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 학고재 / 384쪽
(2017.11.12.)


영화가 유명해져서 책을 선택했는데..
막상 영화는 반쯤 보다 갑자기 일이 있어 보기를 중단했었는데
아직 다 보지 못하고 있다.
책마다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면 이 책은 추운 겨울에 읽기를 추천하고 싶다.
날이 너무 추워 밖에 나가기 조차 싫은 날
집안에 틀어밖혀서 다시 한번 꼭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를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 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P.9)


  ......네가 기어이 나를 동쪽으로 부르는구나. 너희가 산성에 진을 치고 있다 하나, 나는 대로를 따라 너에게로 갈 것이니 너희들의 깊은 산성은 편안할 것이다. 너는 또 강화도로 가려느냐. 너의 강토를 다 내주고 바다 건너 작은 섬에 숨어서 한 조각 방석 위에 화로를 끼고 앉아 임금 노릇을 하려느냐. 너희 나라가 유신儒臣들을 길러서 그 뜻이 개결하고 몸이 청아하고 말이 준절하다 하나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
(P.28)


  눈 덮인 행궁 골기와 위에서 초저녁 어둠이 새파랬다. 내 행전 구들을 달구는 장작불 연기가 퍼졌다. 푸른 연기가 흐린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삭정이 타는 냄새가 향기로웠고 침소 방바닥은 따스했다. 임금이 옷을 벗느라 비느적거리는 소리가 마루까지 들렸다. 사관이 붓을 들이서 하루를 정리했다.​
  안팎이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 아침에 내행전 마루에서 정이품 이상이 문안을 드렸다. 안에서, 알았다, 마루가 차니 물러가라••••••는 대답이 있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P.37)


  - 경들이 박복하구나. 어찌하라. 내가 비를 맞으라랴
  임금이 내행전 마당으로 내려섰다. 버선발이었다. 마당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임금은 젖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이 이마로 땅을 찧었다. 구부린 임금의 저고리 위로 등뼈가 드러났다. 비가 등뼈를 적셨다. 임금의 어깨가 흔들렸고, 임금은 오래 울었다. 막히고 갇혔다가 겨우 터져 나오는 울음이 었다.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깊이 젖었다. 바람이 불어서 젖은 옷이 몸에 감겼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세자가 달려 나와 임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승지들은 마루에서 뛰어내려 왔지만, 임금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임금 이 젖은 옷소매를 들어서 세자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임금이 울음 사이로 말했다
  - 우리 부자의 죄가 크다. 하나 군병들이 무슨 죄가 있어 젖고 어는가.
  세자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임금의 울음소리는 행각에까지 들렸다. 신료들이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영의정 김류가 울먹였다.
  - 전하, 옥체가 상하시면 사직이 또한 위태로우니...... 김류의 말은 임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임금은 오래 울었고 깊이 젖었다. 마루 위에서, 서안 앞에 앉은 젊은 사관이 벼루에 먹을 갈며 마당에 쓰러져 우는 임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관이 뜻을 들어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사관은 울지 않았다. 낮에 비가 그쳤다.
(P.66)


  너희가 선비의 나라라더니 손님을 대하여 어찌 이리 무례하나. 내가 군마를 이끌고 의주에 당도했을 때 너희 관아는 비어 있었고, 지방 수령이나 군장 중에 나와서 맞는 자가 없었다. 안주, 평양, 개성을 지날 때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간의 뜻을 전할 길이 없어 거듭 강을 건너 이처럼 멀리 내려오게 되었다. 너희가 니를 깊이 불러들여서 결국 너희의 마지막 성까지 이르렀으니, 너희 신료들 중에서 물정을 알고 말귀가 터진 자가 마땅히 나와서 나를 맞이야하지 않겠느냐. 나의 말이 예禮에 비추어 어긋나는 것이나. 너희 군신이 그 춥고 궁벽한 토굴 속으로 들어가 한사코 웅크리고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
(P.77)


  내행전 마루에서 말들은 부딪치고 뒤엉키며 솟구쳐 오르다가 가라앉았다. 말들이 가라앉는 침묵 속에서 신료들은 목젖을 떨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김상헌은 미룻바닥에 시선을 박고 최명길의 말을 기다렸다. 최명길은 말하는 자들의 입을 ㅏ번갈아 쳐다보며 아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금이 팔을 뒤로 돌려 아픈 허리를
두들겼다. 임금 옆자리에서 세자가 콧물을 훌쩍였다.
(P.190)


