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이승우 / 문이당/ 300쪽
(2017. 10. 16.)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지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P.23)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런 것처럼 그 역시 법을 범한다. 범죄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범죄 행위의 결과로서의 급부(給付) 때문이 아니라, 금지된 법을
범하고 있다는 순간의 팽만한 정신의 오락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원죄는 재물의 획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야훼가 진노한
것은 사람이 먹어치운 과일 하나의 손실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을 했다는 것이 참된 이유였다. 세상의 모든 형벌도 태초의 야훼를
닮는다. 어떤 법도 재물의 손실 때문에 극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모든 극형의 대상은 고래로 정신적인 것이다. 요컨대 금지된 법을 범함으로써
누리는 정신의 오락성이 언제나 법집행자의 큰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P.33)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 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P.85)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나는 가장 서툴다. 서툰 것을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상처를 입는다. 궁색한 선택이지만, 그래서 유일한 나의
대안은 사람 곁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참혹하고 질긴 생래적인 외로움은 어쩔 것인가. 하여 나는 나의 물색없는 외로우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P.109)
예감은 열람이 금지된 숙명의 세계를 부지불식간에 엿보고 만 자의
머리 위에 그 부정에 대한 징벌로 떨어지는 벼락, 그 벼락 같은 천재지변의 떨림이다. 그래서 숙명은 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숙명은
비극의 광배(光背)를 두르고 있게 마련이다. 숙명적이라는 말이 비극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P.112)
자, 내가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를 들고 나온다고 하자. 그것들은 거짓이거나
꾸며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내 자아의 어느 층에선가 충동질을 받고 튀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층에서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층의 진실이 모든 층의 진실을 담당할 수 있을까. 그것이 층들을 관통 하는 '작살'의 진실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답을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이 맡은 역(役)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19의 층은 18의 층을 감춘다. 20의 층은 19의
층을 왜곡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감추고 왜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나는 내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로
들어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안다.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이다. 과거란 결국
인상(印象)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상은 실체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체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용납되기도 한다.
(P.115)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대로, 그 어두운 방은, 말하자면 내
자아의 투시에 다름아니었다. 내가 웅크리고 앉아 지낸 그 어두운 공간은 실상 나의 자폐적인 내부였던 것이다.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 세상과의
불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 또는 원인으로서 자아의 지하굴 속에 거하는 행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을 (지하의 세계)라고 불렀다. 여기서
지하는, 그곳이 지상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하늘이라고 해도 무 방하다. 아, 적은 아무데도 없는데 고통은 도처에 널려 있다. 나는 그 책을 내
방에 깔린 어둠의 눈을 빌려 이주 조금씩 읽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조그만 문고판 책의 행간에 무수히 그어진 붉은 줄들은 공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예컨대 동지의식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는 이단의 내가 여기에 또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
(P.123)
막스 데미안을 만다는 젊은
시절의 에밀 싱클레어가 내 꿈속으로 자주 나타나곤 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참으로 원했던 것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동료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를 만나 이 껍데기의, 그림자만의 세계를 성토하는 것이었다. 내가 발견하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내밀한
지하의 세계를 대화로, 마음으로 누리는 것이었다.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P.127)
어떤 책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우리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등 치는 악몽이라고 비유한
글을 읽었다. 제임스 조이스였을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고, 그일지라도, 본래의 뜻에 상당한 왜곡이 가해졌을 지 모른다. 기억은 사실의 편이
아니라 편들고 싶은 자의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편들고 싶은 자를 편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여서는 안된다.
(P.140)
어떤 일의 시작에는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뻥 뚫린 동굴과 같은 캄캄한 영역이 있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또는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운명적인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는 식이다. 운명적이라고
발음하는 순간처럼 운명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운명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운며ㅇ이 깃들이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P.153)
그녀의 이름이 종단임을 알게 되었다는 걸
그날의 소득으로 쳐야 할지. 떠밀려나오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름은 내게 중요하기 않았다. 이름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가장 제한적인
정의이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편의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면 구별할 필요가 없을 때는 어떤가. 구별함 없이도 이미 총체적인 인식에 이르러 있을 경우에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오히려 그 새로운 이름이 참된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경우가
그랬다.
(P.163)
한 작가의 각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소설들을 만든다. 삶의 파편들은 때로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더 자주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기도 한다. 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책 밖에 있고, 작가가 쓴 글들은 책 속에
갇혀 있다. 독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는 한 작가가 써 놓은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그 각각의 소설들에 드러나
있거나 감취져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조합함으로써 나름대로 한 작가를 만든다. 그런 뜻에서 소설이 없으면 삶도
없다.
(P.192)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그런 질문을 무색하게 만드는 발언을 했다.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예컨대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거나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편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들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 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한다.
(P.260)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취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 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