나 자신을 크게 만든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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