  송파강의 여울은 빨랐다. 지저귀는 물 위로 물비늘이 튀었다. 풀리는 강을 바라보면서 간은 망월봉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조선 행궁의 망궐례를 생각했다. 홍이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명을 향해 영신의 춤을 추던 조선 왕의 모습은 칸의 마음에 깊이 박혀들었다. ...난해한 나리로구나....... 아주 으깨지는 말자....... 부수기보다는 스스로 부서져야 새로워질 수 있겠구나•••
(P.276)


  조선 왕이 말에서 내렸다. 조선 왕은 구층 단 위의 황색 일산을 향해 읍했다. 멀어서 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단 위에서 칸이 말했다. 말은 들리지 않았다.
  정명수가 계단을 내려와 칸의 말을 조선 왕에게 전했다.
  - 내 앞으로 나오니 어여쁘다. 지난 일을 말하지 않겠다. 나는 너와 더불어 앞일을 말하고자 한다. 조선 왕이 말했다. ​
  -황은이 망극하오이다.
  정명수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 조선 왕의 말을 전했다. 청의 사령이 목청을 빼어 길게 소리쳤다.
  -일 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항해 절했다.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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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박웅현 / 북하우스 / 204쪽
(2017. 11. 9.) 



  “팀장님,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아이가 행복해질수 있을까요?"
  어느 날 다섯 살 아들을 둔 여자 후배가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묻더군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글쎄”라고 답은 해놓고 술잔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해봤죠. 어떤 것을 가르쳐야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다행히 그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제 자신도 납득할 만한 답이 떠올랐습니다. 행복한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자존(自尊)'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후배에게 이야기해줬습니다.
(P.15)


남과 다르면 알수 없는불안감이 밀려드는 환경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살려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자존감이 없으면 서울대를 다닌다고 해도 행복할 수 없이요. 백 억을 번다고 다 행복하기만 하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건 일 마나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비느냐가 아닙니다. 기준점을 바깥에 두고 남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안에 두고 나를 존중하느나일 겁니다.
(P.21)


결국 그는 미국 교육은 '네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한다 면 한국 교육은 '네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했습니다. 바깥에 기준점을 세워놓고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아ㄴ에 있는 고유의 무엇을 끌어내는 교육을 이야기한 것이죠.
  제가 뉴욕에서 공부할 때 느낀 것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집어 넣으려 하지 않고 뽑아내려고 애썼습니다. 서른여섯에 사회생활을 하던 아저씨가 책상에 앉아 처음으로 디자인을 배우는데 주뼛댈 틈도 없이 교수의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해온 숙제를 벽에 쭉 붙여놓고 좋은 점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교수는 마치 칭찬을 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
​  그런데 우리 교육은 과연 어떤가요? 내 안에 있는 걸 존중하게 해주는 교육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는 늘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해 지적 받고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교육 받아왔어요.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중심점을 바깥에 놓고 눈치 보며 바깥을 살핍니다. 지존은 중심점을 안에 찍고 그것을 항해 나아가는 겁니다.
(P.26)


  Be Yourself, 너 자신이 되어라. 제가 딸에게 자주하던 말입니다. 지금 대학생이 된 딸이 어렸을 때에는 숫기가 너무 없어서 다른 사람과 말도 잘못했어요. 그 시절에 딸아이에게 매일 이야기해줬습니다. "Be Yourself, 너는 너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되라고 말이죠. 여러분은 모두 폭탄입니다. 아직 뇌관이 발견되지 않는폭탄이에요. 뇌관이 발견되는순간, 어마어마한폭발력을 가질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즉 자존을 찾고 자신만의 뇌관을 찾으세요.
(P.34)


  저는 딸에게도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으면 스펙 관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시간에 네 본질을 쌓아놓으라고 하죠. “기준점을 밖에 찍지 말고 안에 찍어,
실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별을 만들어낼 수 있어. 강판권을 봐, 언젠가 기회가 온다니까. 그러니 본질적인 것을 열심히 쌓아둬.”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다 본질이나? 고스톱이나 에니팡 같은 게임을 진짜 잘하는데 그럼 이게 내 본질일까?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5년 후의 나에게 긍정적인 체력이 될 것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치는 고스톱이, 에니팡이 당장의 내 스트레스는 풀어주겠지만 5년 후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본질은 결국 자기 판단입니다. 나한테 진짜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봐야 합니다.
​(P.60)


  복잡한 사물의 핵심이 무엇인지 보려는 노력, 어떤 것을 보고 달려가느냐가 세상과의 씨움에서 이길 수 있는 커다란 무기입니다. 기타를 만든다고 했던 클래식 기타 회시는 다 망했고, 음을 만든다고 했던 클래식 기타 회시는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본질은 삶을 대하는데 있어 잊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 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이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경험상 돈을 따라가면 재미도 없고 재미를 따라가면 돈도 따라오더군요. 그런 경험에 따른 제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돈은 본질이 아닙니다. 돈을 따라가지 말고 내가 월하고 싶은지 내 실력은 무엇인지 어떤 것을 할수 있는지를 고민해보고 그것을 따라가세요.
(P.68)
​​

  진짜 알려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해질 겁니다.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알기 전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단순히 비발디 좋지. 바로크 알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그거 영화〈엘비라 마디간〉에 나오는 건데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보는 인터넷으로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알려고 하기 전에 우선 느끼세요. 우리는 모두 유기체잖아요? 고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느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문이 열려요. 그 다음에는 막힘 없이 몸과 영혼을 타고 흐를 겁니다.
(P.86)


 존 러스킨이라는 미국의 시인은 “네가 창의적이 되고 싶다면 말로 그림을 그려라"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뭘 봤니?"라고 물었을 때 그저 “루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풀"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고, 잎이 몇 개 있 었는데 길이는 어느 정도였고. 햇살은 어떻게 받고 있었으며 앞과 뒤의 색깔은 어땠고, 줄기와 잎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등 자세하고 소상히 그림 그리듯 말하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즉,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도「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P.113)


  〈아메리칸 뷰티〉의 비닐봉지처럼 만들어진 것들을 보면 내 주변에 다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見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처음 창의력 강의를 위해 창의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고민하다 見을 발견했고, 그 이후 나와 같은 생각들을 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 기를 통해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 들이 본 것들을 배우고 스스로 들여다보면서 見을 실천하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의 저를 돌아보면 見을 알고 난 뒤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P.121)


萬物 皆備於我矣 (만물 개비어아의)
反身而誠 樂莫大焉 (반신이성 낙막대언)

「맹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맹지를 완독한 적도 없는 제가 아는 척 할수 있는 작은 지식이지만 제게 선명한 도끼의 흔적을 남긴 구절이기 때문에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해석을 해보면 이런 의미입니다.​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하는 일에 성의를 다한다면 그 즐거움이 더없이 클 것이다.'​
  見강의 때 말씀 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냈던 아이디어들이 전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주변에 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죠. 말하자면 제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행동을 돌아보고, 그 행동이 왜 일어났는지 성의를 다해 생각해보면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깨닫고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문장이었습니다.
(P.136)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선택을 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겁니다. 팁을 하나 드릴게요. 어떤 선택을 하고
그걸 옳게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냐, 바로 돌아 보지 않는 자세입니다.
(P.141)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행복은 삶이 끝나갈 때 쯤에나 찾게 될 겁니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의미 없는 순간들의 합이 될 테니까요. 만약 삶은 순간의 합이라는 말에 동의하신다면, 찬란한 순간을 잡으세요. 나의 선택을 옳게 만드세요. 여러분의 현재를 믿으세요.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면 내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겁니다.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불어넣으면 모든 순간이 나에게 다가와 내 인생의 꽃이 되어줄 겁니다. 당신의 현재에 답이 있고, 그 답을 옳게 만들면서 산다면 김화영의 말대로 '티 없는 희열'을 매 순간 느낄 겁니다. 티 없는 희열로 빛나는 관능적인 기쁨에 들뜨는, 예외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가 온전히 여러 분의 인생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P.148)


​​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세련되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주술 구조를 제대로 갖추고 문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기능합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처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말에 담긴 힘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디자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시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훈련이 잘 안 되어 있습 니다. 우리 문화가 논쟁의 문화가 아니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사색의 문화인 반면 서양은 논쟁의 문화죠. 서양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토론하고 논쟁합니다. 네 생각을 이야기해봐, 너의 생각은 어때? 끊임없이 묻고 답하죠. 우리는 그런게 없어요. 하지만 사색의 문화가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좋은 시나 깊은 사유의 글들은 많죠. 이철수의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같은 문상은 사색의 힘이에요. 이런 우리의 장점은 가져가되, 소통을 위해서는 논쟁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어려서부터 그 훈련이 너무 안 되어 있으니까 말이 막히면 감정적으로 멱살부터 잡는 국회의원들이 나타나 는겁니다.
(P.199)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 말함과 동시에 어떤 문맥으로 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힘을 싣기 위해서 지혜롭게, 생각을 디자인을 해서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소통을 잘하고 싶으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 합니다. 역지사지, 문맥파악,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습관. 스케치를 할 때 형태를 잡는 데생이 필요하듯 자기 생각을 데생해야 해요. 연습하고 말을 만들어보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리해보고,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소통은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개인생활에서도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내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싶다면 소통을 잘 하면 되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오해가 생겨서 싸움이 되고 일이 꼬여 걷잡을 수 없게 되면 그냥 포기해버리는 집들은 대부분 소통이 안 되는 집이에요.
​(P.206)
​​

  마지막으로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훈련 방법 두 가지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할리우드에는 7 Words Rule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가져오니까, 투지를 받고 싶으면 시나리오를 단 일곱 단어로 설명해보라는 건데, '결혼을 했는데 마누라가 조폭이네? 조폭 마누라' 이런 식으로 그림이 확 그려지도록 설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훈련을 한번 해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에 다닐 때 논문을 쓰기 전에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줄로 정 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세 개의 패러그래프로 씨보고, 그걸 다시 챕터 별로 나눠서 논문을 만들죠.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일곱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직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P.207)

​​
많은 후배들이, 학생들이, 젊은이들이 정답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말씀드렸죠. 인생은 전인미답이잖아요. 어찌 알겠어요. 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할지 아닐지 아무도 모릅니다. 답을 찾지 마세요.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걸 선택하고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들죠.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잊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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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 김화영 / 민음사 / 508쪽​
​(2017. 11. 8.)


절망이나 고난, 시련에 처했을때 인간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행동의 양식은 시대.공간을 초월하는것 같다.
시대나 환경에 좌절하여 순응적인 인간으로 남는 가 하면
반대로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사회를 탱해왔던것 같다
문제는 그런 사람 인간들이 그 시대의 지도자나 상위계층이라기 보다는 주로 시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실인가?
인간 본연의 본능인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메르스 사태를 생각나게 한다.
전염병에 대한 국가의 대처 능력이라든지 대자본이 운영하는 병원의 업무처리 안일함을 운운하기보다는
전염병이라는 거대한 두려움에 앞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인간 본연의 두려움들과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의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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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도시에서 보다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 겪는 어려움이다. 사실 어려움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못 된다. 불편함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병을 앓는 것이 기분 좋을 적은 결코 없지만 어떤 도시나 고장은 병을 앓는 동안에 의지가 되어서, 거기서는 이를테면 마음을 푹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병자란 부드러움을 필요로 하며 무엇엔가 기대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랑에서는 지나치게 거센 기후, 거기서 거래하는 사업의 중요성,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황혼, 쾌락의 특질 등 모든 것이 한결같이 건강한 몸을 요구한다. 이곳에서 병을 앓는 사람은 아주 외롭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시간에 전화를 붙잡고서, 혹은 카페에 앉아서 어음이니 선하증권이니 할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더위로 불꽃이 튀기는 듯한 수많은 벽들 뒤에서 덫에 걸린 채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비록 현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메마른 고장에 죽음이 그처럼 들이닥칠 때 그 불편함이 어떠할 것일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P.13)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우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당장에는 특별한 주의도 하지않은 채 그 동물을 발로 밀어 치우고 층계를 내려왔다. 그러나 거리에 나서자 쥐가 나올 곳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길을 돌려 수위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 미셸 영감의 반응을 보자 자기가 발견한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더한층 실감했다. 쥐가 죽어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저 괴이하게 보였을 뿐이지만
수위에게는 빈 축을 살 만한 난리였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수위의 입장은 단호한 것이어서 이 건물 안에는 절대로 쥐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층 층계참에 한 마리가 있는데 필경 죽은 것 같다고 의사가 분명히 말했지만 아무 소용 없이 미셸 씨의 신념은 조금 도 흔들리지 않았다. 건물 안에는 쥐가 없으니, 그렇다면 누가 밖에서 그 쥐를 가져왔을 것이다. 요컨대 이건 누군가의 장난이라는 것이었다.
(P.17)


  '물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시간의 길이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것. 방법: 치과 병원 대기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여러 나절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앞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하는 강연을 경청할 것. 가장 길고 가장 불편한 철도의 코스를 골라 가지고 물론 입석으로 여행할 것. 공연장 의 매표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오면 표를 사지 말 것 등등.' 그러나 이러한 언어 혹은 사색의 일탈에 바로 이어서 수첩은 우리들 도시의 전차, 그것의 조각배 같은 형상, 그 어정쩡한 색깔, 일관된 불결함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로 시작해 아무런 설명도 되지 못하는 '그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라는 말로 관찰을 끝맺고 있다.
(P.40)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
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P.54)
​​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P.55)


  담배 가게 여주인이 있는 데서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한참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여자가 알제에서 한창 떠들썩하던 당시의 어떤 체포 사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어떤 상사의 젊은 사무원이 바닷가에서 한 아랍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P.79)


  그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때까지는 그 이상한 사건들이 빚어 놓은 놀라움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각자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맡은 자리에서 그럭저럭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상태는 그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시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모두(서술자 자신도 포함해) 같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 으며 거기에 그냥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령 사랑 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개인적인 감정도, 처음 몇 주일부터 당장 모든 사람들 전체의 감정이 되었고, 공포심이 가세하면서 저 오랜 귀양살이 시절의 주된 고통거리가 되었다.
(P.93)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타루는 잠시 의사를 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무거운 걸음으로 문 앞까지 갔다. 리유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의사가 이미 그의 곁에까지 갔을 때 자기 발등을 보고 있는 것 같던 타루가 리유에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니짰다.
  “가난입니다”
(P.172)
​​

  훌륭한 행동에다 너무나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 힘에 대해 간접적이며 강렬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 행위들이 아주 드문 것이고, 인간 행위에 있어서 악의와 무관심이 훨씬 더 빈번하게 원동력이 되기 때문 이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것은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다.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러다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P.176)


  이번 이 유행병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 대 리유.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해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P.329)


  사실상 페스트는 그다음 날로 당장 끝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겉보기에 의당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빨리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정월 초순에는 추위가 보통이 아닌 맹위를 떨치며 버티고 있어서, 도시의 하늘은 그대로 얼어 붙은 성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때만큼 하늘이 푸르렀던 적은 없었다. 며칠 동안을 두고 내내 싸늘하면서도 활짝 갠 채 요지부동인 찬란한 하늘이 계속적으로 쏟아붓는 광선으로 온 도시가 가득했다. 페스트는 그 깨끗해진 대기 속에서 삼 주일 동안 계속적인 하강 상태에 있었다. 페스트로 말미암은 시체의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페스트는 힘을 잃어 가는 듯싶었다. 수개 월 동안 축적해 놓았던 힘을 단시일 안에 거의 전부 잃고 있 었다. 그랑이나 리유가 돌보았던 그 처녀처럼 완전히 점찍었던 미끼를 놓쳐 버린다든지, 또 어떤 동네에서는 이삼일간 병세가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또 다른 동네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든지, 월요일에는 희생자의 수를 부쩍 늘려 놓았다가 수요일에는 거의 대부분의 한자를 다시 살려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처럼 숨을 몰아쉬거나 허둥지둥 서둘러 대는 꼴을 보면 마치 페스트는 신경질과 싫증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며, 그것 자체에 대한 자제력과 동시에 그의 힘의 바탕이었던 그 수학적이며 위풍당당한 효율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듯싶었다. 카스텔의 혈청은 갑자기 여태껏 한 번도 거둘 수 없었던 성공을 여러 차례 이루게 되었다. 전에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 했던, 의사들의 몇몇 조치들 하나하나가 갑자기 확실한 효과 를 거두는 듯도했다. 이번에는 페스트 쪽에서 몰리게 되었고, 갑작스럽게 힘이 약해진 그 덕에 여태껏 그것을 향해 겨누었던 무던 칼날에 힘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다만 가끔가다가 병세가 완강해지면서 일종의 맹목적인 폭발을 일으키는 가운데 들림없이 완쾌할 것으로 기대했던 환자를 서너 명씩 앗아가곤 했을 뿐이다. 그들은 페스트에 운이 나쁜 사람들, 희망에 가득 찼을 때 살해당한 사람들이다. 격리 수용소에서 나은 오통 판사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사실 타루는 그에 대해서 운 이 나빴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판사의 죽음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판사가 살았을 때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알 길이 없었다.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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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저널리즘
정철운 / 메디치미디어 / 280쪽
(2017. 11. 1.)


  손석희는 지위와 명예가 보장된 교수직을 관두고, 모두의 비난과 의심을 한 몸에 받으며 수년간 살얼음판을 걷는 길을 선 택했다. 그리고 불의의 시대에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다 손석희로 인해 한국의 저널리즘을 논하는 우리의 수준은 높아졌다. 물론 그의 저널리즘이 완벽했디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 나 그가 완벽을 추구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손석희는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그는 공평하게 공격적이었다.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불편부당한 언론인이자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세월호 참사와 박근해-최순실 국정농단 국면에서는 정의로운 저널리즘에 대한 시민들의 갈증을 해소시 켰다. 그는 저널리즘의 이론과 현실을 절묘하게 조합해〈뉴스 룸〉의 진회를 이뤄내고 대중적 인기까지 거머쥔, 어찌 보면 한국 언론사(史)에서 유일무이한 캐릭터다.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한국의 언론환경에 비춰보면 그는 더욱 특별한 존재다.
(P.8)


  “방송 시작 3분 전. 스튜디오의 내 자리에 앉아 주머니 속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뉴스 타이틀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고방송 몇 개가 나가고 나면 내 얼굴이 잡힐 것이다. 적어도 문 화방송의 모든 사람들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리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최대의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그 리본 을 양복 것에 달지 않고 옷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달았던 것이다.”
  그날은 결국 리본을 달지 못한 셈이었다.
  “나는 뉴스를 시작하는게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자기합리화의 싸움이었다. 화면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고 나는 붉어지는 내 얼굴을 느낄수록 더한 당혹감에 빠졌다. 뉴스시간 내내 양복 깃에 가려 반쯤 보일락 말락 했던 리본은 그대로 썩어빠진 내 양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행동에 손석희가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손석희는 이날 밤 한잠도 못 잤다고 적었다. 그는 “내 자신에게 책임져야 할 지극히 '인간적' 양심의 문제였던” 일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렇게 일요일이 왔다. 그리고 일요일 밤,〈뉴스데스크〉에서 '공정방송 쟁취'리본을 달았다.
(P.34)


“대한민국 청년들은 군대에서부터 졸속과 전시와 무사안일주의를 강요받고 또 배운다. 그들이 사회로 나와도 그런 식의 획일화되고 비생산적인 군사문회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임을 자랑 삼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기형적으로 맞물려 존재한다.”

“이 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경제구조적 모순이 불로소득을 최선의 덕목으로 정당화해주고 그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손꼽아주는데, 거기서 생겨난 눈먼 돈들은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서 부정한 유착과 비극적 이반을 부채질하여 결국엔 그 구조적 모순을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계속 반복시키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경제적 잉여가치는 그것을 '생산해낸 사람들'에게 분배되도록 해야 한다. 그 생산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불로소득으로 그것을 독점하고 세습해가는 경제구조 속에서는 결국 사회성을 잃은 무뇌아 같은 개인만이 자라날 뿐이다.”

“미국에서 독립운동 비슷한 걸 하고 돌아온 사람이 영웅이 되어 반쪽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그 밑으로는 친일파라는 독버섯들이 어이없게도 되살아나 기득권을 형성해 오늘 이때까지 잘도 사는 나라. 심지어는 일본군에 있던 사람이 대통령까지 지낸 나라. ... 그 외에도 예로 들 말은 얼마나 기습이 터지도록 많은가.”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의 급속한 확대, 그에 따른 텔레비전 매체의 막강해진 영향력, 그리고 그 영향력을 이용한 군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 전파와 우민화 정책, 순서의 착오는 있을지언 정 우리 텔레비전 문화의 역사와 현상은 그렇다.”
(P.40)


  손석희 저널리즘의 출발은 공정보도 파업과 공영방송 노동 조합 활동에서 비롯된 언론노동자로서의 각성, 이에 따라 생성된 강한 언론윤리의식, 저널리즘에 대한 사명감이라 볼 수 있다. 최장기 파업을 마친 뒤 1992년 월간《별지 12월호 인터뷰 에서 손석희는 노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왜 노조를 하는가,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노조를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습니다. 직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식, 소시민적 도덕성을 지키려고만 해도 노조 활동은 불가피합니다. 이게 우리 방송 현실의 비극인데, 거기에 국민의 눈과 귀를 대신한다는 우리 직업의 특수성이 더해집니다. 노조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선택이지요.”
(P.45)


  손석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인터뷰였다. 그리고 그 무기가 강력할 수 있었던 건 '이 인터뷰로 출세나 이득을 바라지 않는 다는 전제가 있어서였다. 그가
대중이 원하는 진실을 공급할 수 있었던 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양심'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얻으려하지 않음으로써 언론인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얻었다. 이것이 저널리스트로서 손석희가 가진 카리스마의 원천이다.
  손석희는 2006년〈100분 토론〉300회 기념 인터뷰에서도 “좁은 인간관계가 오히려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관계가 쌓이기 시작하면 굴레가 된다. 내 방식의 인터뷰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공격적 인터뷰를 위해 인터뷰이와의 인간관계나 방송 진행자로서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접고 자신을 고립시킨 셈이었다. 이와 관련해 언론학자 강준만은 자신의 책 《손석희 현상》에서 “그에겐 하늘을 찌를 정도의 강한 자부심이 있고, 이게 그의 고독을 지켜주는 동력”이라고 적었다.
(P.56)
​​

  그는 자신의 주관을 밝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신중했다. 2005년 1월 8일 손석희는 <시선집중>에서 말했다. “전 지도층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은 없으니까요.” 이 말은 '손석희 어록'이란 이름으로 퍼졌다. 그가 방송에서 주관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는 발언이었다. 2005년 10월 21일자《한겨레》 인터뷰에서 손석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과 관련해 이렇게 답했다.
  “개인적인 생각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가치괸에 따라 공적 영역인 방송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의 의견이 투영된다면 프로그램의 생명력을 잃는 것이죠. 진행자는 균형을 잡고 가능하면 많은 의견들을 다양하게 담아 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P.67)


  언론은 바른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았고, 권력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했다. 우리가 그런 언론에 기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유가족들은 박근혜를 불신하는 만큼 언론을 불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 만큼, 정말 믿을 수 있는 언론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20세기에서 송건호와 리영희라는 걸출한 언론인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뤄놓은 언론민주화의 토양에서 성장한 손석희는 건강한 시민 사회의 편에서 정론을 보도하고자 노력하며 '의지'를 계승했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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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행복
(루소 사상의 현대성에 관한 시론)​
츠베탕 토도로프 / 고봉만 / 문학과 지성사 / 169쪽
​(2017. 10. 27.)



  과거의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루소가 가장 매력적이라거나 가장 현명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강력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루소가, 특히 프랑스에서 근대성 발견하고 또 발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발견했다고 한 이유는, 근대사회는 루소 이전에 이미 존재했지만
그때까지 그것을 통찰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명했다고한 이유는 루소가 이백 년 전부터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는 개념과 주제를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루소를 읽으면, 우리는 그의 예언적인 통찰력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루소의 반대자들조차 우리가 아직까지 루소가 만든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P.9)
​​

  우선 루소는 스스로 자신의 사상 체계의 근본 원리로 보았던 이 대립에 대해 인간은 본원적으로 선(善)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첫번째 논문 『학문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이 불러일으킨 논쟁 속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행히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본래 선하다”. 루소는 말년까지도 그것을 자신의 '대(大)원fl'라고 했으며,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연의 인간이 선하다고 한다면, 인간의 인간은 선하지 않다. 또는 루소가 종종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선하지만, 인간들은 악하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인간들은 타락했고, 동시에 불행하다. 이러한 반전(결과)은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제도나 사회 질서,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이다.
(P.18)
​​

  “자기애는 자연적인 감정으로 모든 동물들이 자기 보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성에 의해 안내되고 동정심에 의해 변화되어 인간애와 미덕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이기심은 사회 속에서만 생겨나는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각 개인으로 하여금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존중하게 하여 인간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악을 야기한다. 그것은 명성이라는 것의 진정한 동기이다.”
(P.21)


  인간은 두 가지 상반된 이상을 가진다. 그런데 인간은 그 둘의 조화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이러한 삼단 논법의 결론은 논의 과정 중에 내려진다. 인간이 불행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 다. 그리하여 새로운 불행이 밝혀짐으로써 가까스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희망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두 가지 길. 즉 '시민의 길'과 '개인의 길'은 사회 상태로 추락해서 인간이 겪게 된 불행에서 인간이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가야 하는데도 그럴 수 없으니, 인간은 불행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P.38)


  일반 의지는 루소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일반 의지는 공동체를 지도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이 최고 원리는 개인의 자유 의지 안에 존재한다. 루소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달성하려는 사적 의지를 지니고 있 으며, 사적 이익 가운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지인 일반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일반 의지는 개인이 가진 사적 의지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일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자유 의지를 따르는 것이 된다. 일반 의지는 자기 입법의 원리이다. 일반 의지 속에서 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전체의 자유가 일치하며, 일반 의지에 의해 개인의 자유는 절대화된다. 일반 의지 에 따라 행동할 때 나도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남도 똑같이 자유롭고, 또한 나와 남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성립된다. 일반 의지는 항상 옳지만, 한 개인이 계몽이 안 되었을 경우 사리시욕을 추구하는 충동에 억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 의지가 자연스럽게 발현되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와 이성의 계몽이 결합될 필요가 있다(김용민,『루소의 정치철학』, 인간사랑,2005,
(P.51)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루소가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리 할 수 있다. 즉 공동체 생활에 도움을 주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잠재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침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평등의 원리를 무시하므로, 인류에게도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이 길을 선택하게 될 경우, 그 선택이 초래하는 희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루소는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 순서가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과중하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원시적인-그리스도교 이전의-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이다.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지 않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원시시대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용인될 수 없는 불관용intolérance을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P.62)


  생프뢰saintPreux는 파리 도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마음속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공포를 품고서 세상이라는 이 광대한 사막에 들어왔다. 이러한 혼돈은 나에게 암울한 침묵이 지배하는 끔찍한 고독만을 선사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만큼 고독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군중
속에 있을 때만 고독하다'(『신 엘로이즈』, Ⅱ, 231). 고독은 늘 비참한 것이다. 그러나 고독의 최악의 형태는 군중 한가운데서 느끼는 것이다. 세계는 사막이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숨 막히는 침묵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키케로3)가 말한 것처럼, 표면적이면서 순수하게 물리적인 고독은 실제로는 진심이 담긴 의사소통이다.(P.67)
​​

  루소는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코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은, 가능한 한 인간 사회와 관계를 맺지 말라는 교훈을 포함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 상태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은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불행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사물의 본질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어떤 것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사회적 인간과 고독한 인간 중
어느 쪽이 더 좋은가를 탐구해보게 하라. 어떤 유명한 작가[디드로를 말한다- 옮긴이〕는 악인만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선한 사람만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명제는 비록 격언까지는 아니었지만, 앞의 것보다 더 진실하고 이치에 맞다. 만일 악인이 혼자 있디편, 그는 어떤 짓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악인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그의 계략을 꾸미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 속에서인 것이다"(『에 밀』, Ⅳ, 341).
(P.70)


  루소가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의 긴장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발견한 수단은 결국 이주 간단한 것이다. 루소는 교육의 두 가지 큰 단계를 상정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에서는 상반된 두 가지 항 가운데 하나를 강조한다. 첫번째 단계를 루소는 '소극적 교육'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개인 교육'이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이 단계는 탄생에서 '철드는 시기'인 열다섯 살 무렵까지다. 두번째 단계인 사회 교육의 단계는 이 무렵에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첫번째 단계의 목적은 우리안에 있는 자연인의 발달을 도와주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의 목적 은 다른 인간들과의 생활에 우리를 적응시키는 것이다.
(P.116)


  루소에 따르면 대략 15세부터 사춘기가 시작되며 사춘기를 경계로 아동과 성인의 시기가 구별된다. 아동은 육체적 존재이고 사회적 감정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존재이며 외적 자연, 즉 사물과의 관계로만 맺어져 있다. 인생에서 가장 비판적 시기인 사춘기를 지나면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알게 되는 정신적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은 변화를 루소는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른다. 에밀은 이 시기부터 문학을 접하면서 세계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를 넓히고, 사회관계를 연구하고 사회 조직과 제도를 학습한다.
(P.122)


  뒤몽Louis Dumont이 말한 것처럼, 외부에서 인간에게 강제한 어떤 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전체론에 입각한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계속 존재한다. 그런 질서를 강제하는 것이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건 우주에 내재한 질서, 자연 자체이다. 이런 질서에 대한 지식이 바로 전통을 이루며, 그 지식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새로운 점은, 이제부터 인간 스스로가 세계를 해독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임무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오컴과 몇몇 다른 철학자 들이 벌려놓은 틈새로, 종교 및 윤리의 영향력으로부터 근대 과학을 해방시키고,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생각이 맹렬하게 침투해 들어가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근대성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의 법칙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의 자유, 판단의 자유, 의지의 자율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해방은 다양 한 층위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는 생각 이, 그러니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듯이 인간은 창조주가 마음대로 주무르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힘을 얻는다. 그 뒤를 이어 과학 혁 명이 일어난다. 베이컨Francis Bacon,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데카르트Rene Descartes를 생각해보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반드시 세계에 관한 진리일 수는 없으며, 진리는 차라리 나의 경험과 나의 이성에 의해 내가 알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P.137)


  루소에 의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타인의 존재를, 우리에게 머무는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아직 완전하게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도덕morale'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타인에게 선 혹은 악을 행할 수 있는데, 이 두 개념은 개인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자유liberte'의 세계로 들어 서게 된다. 왜냐하면 선 혹은 악의 실천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다를 바 없는 타인들과 공유하는 언어와 문화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다. 루소에게 있어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개인, 윤리도 자유도 없는, 언어도 문화도 없는 개인은, 간단히 말해 서 사회적인 삶이 없는 개인은 진정한 의미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P.152)


  이 책의 제목인 '덧없는 행복'에는 루소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루소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의 행복은 타인에게 달려 있기에 우리는 결코 행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충만한 행복이 자연의 질서에만 달려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늘 변함이 없기에 그에 맞추기 위해서는 자연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 만약 신에게 달린 문제라면, 그 또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무한한 관대함을 보이며, 그곳에 있을 테니까. 만약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면 그 또한 문제없을 것이다. '자기애amourdesoi,' 즉 자기 존재 방어의 필연성이 들림없이 개인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쪽으로 이끌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필요로 하고, 이 타고난 불완전함이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한다. 루소는, 우리가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 각자가 타인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타인과 합일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우연적일 수 밖에 없거나, 혹은 루소가 결론짓듯이, 이리하여 “우리 자신의 나약함infirmite으로부터 우리의 덧없는 행복은 생겨”나는 것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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